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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부를 노래 -신32:8-14

by 【고동엽】 2022. 7. 6.

오늘 우리가 부를 노래
신32:8-14
(2014/12/28, 송년주일)

[가장 높으신 분께서 여러 나라에 땅을 나누어 주시고, 인류를 갈라놓으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갈라놓으셨다. 그러나 주님의 몸은 그의 백성이니, 야곱은 그가 차지하신 유산이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야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황야에서 그를 만나, 감싸 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파닥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은 옆에 있지도 않았다. 주님께서 그 백성에게 고원지대를 차지하게 하시며, 밭에서 나온 열매를 먹게 하시며,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먹게 하시며, 단단한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기름을 먹게 하셨다. 소젖과 양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의 숫양과 염소 고기와, 잘 익은 밀과 붉은 빛깔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다.]

• 택함 받은 백성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참 먼 길을 걸어 우리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덕분에 살아온 나날입니다. 금년 한 해는 돌아보기가 좀 고통스럽습니다. 매년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이 설문조사를 통해 그 해의 사자성어를 정하곤 했는데 올해는 지록위마指鹿爲馬가 뽑혔습니다.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거짓이 넘쳤다는 말일 겁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신뢰의 토대가 되는 말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위험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속아 살아온 관성 때문입니다. 2014년을 요약하는 핵심어로 '멘붕' 혹은 '죽음'을 꼽는 이들도 있습니다.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로부터 시작하여 세월호 참사,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 러시아 베링해에서의 오룡호 침몰 사고 등 대형 사고로 많은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몇 해 전 동일본해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수많은 사람이 졸지에 희생되었을 때, 일본의 한 작가는 그것을 2만 명이 죽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저마다 소중한 사람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정한 세상은 그들을 숫자로 환원하여 추상화하곤 합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런데 이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이나 특정인의 국정개입의혹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땅콩 회항 사건은 온갖 특권을 누리며 살다가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약자들을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갑질'이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약자인 '을'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강자들의 폭력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타자의 요구에 응답하는 능력에서 발현되게 마련입니다. 이런 능력은 그의 처지에 서보려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욕망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유지되는 지금 세상은 이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웃은 언제나 경쟁의 대상이거나 나와 무관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누군가를 공격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엽기적 행위를 영웅시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디스토피아의 서막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속 끓이며 한 해를 살아왔습니다. 현실은 그야말로 광야와 같습니다. 낮에는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를 걷는 것 같고, 밤이면 을씨년스럽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시달렸습니다. 뱀에 물리거나 전갈에 쏘이지 않을까 염려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 있을까 늘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기가 막힌 세월입니다. 오늘 송년주일에 제가 모세의 노래를 본문으로 선택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모세는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알아차린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래 하나를 지어 들려줍니다. 일종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노래에는 애굽에서 그들을 구출해내시고 광야에서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아름답게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또 백성들의 배덕 행위에 대한 아픈 기억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라는 당부 또한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몇 가지 단어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찾아오심', '감싸주심', '보호하심', '지켜주심', '인도하심', '먹이심'.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들 위에서 그 날개를 퍼덕이듯이, 그 날개로 새끼들을 업어 나르듯이 하나님은 그 백성을 그렇게 돌보셨습니다.

