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스스로 성결케 하라(여호수아 3장 1절~6절)

by 【고동엽】 2023. 2. 19.
목차로 돌아가기

스스로 성결케 하라(여호수아 3장 1절~6절)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과 그 성취의 역사로 충만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약 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약속하신 바를 약속하신대로 이루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모든 역사의 맥락(脈絡)입니다.

사람에게는 이상(理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을 현실화하려고 하는 실제적인 노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차원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상이 없는 사람입니다. 많은 실패를 거듭하였기 때문에 숫제 이상을 가지는 것마저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이상과 현실을 아예 별개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이루지 못할 소원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이상은 이상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따로 생각합니다.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저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거꾸로 말합니다.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기라도 해라'---쳐다보기라도 하여야 희망이 있습니다. 쳐다도 안 본다면 오를 마음조차 먹어보지 못하고 맙니다. 쳐다보아야 언젠가는 오를 때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흔히 너무도 현실에만 집착한 나머지 아예 이상을 포기해 버리거나 아니면 이상을 무지개 보듯 멀리 두고 마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세 번째는, 이상을 현실로 옮기려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으로는 두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 현실화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씁니다. 있는 지혜와 노력과 힘, 심지어는 폭력까지도 서슴없이 다 동원합니다. 이른바 혁명이라는 방법이 이 경우에 속합니다. 무슨 수를 쓰든지 나름의 이상적인 세계 혹은 이상에 도달하고 말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상은 고사하고 현실보다도 더 못한 처지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을 현실로 바꾸려는 사람의 두 번째 스타일은, 이상을 바라고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라고 나아가되 은총적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기다릴 줄을 압니다. 무던히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 그 시간, 그 방법, 그 역사(役事)를 끝까지 기다려서 약속을 받고, 그래서 성취를 보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중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그 약속이 곧 이상이 되겠습니다. 이 이상을 현실화하고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또한번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정적(靜的)인 기대가 아니라 동적(動的)인 인내로써 끈기 있게 기다려 나가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그리고 성취하는 그러한 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약속'이라는 말을 요즈음의 신학적 용어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고 합니다. 마지막 목표, 종착점---이 오메가 포인트를 우리는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순간순간 새롭게 기억하고 그리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오랜 세월 전승(傳承)되어 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한 추장이 종족을 잘 다스려 오다가 나이 많아 세상 떠날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아들이 셋인데, 그 중의 한 아들에게 추장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합니다. 어느 아들이 추장감일까? 테스트를 하기 위하여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섰습니다. 종일토록 험한 산길을 탔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숨도 찼습니다.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습니다. 지칠 때가 되고도 남았지만 늙은 추장은 도중에 쉬는 일 한번 없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윽고 깊은 산속 어느 지점에 이르자 추장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한 그루 높은 나무가 있고 그 꼭대기 나뭇가지에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드디어 테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맏아들에게 묻습니다. "네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 "푸른 하늘과 나뭇가지가 보입니다." "너는 낙제다." 다시 둘째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이 보이느냐?" "나뭇가지와 거기 앉아 있는 독수리가 보입니다." "네게도 실망이다." 마지막으로 막내한테 물어 봅니다. "네 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독수리의 가슴팍이 보입니다." "너는 됐다! 활을 쏘아라." 막내는 시위를 당겼습니다. 추장은 막내를 보고 선언합니다. "네가 추장이다."

