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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 -계21:1-8

by 【고동엽】 2022. 7. 6.
새 하늘과 새 땅
계21:1-8
(2014/12/21)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 디스토피아를 넘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지금도 세상의 칼 바람 앞에 서 있는 모든 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초 네 개가 밝혀졌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우리 마음의 풍경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주님 오실 길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앞서 길을 닦아주는 이가 없어도 기어코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십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향한 본능적 끌림 때문입니다. 질량을 가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중력이라면, 슬픔과 아픔에 이끌리는 힘은 은총입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에서 아름답게 노래했던 것처럼 주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

예수님의 오심은 이처럼 자기 비움의 과정입니다. 저는 죄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을 주변화 시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 좋을 대로 다른 이들과 사물들을 동원하고 이용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영원히 뭇 생명의 중심이신 주님이 스스로를 비우고 당신을 주변화하신 것이 성탄절의 사건입니다. 철저한 비움의 상징이 바로 '구유'입니다. 우리 교회에 번쩍번쩍하는 성탄 장식을 배제하고 소박한 구유만 배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주님 오심의 참 뜻을 되새겨보자는 초대입니다.

사는 일이 참 힘겹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기가 어려운 나날입니다.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살아간다면 모를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갖는 순간 우리 내면은 평안을 잃게 됩니다. 정치가 퇴행을 거듭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나워졌습니다. 정 깊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소비주의 세계에 중독된 이들이 많습니다. 구매력을 세상에서 자기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의 크기로 생각하는 이들은 구매력이 없는 이들을 함부로 무시합니다. '갑'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을'을 함부로 대함으로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을'은 마음 깊은 곳에 원한감정(르상티망)을 키움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제한받습니다. 이중의 소외입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 세상을 꿈꿨습니다. 유토피아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유토피아의 뜻은 '없는 곳'입니다. '유'(u)는 없다는 뜻이고 '토피아'는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dystopia)입니다. 디스토피아란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부분이 극단적으로 확대된 암울한 세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디스토피아의 문턱에 서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는 없는 것일까요? 어느 학자(미셸 푸코)는 그 세계를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는 말로 그려 보여줍니다. 그것은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다락방 혹은 놀이공원, 어른들이 좋아하는 여행지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곳이라도 많아지면 삶이 이렇게 팍팍하지는 않을 겁니다. 새로운 세상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 메시아의 시간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당시 기독교인들의 상황은 암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시대를 거치면서 황제 숭배가 강요되었고, 거기에 순응할 수 없었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중되는 때였습니다. 계시록은 그런 환경 속에서 살고 있던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절망의 시간, 짐승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어디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계시 혹은 묵시를 뜻하는 '아포칼뤼프시스'는 '덮개를 벗김', 혹은 '숨은 것을 드러내 보임'을 뜻합니다. 계시록은 그러니까 지금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늘 옛 세계의 파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괘종시계의 진자운동처럼 역사는 한쪽으로 쏠리면 다음번에는 다른 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시간을 가늠하며 살아갑니다. 로마의 국력이 극대화 되었을 때, 그래서 누구도 로마의 멸망을 예측할 수 없었을 때 예언자들은 그 문명의 비극적 종말을 내다보았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역사라는 배가 지금은 강물을 타고 순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아 폭포에 다다르게 될 것임을 압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행복하고 다수는 불행하게 살아가야 하는 세상, 사람들이 형제자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세상은 종말을 앞둔 세상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면서 시작됩니다. 세상에 억울한 이들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약자들의 탄식과 신음소리가 높아가는 세상은 '바로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20장까지 땅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그려 보인 계시록은 21장과 22장에서 새롭게 갱신된 세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에도 그대로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이상 시련 속에 방치되지 않고 저마다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평화 세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사65:17). 요한은 바로 그런 세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이나 묵시가들은 '보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했습니다. 우리 눈이 근시안으로 변할 때, 그래서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할 때 우리는 날마다 탄식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고 했습니다. 큰불이 일어나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재만 남은 것 같은 현실이라 해도, 그 재가 기름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물론 쓰리기는 합니다. 잠시 맥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오는 법입니다. 나희덕 시인은 "산불이 나야/비로소 번식하는 나무가 있다"고 노래합니다. 이건 상징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뱅크셔나무는 씨방이 너무 단단해 뜨거운 불길에 그을려야만 씨를 터뜨릴 수 있답니다. 시인은 그 나무를 떠올리며 "모든 것이 타고 난 뒤에야/검은 숯 위로 연한 싹을 내밀고 싶은"(<뱅크셔나무처럼>) 마음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이 마음이면 됩니다.

