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쁨을 주는 소식 눅2:8-14 (2014/12/25, 성탄절)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 죽음의 그늘진 땅에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금 우리는 빛과 어둠 사이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과 더불어 어둠에 속한 옛 삶은 지나가고 빛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4주간의 대림절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고요함을 한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대립과 갈등으로 조각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도 거칠어졌습니다. 생명은 온기 속에서 자라는 법인데, 우리는 냉기가 감도는 세상에 사느라 지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고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갈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가르는 빛으로, 절망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으로, 미움을 녹이는 사랑으로,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으로 주님은 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에 충만하여 부른 노래는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시는 분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눅1:78b-79) 죽음의 그늘이 제 아무리 짙다 하여도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갈등과 혼돈이 제 아무리 극심하다 해도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잠시 구름이 해를 가릴 수는 있지만 아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가르고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승리입니다. 주님의 탄생과 부활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성탄절은 기쁨의 절기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가이사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일 때,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누가가 이처럼 주님의 탄생을 세계사적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는 까닭은 그분의 오심이 갖는 시대사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분열되었던 나라를 통일하고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지배하던 때, 사람들이 흔히 로마의 평화시대라고 일컫는 그 시대에 주님은 오셨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모두의 평화가 아니라 소수의 로마 시민만이 누릴 수 있는 평화였습니다. 그들의 사치스러운 삶과 평안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희생당해야 했던 세상은 불의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세상에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인근의 들에서 양떼를 돌보던 목자들은 한밤중에 마치 호렙산의 모세가 그러했듯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광채와 만났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두려워하는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줍니다. 성경에서 '큰 기쁨의 소식'은 메시야의 도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천사는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마침내 오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메시야는 말을 타고 오는 초인이 아닙니다. 그는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징표는 구유입니다. 짐승의 먹이통 속에 오신 아기의 상징성이 대단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중앙이 아니라 변방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시작되는 것입니다. • 연약함의 신비 그런데 큰 기쁨의 소식으로 온 그 아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는커녕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연약할 뿐만 아니라 볼품도 없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신비가 있습니다. 연약한 것이 세상을 구합니다. 뿌리가 드러난 나무를 보면 흙 한 줌 보태주고 싶고, 떨고 있는 짐승을 보면 거둬주고 싶고, 우는 아기를 보면 달래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입니다. '연약한 것들'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던 인간됨을 소환하는 전령입니다. 작고 연약한 것 앞에 자꾸 다가갈 때 우리 영혼은 맑아집니다. 욕망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예수는 강함으로 남을 압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물처럼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마련입니다. 자아를 여읜 사람이라야 평화를 가져옵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를 보셨을 겁니다. 참 신비합니다. 나무는 뿌리에서 나오는 산성용액으로 바위를 녹이며 뿌리를 뻗어간다고 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뚫는 겁니다. 저는 <채근담>에 나오는 한 구절을 좋아합니다. 승거목단繩鋸木斷 수적천석水滴穿石. 새끼줄로 톱질해도 나무를 자를 수 있고, 물방울이 떨어져서 돌을 뚫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에 처마 밑에 놓아두었던 댓돌이 빗방울에 움푹 패인 것을 보고 신기해한 적이 있습니다. 딱딱하고 강한 것이 무르고 약한 것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생명 뿐입니다. 생명에 가까운 것일수록 부드럽습니다. 부드럽지만 무력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찾아가야 할 구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포대기에 싸인 아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자리가 아닙니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들, 혼자서는 이 시린 세월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 조금씩이라도 발걸음을 옮길 때 우리는 문득 하늘 군대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차가운 거리를 떠도는 실직자들,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와 그 가족들, 탈레반에 의해 희생된 140여 명의 파키스탄의 학생과 교사들, 나이지리아에서 보코 하람에 납치된 200여 명의 소녀들, 그리고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일하다가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 먹고 살기 위해 굴욕을 당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 모두에게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은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이 되라고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주님의 이런 부름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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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12월 25일 11시 50분 33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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