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온유한 자인가/ 마 5:5
우리는 지금 몇 주간을 이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보훈 중 8가지 복에 관해 함께 배우고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주 설교준비를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8가지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할 세 번째 복을 좋아하겠구나.
온유하면 땅을 주신다고 했는데, 워낙 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아마 굉장히 좋아하겠다.'
이런 약간 장난기 섞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부동산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너무 많은 것이 나라를 위해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계속 멍이 들고, 또 선진국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원인을 캐고 들어가 보면 망국적인 토지 투기, 이것이 바로 이 나라의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때 신문에 떠들썩했던 김모 국회의원처럼 가족들이 19번이나 불법으로 전입 이전 하면서
전국에 60만평의 땅을 사두는 짓을 하는 사람이 이 나라의 지도자로 있는 이상, 이 나라의
미래는 절대 밝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이 한반도 좁은 땅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쓸어 내고 자기 가족만 살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리가 아직도 많은 사람의
뇌리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땅을 주신다고 하면 온유한 자가 많이 생길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땅을 가지고 싶습니까? 온유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사람들은 땅은 갖고 싶은데 온유한 자가 되라고 하는 말씀은 별로 달갑게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온유함이라는 말은 그렇게 썩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은 글자 그대로 하면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입니다.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생각하라고 하면 자연히 유약한 성격의 이미지가 우리 마음에 그려지게 됩니다. 성격이 부드러워서 남에게 싫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해서 무슨 일을 맡겨도 안심이 안 되는 사람, 또 어떤 경우에는
지나칠 정도로 비굴하게 굽실굽실 거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이미지가 우리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러다 보니 온유하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언젠가 나이가 지긋하신 부인이 자기 사위를 못 마땅하게 여기며 불평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심성이 좋아서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이라구요? 말도 하지 마십시오. 진절머리가 납니다. 제 식구하나 벌어 먹이지 못하는 주제에 사람만 좋으면 무엇합니까? 차라리
성깔을 부리고 주먹질을 하면서도 제 식구는 제대로 먹여 살리는 사람이 백배로 낫습니다.'
이렇듯 마음씨가 좋고 온유하다는 것에 대해 약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사회에서는 적자생존의 냉엄한 원리가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강한 자가 이긴다. 강한 것이 좋다. 그러므로 줄을 서도 강한 사람에게 가서
줄을 서라.' 모든 것이 이런 식입니다. 자기 자신이 남에게 약하게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경향을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이 별로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묵상하면 결국 천하가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온유한 자가 가장 강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드러운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기대될 수 있는
후천적인 성품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서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령을 애통하게 만드십니다. 그 다음에 우리 안에서 성령이 형성시켜 주는 성품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온유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충동을 받으면 야생마처럼 난폭해지기 쉬운 성품이 다 있는데, 성령께서 이 난폭해지기 쉬운
우리의 성품을 통제하시고 균형을 잡아주실 때 나타나는 것이 온유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이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성격을 일컬어서 성령의 열매라고 흔히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이 육화 되어 예수 믿는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온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천적으로 마음이 조금 부드럽다면 약간 도움이 될 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성품을 표현하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보면 그 안에 온유가 들어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9가지가 모두 예수님의 한 인격, 성품을 드러내는 요소입니다. 그 가운데 온유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이 온유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예수님의 성품을 온유하게 하신 것처럼 그 성령께서 우리의 기질을 온유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군가 '그리스도의 온유는 우리 믿는 자들이 착용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와 같다.'고 말한 것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한 가지를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령을 모시고 삽니다. 할렐루야!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뒷방 영감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시고 천국을 이루도록 하시는 절대자입니다. 절대자로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은 우리의 성품을 온유하게 바꾸어 놓으십니다.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 성격이 온유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모순에 빠지는 것임을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우리가 온유한지 아니한지를 어떻게,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마음자세를 놓고 따져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면 온유한 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는 욥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욥처럼 처신하면 온유한 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욥은
동방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재산, 10남매나 되는 자랑스러운 자녀들, 천하에서
가장 미인이라고 하는 아내,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생의 모든 쾌락을
만족시킬 만한 조건들을 다 충족시키면서 살던 욥이지만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주식으로 떼돈을 벌었습니까? 하루
아침에 다 날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재산, 내가 자랑하는 자녀,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루 아침에 다 없어질 수 있습니다. 욥이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다 없어지고 몸에 병까지 들어 가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기와조각으로 온 몸에 피가 흐르도록 긁어야
