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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다수확의 원리(고린도후서 9장 1절~8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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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확의 원리(고린도후서 918)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히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연 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솝 우화 가운데 농부와 여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달리 여우를 미워하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밀밭에 나갔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여우를 한 마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우를 가지고 마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단언합니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여우를 잡았소. 보시오. 모진 고통을 주어 이 여우를 죽일 것이오"라고. 동네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 농부는 사람들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여우의 꼬리에 기름을 묻힌 밧줄을 매고 거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농부는 불이 붙은 여우가 놀라 산 속으로 도망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생각과는 달리 여우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그 농부의 밀밭으로 들어가 추수를 앞둔 밀을 모두 태우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심은 대로 거둡니다. 심은 만큼 수확합니다. 이 단순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이 엄연한 원리를 거역하고 거스리는 사람 때문에 세계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불한당(不汗黨)이란 말이 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땀 흘리지 않고 살겠다는 무리가 불한당입니다. 요즘 연일 매스컴에서는 망국풍속인 고스톱에 대하여 떠듭니다. 모여 앉기만 하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고스톱을 합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마주앉아서 누가 누구 돈을 따먹겠다는 것입니까? 땀 흘리지 않고 먹겠다는 생각 ---- 나쁜 태도요 지양해야 할 자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이치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일곱 가지의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씨앗의 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옛말처럼 좋은 일을 하면 선()이 나고, 나쁜 일을 하면 악()이 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그 종자는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분량(分量)의 원리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우리 나라는 땅이 작기에 농사규모도 작습니다만, 외국, 특히나 땅덩이가 큰 미국을 보십시오. 농장이 얼마나 넓은지 비행기로 씨를 뿌립니다. 이렇듯 많은 양을 심으니까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셋째는 정성의 원리입니다. 많이 심는다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종자라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정성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40년을 두고 온세계를 소란하게 했던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그들은 집단농장을 통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집단농장 체제하에서는 농사가 잘되지를 않아 수확이 적습니다. 공산국가마다 식량 문제로 시달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종자가 나빠서입니까, 땅이 좁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정성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북경에 갔을 때에 그곳에서 나온 영자신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도된 기록에 따르면 집단농장을 통하여 농사를 지을 때에 비하여 농토를 개인에게 나누어주어 농사를 짓게 했더니 1년만에 수확이 3배나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수확이 5배로 껑충 뛰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공산주의하에서는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풀 한 포기를 가꾸는 데도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합니까? 결국 심는다는 것은 종자만 심는다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심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기다림의 원리입니다. 아침에 심고 저녁에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금년에 심고 몇 년 후, 5년 혹은 10년 후에 거둡니다. 부모가 심고 자식이 거둡니다. 이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흔히 악을 행하고도 당장 거두는 것 같지 않아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거두어야 할 때가 옵니다. 선도 그렇습니다.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반드시 거두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것 없습니다.

다섯째는 심판의 원리입니다. 심을 때에 아차 실수로 잘못 심었습니다. 그러나 바꾸려고 해도 바꿀 길이 없습니다. 심어놓았으면 거둘 수밖에는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심는 것은 자유요 거두는 것은 심판입니다. 그대로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은총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수고란 아주 작은 것입니다. 하찮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종자도 주시고 땅도 주시고 비도 주시고 햇빛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건강도 주셨기에 추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땀 흘려 수고하여 수확한 뒤에, 이 모두를 하나님께 돌리고 감사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은총의 원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는 나눔의 원리입니다. 농사 지어서 나 혼자 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은 전국민의 5퍼센트만이 농민이라고 합니다. 다섯 사람이 농사를 지어서 백 사람이 먹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일터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 혼자 먹고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고해서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도록 되어 있습니다. 추수한 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과 더불어 서로 베풀고 나누는 데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특별히 선행에 대하여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어느 곳에서 전하든지 교회를 세우고 교인들이 일어서게 되면 그들에게 꼭 부탁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몇 년째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니 그들을 위하여 헌금합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예수믿는 성도들이니 그들을 위하여 헌금합시다, 라고 부탁합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근방에서 전도할 때에도 그곳에서 1년 반을 거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교인들을 위하여 헌금을 부탁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선뜻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크게 감격하여 다른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이 소식도 함께 전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인들에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일 년 전부터 헌금을 준비했노라고 자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2)" ---- 이 말씀이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헌금한다면 우리들도 당연히 해야지 하며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위해 나섭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을 무렵,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헌금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헌금하기로 작정만 해놓고 실제로는 안낸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충동적인 사람들로 실천의지가 부족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사도 바울은 마음이 아파서 오늘의 본문말씀을 편지로 쓰게 됩니다.

