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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의 은혜(누가복음 6장 31절~38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인종 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미국 신사가 자기 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 있었습니다. 이 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신사는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잔" 주십사고 부탁했고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몹시도 배고프고 갈증이 난 인디언은 마지막으로 물 한 모금이라도 달라고 사정했지만 영국 신사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언에게 줄 물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인디언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에 영국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사냥개를 놓쳐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방향 감각도 없이 산 속에서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배고프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 그 때 그곳을 지나가던 인디언은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당장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여 후히 대접했습니다. 그 신사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언이 바로 얼마 전 자기가 박대했던 그 인디언이었습니다.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신사에게 인디언이 조용히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심은대로 거둔다는 이치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믿지 않고 거역하며 소홀히 여겨 많은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웃으로부터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이 대우가 바로 내가 심은 것이라고 믿을 수만 있다면 불평할 이유가 있습니까? 무엇을 심었든지 내가 심은대로 거두게 될 것임을 믿고 사는 자가 많을 때, 이 세상은 좀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첫째 하나의 심판입니다.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니까 말입니다. 심을 때는 내 마음대로 심지만, 거둘 때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대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친절을 심으면 친절이 거듭되고 강포를 심으면 강포함이 거듭되며, 자비를 심으면 자비를 거둡니다. 물론 질적으로만이 아니라 양적으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후하게 심으면 후하게 나타나고 인색하게 심으면 인색하게 나타납니다. 성경은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고 명백하게 문자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요 심판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심판의 계절이라고도 말합니다. 둘째, 이 진리는 미래적인 약속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심고 바로 내일 거두는 것은 아니니까요. 때로는 아주 먼 훗날에 거둘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곡식은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행위는 금년에 심었는데 십 년 후에 거둘 때도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심은 것에 대한 결과를 소홀히 여기게 됩니다. 오늘 죄를 짓고 당장 벼락을 맞는다면야 정신차리겠지요. 그러나 늦게 거두는 열매도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셋째, 이 진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무던히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넷째, 이 진리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수고는 수고대로 있어야 하겠지만 그 수고에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하지만 하늘로부터 햇빛과 비가 주어져야 하고, 바람이 알맞게 불어야 곡식이 거두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수고의 댓가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후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래전의 미국의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씨를 찾아가서 이천 불을 꾸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는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바턴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씨는 왠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이천 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 공황이 일어나 바턴씨는 완전히 파산이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씨를 찾아가 당신이 빚진 돈 7만 5천 불을 내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턴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분명히 빚진 돈 2천 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베풀어 준 그 은덕은 평생 갚지를 못합니다. 그 때에 2천 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스트로사는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여러분, 은덕과 사랑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나간 사람입니다. 어느 똑똑한(?) 어머니가 자녀에게 용돈을 줄 때마다 기록을 하면서 너희에게 투자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이가 용돈을 타가면서 십 년 후에 이자 많이 붙여서 갚아 드리겠다고 말하며 고마움은커녕 당당하게 받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갚을 것이니 미안하거나 고마울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얼마나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까? 이것이 과연 갚아지는 것입니까? 은덕과 사랑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오늘 본문은 심은대로 거둔다는 인과율 위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는 과거 지향적인 형과 미래 지향적인 형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으로는 우선 악을 심고 그 악의 싹이 날 것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도 심은대로 거둔다는 이 진리를 알고 있기에 어딘가에 남몰래 심어 놓은 악의 씨가 머리를 들고 돋아날 것이므로 무사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한 과거에 매여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작은 것이지만 선을 심고 기다리면서 불만을 가진 인간형이 있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했는데 왜 하나님은 복을 주시지 않는가, 또는 십일조를 바쳤는데 왜 장사가 잘 되지 않는가 하고 불만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쨌든 둘 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로, 피곤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율법적인 생이란 언제나 불안하거나, 불평 가운데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미래 지향적이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4가지 인생을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받고 미워하는 사람, 즉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둘째는 미움을 받고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빼앗겼으니 빼앗고 미움받았으니 미워하고 배신당했으니 배신한다는 식의 삶의 방법입니다. 셋째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받았으니 사랑하는 것으로, 일대 일입니다. 넷째는 미움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즉 빼앗기고도 베푸는 형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바로 네 번째의 인간형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빼앗겼다고 빼앗을 권리가 있는 줄 아십니까? 미움을 받았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미워할 권리는 없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으면서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수준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분문은 또 다른 의미에서 네 가지의 사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먼저 받고 주는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보통 흔히 있는 일로서 죄인들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받기를 바라고 주는 사람으로 보통 사람을 말합니다. 먼저 주는 것이므로 다소 주도권(initiative)이 있습니다. 그러나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는 것이므로 기회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와 악수를 하면서도 이 사람과 친해 놓으면 나에게 유리할까 아닐까를 생각하는 눈치 빠른 타입입니다.