하는 너무나 불쌍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욥기 1장 20절 이하에 보면 그의
됨됨이를 발견할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알거지가 된
다음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었고 머리털을 밀었고 그 다음에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일컬어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거세게 항의하고 싶고 고개를 쳐들고 따지고 싶을 때,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회개하는
자와 같이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행동이 있으면 말이 따라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가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사온즉 또한 벌거벗은 채로 모태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아멘'
(욥1:21) 그는 절대로 입을 열어 범죄하지 아니했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욥1:22) 욥은 온유한 자의 기념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자세를 취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온유하다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땅을
주십니다. 욥은 나중에 땅을 얻었습니다. 잃은 것 보다 몇 배로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 주셨습니다. 욥은 인생을 실패자로 산 것이 아닙니다. 땅을 얻은 사람은 승자입니다. 옛날에 땅을 소유하면 승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욥은 승자로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째서 그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형제 자매 가운데서 현재 욥과 같이 기가 막힌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이 생각할 때 이해가 안 되는 불행,
이해가 안 되는 고통과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기도를 할 힘도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 계속 따지고 싶은 마음 밖에 없습니까? '그래도 이만큼 신앙 생활을 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이런 대우를 하실까?' 이런 편치 못한 마음 때문에 계속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사나워집니까? 여러분의 자세는 욥과 비교하여 온유하지 못합니다. 욥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시를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신뢰하십시오. 그의 성실하신 약속들을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기다리십시오. 저녁에 울음이 있다고 해서 그 다음 날도 울음이 계속 된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따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 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세가 온유한 자의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땅을 주십니다. 한편 온유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향해서 어떤 마음, 어떤 태도를
갖는가도 온유와 대단히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그가 온유한가 그렇지 않은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을 비난하거나 대적하거나 모함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 마음 태도가 어떠한가를 보면 온유한 자인지 아닌지 금방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를 두고 우리 자신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모세는 자신을 일컬어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합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민수기는 모세가 썼는데, 자기가 그 글을 쓰면서 자기를 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좀더 쉬운 말로 바꾸면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 중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라고 자화자찬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놓고 볼 때 민수기는 모세가 쓴 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두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세가 자기를 세상에서 제일 온유한 자라고 고백한 배경을 살펴보면 그가 그렇게 이야기한 것에 대해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모세는 43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던 사람들을 해방시켜서 수백 만명의 큰 무리를 이끌고 시내산에까지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지도자입니다. 그의 권위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확인된,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 권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세의 형님과 모세의 누님이 결탁을 하여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모세의 나이가 80이 약간 넘었다고 하면 그의 형님과 누이는 거의 100살 가까이 된 사람들입니다. 형제 중 하나만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고 높아지자 아마 질투가 생겼나 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형제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존경하는데 형제는 절대로 존경하지 않습니다. 형님 아론과 누님 미리암이 결탁을 해서 백성들 일부를 충돌질하여 인신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아마 이디오피아 사람의 혈통을 이어받았던가 봅니다. 성경에는 그녀를 구스인이라고 했습니다. 흑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이디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
살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인신공격을 했습니다. 벌써 결혼한 때가 몇 년 전입니까? 40년 전이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 나와서 새삼스럽게 공격을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그들은 '어떻게 모세만 지도자인가? 하나님이 우리도 만나주셨다. 우리도 하나님이 만나서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모세 혼자 절대 권력을 휘두를 이유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화가 낫겠습니까? 형제이기 때문에 더 화가 나고 괘씸한 것입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들을 입 다물게도 할 수 있고 벌을 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복수를 할 수 있는 힘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모세는 잠잠했습니다.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망신을 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억울함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심정으로 조용히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이런 태도를 두고 모세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세와 같이 처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온유한 자입니다.