여기에 삼중낭패가 있습니다. 첫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식언(食言)을 한 것입니다. 약속을 해놓고 실천하지 않았으니 신앙적으로 병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둘째,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열심히 헌금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교회의 교인들도 열심히 헌금했는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헌금을 중단했다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이 일을 주도했던 사도 바울 역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보다 큰 낭패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중요한 문제를 앞에 놓고 분노나 책망보다는 격려하고, 강요나 명령보다는 설득하는 입장에서 납득이 되도록 다시금 이 귀한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실천철학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행위는 추수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과거에 심어놓은 것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미래를 향하여 심는 것으로 파종적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사건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이 사건은 반드시 미래에 그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심는 것이 곧 거두는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있듯이 우리의 행위도 씨앗이 됩니다. 내가 한 일, 내가 한 말이 남을 아프게 했다면 언젠가는 내가 아플 때가 올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배신했다면 언젠가는 내가 배신당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선한 일을 했다면 언젠가는 내게 선한 일이 돌아올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선과 악의 행위에는 거두어들이는 가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첫머리에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를 섬긴다'는 것은 '디아코니아''봉사'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가진 사명, 교회의 기능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케리그마(kerygma)' '디아코니아(diakonia)' '코이노니아(koinonia)'입니다. '케리그마'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 '전도'입니다. 예배도 이 기능에 해당합니다. '디아코니아'는 봉사요, '코이노니아'는 친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으로 구원을 얻고, 성도의 교제와 사랑의 친교가 이루어지고 그 친교가 열매를 맺어서 봉사합니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교회의 기능입니다. 봉사의 열매를 맺을 때에 그 신앙이 바른 위치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의와 사랑과 화평과 진리와 충성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다시 선과 의와 사랑과 화평과 진리와 충성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충성을 심지 않고 충성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사랑을 심지 않고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선을 심지 않고 선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6)." 이것은 물량적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많이'라는 말에는 좀더 높은 차원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15절이나 에베소서 320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더 넘치도록"이라는 말씀과 같이 '많이'는 후하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7)" ---- 결심한대로 원하는 대로 행해야 한다, 미루지 않고 그 즉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지금 도와주어야 하는데 내일 하지하고 미루는 것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감동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마음에서 격동할 때에 바로 그 즉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결심대로 행하질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심대로 해야 할 것이요, 인색함이 없이 해야 할 것이요,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색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와주어야 할 시간에 그 마음을 억누르고 돕지 않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선행은 기쁘게 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쁨이 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행위는 소용없습니다. 또한 선행은 준비해야 합니다.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헌금할 때에도 미리 준비해서 하는 것과 현장에서 불현듯 생각나서 하는 것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기도하면서 정성껏 선행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5절에 보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자신을 드리고, 그 다음에 봉사할 것입니다. 나아가 봉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자발적인 마음이 아니고는 안됩니다. 부득이해서 혹은 억지로 하는 것은 선행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도 "억지가 아니니라"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선행이 아니고는 참 연보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인사받을 것 없습니다. 사실 인사 받고자 하는 마음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도와주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더라'하고 불평하는 사람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었기에 이런 소리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인사 받을 것도, 보상받을 것도 없습니다. 이런 깨끗한 마음으로 봉사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봉사가 될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영락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에 한목사님이 헌금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부부간에 다 의논을 하고 생활형편을 따져가면서 얼마를 헌금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자리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그 생각한 헌금에 두 배를 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 합당합니다." 그렇습니다. 요모조모 따져보고 하는 헌금은 결코 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계산이 빠릅니다. 너무 보상심리가 강합니다.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 베푸는 마음, 이것이 많이 심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성을 담아서 심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손이란 그림을 다 보셨을 줄로 압니다.