세상이 몇백 번 변하고 뒤바뀌는 한이 있어도 우리 앞에 있는 약속의 땅 오메가 포인트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절대로 흐트러져서는 안 됩니다. 한순간이라도 흐트러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려서 기어이 그 약속의 땅에 다다라야 할 것입니다. 남은 것은 존재의 문제입니다. 거기 들어가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십니다. 하나님 주도적(主導的)인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뜻하고 스스로 힘을 모아 출애굽한 것이 아닙니다. 노예가 된 사람은 몸만 노예이지 않습니다. 정신까지 노예입니다. 출애굽이니 자유니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건지실 때에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 너희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그 땅에 올라가도록 하여 주마." 이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보인 그들의 행위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거스릅니다. 이러한 불 신앙적인 형태들을 보아하면 얼마나 괘씸합니까?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저 "약속 취소다!" 하고 말 것 같습니다. 정말 한심하고 딱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십니다. 당신이 정하신 이 역사는 반드시 이루십니다. 저들이야 어떠하든 당신의 약속을 능동적으로 창조적으로 지키십니다. 자격으로 보아서야 저들은 도저히 가나안에 들어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을 길이 참으시면서 훈련해 가지고 이 종말론적인 오메가 포인트에 다다르도록, 마침내는 요단 강 건너 약속의 땅에 이르도록 경륜(經綸)하시고 이끄시고 성취하십니다. 문제는 그 곳에 들어갈 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40년을 두고 기다려 오던 날입니다. 그 많은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힘입어서 마침내 요단 강을 건너가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복된 날입니까? "어서 가나안에 들어가야 되겠는데, 왜 이토록 광야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달이 나서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당신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반드시 차야만 성취하십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 보면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 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貫盈)치 아니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죄가 차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관영'이라는 말은 꿰미가 다 꿰어져서 꽉 찼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일곱 족 속의 죄가 아주 꽉 차서 더는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십니다. 이를테면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을 내려 멸망시키신 그 순간이 바로 죄가 관영한 순간입니다. 저들의 사악과 우상 숭배와, 저들의 행음과 타락이 더 갈 데 없이 차고 넘쳐 하늘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남김없이, 하나도 남김없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교육적인 의미를 두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하여 저들을 섬멸하게 하십니다. "너희 이스라엘도 조심하라.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동안 너희도 범죄하면 이같이 되느니라"---이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가나안에 유황불을 내리시는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로 직접 쳐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안에 있는 것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없애라고 명하십니다. 그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은총의 날이지만,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그처럼 혹독한 심판의 날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같은 사건에서 두 가지 역사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연설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다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닙니다.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역사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거기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가 당신은 용감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의 앞에 비굴하지 않았는가, 옳은 일을 피하는 기회주의적인 인간은 아니었는가, 깊이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당신은 현명한 판단을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참으로 성실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넷째가, 당신은 얼마나 헌신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8․15해방이 되던 그 해에, 아직 어렸을 때입니다 마는, 참 감동적인 장면을 목도했습니다. 소위 옥중성도(獄中聖徒)라고 해서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하여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수고하다가 감옥에 들어가셨던 분들이, 6년 7년 영어(囹圄)생활 끝에 옥문이 열리면서 산 순교자로 나왔습니다. 그 중에 집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신학교는 문 앞에도 못 가 보신 분이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 열심히 전도사 일을 보시다가 잡혀가셨던 분입니다. 이 분이 출옥하시자 교회로 나와 부흥회를 인도하시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하얀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작달막한 분이 "죽도록 충성하라"고 외치시는데, 그 모습이 제 눈에는 천사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소위 신사참배(神社參拜)하라는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그 우상 앞에 꾸벅꾸벅 절을 하는 욕된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니까 부끄러움을 못 이겨 사표를 내고 멀리멀리 가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날 한 시에 이처럼 상반되는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입니다. 거룩한 역사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얼마나 헌신했던가, 최선을 다했던가에 따라서, 주의 날은 영광의 날이 될 수도 있고 저주와 징벌의 날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요단 강을 건너가게 하신 그 순간이 이스라엘에게는 크나큰 영광의 순간이지만, 그 영광에 동참하지 못하고 마는 부끄러운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일껏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도 끝내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만 사람들이 많았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호수아 2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하셔서 여호수아 장군을 권세 있게 하신 다음에 요단 강을 건너게 하시는데, 지킬 것 세 가지를 일러 주십니다.

