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 4장 16절~17절)

by 【고동엽】 2023. 2. 22.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 4장 16절~17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사람은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지구는 지금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물이 썩어서 마음놓고 마실 수가 없습니다. 사방이 쓰레기로 뒤덮여서 이제는 버릴 곳이 없습니다. 공기가 오염되어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습니다. 오존층에까지 구멍이 뚫렸다고 합니다. 모든 환경이 남김없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도 그러합니다. 갖가지 독(毒)을 먹어서인지 이름조차 모를 병에 걸립니다. 썩고 병들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육체뿐이 아닙니다. 인간성, 도덕성도 썩어버렸습니다. 산산이 파괴되고 변질해버렸습니다.

인간성이 끝없이 사악해지고 있습니다.

일전에 미국에 있는 제 친구 한 분이 다녀갔습니다. 그가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본, 실로 경악할 사건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한 청년이 기관총을 들고 시장으로 나가서 무차별 살상을 했다고 합니다. 수십 명이 이유도 없이 죽고 부상을 당한 것입니다. 시장이 온통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경찰에서 그 청년을 붙잡아 수사하는 가운데 사고를 내게 된 동기를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아침식사를 하고나자 불현듯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총을 들고 나가 신나게 즐겼을 뿐이다'---천연덕스레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었습니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 채 방송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개탄할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듣는 것, 보는 것이 모두 충격적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처음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들 뿐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비관적이기만 합니다.

낙심하게 합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무기력해지는 우리로서는 별도리가 없습니다. 힘도 의욕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낙심과 실의, 절망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러합니다. 짜증과 절망 속에서 아무런 의식 없이 그저 살아가기에 그러합니다. 숱하게 많은 부작용이 여기저기서 속출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이 어디로서 오는 것입니까? 그 근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심리학자 로저스 골드는 일반적인 성인의 발달과정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함께 생각해보십시다. 16~17세는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이른바 '도망기'입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일단 반항부터 합니다. 이유 없는 반항을 합니다. 그저 뛰쳐나가려고 하는 시기입니다. 18~22세는 삶의 가능성을 찾으려 하는 '탐색기'입니다. 무엇이건 다 할 것 같습니다. 이것도 하겠다, 저것도 하겠다 ---- 나름대로의 꿈이 많습니다. 23~28세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투쟁기'입니다.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의 문제로 서로 싸웁니다.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시기입니다. 29~34세는 인생을 깊이 생각하는 '회의기'입니다. 이제 가능성의 한계점에 도달한 듯합니다. 뜻대로 다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능력의 부족함을 깨달으면서 회의에 빠집니다.

35~43세는 초조와 위기를 느끼는 '불안기'입니다.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가 하는 불안과 공포가 엄습합니다. 지금보다 더는 바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런 생을 꿈꾸며 살아왔던가 --- 생각하면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남아 있는 앞날이 암담하기만 합니다. 44~50세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반성기'입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면 후회막급입니다. 한심스럽습니다. 많은 후회가 있는 시기입니다. 이제 50세가 넘으면 나를 알고 나와 관계된 것들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성숙기'에 도달합니다. 비로소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철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신적으로 몇 살이나 되었습니까? 아직도 반항하고 싶습니까, 아무하고나 싸우고 싶습니까? 무엇이건 다 될 것 같습니까, 혹 안되어서 원망을 합니까?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철없는 짓거리입니다. 인생에 있어 실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나의 위치, 나의 존재, 나의 정체를 분명히 하십시다. 인간실존을 생각해보십시다. 나의 정신적 연령은 과연 몇 살이나 되었는가---문제의 요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 세상이 이토록 살기 어려워졌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좀더 객관화하여 생각해보십시다. 성경에 비추어 그 요인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나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아서입니다. 남이야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만 살고, 나만 부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 혼자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아내가 기쁘고 행복해야 남편이 살 맛나지 않습니까? 남의 눈에 눈물 흐르는데 내가 편할 수 있습니까? 그와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망상입니다. 결국은 함께 살아야 하고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오로지 나만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이 세상을 이토록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둘째로, 현재만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서 입니다. 지금이 순간만을 생각합니다. 저 앞에 있을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오늘만 있습니까? 오늘만 살고 맙니까? 우리는 대를 이어 이 땅에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보다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 한창 공부할 나이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엉뚱한 일만 벌이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을 이렇게 보내버리면 다가올 내일은 어떡할 것입니까? 이대로 살다가 죽어버릴 것입니까? 나이 들어 후회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옵니다. 왜 훗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12월에 입학시험을 치러야 할 아이들이 여름 캠프에 놀러 가는 것을 봅니다. 대체 무슨 꼴입니까? 내일 아침이면 학교 갈 아이가 오늘 저녁 숙제도 안한 채 잠자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일에서 앞에 있을 일, 미래에 있을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이 그러합니다. 미래로부터 현재를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그로부터 오늘을 생각합니다. 미래가 먼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희생합니다마는, 어리석은 사람은 찰나적인 향락을 위하여 미래를 포기해버립니다. 술을 지나치게 마셔대서 위를 절반이나 절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사가 더 마시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얼마간은 잘 참는다 싶더니 다시 마시기 시작합니다. 더 많이 마십니다. 제가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대답하는 말이 참으로 안되었습니다. 술 마시면 죽는다는 그 말을 잊기 위하여 마신다는 것입니다. 자살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을 매거나 손목을 자르는 것만이 자살이 아닙니다. 그 길로 가면 죽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여전히 가고 있는 것이 그대로 자살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현재에 집착하십니까? 또 얼마만큼 미래를 생각하고 사십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셋째로 부분에 집착하고 전체를 잃어버려서 그러합니다. 이 세상에 부분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전체 안의 부분입니다.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피아노가 있다고 합시다. 줄과 망치와 공명상자를 따로따로 떼어놓으면 어린아이의 장난감도 못됩니다. 각기 제 위치에 바르게 조립되어 서로 조화를 이룰 때에 우리는 피아노의 아름다운 음률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합니다. 학생은 학생의 위치에, 교수는 교수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기술자, 의사, 농부, 다들 그들의 위치가 있지 않습니까? 놓일 자리에 놓여서 제구실을 다할 때에 비로소 전체가 사는 것입니다. 그 전체를 생각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국가도 생각하지 않고 인류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국에는 나도 망하고 말 것입니다.

