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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나되게 하신 은혜(고린도전서 15장 1절~11절)/곽선희

by 【고동엽】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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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나되게 하신 은혜(고린도전서 15장 1절~11절)

 

서양사람들은 유달리 개를 좋아합니다. 어쩌다가 서양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유숙을 하든가 하게 되면, 개를 지나치게 위하는 그들의 태도가 동양사람인 저로서는 영 못마땅할 때가 있습니다. 우선 방안에서부터 개 냄새가 지독하게 납니다. 개 먹이를 따로 만들어 준다든지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야 어찌하겠습니까마는, 때마다 목욕을 시키고, 일삼아 미장원에 데리고 다니고, 나들이 때에도 자동차에 모시고 다닙니다. 심지어는 개 보험도 들고 유산까지 물려주는가 하면, 죽은 다음에는 무덤에다 비석까지 세워 줍니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개는 역시 개로 취급해야지 어떤 때에는 사람 이상으로 대접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사람의 등급이 떨어지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개를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못마땅해서 가끔 물어봅니다마는 대답은 언제나 비슷합니다. "개는 배신을 할 줄 모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친구는 고사하고 자식도 키워 놓으면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많은데, 개는 은혜를 압니다." 깜짝 놀랄 대답입니다. 흔히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을 가리켜 '개만도 못하다'고 매도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기준은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사람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은혜라는 것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안다는 것은 거저 받은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거저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사의 사람되는 기본 조건입니다. 바로 그 은혜의 신학적 의미를 아는 데에 그리스도인다움이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 성령의 감화하시는 은혜----이런 것을 알고 감격하고, 그리고 그 은혜에 답하려는 삶을 살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다. 신학적으로 좀더 깊이 있게 말씀드리자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는 은혜 받았다' '나는 은혜로 산다'----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심령은 구원받지 못한 심령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안다는 것은 무자격한 가운데 은혜를 받고, 죄인이면서 구원을 받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데 사랑을 받는다 하는 감격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이 바로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빈은「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수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마는, 그 많은 저서에 흐르고 있는 칼빈의 사상을 단적으로 말하라 하면 단 두 마디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이요, 둘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사람이란 은혜를 생각조차 할 수 없게 완전히 타락해서 무자격하게 버려진 존재인데, 여기에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강권적인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임해서,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칼빈이 이해한 성경입니다. 이와 같은 안목으로 성경을 볼 때, 성경은 전적으로 이 두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이 생각할 때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이지, 여기에 내 공로란 없습니다. 내 노력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형제도 성도간의 교제도 다 은혜로 알고 감사하게만 받아들여집니다. 어거스틴도 그의「고백록」에서 저 유명한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시여, 나의 모든 행위와 나의 모든 생각 가운데에 죄 아닌 것이 어디 있더이까?' 나의 모든 것이 죄뿐임을 깨달은 고백입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마침내, 하나님의 경륜하시는 모든 일은 은혜 아닌 것이 없더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란 율법주의에 반대되는 용어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율법적 관계에서 벗어나 은혜의 관계로 구원받은 그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된 관계에서 자녀된 관계로 바꾸어진 은혜스러움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그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미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는 은혜를 받으려고 수고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나된 것이다." 여러분, 이런 감격과 기쁨을 맛보아 보셨습니까?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바울 그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터득하고 이 은혜를 깨닫기만 하며, 다시는 아무런 원망도 불평도 없는 승리의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지식도 내 건강도 내 가정도 내 직장도, 그 무엇도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은혜 안에 내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저서에「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하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 앞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긍정(自己肯定)이 곧 존재의 용기(존재로의 용기)라고 하는 것이 그 책의 주제(主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납하시기에 그 용납하심을 내가 받아들일 때에 그 안에 '나'라고 하는 존재의 긍정이 있고, 이 자기 긍정 안에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 용기는 내 지혜나 내 경험이나 내 능력, 또는 내 도덕적인 의(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 없는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그 용납하심을 내가 받아들일 때에 이루어지는 자기 긍정, 즉 하나님이 긍정하실 때에 그 긍정을 받아들여서 오는 내 존재의 긍정, 그 안에 있는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용기의 근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단순히 감상적인 기분으로나, 어떤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나, 감정적인 기쁨으로나, 단순한 용기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란 곧 능력입니다. 능력도 무서운 능력, 권능, 파워(power)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나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내가 있기 전에 은혜가 있었고, 내가 아직 은혜를 모를 때에 그는 이미 내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은혜란 다만 지금 깨닫고 있을 뿐입니다. 깨달음이 지금이지 은혜의 사건은 벌써 오래 전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짖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은혜라고 고 백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 보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고 말합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납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더라면 선교사가 못될 뻔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외국땅 낯선 곳에서 디아스포라(diaspora)로 살아가는 부모 슬하에서 태어납니다. 이리하여 그는 헬라 문화에 능통하고 히브리 문화를 함께 익히게 됩니다. 헬라 철학과 히브리 종교에 다 익숙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자기를 이렇게 택정하신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선교적 경륜을, 그 은혜를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가 생각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그 오래 참으심입니다. 바울이 교만할 때에 참아 주셨습니다. 방종할 때에, 스데반을 죽일 때에,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갈 때에도 하나님은 계속 참아 주셨습니다. 정말 오래오래 참으셨습니다. 여러분, 만일에 하나님께서 참지 않으시고 죄의 현장에서 즉결(卽決)로 사람을 내려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오늘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애(仁愛)하심과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것을 크신 은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은 존 뉴턴(John Newton)이 지은 것입니다. 그는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생사람들을 잡아다가 백인 사회에 가서 팔아먹는 짓을 일삼던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그 감격을 노래한 것이 이 찬 송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오래 참으신 하나님, 많이 참으신 하나님, 너무도 오래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이렇게 감사하면서 평생 복음을 전하다가, 뉴턴은 기쁨으로 주 앞에 갔습니다.