인사를 하든 선물을 주든 간에 조건적이요 바라는 마음이 앞서 있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대체로 이런 종류의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셋째는 바라지 않고 베푸는 사람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도 바라는 것 없이 베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라고 베푸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보통 흔히 있는 일이므로, 바라지 말고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영국 웨일즈 지방의 아주 깊은 산골에 사는 한 소년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기에 그 어머니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 부근에는 병원도 없었습니다. 걱정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5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빗속을 뚫고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를 붙들고 사정했습니다. 의사는 괴로웠습니다. 의사된 것이 윈망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돈만 보고 의사 노릇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빗속을 달려가 그 아이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치료에 큰 효험이 있었습니다. 그 후 의사는 그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로이드 존 경이라는 영국이 낳은 유명한 정치가가 재무상으로 등단하여 축하를 받게 되었습니다. 축하연이 벌어진 자리에 그 의사도 참석을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 재무상은 그 옛날 자기가 치료해 주었던 바로 그 소년이 아니겠어요? 의사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 당시 억지로 치료해 준 그 선한 일이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결과로 나타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의 작은 선행이 뜻밖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바라는 바가 없이 베푸는 일에는 후에 엄청난 열매가 맺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러 있을 수만 없습니다.
넷째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께 받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베풀 수 있는 자의 입장에 대해 감사하며 베푸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본문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사람들에게 베풀고, 혹은 사람에게 베풀면서 하나님께 다시 받는 이 이치가 보상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것을 줍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크게 보십니다. 주님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줄 때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순수한 동기에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풀어질 때에는 하늘의 상이 있겠다고 엄청난 보상의 진리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 동기가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주고 인간으로부터 받고, 오늘 주고 내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단순한 인과율에 불과합니다만 이웃에게 베풀고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땅에서 베풀고 하늘에서 받으며 작은 것으로 베풀고 큰 것으로 받는 그 이치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보상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남으로부터 대접받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이웃이나 친지들이 여러분께 어떻게 대해 주기를 바랍니까? 사람마다 공통적으로 그들의 이웃으로부터 바라는 바가 있는데 심리학자의 분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상대방이 정직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상관되는 사람은 다 네게 정직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즉 사랑받기를 바라고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신실해 주기를 바랍니다. 오늘 한 약속을 끝까지 지켜 주기를 바란단 말입니다. 나는 비록 잘 지키지 못해도 상대방은 꼭 지켜 줄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인내해 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성급하면서도 상대방은 참아 주기를 원합니다. 이상 네 가지가 인간이 남에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욕구에 대해 "네가 먼저 그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네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요 심판이며 보상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입니다. 자비를 베풀라.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자비하심을 받을 것이요, 용서를 베풀라.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하심을 받을 것이고, 은혜를 베풀라.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것이라. 먼저 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은혜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정말 귀한 복음입니다.