이와 같이 온유는 화를 내는 것, 격분하는 것과 많이 연관을 시켜서 생각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원래 중용의 도를 많이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온유에
대해서도 똑 같이 말했습니다. '온유는 격렬한 분노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의 중간이다.' 즉, 미칠 정도로 화를 내는 것과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의 중간이 온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온유를 힘과 부드러움의 조화로 설명한 것 같습니다. 격분하거나 복수를 할 수도
있지만 자기 힘을 쓰지 않고 용서해 주는 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온유는 힘을 가진 자, 능력이 있는 자와 결부를 시켜서 설명합니다. 힘이 없어서 온유한 채 하는 것은 유약함일 뿐입니다. 그런 경우는 감동이 없습니다. '어린 애가 온유하다.'고 하면 별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온유하다.'고 하면 그것은 굉장히 진한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옥 목사가 온유하다.' 목사이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아무도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이 온유하다.'고 하면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온유는 힘과 많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잘못하면 폭발하기 쉬운 '분노'라는 강력한 폭탄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다스리고 길들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으면 언제든지 폭발해서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분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얼마나 잘 다스리는가, 얼마나 잘 조정하는가, 얼마나 균형을 잘 이루게 하는가에 따라서 온유한 자가 될 수도 있고, 온유하지 못한 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오랜 시간의 훈련과 자기 수양을 통해서 자기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화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는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적당히 조절하면서 얻을 수 있는, 수양하면서 얻을 수 있는 온유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철저하게 나를 다스림으로써 나타나는 온유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화를 내어야
합니까? 언제 화를 내지 말아야 합니까? 화를 내어도 온유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보면 온유하고 겸손한 자기 모습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셨습니다.' 꺾을 힘이 얼마든지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꺾지 않았습니다.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셨습니다.' 훅 불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끄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온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서 화를 내신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 저 촌놈'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경멸했을 때에도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신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 집에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할 때도 거지를 초대한 것처럼 전혀 예우를 해 주지 않고 박대를 당했지만,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신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일은 언제였습니까?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때 화를 내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경건하게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장사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경건하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보실 때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회초리를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 내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나를 위해 화를 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화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불의와 죄악을 보실 때 화를 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자리로 끌고 가는 것을 볼 때 그 불의를 참지 못하시고 '독사의
자식들아, 뱀의 새끼들아' 하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와 같은 태도를 우리가 가만히 배우고 묵상하면 온유한 사람으로서 화를 낼 때가 언제이고, 화를 내지 말아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화를 내어도 온유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화를 안 내도 온유가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옵니다. 정치개혁을 부르짖는 시민의 소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한국이 이래서는 안됩니다. 나라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몇몇이 지역주의는 더 이상 안 된다며 큰 소리치면서 오히려 지역주의를 자극하고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이런 풍토를 만들어 가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다 물러 가야 됩니다. 금권 선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분을 내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부패한 정치풍토를 놓고 분도 내지 못하고, 말도 한 마디 못 하며, 무엇인가 바로 해보자고 하는 일에 동참도 못하면 그 사람은 온유하지 못한 사람이요, 비겁한 사람입니다. 온유는 강합니다.
연세대학교 윤방부 교수가 공천을 받았다가 반납하면서 쓴 글을 보면서 정말 공감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낚시터에 낚시꾼들이 모이듯이 정치판에는 모리배 같은 정치꾼들이 몰려 다니면서 돈을 뜯어내고, 지방색을 가지고 표를 끌어 모아주고, 탈법을 해서라도 어떻게 하든지 당선만 시키면 된다고 하는 풍토를 만들기 때문에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더러운 판에 뛰어 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하지 말아야 됩니다. 비전을 가진 젊은이들이 정치계에 나가야 합니다. 뜻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계에 나가서 이 나라를 바로 잡아야 됩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가만 있으면 안됩니다. 가만 있으면 비겁한
것입니다. 말을 할 것은 해야 합니다.
