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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디모데후서 4장 1절~5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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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디모데후서 415)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두어 달 전 평양을 방문했을 때, 저는 그들의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부 자유를 비롯한 여러 어려운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더욱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그들에게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라디오가 없습니다. 북한 전역에 걸쳐 라디오가 없습니다. 유선방송으로 나오는 작은 스피커가 집집마다 있기는 합디다마는 마음대로 켜지도 끄지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나오는 대로 들을 수 밖에요. 그 밖의 다른 소리는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문도 보지 못합니다. 보통사람은 신문 볼 자유조차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40여 년을 깜깜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특별히 허가를 받아서 가지고 들어간 라디오를 새벽에 틀어보니 남한의 설교방송이 나옵디다. 제가하는 설교방송이 흘러나옵니다. 어느 방송이든 다 잘 나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이것을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마음 아팠습니다 개인적으로 기회가 닿아 제가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성경을 아십니까?" "성경이라는 말은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온 세계가 다 읽는 책인데 정말 모르십니까?" "모릅니다." 하나같이 모른다고 합니다. 40여 년 동안 이렇게 암흑세계를 살아오고 있습니다.

로마서 1014절로 15절에서 말씀합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믿음이 아무리 귀중하다 하지만, 듣는 일이 있고 나서 믿음이 생깁니다. 듣는 일없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전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기회를 가지지 못하면 믿음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우리 나라에도 농아가 많습니다. 많은 수의 벙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벙어리의 대다수가 입이나 혀의 구조에는 전혀 이상이 없는, 다시 말해서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배우지 못해서 벙어리가 된 경우라고 합니다. 듣지 못하면 이렇듯 말조차 배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만큼 생각할 수 있고 이만큼 인격을 세워갈 수 있는 것은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세계를 떠나 산 속에서 혼자 자란 아이는 새소리와 짐승소리밖에 낼 줄 모릅니다. 듣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 소리밖에 없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듣는 대로 달라집니다.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그 인격이 달라집니다. 듣는다는 것,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들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이겠습니까? 마음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행복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몸은 양식을 먹고삽니다.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은 진리를 먹고삽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삽니다. 그런데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다. 우리의 몸이 왜 병들어가고 있습니까? 독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인간성이 왜 파괴되고 있습니까? 타락한 이데올로기와 잘못된 철학을 들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이 왜 죽어가고 있습니까? 거짓을 들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과 영은 우리가 무엇을 먹고 두엇을 듣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진단을 받아보셨습니까? 너무 조급해하는 나머지 일년에 몇 차례씩 건강진단을 받으면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한번도 건강진단을 받아보지 않고 살기도 합니다. 건강하면 모르거니와 그러다가 덜컥 중병에라도 걸리게 되면 대책 없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고칠 수 있었을 텐데……" "진작 병세를 발견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런 진단을 받고 후회하면서 병세는 더욱 깊어갑니다.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건강 진단이 필요한 줄로 압니다. X레이 검사다 피 검사다 해가며 온몸 구석구석까지 사진을 찍고 쑤셔보고 하면서 여러 시간 괴로움을 줍니다마는, 그렇게 해서 내 몸의 현재 상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에 무엇이 부족하고 어디가 약한지, 내 몸의 형편이 종이 한 장에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나옵니다.

