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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을 짓고 있나? -마7:24-29

by 【고동엽】 2022. 7. 6.
어떤 집을 짓고 있나?
마7:24-29
(2014/12/14, 성서주일)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 어지러운 세상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촛불 세 개를 밝혀놓고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힘겹습니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마조마합니다. 자기와 견해가 다른 이들의 모임을 방해하기 위해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화학약품이 든 냄비를 투척해서 사람들을 다치게 했습니다. 그런 백색 테러를 저지른 것이 고등학생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일베 사이트를 중심으로 그의 행동을 두둔하고 영웅으로까지 치켜세우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습니다.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증오와 혐오감을 드러내거나, 폭력적으로 그들을 동화시키려 하는 것은 일종의 악마의 주술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악마의 벌린 입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2월 둘째 주일인 오늘은 성서주일인 동시에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금주 중 우리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어느 항공회사 부사장의 갑질 이야기입니다. 승무원이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다고 이미 이륙을 위해 움직이고 있던 비행기를 후진시키고 기어이 그 승무원을 내리게 했다고 하지요? 심지어는 무릎 꿇리고 때리기까지 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굴욕감을 생각하면 분노가 입니다. 이 사건은 타자의 심정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여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테러 용의자들에게 가한 가혹한 고문에 대한 폭로는 국제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의 민낯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용의자에 지나지 않는 이들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짐승이었다고 해도 그렇게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화는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올 수 없습니다. 성서는 시종일관 인권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권을 유린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고,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이들은 파국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 노아 시대의 타락한 인류를 보면서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떠올라 가슴이 울울해질 때가 많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도 팍팍하게 사는 것일까요?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고, 서로의 눈에 어린 눈물을 통해 하늘을 보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요? 신약성서 가운데 맨 먼저 기록된 책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살전5:14-15)

이렇게 사는 게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됨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제도나 사회, 이념이나 종교 혹은 국가는 악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울면서라도 참 사람의 길을 걸어가려는 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갖은 핑계를 대며 그 길을 외면합니다. 야고보는 그래서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자는 자기를 속이는 자(약1:22)라고 말했습니다. 앎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 두 건축자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 단어인 '그러므로'라는 접속부사는 산상수훈 전체를 받는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은 이미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24)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삶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매끄럽기 이를 데 없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우리가 이 텍스트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해도 좋을까요? 우리가 한 가지 묻지 않은 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리키는 그 슬기로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좀 생뚱맞은 질문 같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같다'라고 번역된 '호모이오오'는 단순히 유사함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같아질 것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슬기로운 사람은 그저 명철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르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 대목은 매우 강력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주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구절은 제자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서술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닮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괴리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주님의 말씀 곧 로고스를 듣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건축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건축가와 어리석은 건축가입니다. 그 둘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표상이 반석과 모래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어쩌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더 빠르고 힘도 덜 들 겁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힘도 더 들고 시간도 더 들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금 속도와 빠름을 숭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만, 기초가 부실한 탓에 우리 사회가 흔들리고 있음을 날마다 실감하며 삽니다. 운동이 되었든 학문이 되었든 기초를 세우는 데 공을 들이지 않은 이들은 크게 이룰 수 없습니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大器晩成)고 합니다. 급하다고 무딘 도낏날로 아무리 찍어보아야 소용없습니다. 먼저 도낏날을 갈아야 합니다. 논어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이 나옵니다. 문자적인 뜻은 그림을 그리려면 먼저 흰색 피륙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지만, 사람됨의 기초가 먼저 갖춰져야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도'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보잘것없어 보인다(樸雖小)고 했습니다.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에의 열정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재주 많은 사람보다는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 큰 성취를 이루는 법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좀 손해가 나더라도, 사람들에게 어리석다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정말 좋은 세상이 올까요?"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지금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계산하지 말고, 대가를 바라지 말고. 바람 조금 분다고 휘뚝휘뚝 비틀거리지 말고, 바람이야 불거나 말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야말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닐까요?

• 판가름의 날
화창한 날만 계속된다면 모래 위에 세운 집도 어연번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25절과 27절은 동사 네 가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없습니다. '비가 내리다', '홍수가 나다', '바람이 불다', '그 집에 들이치다'. 그러나 결과는 천양지차입니다. 25절은 '무너지지 않았다'라고 말한 후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반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의 운명을 설명하는 27절은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25절과 대구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는 구절이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구절을 과감히 포기하고 그 자리에 더 충격적인 표현을 채워 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텍스트를 읽는 이들은 이 대목에서 심리적 타격을 받게 됩니다.

우리 삶의 공력이 드러나는 날은 반드시 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비슷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람과 홍수에 빗대 설명했다면 바울은 불에 빗대 설명했습니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고전3:12-13) 만든 작품이 그대로 남는 이들도 있고, 타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이든 불이든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삶의 곤경입니다. 김흥호 목사님은 '믿음'을 '밑힘'이라 설명하셨습니다. 밑힘을 굳이 한자어로 옮기면 '저력底力 '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밑바닥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시련의 시간이 다가와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시련은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쓰리지만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을 뒤흔들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쓴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전기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 교회가 어떻게 타락의 길을 걸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히틀러는 어용 종교인들에게 권력의 단맛을 보여줍니다. 그들을 특권적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히틀러가 원하는 말만 합니다.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지는 순간 그들은 '주'(퀴리오스)를 바꿉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어서 그래도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에는 히틀러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국가가 그들의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목사들은 슬그머니 히틀러가 요구하는 대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끝내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던 본회퍼와 같은 이들은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고 맙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본회퍼 류의 사람들의 최후는 비극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내다보는 이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더 큰 생명을 향한 투신입니다. 그들은 실패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승리자들입니다. 그들은 비와 홍수와 바람이 몰아치던 그 위기의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슬기로운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길 위에 서 있습니다.

• 사람들의 반응
28절과 29절은 사람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28) '마치셨다'는 단어는 단순히 입을 다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는 여기서 '텔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목적 혹은 목표'를 뜻하는 텔로스에서 온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목표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푯대라고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셨다는 표현을 통해 이제 궁극적인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야말로 온 인류가 당도해야 하는 오메가 포인트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놀람입니다. '말 잘하네!' 정도의 놀람이 아닙니다. 뭐라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무리들은 자기들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낀 겁니다. 마태는 그 놀람의 이유를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9). 이 구절은 마가복음 1장 22절과 정확히 일치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이런 반응을 먼저 언급한 후에 곧 이어서 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악한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습니다.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막1:27)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 말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예수님을 통해서도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고, 혼돈은 질서로 바뀌고, 미움은 사랑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도 우리 삶이 이렇게 무기력한 것은 그 말씀대로 살려고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신 예수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한걸음씩이라도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기다림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어두운 우리 마음에, 그리고 날로 어두워가는 이 땅 위에 빛으로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12월 14일 12시 01분 1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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