이것은 그림으로 뿐만 아니라 조각으로도 나와 있어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손은 여자의 예쁜 손이 아닙니다. 남자의 거친 손이요, 게다가 손가락 하나가 옆으로 구부러져 있는 손입니다. 그 그림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이탈리아의 어느 농촌에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 청년은 피아노를 치고, 한 청년은 그림을 그립니다. 그들은 서로 로마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기로 다짐하고는 로마로 향합니다.

그런데 일하면서 공부를 하려니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서로 일 년씩 나누어가면서 공부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한 사람이 일을 해서 다른 한 사람의 학비를 대기로, 그렇게 일 년씩 바꾸어서 하기로 한 것입니다. 서로 양보하다가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먼저 공부를 하고, 피아노를 치는 친구가 식당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나 역할을 바꾸려고 보니, 피아노를 공부하려던 그 청년은 그 간의 부엌일로 손마디가 굵어지고 굳어져서 도저히 피아노를 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실망하지 않고 그림 그리는 친구에게 공부를 더 하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그림을 그리는 청년은 친구의 희생과 도움으로 훌륭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림을 그리는 청년이 집에 돌아와보니 안에서 기도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피아노를 못 치게 된 그 거칠어진 손으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이 문틈으로 보입니다. 그림을 더 잘 그리게 해주십사, 훌륭한 그림을 그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주십사 하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본 그 청년은 '내 친구의 기도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이구나' 깨닫고는 그 친구의 거룩한 손을 그리게 됩니다. 친구를 위하여 깨끗하게 바친 손, 어떤 의미에서는 일생을 바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은혜를 넘치게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넉넉하게 하신 하나님을 말씀합니다(8).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제 가족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저희 할아버님께서는 교회 장로님으로 계셨습니다. 저는 늘 선한 일을 하시는 할아버님의 모습을 뵈며 자랐습니다. 그 당시는 모두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서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식사 때 오면 밥을 주고, 식사 때가 아닌 때에 오면 쌀을 얼마씩 퍼줍니다. 할아버님 할머님이 계시니 며느리인 저희 어머니가 쌀을 마음대로 퍼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얼마간 가져다주면 할머님께서 보시고는 "좀더 주어라"하십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들어와서 식사도 하고 돌아가게 하라"고 후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무 많이 주지 마라'는 말씀은 전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86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전날까지 낚시질을 하실 정도로 아주 건강하셨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아시고 자리에 누우시기 전에 손을 모아 기도하시고 저희에게 여러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내가 죽거든 잔치를 해라. 창고를 열고 일주일 동안 거지잔치를 해라"였습니다. 할아버님의 유언대로 마당에 천막을 쳐놓고 일주일 동안 온 동네 거지를 모아서 후하게 잔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저 혼자 빈손으로 내려왔지만, 이렇듯 자리를 잡고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다 할아버님의 덕인 것 같습니다. 어디를 가던지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고, 우리 성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정말 재벌 부럽지 않게 잘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것은 분명히 조상 덕이다.

그분들이 많이 심어놓으셨기에 손자인 내가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6:20)"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의 자식이 걸식함을 보지 못했노라"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이밖에도 잠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19: 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전도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1:1)"라고. 여러분, 우리는 자식에게 무엇인가 주려고 너무 연연해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자식에게 재산을 주면 자식을 망치고 가문을 망칩니다. 그러니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선행을 하십시오.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십시오.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바른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자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식이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에 무엇을 거둘 것 같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점검하십시오. 나의 인격을 점검하고, 도덕성을 점검하고, 영성(靈性)을 점검하십시오. '나는 무엇을 심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후손은 무엇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 심은대로 거두며, 많이 심은 자가 많이 거둘 것입니다.  