그러나, 좀 미련한 생각일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 마음 같아서는 건강진단을 받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 입맛이 좋으면 나는 건강한 것입니다. 무슨 음식을 먹든지 꿀맛 같고 소화를 잘 시키면 건강진단을 별도로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전에 없이 입맛이 없어지고 음식을 가리게 되면, 음식 냄새에 구역질이 나거든 병이 난 줄 알아야 합니다. 입맛이 뚝 떨어지거든 죽을병 걸린 줄 아십시오. 우리의 건강은 입맛대로 유지됩니다. 입맛이 좋은 사람은 소화도 잘 시켜서 당연히 건강합니다. 건강한 사람의 입맛은 건강합니다. 몸에 이로운 것을 좋아하여 그것만 찾아먹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입맛 당기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짠것이 먹고 싶은데 싱겁게 먹는 것이 좋다고 하여 맹물만 먹다가는 자칫 탈나기 쉽습니다. 몸에 염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짠것이 먹고 싶어진 것입니다. 싱거운 것은 싱거운 것대로 단 것은 단 것대로 내 몸에 필요하기에 그쪽으로 입맛이 당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병든 사람은 자기 몸에 해로운 것만 좋아합니다. 의사가 먹지 말라고 금해놓은 것만 골라서 찾습니다. 죽더라도 먹겠다고, 먹어보고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입맛마저 병든 것입니다. 입맛에는 다분히 정신적 성향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나의 심령의 건강을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좋은가? 듣고 배우고 또 들어도 마냥 듣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의 심령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성경만 펴면 졸음이요 멀쩡하다가도 교회 문만 들어서면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고 설교만 시작되면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면 병든 심령인 것입니다. 늦게 나와서 뒷자리에 앉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일찍 나와서도 꼭 뒤에 자리를 잡는 사람, 그 사람도 어딘가가 병든 사람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말씀의 입맛은 어느 정도인가? 전에는 귀한 말씀인 줄 몰랐는데, 이제는 말씀이 좋아지고 꿀보다 더 달게 느껴지거든 내 심령의 건강이 괜찮은 줄로, 수준급인 줄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꾸만 등한시되면 병든 줄로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합병증이 나타날 것입니다.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인격파탄이요 가정파탄이요 사회문제입니다. 말씀을 향한 입맛이 병들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가까이 즐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주일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을 듣고도 카세트 테이프를 가지고 돌아가 일주일 내내 저녁마다 한번씩 듣고 잠을 잔다고 합니다. 좀 심하다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괜찮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듣고서 잠자리에 든다, 말씀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시면서 많은 분들이 제게 인사를 합니다. "좋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욕 많이 보셨습니다"하고 사투리로 말하기도 합니다. 간혹 "설교 좀 더 길게 해주세요"하고 부탁해오는 분도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아쉬운 마음인 것입니다. 이래야 건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동기, 당시 처하신 상황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십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성경은 예수님의 몸의 생리학적 상태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40일을 굶으셨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시겠습니까? 그 주리심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40일을 굶으신 이 절박한 시간에도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말씀이 먼저요, 아무리 가난해도 말씀이 먼저입니다. 구제가 먼저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 ---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납니다. 마르틴 루터는 신앙을 '하나님과 나 사이의 바른 관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란 무엇입니까? 말씀하시는 자와 말씀 듣는 자와의 관계입니다. 곧 계시자와 응답자 사이의 바른 관계, 이것이 신앙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제 가정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여든이 넘고 4대 독자인 아버지도 환갑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환갑 넘은 아들을 가리켜 "아무개야"하고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꼼짝없이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하시면 무조건 예, 그럽지요, , 그러십시오,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물러 나오면 그 말씀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가 봅니다. "나 원 답답해서……" 혼잣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디까지나 순종이 먼저입니다.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듣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간혹 가다 가정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진 것도 아니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닙니다. 부부간에 대화가 끊어졌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 대화가 끊어졌습니까? 원인을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연애할 때에는 상대방의 말이 다 좋게만 들렸습니다. 더 듣고 싶어서 심지어 밤새도록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역겹게 들립니다. 다 잔소리로 들려서 "입 좀 다물어"라고 소리나 지르기 일쑤입니다. 당연히 대화가 끊어질 수 밖에요. 더는 답답해서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칠 지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나, 대화적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는 그 계시에 응답합니다. 이 관계가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서 마침내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밭길과 같은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이 네 가지의 마음 밭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마음 밭에 뿌려질 씨앗입니다. 아무리 옥토라 하더라도 씨앗이 뿌려지지 않으면 싹이 나지 못합니다. 이 보배로운 씨앗, 곧 말씀을 잘 받아 소중하게 간직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동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그들의 진지한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 동유럽이 왜 망했는가? 그들은 이 질문에 아주 극단적인 대답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없애고 성경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많은 주의 종을 잡아죽였다. 과학적이고 초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이룩하겠다고 하더니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 인간성이 파괴된 것은 두말할 것 없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농사조차 안 된다고 말합니다. 되는 일이 한 가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살던 큰 나라들이 이제 와서 우리 나라 같은 작은 나라에 손을 벌려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부정하고 말씀을 거부하고 보니 개인도 나라도 망하더라----이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서방의 자유국가들은 또 어떻습니까?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새벽마다 아세아방송을 틀어놓고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인들은 새벽 530분에 그런 설교방송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있겠습니까? 늦잠 자느라고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들려도 듣지 않습니다. 보여도 보지 않습니다. 말씀을 등한히 합니다. 거역합니다.

