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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의 공평(마태복음 20장 1절~16절)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 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 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 시에도 나가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이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어느 이른아침, 링컨 대통령이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이웃에 사는 아주 어린 형제 둘이 사이좋게 대통령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대통령은 주머니에서 호두 세 개를 꺼내 주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고 좋아라 하는 형제의 모습을 그렸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 의좋던 형제는 이 호두 세 개 때문에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생이 주장합니다. "대통령께서 이것을 나한테 주셨으니 내가 둘을 갖고 형이 하나를 갖는 것이 옳아." 형은 형대로 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형이니까 당연히 내가 둘을 갖고 네가 하나를 갖는 것이 공평해."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장관이 이를 보고 "각하, 이 애들이 왜 이렇게 싸우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대통령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세계 문제로 다투고 있는 거요." 여러분, 세계 문제란 무엇입니까? 공평입니다. 평등해야 하고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것이 공의요, 어느 것이 평등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누구나 공평을 말하고, 평등을 말하고, 진리를 말합니다마는 그 역시 각자 나름대로의 견해일 뿐입니다. 진정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고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분명 인간에게 있어서 평화라고 하는 것은 공평에 기초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공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공평을 어떻게 느껴야 합니까, 나아가 이 공평을 어떻게 구현해야 합니까? 바로 이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는 평등하고자 하는 고민입니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이 먹는 대로 먹고, 남이 입는 대로 입고, 남이 배운 만큼 배우고…… 남보다 못하면 불만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늘 남과 같아지려고 하기에, 그런 공평으로 지향하고자 하기에 우리에게는 고민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공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에게는 특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과 평등하고자 하는 욕망에 머물지 않습니다. 남과 같은 것을 가지고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유별나고 탁월해 보이려고 합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특별함을 즐기는, 그런 행복관을 지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늘 일등이어야만 만족하는 사람, 최고이어야만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흔히 'top crazy'라고 합니다. 이러한 개별성이 지나친 나머지 'meism(나 위주)'에 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에 붙들려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은 'weism(우리 위주)'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라는 개념은 없이 언제나 '나'라는 개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듯 남이 못 가진 것을 가져야 좋고, 남이 모르는 것을 알아야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도 옷도 외모도 행하는 일도 전부 유별나야만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의 원인을 우리의 교육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남과 같음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특별해야 한다, 일등을 해야 한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만 배워왔습니다. 이런 배움을 가지고 자랐으니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는 항상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번민에 시달립니다.
어떤 부인이 참으로 오랜만에 옷을 사 입겠다고 쇼핑을 하러 나갔습니다. 다소 분수에 넘치는 듯한 옷을 큰맘먹고 한 벌 샀습니다. 어느 날, 그 옷을 본때 있게 입고 외출을 했다가 우연찮게 자신의 옷과 똑같은 것을 입은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분이 엉망이 되어 돌아온 그 부인은 다시는 그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특히 여성분들 사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마는 사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평등에서 기쁨을 얻고 있습니까, 아니면 특별해야만 만족합니까?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특별 하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특별한 대우를 받고자 하고, 특별한 존경을 받고자 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유별난 것을 사랑하는, 특별한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드문 것이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공평함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생활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에 모두 공평하게 태어났습니다. 물론 좋은 병실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오막살이집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마는 벌거숭이로 태어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장례식을 거창하게 치르는 사람 무덤을 화려하게 쓰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몇십억짜리 무덤에 묻혔다고 해서 그 시체가 달라집니까? 아닙니다. 공평하게도 무덤 속의 시체는 모두 같습니다. 썩은 시체에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들 그렇게 무덤을 유별나고 특별하게 꾸미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것 중에서도 특별한 무덤이 가장 큰 넌센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죽은 뒤의 모습은 공평하니까요.