여러분,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에, 거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오래오래 기다리고 많이 참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왜 나 같은 것을 부르셨을까? 이 그릇되고 덜된 작은 나를 충성 되이 여기시고 직분을 맡기시다니…… 바울은 그 은혜에 끝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에 사양(辭讓)이 없어야 합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자격을 주시고, 아무 쓸모 없는 자를 쓸모 있다 인정해 주셔서 직분을 맡기십니다. 일을 맡는다는 것, 오늘도 일거리가 있다는 것, 직장이 있고 건강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엄청난 은혜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한테 그렇게도 많이 속으시고 그렇게도 많이 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나를 믿으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계십니다. 어는 장로님 한 분이 사업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분의 친구 되시는, 연세가 좀 높으신 장로님이 그분에게 사업 자금을 대어 줍니다. 그러나 또 실패를 합니다. 또 대어 줍니다. 그렇게 세 번 네 번 거듭 대어 주시는 것을 보고, "그 장로님, 사업 수완이 없으셔서 번번이 실패하시는 것 같은데 어찌하시려고 자꾸 대어 주십니까?" 하고 걱정을 했더니 그 나이 많으신 장로님은 "이미 들어간 것 도로 찾으려면 저 사업을 일으켜야지요"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이 투자하셨습니다. 그리고 손해만 보아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투자하신 것을 도로 찾으시기 위하여, 베푸시는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부득이 오늘도 계속 투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과 지혜와 기회----이런 은혜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충성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울은 또,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 데 대하여 이것을 은혜로 받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고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삼층천(三層天)에 올라가 하늘나라 구경까지 한 사람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영광을 본 사람입니다.