그리고 세상 물질, 세상 향락, 세상 명예에만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취하려고 열심히 뛰었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허무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 헛되이 살았다 ---- 이것이 인생의 결론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말씀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우리 마음 가운데 진실한 고백이 있습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또한 인간을 압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알고 역사의 목적을 압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성경 안에서 우리는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의 그 구체적인 계시를 증거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새로운 은총에 저 미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운명도 봅니다. 내가 처한 문제가 어렵다고 생각되십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암담하게 여겨집니까? 그러면 더욱 성경을 보십시오. 이 역사의 종말을 느끼십니까?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성경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철학서를 뒤진다 역사서를 뒤진다, 학자의 말을 들어본다----다 소용없습니다. 결국에는 성경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 힘이 없이 나약해지십니까? 승리의 비결은 말씀뿐입니다. 시험을 이기고자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무장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말씀의 검으로 비로소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과 위대성, 그리고 그 생명의 창조성을 고백하며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만이 해결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의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케 하고 온전케 하는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거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거울을 통하여, 곧 나를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디모데에게 이 서신을 쓰고 몇 달 후에 순교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교훈의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엄하게 명령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먼저, "말씀을 전파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선포하다, proclaim --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가르쳐라" 합니다. 지성에 호소하면서 알아듣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 셋째, "권면하라" 합니다. 감정에 호소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수용하도록, 믿도록 권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전파하라, 가르쳐라, 권면하라----강하게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군중 앞에서, 선상에서, 혹은 법정에서, 심지어 감옥에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 말씀 전함을 그는 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강하게 명령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곧 기회를 얻었으면 전할 것이요, 기회를 얻지 못했으면 기회를 만들어서 전하라는 말씀인 줄로 압니다. 기회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을 문안간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분인데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일반병실에 입원해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특실에 계셔도 될 형편인데 왜 사서 고생이냐고 물었더니 몇 가지 속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저는 건강할 때, 전도라는 것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비로소 같이 입원해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은 비록 괴롭지만 병든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습니다." 특실에 있으면 혼자 감옥에 갇힌 양 지내야 할 텐데 일반병실에서 많은 사람들과 지내며 그들에게 전도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참으로 좋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지혜를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직업을 원하십니까? 어떤 생활을 해나가야 되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미국에서 조그마한 선교모임에 참석을 해보았습니다. '직업과 전도'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는데, 참석한 사람 가운데 은행에 근무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월급은 적어도 텔러(teller), 창구에 앉아서 금전을 출납하는 일을 고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십 년 동안 줄곧 그 일만 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급을 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주임도 지점장도 필요 없다, 나에게는 이 일만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창구에 앉아서 돈을 받고 내주고 하면서 손님들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면서 전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언젠가 돈을 좀 찾을 일이 있어서 은행에를 갔더니 창구 여직원이 돈을 내주면서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어디어디에 쓸 것이라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이 아가씨 하는 말이 '교회에 가는 것 잊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목사한테 교회 나가는 것 잊지 말라고 합디다. 그래서 꼭 나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마는 이런 분들에게는 돈이 문제가 안됩니다. 부자가 무슨 대숩니까? 하루종일 그 자리에 앉아서 한마디씩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출세해봐야 별 볼일 없습니다. 세도 부려보았자 허무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생을 질적으로 살아가 보십시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부지런히 전도하십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혜가 있든지 없든지, 상대방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우리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절에서 명령합니다. "네 직무를 다하라." 파수꾼의 직무입니다. 사람들이 깨든 안깨든 기상나팔은 불어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묻지 마십시다. 기다리지도 마십시다. 좋은 대답이 있기를 바라지도 마십시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내하며, 고난을 받으며 --- 복음을 위하여 참고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내가 전도하고서 욕을 당하면 그 욕은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지런히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경 안에서 말씀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자에게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내게 말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고,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엄한 명령입니다. 종말론적 명령입니다.