끝으로 본문에서는 전원적인 풍경 같은 귀한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요즘은 물건을 살 때에 저울에 달아서 주고받으니 이런 광경은 볼 수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곡식을 팔 때에 주로 말이나 되로 되어서 팔았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본 사람들은 경험한 일입니다만 쌀을 되로 될 때에 대단히 기술적으로 합니다. 한 되 수북하게 담아서는 굴대로 살짝 굴리되 끝까지 굴리지 않고 한쪽 끝은 수북한 채로 약간 남겨서 주는데, 집에 와서 다시 재어 보면 쑥 내려가곤 합니다. 되를 되는 기술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즉 곡상(斛上)으로 주겠다는 말입니다. 곡상이란 옛말로서 그릇이 넘치게 준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후한 인심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후히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 천 원을 달라는 사람에게 이천 원을 준 경험이 있습니까? 오 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십 리를 가 보았습니까?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준 경험이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만사를 달라는 것에서 더 주기는커녕 깎아서 주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천 원을 달라고 하면 오백 원을 주기가 십상입니다. 하나님은 흔들고 눌러서 넘치도록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의 은혜입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진리를 심판으로 받으며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심은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은혜의 보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축복된 사람입니다. 나의 작은 선행이 하늘로부터 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며 그렇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보상의 은혜(누가복음 6장 31절~38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인종 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미국 신사가 자기 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 있었습니다. 이 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신사는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잔" 주십사고 부탁했고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몹시도 배고프고 갈증이 난 인디언은 마지막으로 물 한 모금이라도 달라고 사정했지만 영국 신사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언에게 줄 물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인디언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에 영국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사냥개를 놓쳐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방향 감각도 없이 산 속에서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배고프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 그 때 그곳을 지나가던 인디언은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당장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여 후히 대접했습니다. 그 신사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언이 바로 얼마 전 자기가 박대했던 그 인디언이었습니다.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신사에게 인디언이 조용히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심은대로 거둔다는 이치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믿지 않고 거역하며 소홀히 여겨 많은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웃으로부터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이 대우가 바로 내가 심은 것이라고 믿을 수만 있다면 불평할 이유가 있습니까? 무엇을 심었든지 내가 심은대로 거두게 될 것임을 믿고 사는 자가 많을 때, 이 세상은 좀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첫째 하나의 심판입니다.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니까 말입니다. 심을 때는 내 마음대로 심지만, 거둘 때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대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친절을 심으면 친절이 거듭되고 강포를 심으면 강포함이 거듭되며, 자비를 심으면 자비를 거둡니다. 물론 질적으로만이 아니라 양적으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후하게 심으면 후하게 나타나고 인색하게 심으면 인색하게 나타납니다. 성경은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고 명백하게 문자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요 심판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심판의 계절이라고도 말합니다. 둘째, 이 진리는 미래적인 약속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심고 바로 내일 거두는 것은 아니니까요. 때로는 아주 먼 훗날에 거둘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곡식은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행위는 금년에 심었는데 십 년 후에 거둘 때도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심은 것에 대한 결과를 소홀히 여기게 됩니다. 오늘 죄를 짓고 당장 벼락을 맞는다면야 정신차리겠지요. 그러나 늦게 거두는 열매도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셋째, 이 진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무던히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넷째, 이 진리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수고는 수고대로 있어야 하겠지만 그 수고에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하지만 하늘로부터 햇빛과 비가 주어져야 하고, 바람이 알맞게 불어야 곡식이 거두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수고의 댓가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후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래전의 미국의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씨를 찾아가서 이천 불을 꾸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는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바턴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씨는 왠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이천 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 공황이 일어나 바턴씨는 완전히 파산이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씨를 찾아가 당신이 빚진 돈 7만 5천 불을 내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턴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분명히 빚진 돈 2천 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베풀어 준 그 은덕은 평생 갚지를 못합니다. 그 때에 2천 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스트로사는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여러분, 은덕과 사랑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나간 사람입니다. 어느 똑똑한(?) 어머니가 자녀에게 용돈을 줄 때마다 기록을 하면서 너희에게 투자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이가 용돈을 타가면서 십 년 후에 이자 많이 붙여서 갚아 드리겠다고 말하며 고마움은커녕 당당하게 받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갚을 것이니 미안하거나 고마울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얼마나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까? 이것이 과연 갚아지는 것입니까? 은덕과 사랑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오늘 본문은 심은대로 거둔다는 인과율 위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는 과거 지향적인 형과 미래 지향적인 형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으로는 우선 악을 심고 그 악의 싹이 날 것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도 심은대로 거둔다는 이 진리를 알고 있기에 어딘가에 남몰래 심어 놓은 악의 씨가 머리를 들고 돋아날 것이므로 무사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한 과거에 매여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작은 것이지만 선을 심고 기다리면서 불만을 가진 인간형이 있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했는데 왜 하나님은 복을 주시지 않는가, 또는 십일조를 바쳤는데 왜 장사가 잘 되지 않는가 하고 불만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쨌든 둘 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로, 피곤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율법적인 생이란 언제나 불안하거나, 불평 가운데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미래 지향적이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4가지 인생을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받고 미워하는 사람, 즉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둘째는 미움을 받고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빼앗겼으니 빼앗고 미움받았으니 미워하고 배신당했으니 배신한다는 식의 삶의 방법입니다. 셋째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받았으니 사랑하는 것으로, 일대 일입니다. 넷째는 미움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즉 빼앗기고도 베푸는 형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바로 네 번째의 인간형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빼앗겼다고 빼앗을 권리가 있는 줄 아십니까? 미움을 받았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미워할 권리는 없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으면서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수준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분문은 또 다른 의미에서 네 가지의 사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먼저 받고 주는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보통 흔히 있는 일로서 죄인들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받기를 바라고 주는 사람으로 보통 사람을 말합니다. 먼저 주는 것이므로 다소 주도권(initiative)이 있습니다. 그러나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는 것이므로 기회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와 악수를 하면서도 이 사람과 친해 놓으면 나에게 유리할까 아닐까를 생각하는 눈치 빠른 타입입니다.