이전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는 사라집니다. 고대 우주관에 의하면 바다는 암흑의 권세 혹은 혼돈을 상징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슬픔, 고통, 혼돈, 억울한 눈물, 불의가 없는 세상입니다. 요한은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2)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보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독일 출신의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은 "매 순간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라 말했습니다. 이것을 저의 방식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절망이나 공허에 빠지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신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역사가 아무리 어두워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승리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이들은 그 승리를 지금 여기서 살아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이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만 희망을 둘 것이 아니라, 절망의 땅에서 검질기게 희망을 추구해야 합니다.

•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집
요한은 보좌 가운데서 울려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일찍이 레위기를 통해 주신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당신의 규례를 잘 따르고 계명을 그대로 받들어 지키면 철 따라 복을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후에 놀라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26:11-12)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좀 거북살스럽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식구들끼리 오붓하게 살고 있는 집에 좀 대하기 어려운 어른이 이불 짐을 싸들고 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는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면 누가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삶이 이렇게 팍팍한 것은 하나님이 머무실 공간을 자꾸만 다른 것으로 채우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몰아낸 자리에 돋아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의심과 적대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요한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집을 보고 있습니다. 홀로 자족하는 자들이 아무리 무너뜨리려 해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려는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 희망은 여기서 움터 나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이신 분이 지금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b)

믿는 이들은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집을 보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집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백성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눈물 닦아주심'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음, 슬픔, 울부짖음, 고통 등 이전 세계에 속했던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동지녘으로 정한 것은 교회의 선택이었지만 그것은 탁월한 상징성을 갖습니다. 어둠의 기운이 가장 깊은 때, 주님은 빛으로 이 땅에 돌입하고 계십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우리가 예수님께 더욱 집중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억울하게 눈물을 흘리는 이들' 곁에 다가가는 일이고, 그들이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 둘째 사망
오늘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말씀은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라는 구절입니다. '새롭게 했다'도 아니고 '새롭게 할 것이다'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현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현재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현재는 또한 영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추수하는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밭에 들어가면 됩니다.

제 사무실에는 Sieger Koeder 신부의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기원과 완성'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입니다. 온통 붉은색 색조의 그림인데, 한복판에는 하얀 면사포를 쓴 여인을 두 팔로 꼭 부둥켜안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굳이 그 인물이 누구인가를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화가는 어쩌면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핵심은 사랑입니다. 둘이 부둥켜안은 모습은 둥근 원 모양입니다. 그 중심으로부터 화려한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화면의 아래쪽으로는 반원 형태의 지구도 보입니다. 그곳 역시 몇 가지 색채들이 어울려 빛의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지거 쾨더는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역사의 기원인 동시에 목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부둥켜안음 혹은 얼싸안음이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편 가르고 배척하고 미워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지옥입니다. 하지만 용납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디스토피아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만드는 이들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겁한 자들, 신실하지 못한 자들, 가증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마술쟁이들, 우상 숭배자들, 모든 거짓말쟁이들에게 돌아갈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입니다. 이 명단에서 맨 앞자리에 나오는 것은 '비겁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황제숭배가 강요되던 박해시기에 믿음의 길에서 떠난 이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겁니다. '가증한 자들'은 황제 숭배를 비롯한 이교 제의에 참석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시련의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실체가 드러나는 때입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마십시오. 증오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고 계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십시오. 억울한 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입 없는 이들의 입이 되어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십시오. 오늘 우리 곁에 오고 계시는 주님을 위해 거처를 마련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12월 21일 11시 55분 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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