사도행전 203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우리의 마지막 운명은 이 말씀에 의존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우리가 성경을 사랑합니다. 마침내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우리의 운명을 책임집니다. 말씀에 위탁할 때 말씀이 우리를 인도해줄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디모데후서 415)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두어 달 전 평양을 방문했을 때, 저는 그들의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부 자유를 비롯한 여러 어려운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더욱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그들에게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라디오가 없습니다. 북한 전역에 걸쳐 라디오가 없습니다. 유선방송으로 나오는 작은 스피커가 집집마다 있기는 합디다마는 마음대로 켜지도 끄지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나오는 대로 들을 수 밖에요. 그 밖의 다른 소리는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문도 보지 못합니다. 보통사람은 신문 볼 자유조차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40여 년을 깜깜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특별히 허가를 받아서 가지고 들어간 라디오를 새벽에 틀어보니 남한의 설교방송이 나옵디다. 제가하는 설교방송이 흘러나옵니다. 어느 방송이든 다 잘 나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이것을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마음 아팠습니다 개인적으로 기회가 닿아 제가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성경을 아십니까?" "성경이라는 말은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온 세계가 다 읽는 책인데 정말 모르십니까?" "모릅니다." 하나같이 모른다고 합니다. 40여 년 동안 이렇게 암흑세계를 살아오고 있습니다.

로마서 1014절로 15절에서 말씀합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믿음이 아무리 귀중하다 하지만, 듣는 일이 있고 나서 믿음이 생깁니다. 듣는 일없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전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기회를 가지지 못하면 믿음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우리 나라에도 농아가 많습니다. 많은 수의 벙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벙어리의 대다수가 입이나 혀의 구조에는 전혀 이상이 없는, 다시 말해서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배우지 못해서 벙어리가 된 경우라고 합니다. 듣지 못하면 이렇듯 말조차 배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만큼 생각할 수 있고 이만큼 인격을 세워갈 수 있는 것은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세계를 떠나 산 속에서 혼자 자란 아이는 새소리와 짐승소리밖에 낼 줄 모릅니다. 듣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 소리밖에 없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듣는 대로 달라집니다.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그 인격이 달라집니다. 듣는다는 것,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들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이겠습니까? 마음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행복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몸은 양식을 먹고삽니다.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은 진리를 먹고삽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삽니다. 그런데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다. 우리의 몸이 왜 병들어가고 있습니까? 독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인간성이 왜 파괴되고 있습니까? 타락한 이데올로기와 잘못된 철학을 들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이 왜 죽어가고 있습니까? 거짓을 들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과 영은 우리가 무엇을 먹고 두엇을 듣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진단을 받아보셨습니까? 너무 조급해하는 나머지 일년에 몇 차례씩 건강진단을 받으면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한번도 건강진단을 받아보지 않고 살기도 합니다. 건강하면 모르거니와 그러다가 덜컥 중병에라도 걸리게 되면 대책 없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고칠 수 있었을 텐데……" "진작 병세를 발견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런 진단을 받고 후회하면서 병세는 더욱 깊어갑니다.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건강 진단이 필요한 줄로 압니다. X레이 검사다 피 검사다 해가며 온몸 구석구석까지 사진을 찍고 쑤셔보고 하면서 여러 시간 괴로움을 줍니다마는, 그렇게 해서 내 몸의 현재 상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에 무엇이 부족하고 어디가 약한지, 내 몸의 형편이 종이 한 장에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나옵니다.