다수확의 원리(고린도후서 918)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히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연 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솝 우화 가운데 농부와 여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달리 여우를 미워하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밀밭에 나갔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여우를 한 마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우를 가지고 마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단언합니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여우를 잡았소. 보시오. 모진 고통을 주어 이 여우를 죽일 것이오"라고. 동네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 농부는 사람들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여우의 꼬리에 기름을 묻힌 밧줄을 매고 거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농부는 불이 붙은 여우가 놀라 산 속으로 도망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생각과는 달리 여우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그 농부의 밀밭으로 들어가 추수를 앞둔 밀을 모두 태우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심은 대로 거둡니다. 심은 만큼 수확합니다. 이 단순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이 엄연한 원리를 거역하고 거스리는 사람 때문에 세계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불한당(不汗黨)이란 말이 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땀 흘리지 않고 살겠다는 무리가 불한당입니다. 요즘 연일 매스컴에서는 망국풍속인 고스톱에 대하여 떠듭니다. 모여 앉기만 하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고스톱을 합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마주앉아서 누가 누구 돈을 따먹겠다는 것입니까? 땀 흘리지 않고 먹겠다는 생각 ---- 나쁜 태도요 지양해야 할 자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이치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일곱 가지의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씨앗의 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옛말처럼 좋은 일을 하면 선()이 나고, 나쁜 일을 하면 악()이 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그 종자는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분량(分量)의 원리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우리 나라는 땅이 작기에 농사규모도 작습니다만, 외국, 특히나 땅덩이가 큰 미국을 보십시오. 농장이 얼마나 넓은지 비행기로 씨를 뿌립니다. 이렇듯 많은 양을 심으니까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셋째는 정성의 원리입니다. 많이 심는다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종자라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정성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40년을 두고 온세계를 소란하게 했던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그들은 집단농장을 통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집단농장 체제하에서는 농사가 잘되지를 않아 수확이 적습니다. 공산국가마다 식량 문제로 시달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종자가 나빠서입니까, 땅이 좁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정성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북경에 갔을 때에 그곳에서 나온 영자신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도된 기록에 따르면 집단농장을 통하여 농사를 지을 때에 비하여 농토를 개인에게 나누어주어 농사를 짓게 했더니 1년만에 수확이 3배나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수확이 5배로 껑충 뛰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공산주의하에서는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풀 한 포기를 가꾸는 데도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합니까? 결국 심는다는 것은 종자만 심는다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심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기다림의 원리입니다. 아침에 심고 저녁에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금년에 심고 몇 년 후, 5년 혹은 10년 후에 거둡니다. 부모가 심고 자식이 거둡니다. 이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흔히 악을 행하고도 당장 거두는 것 같지 않아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거두어야 할 때가 옵니다. 선도 그렇습니다.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반드시 거두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것 없습니다.

다섯째는 심판의 원리입니다. 심을 때에 아차 실수로 잘못 심었습니다. 그러나 바꾸려고 해도 바꿀 길이 없습니다. 심어놓았으면 거둘 수밖에는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심는 것은 자유요 거두는 것은 심판입니다. 그대로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은총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수고란 아주 작은 것입니다. 하찮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종자도 주시고 땅도 주시고 비도 주시고 햇빛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건강도 주셨기에 추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땀 흘려 수고하여 수확한 뒤에, 이 모두를 하나님께 돌리고 감사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은총의 원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는 나눔의 원리입니다. 농사 지어서 나 혼자 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은 전국민의 5퍼센트만이 농민이라고 합니다. 다섯 사람이 농사를 지어서 백 사람이 먹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일터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 혼자 먹고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고해서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도록 되어 있습니다. 추수한 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과 더불어 서로 베풀고 나누는 데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특별히 선행에 대하여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어느 곳에서 전하든지 교회를 세우고 교인들이 일어서게 되면 그들에게 꼭 부탁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몇 년째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니 그들을 위하여 헌금합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예수믿는 성도들이니 그들을 위하여 헌금합시다, 라고 부탁합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근방에서 전도할 때에도 그곳에서 1년 반을 거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교인들을 위하여 헌금을 부탁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선뜻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크게 감격하여 다른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이 소식도 함께 전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인들에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일 년 전부터 헌금을 준비했노라고 자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2)" ---- 이 말씀이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헌금한다면 우리들도 당연히 해야지 하며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위해 나섭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을 무렵,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헌금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헌금하기로 작정만 해놓고 실제로는 안낸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충동적인 사람들로 실천의지가 부족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사도 바울은 마음이 아파서 오늘의 본문말씀을 편지로 쓰게 됩니다.