우리의 사는 모습을 보십시오. 부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고, 큰 집이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집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마음을 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달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질량은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애초부터 가난하거나 부자였던 분은 거의 없을 줄로 압니다. 모두들 부하게 살아보기도 하고, 가난하게 살아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행복합니까? 부하니 꼭 행복합니까? 가난하니 꼭 불행합니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소화기능이 좋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입맛도 계절에 상관없이 좋습니다. 그런데 부한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두고도 못 먹습니다. 소화기능이 시원치 않아서 허연 죽만 먹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없어서 못 먹는 사람, 두고도 못 먹는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행복의 질량은 똑같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불행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행복하리라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실제는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것을 알고 예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인간의 공평 의식과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만나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수용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인간과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은혜 중심의 인간을 오늘의 본문에서는 잘 대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두말없이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늘 불평불만에, 끝없는 원망에 살아가는 불쌍한 심령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면 천국을 포도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농업국가로 특히 포도를 많이 재배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스라엘은 포도를 많이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라는 것은 열매가 맺힐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데 마지막에 열매가 다 큰 다음, 성숙해져서 익을 때가 문제입니다. 포도가 익을 때의 일조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며칠 아니 몇 시간 더 햇빛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당분과 질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포도는 많은 햇빛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햇빛을 너무 많이 받도록 내버려두어 지나치게 되면 그 포도는 저절로 떨어지고 맙니다. 대체로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는 9월말쯤이라고 합니다. 그 뒤에는 우기가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전에 포도를 수확해야만 합니다. 이 때에 될 수 있는 대로 햇빛을 좀더 많이 받도록 해서 잘 익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일 충분한 일조 시간을 기다리다가 시기를 놓쳐 우기를 맞게 되면 포도농사는 망치게 됩니다. 따라서 적당한 일조광을 기다려서 잘 익도록 두고 수확할 마땅한 시기에 가서는 급하게 서둘러 며칠 안에 포도를 전부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추수하는 이 시기가 가장 바쁠 때로 늘 일손이 모자랍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말씀의 배경이라 하겠습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포도원 주인은 시간, 시간 나가서 품꾼을 사서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제 삼 시, 제 육 시, 제 구 시, 제 십일 시에 각각 나가서 품꾼을 사서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으로 바꾸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주인이 아침 아홉 시에 장터에 나가보니 노는 사람들이 있어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하고 포도원의 품꾼으로 씁니다. 주인은 정오와 오후 세 시에 다시 나가서 일없이 노는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도록 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오후 다섯 시에도 주인이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묻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는 그들의 대답에 앞으로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는 남지 않았으나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허락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 혹은 이미 기회를 놓쳐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안 남은 사람일지라도 일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의 포도원에서 일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일이 모두 끝나고 저녁이 되자, 주인은 청지기에게 명하여 품삯을 나누어주도록 합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미 약속한대로 한 데나리온씩 나누어줍니다. 이를 본 먼저 온 사람들은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밖에는 일을 안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걸 보니 종일 일한 우리에게는 더 주겠군. 약속하기는 한 데나리온이라고 했지만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서너 데나리온 정도는 주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것은 역시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하고 원망합니다. 불공평한 처사에 대하여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원망에 대하여 주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까? 아주 복잡한 것 같으나, 그실 이처럼 선명한 이치도 없습니다. 참으로 귀한 복음이 여기에 계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평등이라는 것은 대체로 보아 산술적입니다. 계산적입니다. 두 시간 일했으면 두 시간만큼, 열 시간 일했으면 열 시간만큼, 하루 일했으면 하루만큼의 품삯을 받고자 합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산술적으로 따지고자 하는 공평이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기계적인 공평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합리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율법적인 공평이 있습니다. 내가 일을 했으므로 대가를 받습니다. 때문에 고마울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받을 것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은혜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일한 대가를 받는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준 주인에 대한 감사는 없고, 다만 일한 데에 대한 품삯으로서의 보상, 곧 율법적인 관계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공평입니다.