그러나, 좀 미련한 생각일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 마음 같아서는 건강진단을 받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 입맛이 좋으면 나는 건강한 것입니다. 무슨 음식을 먹든지 꿀맛 같고 소화를 잘 시키면 건강진단을 별도로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전에 없이 입맛이 없어지고 음식을 가리게 되면, 음식 냄새에 구역질이 나거든 병이 난 줄 알아야 합니다. 입맛이 뚝 떨어지거든 죽을병 걸린 줄 아십시오. 우리의 건강은 입맛대로 유지됩니다. 입맛이 좋은 사람은 소화도 잘 시켜서 당연히 건강합니다. 건강한 사람의 입맛은 건강합니다. 몸에 이로운 것을 좋아하여 그것만 찾아먹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입맛 당기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짠것이 먹고 싶은데 싱겁게 먹는 것이 좋다고 하여 맹물만 먹다가는 자칫 탈나기 쉽습니다. 몸에 염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짠것이 먹고 싶어진 것입니다. 싱거운 것은 싱거운 것대로 단 것은 단 것대로 내 몸에 필요하기에 그쪽으로 입맛이 당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병든 사람은 자기 몸에 해로운 것만 좋아합니다. 의사가 먹지 말라고 금해놓은 것만 골라서 찾습니다. 죽더라도 먹겠다고, 먹어보고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입맛마저 병든 것입니다. 입맛에는 다분히 정신적 성향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나의 심령의 건강을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좋은가? 듣고 배우고 또 들어도 마냥 듣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의 심령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성경만 펴면 졸음이요 멀쩡하다가도 교회 문만 들어서면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고 설교만 시작되면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면 병든 심령인 것입니다. 늦게 나와서 뒷자리에 앉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일찍 나와서도 꼭 뒤에 자리를 잡는 사람, 그 사람도 어딘가가 병든 사람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말씀의 입맛은 어느 정도인가? 전에는 귀한 말씀인 줄 몰랐는데, 이제는 말씀이 좋아지고 꿀보다 더 달게 느껴지거든 내 심령의 건강이 괜찮은 줄로, 수준급인 줄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꾸만 등한시되면 병든 줄로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합병증이 나타날 것입니다.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인격파탄이요 가정파탄이요 사회문제입니다. 말씀을 향한 입맛이 병들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가까이 즐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주일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을 듣고도 카세트 테이프를 가지고 돌아가 일주일 내내 저녁마다 한번씩 듣고 잠을 잔다고 합니다. 좀 심하다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괜찮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듣고서 잠자리에 든다, 말씀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시면서 많은 분들이 제게 인사를 합니다. "좋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욕 많이 보셨습니다"하고 사투리로 말하기도 합니다. 간혹 "설교 좀 더 길게 해주세요"하고 부탁해오는 분도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아쉬운 마음인 것입니다. 이래야 건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동기, 당시 처하신 상황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십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성경은 예수님의 몸의 생리학적 상태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40일을 굶으셨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시겠습니까? 그 주리심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40일을 굶으신 이 절박한 시간에도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말씀이 먼저요, 아무리 가난해도 말씀이 먼저입니다. 구제가 먼저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 ---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납니다. 마르틴 루터는 신앙을 '하나님과 나 사이의 바른 관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란 무엇입니까? 말씀하시는 자와 말씀 듣는 자와의 관계입니다. 곧 계시자와 응답자 사이의 바른 관계, 이것이 신앙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제 가정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여든이 넘고 4대 독자인 아버지도 환갑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환갑 넘은 아들을 가리켜 "아무개야"하고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꼼짝없이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하시면 무조건 예, 그럽지요, , 그러십시오,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물러 나오면 그 말씀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가 봅니다. "나 원 답답해서……" 혼잣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디까지나 순종이 먼저입니다.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듣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간혹 가다 가정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진 것도 아니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닙니다. 부부간에 대화가 끊어졌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 대화가 끊어졌습니까? 원인을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연애할 때에는 상대방의 말이 다 좋게만 들렸습니다. 더 듣고 싶어서 심지어 밤새도록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역겹게 들립니다. 다 잔소리로 들려서 "입 좀 다물어"라고 소리나 지르기 일쑤입니다. 당연히 대화가 끊어질 수 밖에요. 더는 답답해서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칠 지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나, 대화적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는 그 계시에 응답합니다. 이 관계가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서 마침내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밭길과 같은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이 네 가지의 마음 밭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마음 밭에 뿌려질 씨앗입니다. 아무리 옥토라 하더라도 씨앗이 뿌려지지 않으면 싹이 나지 못합니다. 이 보배로운 씨앗, 곧 말씀을 잘 받아 소중하게 간직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동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그들의 진지한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 동유럽이 왜 망했는가? 그들은 이 질문에 아주 극단적인 대답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없애고 성경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많은 주의 종을 잡아죽였다. 과학적이고 초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이룩하겠다고 하더니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 인간성이 파괴된 것은 두말할 것 없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농사조차 안 된다고 말합니다. 되는 일이 한 가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살던 큰 나라들이 이제 와서 우리 나라 같은 작은 나라에 손을 벌려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부정하고 말씀을 거부하고 보니 개인도 나라도 망하더라----이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서방의 자유국가들은 또 어떻습니까?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새벽마다 아세아방송을 틀어놓고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인들은 새벽 530분에 그런 설교방송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있겠습니까? 늦잠 자느라고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들려도 듣지 않습니다. 보여도 보지 않습니다. 말씀을 등한히 합니다. 거역합니다.