투표에 꼭 참여하십시오. 투표를 기권한다면 아무 말 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 참석하셔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100% 다 참석하여 지방색을 떠나고, 여러 가지 지역주의를
떠나고, 학연을 떠나고, 금품을 수수했는지 안 했는지를 떠나서 가장 확실한 사람을
밀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가 갖는 힘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온유는 강한 것이지 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었다. 신은 죽었다.'고 한참 떠들면서 인기를 끌었던 철학자가 있습니다.
니체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차지 한다.'는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한 온유는 약자의 덕, 노예의 덕이지 강자의 덕은 아니라고 그는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한 자'는 세상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초인의 힘을 들고 나왔습니다. 초인의 정신을 이야기 했습니다. 슈퍼맨의 정신을 이야기 했습니다. 슈퍼맨의 정신을 가져야 이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꼴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나중에는 정신병에 걸려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철학자의 말을 맹신하고 실제로 정치계에 그것을 활용했던 악마가 하나 등장했는데 바로 히틀러입니다. 슈퍼맨의 정신을 그는 이어 받았습니다. 슈퍼맨의 정신으로 세계를 정복하자고 한 결과, 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이 한때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치르었습니까? 온유가 빠진 슈퍼맨의 정신은 저주 받은 폭력이요, 지옥 같은 파멸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온유를 비웃던 니체와 히틀러는 영원한 약자가 되어 버렸고, 패자로서 역사에 남아 있지만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은 영원한 강자요, 승자가 되어 경배와 찬양을 받고 계시는 것을 우리 모두가 봅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온유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온유한 자가 됩시다. 누구처럼 해야 합니까? 욥처럼 합시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 앞에서
온유한 자가 됩시다. 누구처럼 해야 합니까? 모세처럼 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화를
낼 것인지 안 낼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온유인지는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배운 것들을 작은 일에서부터 적용해야 합니다.
온유한 자가 되면, 제일 먼저 행복해지는 사람은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부터
내가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정에서 온유하지 못하면 제일 먼저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식구들입니다. 부인이 다칩니다. 아들이 다칩니다. 온유하지 못하면
주변에 있는 식구들이 다 다칩니다. 가정 상담자들의 말을 들으면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 사이에 제일 어려운 문제가 상존하는 분노라고 합니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남편의 마음에도 계속 남아있고, 아내의 마음에도 계속 떠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런 분노를 일컬어서 얼어 붙은 분노라고 말합니다. 얼어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잘 안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서로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상처를 주고 독한 말로 상대방의 감정을 뒤집어 엎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가 굉장히 살벌해 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그
마음에 모시고, 성령이 자기의 감정을 다스려주시고 통제하도록 전적으로 의뢰하면 성령의
손 안에서 그런 악한 것들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반드시 온유한 자로
만들어 주시는데, 만일 성령께 순종하지 아니할 경우에 온유는 저만큼 가 버리고 자기
감정과 분노만 쉴 사이 없이 끌어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이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온유가 부족하면, 우리의 감정, 우리의 분노는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온유해야 됩니다. 최근에 상담가인 모 교수에게 목사 사모님이
찾아와서 상담한 내용을 써 놓은 글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 사모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똑똑한 목사를 남편으로 둔 부인입니다. 이 남편이 명문대를 나왔는데, 처음에 얼마 동안
직장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날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이런 것이었
습니다. '시시한 놈들, 이 지저분한 놈들 하고는 도무지 일을 못하겠어. 시시한 놈들,
지저분한 놈들, 나까지 더러워지겠어.' 이처럼 직장 동료들을 날마다 비난하더랍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아내와는 의논도 하지 않은 채 신학교에 가더랍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명문대학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런 대로 괜찮은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잘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교인들로부터는 영성과 지성이 겸비한 지도자요, 또
세속적인 것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아주 정의로운 지도자라고 존경을 받고 있답니다.