또한 우리는 경제적 차원에서 공평을 생각합니다. 돈으로만 계산하려고 합니다. 똑같이 주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만 계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때로 우리는 마음으로 받은 것도 있고, 깨달음으로 받은 것도 있고, 지식으로 받은 것도 있고, 경험으로 받은 것도 있고, 명예로 받은 것도 있고, 노하우(know-how)로 받은 것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두를 단순히 돈으로만 환산하려고 합니다. 일한 댓가를 돈 하나로만 계산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때로 우리에게는 어떤 일을 함으로 경험이 축적된다는 이득이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상관하지 않고 내게 주어지는 한 데나리온, 다시말 하면 경제적인 공평만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어떠합니까? 탄력적이요 융통성이 있습니다. 어떤 품꾼은 하루종일 일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품꾼은 기회를 얻지 못해서 하루종일 빈둥거리다가 마지막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인의 입장에서는 이들 모두가 똑같이 고마운 것입니다. 자신의 포도원에 와서 일해주었다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아주 융통성 있게 저들을 공평히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일방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다같이 일하는 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동시에 내 것을 가지고 내 생각대로 합니다. 너와 내가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이며 원망하지 말고 직선적이며 수직적인 관계에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주인과 품꾼 사이에 정확한 공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지극히 은총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일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특별히 늦게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기회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고마운 일이 없습니다. 온전히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공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인권적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주인은 품꾼들이 일한 데에 따라서 품삯을 주었다기보다는 품삯을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주인에게는 품삯이라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에게는 사람들 모두가 다같이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불평은 인간적 평등계산법에서 비롯됩니다. 모두가 저마다 평등하다고 합니다마는, 그실 자기만의 평등계산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불만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막상 평등 의식이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남보다 더 특별하고자 하는 마음이 싹틉니다. 여기에 시기와 질투가 있고, 특권 의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끝없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은혜에 대한 율법적 불평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은 후, 시험 때마다 채점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대체로 다섯 문항 정도의 논술식 시험문제를 내는데 채점할 때에 보면 어떤 학생은 제가 생각하기에 네 문제의 답안은 완벽하게 작성했는데 한 문제를 잘못 쓴 경우가 있습니다. 네 문항의 답안은 완벽하니 만점을 주고 싶다가도 그 학생 스스로가 한 문제를 안 쓴 것을 아는데 만일 만점을 주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는지 생각이 미칩니다. 아마도 읽어보지도 않고 점수를 주는가보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80점만 주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공평한 것입니다. 모두가 바라기는 백 점을 바랍니다. 그러나 잘한 사람에게는 백 점, 못한 사람에게는 영점을 주는 것이 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공의를 실현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따릅니다.
서울 모대학의 한 교수님은 워낙 유명한 교수님이 돼놔서 강의를 할 때마다 천여 명씩이나 되는 학생들이 몰려서 그 강의를 듣습니다. 그분의 강의는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몇 년 전인가 어느 회사에서 그분을 찾아와 사원들을 위해서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해주십사고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그분은 그 회사측에 먼저 강의료로 백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한 시간 강의의 수고료가 십만 원 정도였으니 그 교수님의 요구에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강의는 특별할 뿐더러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는 줄 아느냐면서 끝까지 백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교수님들까지 모두들 그분을 보고 '돌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고집을 부려서 백만 원을 받아냈습니다.
지금도 그 양반의 강의료는 백만 원이라고 하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이 역시 그분에게 있어서는 공평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평이란 참으로 끝없는 이야기이기에 불평이 많은 것입니다. 불평등한 것에 대해서 불평등하게, 공평한 것에 대해서 공평하게 취급하는 것이 공의라고 합니다마는 바로 그 불평등과 공평 때문에 끝없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공평은 본질로 돌아가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 관계에서만 공의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처한 이 상황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나와 너와의 관계는 언제나 공평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역시 언제나 공평한 것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되어지는 일을 보고 상대적으로 비교하면서 불평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것이 엄청난 죄가 된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겸손과 은혜로 하나님의 공의를 수용할 때에 비로소 공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심하게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무 밑에 조그마한 양 한 마리가 오들오들 떨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를 예쁘게 만들어 주신 것은 고맙습니다마는 저는 아무 힘도 없고 약해서 모든 짐승들이 얕잡아보고 마구 잡아먹으려 해서 참으로 힘이 듭니다. 왜 저를 이렇듯 나약하게 창조하셨습니까?"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정말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네 이빨은 옥니로 만들고, 발톱은 갈퀴처럼 만들어주면 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양은 "육식동물이 되어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것은 싫습니다. 저는 그저 풀만 먹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뱀처럼 입 속에 독을 넣어주면 되겠느냐?" "아닙니다. 뱀은 모든 동물들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저는 그렇게 미움을 받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염소처럼 머리에 큰 뿔을 만들어주랴?" "아닙니다.