인사를 하든 선물을 주든 간에 조건적이요 바라는 마음이 앞서 있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대체로 이런 종류의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셋째는 바라지 않고 베푸는 사람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도 바라는 것 없이 베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라고 베푸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보통 흔히 있는 일이므로, 바라지 말고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영국 웨일즈 지방의 아주 깊은 산골에 사는 한 소년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기에 그 어머니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 부근에는 병원도 없었습니다. 걱정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5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빗속을 뚫고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를 붙들고 사정했습니다. 의사는 괴로웠습니다. 의사된 것이 윈망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돈만 보고 의사 노릇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빗속을 달려가 그 아이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치료에 큰 효험이 있었습니다. 그 후 의사는 그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로이드 존 경이라는 영국이 낳은 유명한 정치가가 재무상으로 등단하여 축하를 받게 되었습니다. 축하연이 벌어진 자리에 그 의사도 참석을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 재무상은 그 옛날 자기가 치료해 주었던 바로 그 소년이 아니겠어요? 의사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 당시 억지로 치료해 준 그 선한 일이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결과로 나타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의 작은 선행이 뜻밖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바라는 바가 없이 베푸는 일에는 후에 엄청난 열매가 맺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러 있을 수만 없습니다.
넷째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께 받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베풀 수 있는 자의 입장에 대해 감사하며 베푸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본문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사람들에게 베풀고, 혹은 사람에게 베풀면서 하나님께 다시 받는 이 이치가 보상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것을 줍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크게 보십니다. 주님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줄 때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순수한 동기에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풀어질 때에는 하늘의 상이 있겠다고 엄청난 보상의 진리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 동기가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주고 인간으로부터 받고, 오늘 주고 내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단순한 인과율에 불과합니다만 이웃에게 베풀고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땅에서 베풀고 하늘에서 받으며 작은 것으로 베풀고 큰 것으로 받는 그 이치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보상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남으로부터 대접받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이웃이나 친지들이 여러분께 어떻게 대해 주기를 바랍니까? 사람마다 공통적으로 그들의 이웃으로부터 바라는 바가 있는데 심리학자의 분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상대방이 정직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상관되는 사람은 다 네게 정직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즉 사랑받기를 바라고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신실해 주기를 바랍니다. 오늘 한 약속을 끝까지 지켜 주기를 바란단 말입니다. 나는 비록 잘 지키지 못해도 상대방은 꼭 지켜 줄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인내해 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성급하면서도 상대방은 참아 주기를 원합니다. 이상 네 가지가 인간이 남에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욕구에 대해 "네가 먼저 그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네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요 심판이며 보상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입니다. 자비를 베풀라.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자비하심을 받을 것이요, 용서를 베풀라.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하심을 받을 것이고, 은혜를 베풀라.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것이라. 먼저 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은혜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정말 귀한 복음입니다.
끝으로 본문에서는 전원적인 풍경 같은 귀한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요즘은 물건을 살 때에 저울에 달아서 주고받으니 이런 광경은 볼 수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곡식을 팔 때에 주로 말이나 되로 되어서 팔았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본 사람들은 경험한 일입니다만 쌀을 되로 될 때에 대단히 기술적으로 합니다. 한 되 수북하게 담아서는 굴대로 살짝 굴리되 끝까지 굴리지 않고 한쪽 끝은 수북한 채로 약간 남겨서 주는데, 집에 와서 다시 재어 보면 쑥 내려가곤 합니다. 되를 되는 기술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즉 곡상(斛上)으로 주겠다는 말입니다. 곡상이란 옛말로서 그릇이 넘치게 준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후한 인심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후히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 천 원을 달라는 사람에게 이천 원을 준 경험이 있습니까? 오 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십 리를 가 보았습니까?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준 경험이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만사를 달라는 것에서 더 주기는커녕 깎아서 주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천 원을 달라고 하면 오백 원을 주기가 십상입니다. 하나님은 흔들고 눌러서 넘치도록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의 은혜입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진리를 심판으로 받으며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심은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은혜의 보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축복된 사람입니다. 나의 작은 선행이 하늘로부터 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며 그렇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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