넷째로, 육체적인 쾌락만 찾고 영혼의 행복을 잃어버려서 그러합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요 도덕적 존재입니다. 도덕적 욕구를 떠나서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영혼이 부르짖는데 육체인들 온전하겠습니까? 영국의 박물학자 월레스(Wallace. Alfred Lussel) 박사는 다윈(Darwin)과 함께 평생토록 진화론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87세가 되어 진화론을 포기하고 창조론을 지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진화론으로는 영혼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 영혼의 존재, 인간의 참 존재의 의미를 설명할 길이 없기에 결국 진화론을 포기하게 되었노라고 밝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분명 영적 존재입니다. 영혼의 행복이 없이 정신이 행복할 수 없고, 정신의 행복이 없이 육체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육체만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잘 입고, 배불리 먹고, 편한 자리에 누웠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행복은 따로 있습니다.

다섯째로, 겉만 추구하고 속은 잃어버렸기에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은 '속사람'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인간을 가리켜 보화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비유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마치 흙덩이로 빚어 만든 것처럼 깨어지기 쉽습니다. 값싼 것입니다.

질그릇과 같이 하잘것없습니다마는 속에 하나님의 형상, 곧 영혼이 들어 있기에 인간입니다. 그만큼 속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하면 무엇합니까? 겉은 멀쩡한데 속이 비었습니다. 겉과 속을 함께 놓고 따지자면 언제나 속이 먼저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찌하여 겉만 추구하는 것입니까? 물질을, 지위를, 명예를 먼저 얻으려고 합니다마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겉만 추구하는 세상이라 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섯째로, 잃고서 얻어야 할 터인데 그 잃는 것에 연연합니다.

세상살이에는 잃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얻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잃는 것과 얻는 것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잃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습니다. 뭣좀 얻었다고 다 얻은 것입니까? 분명히 잃은 것이 있습니다. 얻었다고 다 얻은 것으로, 잃었다고 다 잃은 것으로 생각하는 몰지각한 이해가 세상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때로 우리가 물질을 잃어버립니다마는 그로 인하여 지혜를 얻습니다.

물질을 잃어버렸다고 탄식만 하는 사람은 절망적입니다.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고 기뻐할 때에 비로소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건강을 잃어버립니다마는 그로 인하여 겸손을 배웁니다. 잃어버림으로 얻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질은 얻었는데 친구를 잃고, 돈은 벌었는데 못할 짓을 많이 하여 양심이 괴로우면 무슨 소용입니까? 나의 인격을 판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잃으면서 얻는 것이 있고 멀어지면서 가까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낙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독교에서는 고통은 인정하고 낙심은 금하고 있습니다. 고통은 겪을지 언정 낙심해서는 안 된다, 고통으로 더 큰 것을 얻고 더 강해지고 더 새로워진다----패러독스입니다. 본문에서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16)." 여기서 '새롭다' 함은 헬라어로 '아나카이노오'입니다. '카이노오'는 '새롭다,' '아나카이노오'는 '다시 새롭다'라는 뜻입니다. '새롭다'라는 말이 헬라어에는 둘이 있습니다. 하나가 '네오스'로 이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새로움입니다. 또 하나가 '카이노오'로 질적인 새로움입니다.