여기에 삼중낭패가 있습니다. 첫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식언(食言)을 한 것입니다. 약속을 해놓고 실천하지 않았으니 신앙적으로 병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둘째,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열심히 헌금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교회의 교인들도 열심히 헌금했는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헌금을 중단했다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이 일을 주도했던 사도 바울 역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보다 큰 낭패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중요한 문제를 앞에 놓고 분노나 책망보다는 격려하고, 강요나 명령보다는 설득하는 입장에서 납득이 되도록 다시금 이 귀한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실천철학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행위는 추수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과거에 심어놓은 것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미래를 향하여 심는 것으로 파종적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사건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이 사건은 반드시 미래에 그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심는 것이 곧 거두는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있듯이 우리의 행위도 씨앗이 됩니다. 내가 한 일, 내가 한 말이 남을 아프게 했다면 언젠가는 내가 아플 때가 올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배신했다면 언젠가는 내가 배신당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선한 일을 했다면 언젠가는 내게 선한 일이 돌아올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선과 악의 행위에는 거두어들이는 가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첫머리에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를 섬긴다'는 것은 '디아코니아''봉사'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가진 사명, 교회의 기능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케리그마(kerygma)' '디아코니아(diakonia)' '코이노니아(koinonia)'입니다. '케리그마'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 '전도'입니다. 예배도 이 기능에 해당합니다. '디아코니아'는 봉사요, '코이노니아'는 친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으로 구원을 얻고, 성도의 교제와 사랑의 친교가 이루어지고 그 친교가 열매를 맺어서 봉사합니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교회의 기능입니다. 봉사의 열매를 맺을 때에 그 신앙이 바른 위치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의와 사랑과 화평과 진리와 충성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다시 선과 의와 사랑과 화평과 진리와 충성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충성을 심지 않고 충성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사랑을 심지 않고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선을 심지 않고 선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6)." 이것은 물량적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많이'라는 말에는 좀더 높은 차원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15절이나 에베소서 320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더 넘치도록"이라는 말씀과 같이 '많이'는 후하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7)" ---- 결심한대로 원하는 대로 행해야 한다, 미루지 않고 그 즉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지금 도와주어야 하는데 내일 하지하고 미루는 것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감동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마음에서 격동할 때에 바로 그 즉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결심대로 행하질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심대로 해야 할 것이요, 인색함이 없이 해야 할 것이요,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색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와주어야 할 시간에 그 마음을 억누르고 돕지 않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선행은 기쁘게 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쁨이 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행위는 소용없습니다. 또한 선행은 준비해야 합니다.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헌금할 때에도 미리 준비해서 하는 것과 현장에서 불현듯 생각나서 하는 것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기도하면서 정성껏 선행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5절에 보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자신을 드리고, 그 다음에 봉사할 것입니다. 나아가 봉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자발적인 마음이 아니고는 안됩니다. 부득이해서 혹은 억지로 하는 것은 선행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도 "억지가 아니니라"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선행이 아니고는 참 연보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인사받을 것 없습니다. 사실 인사 받고자 하는 마음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도와주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더라'하고 불평하는 사람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었기에 이런 소리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인사 받을 것도, 보상받을 것도 없습니다. 이런 깨끗한 마음으로 봉사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봉사가 될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영락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에 한목사님이 헌금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부부간에 다 의논을 하고 생활형편을 따져가면서 얼마를 헌금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자리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그 생각한 헌금에 두 배를 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 합당합니다." 그렇습니다. 요모조모 따져보고 하는 헌금은 결코 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계산이 빠릅니다. 너무 보상심리가 강합니다.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 베푸는 마음, 이것이 많이 심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성을 담아서 심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손이란 그림을 다 보셨을 줄로 압니다.