뿔이 생기면 남을 해치고 싶은 욕망이 생길 터인데 오히려 뿔이 없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양은 가만히 있더니 "이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구를 해할 능력이 있어 그러한 욕망을 지닌 채 살기보다는 차라리 제가 해함을 당하면서 사는 것이 낫겠습니다. 옳지 않은 일을 행하기보다는 옳지 않은 일을 당하면서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공평을 원하고 있습니까?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살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빼앗기면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을 해치면서 살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차라리 해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이란 평등체질이 되어서 남과 같아야만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특별한 체질이 되어서 유별나야만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행복이란 봉사체질이 되어서 늘 남을 섬겨야만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약속대로 내 몫의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평등하게 받아들이고 만족하면 족합니다. 다른 사람이 비록 나보다 늦게 왔지만 그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은혜로 생각하고 같이 기뻐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불평할 것 없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하여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은혜체질의 사람이 될 때에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 역시 또 다른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합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거든 이 역시 더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면 족할 것입니다. 불평등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된 아름다운 생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불공평의 공평(마태복음 20장 1절~16절)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 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 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 시에도 나가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이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어느 이른아침, 링컨 대통령이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이웃에 사는 아주 어린 형제 둘이 사이좋게 대통령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대통령은 주머니에서 호두 세 개를 꺼내 주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고 좋아라 하는 형제의 모습을 그렸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 의좋던 형제는 이 호두 세 개 때문에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생이 주장합니다. "대통령께서 이것을 나한테 주셨으니 내가 둘을 갖고 형이 하나를 갖는 것이 옳아." 형은 형대로 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형이니까 당연히 내가 둘을 갖고 네가 하나를 갖는 것이 공평해."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장관이 이를 보고 "각하, 이 애들이 왜 이렇게 싸우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대통령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세계 문제로 다투고 있는 거요." 여러분, 세계 문제란 무엇입니까? 공평입니다. 평등해야 하고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것이 공의요, 어느 것이 평등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누구나 공평을 말하고, 평등을 말하고, 진리를 말합니다마는 그 역시 각자 나름대로의 견해일 뿐입니다. 진정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고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분명 인간에게 있어서 평화라고 하는 것은 공평에 기초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공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공평을 어떻게 느껴야 합니까, 나아가 이 공평을 어떻게 구현해야 합니까? 바로 이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는 평등하고자 하는 고민입니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이 먹는 대로 먹고, 남이 입는 대로 입고, 남이 배운 만큼 배우고…… 남보다 못하면 불만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늘 남과 같아지려고 하기에, 그런 공평으로 지향하고자 하기에 우리에게는 고민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공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에게는 특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과 평등하고자 하는 욕망에 머물지 않습니다. 남과 같은 것을 가지고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유별나고 탁월해 보이려고 합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특별함을 즐기는, 그런 행복관을 지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늘 일등이어야만 만족하는 사람, 최고이어야만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흔히 'top crazy'라고 합니다. 이러한 개별성이 지나친 나머지 'meism(나 위주)'에 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에 붙들려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은 'weism(우리 위주)'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라는 개념은 없이 언제나 '나'라는 개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듯 남이 못 가진 것을 가져야 좋고, 남이 모르는 것을 알아야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도 옷도 외모도 행하는 일도 전부 유별나야만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의 원인을 우리의 교육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남과 같음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특별해야 한다, 일등을 해야 한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만 배워왔습니다. 이런 배움을 가지고 자랐으니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는 항상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번민에 시달립니다.
어떤 부인이 참으로 오랜만에 옷을 사 입겠다고 쇼핑을 하러 나갔습니다. 다소 분수에 넘치는 듯한 옷을 큰맘먹고 한 벌 샀습니다. 어느 날, 그 옷을 본때 있게 입고 외출을 했다가 우연찮게 자신의 옷과 똑같은 것을 입은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분이 엉망이 되어 돌아온 그 부인은 다시는 그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특히 여성분들 사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마는 사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평등에서 기쁨을 얻고 있습니까, 아니면 특별해야만 만족합니까?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특별 하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특별한 대우를 받고자 하고, 특별한 존경을 받고자 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유별난 것을 사랑하는, 특별한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드문 것이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공평함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생활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에 모두 공평하게 태어났습니다. 물론 좋은 병실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오막살이집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마는 벌거숭이로 태어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장례식을 거창하게 치르는 사람 무덤을 화려하게 쓰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몇십억짜리 무덤에 묻혔다고 해서 그 시체가 달라집니까? 아닙니다. 공평하게도 무덤 속의 시체는 모두 같습니다. 썩은 시체에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들 그렇게 무덤을 유별나고 특별하게 꾸미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것 중에서도 특별한 무덤이 가장 큰 넌센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죽은 뒤의 모습은 공평하니까요.