그런데 왜 상담을 왔습니까? 사모의 말에 의하면 다른 사람은 남편을 어떻게 보든
간에 그가 밖에서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
성격이 너무 비판적이기 때문에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엄격해서 그런 인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슬픈 것은 자기 가정이 너무나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날씨는 쾌청이 아니라 늘 비가 오려는 듯 답답하기만 하답니다. 그래서 살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 됐는지, 어떻게 하면 되겠는지 가르쳐 달라고 상담을 청한 것입니다. 상담자인 이 교수가 대답했습니다. '사모님, 사회적인 성공은 주로 능력과 관계가 있지만, 가정적인 행복은 주로 성격과 관계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목회에 성공하려면 남다른 능력이 필요하지만, 목회자의 가정이 행복하려면 능력이 아니고 건강한 성격이 필요합니다. 성격을 잘 설명하는 우리나라 말로는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제 눈의 안경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칭찬의 안경, 비난의 안경입니다.
비난의 안경을 쓴 사람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도 항상 불행하기 마련이고, 칭찬의 안경을 쓴
사람은 어느 배우자를 만나도 행복하기 마련입니다. 사모님, 심리학에서 '거래 분석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나의 과거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변하면 상대방이 변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부터 변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상대방이 변합니다. 사모님이 변하면 목사님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사모님의 가정문제는 꼭 목사님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둘 다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다음에 어느 날 두 분이 다 오셔서 이 사무실에서 성격 검사를 좀 받으십시오.'
매우 정곡을 찌르는 지혜로운 상담 처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한 성격이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성격 중에 예수님이 교훈하신 온유한 것만큼 건강하고
좋은 성격이 어디 있습니까? 남편이 온유하면,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건강한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아내를 함부로 비난하고 비판합니까? 온유한 성격을 가진 아내가 남편 마음에 있는 분노를 자꾸 충동질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의 가정이지만 두 사람의 마음을 성령이 다스리도록 전적으로 의뢰하고, 기도하고,
그 분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여전히 상존하는
얼어붙은 분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을 날카롭게 쳐다보고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를 마음 편치 않게 생각하면서 계속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데
가정이 쾌청할 날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 가정에는 고등학교 1학년짜리 딸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려서 학교도 안 가고, 친구도 사귀지도 않고,
그냥 방구석에 쳐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아빠, 엄마와 함께 살면 아무리
목사 집안이라도, 또 그가 설혹 목회를 잘한다고 할지라도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대상은
식구들입니다. 행복을 잃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당신은 온유한 남편입니까? 당신은 성령의
손에 빚어지고 있는 온유한 아내입니까? 행복을 논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성격부터 먼저
따지십시오. 온유하면 주님이 기업으로 땅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총, 칼을 가지고 땅을
빼앗는다는 말이 아니고,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주의하십시오.
유업을 받는 것입니다. 유산을 받는 것입니다. 싸울 필요도 없고, 빼앗을 필요도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손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이 유산입니다. 온유한 자가 받는 것은 남의 것을 훔쳐 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온유하면 처음에는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땅을 얻게 됩니다. 온유한
아내는 남편을 땅으로 얻습니다. 할렐루야! 온유한 남편은 아내를 땅으로 얻습니다.
온유한 부모는 자녀를 땅으로 얻습니다. 가족들이 온유하면 그 가정에는 행복을
땅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기쁨과 만족을 땅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심령의 자유를
땅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을 비난하고 헐뜯는 이웃이 있습니까? 가족이
있습니까? 온유 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그 사람을 하나님이 땅으로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화를 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화를 내십시오. 악에 대하여는 화를 내십시오. 용기가 필요할
때는 누구보다도 우리는 강자로서 악과 대결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온유한
자입니다. 잠언 16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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