그리고 세상 물질, 세상 향락, 세상 명예에만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취하려고 열심히 뛰었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허무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 헛되이 살았다 ---- 이것이 인생의 결론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말씀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우리 마음 가운데 진실한 고백이 있습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또한 인간을 압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알고 역사의 목적을 압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성경 안에서 우리는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의 그 구체적인 계시를 증거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새로운 은총에 저 미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운명도 봅니다. 내가 처한 문제가 어렵다고 생각되십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암담하게 여겨집니까? 그러면 더욱 성경을 보십시오. 이 역사의 종말을 느끼십니까?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성경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철학서를 뒤진다 역사서를 뒤진다, 학자의 말을 들어본다----다 소용없습니다. 결국에는 성경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 힘이 없이 나약해지십니까? 승리의 비결은 말씀뿐입니다. 시험을 이기고자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무장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말씀의 검으로 비로소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과 위대성, 그리고 그 생명의 창조성을 고백하며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만이 해결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의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케 하고 온전케 하는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거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거울을 통하여, 곧 나를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디모데에게 이 서신을 쓰고 몇 달 후에 순교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교훈의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엄하게 명령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먼저, "말씀을 전파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선포하다, proclaim --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가르쳐라" 합니다. 지성에 호소하면서 알아듣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 셋째, "권면하라" 합니다. 감정에 호소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수용하도록, 믿도록 권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전파하라, 가르쳐라, 권면하라----강하게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군중 앞에서, 선상에서, 혹은 법정에서, 심지어 감옥에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 말씀 전함을 그는 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강하게 명령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곧 기회를 얻었으면 전할 것이요, 기회를 얻지 못했으면 기회를 만들어서 전하라는 말씀인 줄로 압니다. 기회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을 문안간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분인데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일반병실에 입원해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특실에 계셔도 될 형편인데 왜 사서 고생이냐고 물었더니 몇 가지 속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저는 건강할 때, 전도라는 것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비로소 같이 입원해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은 비록 괴롭지만 병든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습니다." 특실에 있으면 혼자 감옥에 갇힌 양 지내야 할 텐데 일반병실에서 많은 사람들과 지내며 그들에게 전도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참으로 좋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지혜를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직업을 원하십니까? 어떤 생활을 해나가야 되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미국에서 조그마한 선교모임에 참석을 해보았습니다. '직업과 전도'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는데, 참석한 사람 가운데 은행에 근무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월급은 적어도 텔러(teller), 창구에 앉아서 금전을 출납하는 일을 고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십 년 동안 줄곧 그 일만 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급을 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주임도 지점장도 필요 없다, 나에게는 이 일만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창구에 앉아서 돈을 받고 내주고 하면서 손님들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면서 전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언젠가 돈을 좀 찾을 일이 있어서 은행에를 갔더니 창구 여직원이 돈을 내주면서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어디어디에 쓸 것이라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이 아가씨 하는 말이 '교회에 가는 것 잊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목사한테 교회 나가는 것 잊지 말라고 합디다. 그래서 꼭 나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마는 이런 분들에게는 돈이 문제가 안됩니다. 부자가 무슨 대숩니까? 하루종일 그 자리에 앉아서 한마디씩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출세해봐야 별 볼일 없습니다. 세도 부려보았자 허무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생을 질적으로 살아가 보십시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부지런히 전도하십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혜가 있든지 없든지, 상대방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우리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절에서 명령합니다. "네 직무를 다하라." 파수꾼의 직무입니다. 사람들이 깨든 안깨든 기상나팔은 불어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묻지 마십시다. 기다리지도 마십시다. 좋은 대답이 있기를 바라지도 마십시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내하며, 고난을 받으며 --- 복음을 위하여 참고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내가 전도하고서 욕을 당하면 그 욕은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지런히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경 안에서 말씀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자에게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내게 말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고,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엄한 명령입니다. 종말론적 명령입니다.

사도행전 203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우리의 마지막 운명은 이 말씀에 의존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우리가 성경을 사랑합니다. 마침내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우리의 운명을 책임집니다. 말씀에 위탁할 때 말씀이 우리를 인도해줄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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