첫째, "법궤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상징하는 궤(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상입니다. 오늘로 말한다면 바로 '말씀의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법궤를 따르라 하심은 말씀을 따르라 하심입니다.

둘째, "제사장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멘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수 3:3)." 따르되 이천 규빗쯤 상거(相距)를 두며, 함부로 가까이 다가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디로든지 그렇게 따라만 가라 하십니다.

셋째,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수 3:8)"---역사가들은 이 때가 우기(雨期)였 다고 말합니다. 요단 강물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닙니다. 그런 요단 강이 우기가 되면 홍수가 지고 범람한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때에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깊이 생각을 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기다렸다가 가물 때나 물이 적을 때에 건너가면 쉬울 터인데, 하필이면 홍수가 지는 우기를 타서 건너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시고 지시하신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기를 타서 기적적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도 더욱 신령하게 정신을 차리고, 가나안 7족속도 이 거룩한 역사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더 읽어나가 15절 이하를 보십시다.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여러분, 이런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홍해를 기적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요단 강에서도 이토록 장엄한 역사를 펼치십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수 4:24)."

이제 문제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의 자격입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기사(奇事)를 행하시기 하루 앞서 "너희는 스스로 성결(聖潔)케 하라(수 3: 5)"고 분부하십니다. 지난날의 죄스러운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회개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인 줄로 압니다. 출애굽 이전과 이후에 걸쳐 타성화된 모든 죄와 모든 불 신앙적인 것을 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40년에 걸쳐 때묻은 것을 모두 씻어내라는 것입니다. 앞에 놓인 미래가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과거는 모두 묻어 버리고 깨끗이 거듭나라는 말씀입니다. 요단 강 건너갈 사람들, 이렇게 과거로부터 완전히 성결해야 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결혼을 해서 살고 있는 부인이 옛날에 좋아하던 애인 사진 몇 장 지니고 있다가 그것 때문에 큰 소동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결치 못했습니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롭게 요단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성결케 하라----이제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복잡한 생각 다 지워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끄시는 대로 어디든지 언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 말씀에만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너의 행할 길을 알리니……(수 3:4)"----순종이 선행 조건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우왕좌왕 천방지축으로 갈 짓자 걸음을 걸었습니다마는, 이제는 깨끗하게 순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기로, 그렇게 맹세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사욕(私慾)을 버려야 합니다. 모처럼 요단 강을 건너가 놓고도 사욕을 못 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쟁하다 말고 눈앞에 금덩이가 번쩍번쩍하니까 그만 눈이 뒤집혔어요. 아간이라는 사람이 금덩이 하나, 은 2백 세겔, 좋은 외투 한 벌을 땅에 감추어 놓았다가 결국은 비참하게 처벌을 받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 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수 7:1)." 성결케 하라고 하셨는데 성결치 못했어요. 아직도 탐욕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는 이 마당에 금덩이가 돌멩이로 보여야지요. 옷 한 벌이 한낱 지푸라기로 보여야지요. 이 아간이라는 사람 참 정신없는 사람입니다. 탐욕, 사사로운 생각, 이기적인 마음 다 버리고 깨끗해져야 했습니다.

성결케 하라는 것은 불가피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원적(自願的)이기를 요구합니다. 빼앗기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마지못해 성결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 보면 임종을 앞두었을 때에야 돈도 필요 없고 명예도 필요 없다, 이럽니다. "이제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하지요. 끝장에 이르렀으니 그럴 수밖에요. 이것은 성결이 아닙니다.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성결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끊고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서 사명을 받을 때, "너의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 신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혈기를 못 버렸습니다. 40년 동안을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이 혈기 하나를 끝까지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요단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아간은 요단 강을 건너고도 성결에 결(缺)이 있어 죽고 맙니다. 오늘도 이처럼 유감스러운 심령이 없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역사에 부끄러움 없기를 바랍니다. 오직 영광과 기쁨과 자랑이 있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