이것은 그림으로 뿐만 아니라 조각으로도 나와 있어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손은 여자의 예쁜 손이 아닙니다. 남자의 거친 손이요, 게다가 손가락 하나가 옆으로 구부러져 있는 손입니다. 그 그림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이탈리아의 어느 농촌에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 청년은 피아노를 치고, 한 청년은 그림을 그립니다. 그들은 서로 로마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기로 다짐하고는 로마로 향합니다.

그런데 일하면서 공부를 하려니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서로 일 년씩 나누어가면서 공부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한 사람이 일을 해서 다른 한 사람의 학비를 대기로, 그렇게 일 년씩 바꾸어서 하기로 한 것입니다. 서로 양보하다가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먼저 공부를 하고, 피아노를 치는 친구가 식당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나 역할을 바꾸려고 보니, 피아노를 공부하려던 그 청년은 그 간의 부엌일로 손마디가 굵어지고 굳어져서 도저히 피아노를 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실망하지 않고 그림 그리는 친구에게 공부를 더 하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그림을 그리는 청년은 친구의 희생과 도움으로 훌륭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림을 그리는 청년이 집에 돌아와보니 안에서 기도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피아노를 못 치게 된 그 거칠어진 손으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이 문틈으로 보입니다. 그림을 더 잘 그리게 해주십사, 훌륭한 그림을 그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주십사 하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본 그 청년은 '내 친구의 기도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이구나' 깨닫고는 그 친구의 거룩한 손을 그리게 됩니다. 친구를 위하여 깨끗하게 바친 손, 어떤 의미에서는 일생을 바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은혜를 넘치게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넉넉하게 하신 하나님을 말씀합니다(8).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제 가족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저희 할아버님께서는 교회 장로님으로 계셨습니다. 저는 늘 선한 일을 하시는 할아버님의 모습을 뵈며 자랐습니다. 그 당시는 모두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서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식사 때 오면 밥을 주고, 식사 때가 아닌 때에 오면 쌀을 얼마씩 퍼줍니다. 할아버님 할머님이 계시니 며느리인 저희 어머니가 쌀을 마음대로 퍼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얼마간 가져다주면 할머님께서 보시고는 "좀더 주어라"하십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들어와서 식사도 하고 돌아가게 하라"고 후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무 많이 주지 마라'는 말씀은 전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86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전날까지 낚시질을 하실 정도로 아주 건강하셨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아시고 자리에 누우시기 전에 손을 모아 기도하시고 저희에게 여러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내가 죽거든 잔치를 해라. 창고를 열고 일주일 동안 거지잔치를 해라"였습니다. 할아버님의 유언대로 마당에 천막을 쳐놓고 일주일 동안 온 동네 거지를 모아서 후하게 잔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저 혼자 빈손으로 내려왔지만, 이렇듯 자리를 잡고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다 할아버님의 덕인 것 같습니다. 어디를 가던지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고, 우리 성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정말 재벌 부럽지 않게 잘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것은 분명히 조상 덕이다.

그분들이 많이 심어놓으셨기에 손자인 내가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6:20)"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의 자식이 걸식함을 보지 못했노라"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이밖에도 잠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19: 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전도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1:1)"라고. 여러분, 우리는 자식에게 무엇인가 주려고 너무 연연해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자식에게 재산을 주면 자식을 망치고 가문을 망칩니다. 그러니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선행을 하십시오.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십시오.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바른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자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식이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에 무엇을 거둘 것 같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점검하십시오. 나의 인격을 점검하고, 도덕성을 점검하고, 영성(靈性)을 점검하십시오. '나는 무엇을 심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후손은 무엇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 심은대로 거두며, 많이 심은 자가 많이 거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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