이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감당을 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것,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는 것,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은혜 되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자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의 영을 주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바울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은혜는 겸손케 하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은혜 가운데 무슨 은혜가 제일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 가운데 으뜸가는 복은 겸손의 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배웠으되 겸손을 못 배웠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가졌으되 겸손의 덕을 가지 지 못했으면 그 사람은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입니다. 나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엄청나게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할 때에 은혜를 받고, 은혜를 보전하고, 은혜를 감당하고, 은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겸손은 시작도 끝도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겸손이야말로 매스터 카드(master card)입니다. 복에 대한 매스터 키(master key)가 겸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이 겸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즉 육체의 가시 곧 사단(satan)의 사자(使者)를 주신 것입니다. 그 가시가 그를 찔러서 그로 하여금 겸손케 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고린도후서 12장 7절의 말씀입니다. 바울 그 자신보다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더 잘 아십니다. 조금 나아졌다하면 교만하고, 조금 틔었다하며 게을러지고, 조금 높아졌다하면 오만불손해지는 것이 보통 사람입니다.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야 겸손하지, 그렇지 않고는 겸손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인 거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동차 1급 정비사인 미국 청년 하나가 하루는 낡은 자동차 한 대를 사서, 딴에는 손수 정비를 잘 해 가지고 제 기술에 잔뜩 자만하면서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길 가운데에서 덜컥 고장이 났습니다. 보넷을 열어놓고 이것저것 손대면서 엔진을 다시 걸려고 시도를 해 보지만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웬 노인이 지나가다가 차를 세우고는 청년의 어깨너머로 잠시 엔진을 들여다보더니 말합니다.

"여보 젊은이, 내가 좀 도와줄까?" 그런데 청년은 한마디로 면박을 줍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내가 이래도 일급 정비사란 말입니다, 일급 정비사!" 그래놓고는 다시 열중을 해서 고쳐 보려고 합니다마는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 말았는데, 노인이 들여다보더니 엔진을 탁탁 치고는 시동을 걸라고 말합니다. 청년이 고래를 갸우뚱거리면서 시동을 걸어 보니 '부릉!' 하고 엔진이 돌아가요. 무안해진 청년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대체 누구십니까?" "나요?" 하고 노인이 대답합니다. "나는 이 자동차를 만든 회사의 사장인 헨리 포드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알든, 무엇을 가졌든, 무엇이 되었든, 아무도 교만할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 은혜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뽐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겸손케 하시는 은혜로 우리를 낮추십니다. 때로는 육체의 가시로, 때로는 막대기로 쳐서라도 떨어뜨려서 내 발이 땅에 닿도록 하십니다. 발이 땅에 닿고 무릎을 꿇릴 때에 가서야 우리는 진실을 찾고 겸손해집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겸손해져야 합니다.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떨어낼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즉 겸허(謙虛)의 경지를 말합니다. 흔히 젊은 부부간에 문제가 있어 찾아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별일도 아닌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야기해 줍니다. "한 계단만 내려서 보시지요. 그러면 별일도 아닐 텐데……" 문제는 이 해결책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데 있습니다. 겸손하고 진실하면 해결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겸손케 하십니다. 기어이 원하시는 수준으로까지 겸손케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나를 겸손케 하시는 은혜는 은혜 중의 큰 은혜입니다.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입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무엇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내가 하나님께 드리게 될 선물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사는 인생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위해서 우리는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실망도 절망도 낙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은혜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아픔과 시련도 또다시 나를 겸손케 하시는 은혜임을 알고, 그리고 은혜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게 받아들입시다.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십시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제가 대학 학장으로 있을 때에 같이 있던 비서 아가씨가 심장이 좋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그에게 결혼은 하지 않는 게 좋지만, 정 결혼을 하더라도 아기는 갖지 말라고 주의를 줬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아가씨는 결혼을 했고, 또 곧 아기까지 가졌어요. 어떻게 하려고 아기를 가졌느냐며 걱정을 하니까, 죽을 각오하고 아기 하나 낳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윽고 아기를 낳았고, 그 뒤로도 별탈 없이 우리 교외에 출석하다가 지금은 미국에 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아기를 안고 여기 당회장실에 인사를 왔는데, 아기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마치 남들은 못 낳는 아기를 낳기라도 한 것처럼 유난스러웠습니다. 그럴만도 하지요. 목숨과 바꿀 각오까지 하고 낳았으니까 말입니다. 그야말로 은혜이거든요. 아기를 낳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탈없이 낳아서 잘 키우며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는 남편을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남편은 아내를 은혜로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부모도 은혜요, 자식도 은혜요, 이웃도 은혜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요, 하나님의 은혜로다---이것을 알고 감사하며 살 때에 영원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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