• 어리석은 백성
문제는 망각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 같이 주님을 찾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싶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잊어야 할 것은 빨리 잊을수록 좋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 잘 해준 것은 잊는 게 좋지만, 남에게 진 사랑의 빚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로 삽니다. 유대인 학살 박물관 앞에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아라'라는 글귀가 있다지요? 악한 자들의 악행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그들의 악행을 격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작가들이 글을 쓰는 것도,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드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피카소는 나치의 전폭기 24대가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일대를 초토화시킨 것을 보고 1937년에 작품 '게르니카'를 그림으로써 전쟁의 악마성을 폭로했습니다. 프란체스코 고야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에스파냐인들을 학살한 사건을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이라는 제목으로 그려냈습니다. 작품이 곧 증언인 셈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게 되는 것일까요? 먹고 사는 문제에 몰두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온통 정신이 현실에 집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분주할 망忙 자와 잊을 망忘은 '마음 심' 자의 위치만 다를 뿐 똑같은 캐릭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분주하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게 마련입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그래서 있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모세의 노래는 망각의 또 다른 이유를 밝혀줍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먹거리가 넉넉해져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렸다고 말합니다(32:15). 아마도 이 대목은 나중의 정착생활을 반영한 것일 테지만, 이 말은 아주 중대한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난보다는 풍요로움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풍요로움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이 생활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하나님까지도 바꾼다는 어느 신학자의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닙니다. 영성생활에서는 풍요로움이 덫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지낼 때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만족했습니다.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물로 마른 목을 축였습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생존의 어려움이 사라진 순간 하나님은 마치 불필요한 존재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부담스런 존재처럼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그분에게 등을 돌리고 맙니다. 타락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마주 봄에서 움터 나오고, 적대감은 등 돌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등을 돌이는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불편해지게 마련입니다. 그 불편한 마음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은 다른 곳에 마음을 둡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마치 하나님인양 섬기기 시작합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와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꺼리지 않는 괴물형 인간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약하다 싶으면 함부로 대하고, 자기보다 강하다 싶으면 넙죽 엎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처세술 덕분에 그들은 과잉 보상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잊고 있으니 말입니다.

• 징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기는 백성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나의 얼굴을 숨기겠다. 그들이 마침내는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겠다. 그들은 타락한 세대, 진실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자들이다."(32:20)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는 삶은 기쁨이요,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삶은 절망입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구와 달의 공전 주기가 겹치기 때문에 우리가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달의 전면뿐이라고 합니다. 달의 이면은 해가 들지 않는 영구 음영지역(permanently shadowed regions)입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삶이 그러합니다. 모세의 노래는 그런 삶을 온갖 재앙이 끊이지 않고, 불같은 더위와 열병으로 타들어가고, 짐승의 이빨에 찢겨서 먹히고, 독사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32:23-24). 고난을 겪던 히브리의 시인들도 주님의 환한 얼굴을 보여 달라고 주님께 청하곤 했습니다.

"주님의 환한 얼굴로 주님의 종을 비추어 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시31:16)

함석헌 선생님은 <얼굴>이라는 시에서 참 고운 얼굴이 없는 현실을 탄식합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가슴이 그저 시원한,/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어떻게 해야 이런 얼굴이 될 수 있을까요? 주님의 환한 얼굴빛을 늘 마주 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질투라는 부정적 정서를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아 보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질투도 없습니다. 사랑하기에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우상을 따르는 것을 참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지은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다른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기를 기다리실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롬11:29)라고 말했습니다. 철회되지 않는 부르심과 그 사랑 덕분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 하나님께 붙들려야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결산의 시간은 다가오는 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땅에 묻어두고 살았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찾아가, 곁에 머물고, 돌보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지 못했습니다. 더러 함께 아파하기도 하고,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늘 자기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계 안에서만 움직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십자가는 한사코 멀리하며 살았습니다. 비평하고 충고하는 일은 잘했지만 믿음대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탈레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가장 어려운 일, 그것은 자기를 아는 것", "가장 쉬운 일, 그것은 남에게 충고하는 것". 이제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모세가 그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하고 있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나 이제는 알아라. 나, 오직 나만이 하나님이다. 나 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 나는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한다. 나는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한다.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막지 못한다."(32:39)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평화의 세상, 생명의 세상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은 늘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늘진 땅에 사는 이들을 찾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아니, 그 하나님께 붙들려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둡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도처에 당신의 뜻을 받들며 살아가는 이들을 숨겨두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탓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작은 등불이라도 밝혀들어야 합니다. 사랑과 이해와 관용과 용서의 기름으로 타오르는 신령한 빛, 불의를 불의로 폭로하는 빛 말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다시 한번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약할지라도 주님은 강하십니다. 우리가 넘어진 자리에서 주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으로 일어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12월 28일 11시 56분 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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