육체는 부득불 늙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가꾸고 애를 써도 별도리가 없습니다. 남자는 26세부터, 여자는 24세부터 늙는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이제 모두 사양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발버둥쳐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남자건 여자건 늙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안되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 쓸데없습니다. 그저 곱게 늙도록 하십시다.

늙지 않으려고 수술도 하고 마사지도 해봅니다마는 될 일이 아닙니다. 흰머리를 뽑지만 달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겉 사람은 후패하게 마련입니다. 낡아집니다. 눈도 침침해지고 귀도 멀어지고 다리도 힘이 없어집니다. 어디 낡아지기만 합니까? 결국에는 죽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바둥거리지 말고 남은 시간을 위하여 애써야 할 것입니다. 오래 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마는 그러지 말고 진정 바르게 살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질적으로 살도록 하십시다. 육신의 건강에 너무 집착하지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질적으로 새로워지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천국과 현재와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영광과 환난, 본문의 내용은 이 두 단어로 집약되고 있습니다. 환난의 경한 것이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룬다---역동적인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영광은 중한 것이요 환난은 경한 것입니다. 영광은 영원한 것이요 환난은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이란 좋아도 잠깐이요 슬퍼도 잠깐입니다.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런 가운데도 속 사람은 날로 새롭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는 심방을 많이 다녔습니다. 하루에 서른 가정 이상을 심방하기도 했습니다. 줄잡아 매일 스물 다섯 가정을 심방 하는데 한 나이 많은 권사님이 열심으로 저를 따라다니셨습니다. 간혹 계단을 오르거나 도랑을 건너게 되면 나이가 들어서 발걸음이 여간 불안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깨라도 부축하여 옮겨드리면 나이가 여든이나 된 권사님의 얼굴이 붉어집니다. '왜 얼굴이 붉어지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십니다. 몸은 비록 늙어서 기동조차 수월치 않으나 마음은 스무 살 적 그대로라고 하십니다. 남자가 어깨를 잡으니 스무 살 적 마음이 동하여 당연히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단지 남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속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주책없다 할 만큼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기저기에 매이고, 뜯기고, 찢기고 합니다마는 깨끗한 영혼만은 항상 청춘입니다. 날로 새로워집니다. 깨끗합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심령은 늘 어린아이요 청년의 마음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바로 믿고 속사람이 중생하면 날로 새롭습니다. 육(肉)은 썩어질지언정 영(靈)은 날로 새롭습니다. 잠시잠깐의 일에는 이제 관심이 없습니다. 환난이 제아무리 커도 잠깐입니다. 경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로지 우리의 관심은 영원한 영광, 중한 영광 영혼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영적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령한 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모세를 보십시다. 히브리서 11장 24 절 이하에 보면, 그가 애굽에서 왕자의 이름으로 편안하게 사는 생보다 선민들과 함께 광야에서 고생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생을 더 아름답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의 길을 나섭니다. 성도들도 그러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알기에 고난의 길,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예수님의 세계관을 바로 알고 한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 10)"---그리스도의 복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온갖 것을 누리고 살아보았댔자 무엇합니까? 이 세상, 잠깐입니다. 마음을 저 하늘나라에 두고 살아가십시다. 약속되고 보증된 영광,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갈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날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오늘' 이요 또 하나는 '그날'입니다. 'today and that day' --- 오늘은 그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요, 그날은 오늘에 의미를 부여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날을 생각하십시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날에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그는 이 마음으로 그 많은 환난과 핍박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마음으로 오늘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원을 모르는 자는 현재도 모릅니다. 속을 잃어버린 자는 겉 역시 모두 썩어버리고 맙니다. 생명을 모르는 자는 물질로 말미암은 축복도 모르게 됩니다. 영원한 것을 잃어버릴 때에 현재적인 것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을 위하여 사는 자는 현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바로 찾고 사는 사람은 현재의 즐거움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을 저 앞의 마지막 목표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오늘을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합니다. 속은 날로 새롭습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돌아보나 보이지 않습니다. 돌아볼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세상을 떠나면서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을 무려 스물 여섯 번이나 암송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은 앞에 나타날 영광이 보입니까? 내 앞에 나타날 영광이 똑바로 보이기만 한다면 지금 당하는 환난, 경하고 잠시 있는 환난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은혜와 이 소망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