우리의 사는 모습을 보십시오. 부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고, 큰 집이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집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마음을 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달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질량은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애초부터 가난하거나 부자였던 분은 거의 없을 줄로 압니다. 모두들 부하게 살아보기도 하고, 가난하게 살아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행복합니까? 부하니 꼭 행복합니까? 가난하니 꼭 불행합니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소화기능이 좋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입맛도 계절에 상관없이 좋습니다. 그런데 부한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두고도 못 먹습니다. 소화기능이 시원치 않아서 허연 죽만 먹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없어서 못 먹는 사람, 두고도 못 먹는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행복의 질량은 똑같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불행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행복하리라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실제는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것을 알고 예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인간의 공평 의식과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만나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수용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인간과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은혜 중심의 인간을 오늘의 본문에서는 잘 대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두말없이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늘 불평불만에, 끝없는 원망에 살아가는 불쌍한 심령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면 천국을 포도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농업국가로 특히 포도를 많이 재배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스라엘은 포도를 많이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라는 것은 열매가 맺힐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데 마지막에 열매가 다 큰 다음, 성숙해져서 익을 때가 문제입니다. 포도가 익을 때의 일조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며칠 아니 몇 시간 더 햇빛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당분과 질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포도는 많은 햇빛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햇빛을 너무 많이 받도록 내버려두어 지나치게 되면 그 포도는 저절로 떨어지고 맙니다. 대체로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는 9월말쯤이라고 합니다. 그 뒤에는 우기가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전에 포도를 수확해야만 합니다. 이 때에 될 수 있는 대로 햇빛을 좀더 많이 받도록 해서 잘 익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일 충분한 일조 시간을 기다리다가 시기를 놓쳐 우기를 맞게 되면 포도농사는 망치게 됩니다. 따라서 적당한 일조광을 기다려서 잘 익도록 두고 수확할 마땅한 시기에 가서는 급하게 서둘러 며칠 안에 포도를 전부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추수하는 이 시기가 가장 바쁠 때로 늘 일손이 모자랍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말씀의 배경이라 하겠습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포도원 주인은 시간, 시간 나가서 품꾼을 사서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제 삼 시, 제 육 시, 제 구 시, 제 십일 시에 각각 나가서 품꾼을 사서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으로 바꾸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주인이 아침 아홉 시에 장터에 나가보니 노는 사람들이 있어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하고 포도원의 품꾼으로 씁니다. 주인은 정오와 오후 세 시에 다시 나가서 일없이 노는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도록 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오후 다섯 시에도 주인이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묻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는 그들의 대답에 앞으로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는 남지 않았으나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허락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 혹은 이미 기회를 놓쳐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안 남은 사람일지라도 일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의 포도원에서 일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일이 모두 끝나고 저녁이 되자, 주인은 청지기에게 명하여 품삯을 나누어주도록 합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미 약속한대로 한 데나리온씩 나누어줍니다. 이를 본 먼저 온 사람들은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밖에는 일을 안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걸 보니 종일 일한 우리에게는 더 주겠군. 약속하기는 한 데나리온이라고 했지만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서너 데나리온 정도는 주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것은 역시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하고 원망합니다. 불공평한 처사에 대하여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원망에 대하여 주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까? 아주 복잡한 것 같으나, 그실 이처럼 선명한 이치도 없습니다. 참으로 귀한 복음이 여기에 계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평등이라는 것은 대체로 보아 산술적입니다. 계산적입니다. 두 시간 일했으면 두 시간만큼, 열 시간 일했으면 열 시간만큼, 하루 일했으면 하루만큼의 품삯을 받고자 합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산술적으로 따지고자 하는 공평이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기계적인 공평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합리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율법적인 공평이 있습니다. 내가 일을 했으므로 대가를 받습니다. 때문에 고마울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받을 것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은혜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일한 대가를 받는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준 주인에 대한 감사는 없고, 다만 일한 데에 대한 품삯으로서의 보상, 곧 율법적인 관계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공평입니다.
또한 우리는 경제적 차원에서 공평을 생각합니다. 돈으로만 계산하려고 합니다. 똑같이 주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만 계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때로 우리는 마음으로 받은 것도 있고, 깨달음으로 받은 것도 있고, 지식으로 받은 것도 있고, 경험으로 받은 것도 있고, 명예로 받은 것도 있고, 노하우(know-how)로 받은 것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두를 단순히 돈으로만 환산하려고 합니다. 일한 댓가를 돈 하나로만 계산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때로 우리에게는 어떤 일을 함으로 경험이 축적된다는 이득이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상관하지 않고 내게 주어지는 한 데나리온, 다시말 하면 경제적인 공평만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어떠합니까? 탄력적이요 융통성이 있습니다. 어떤 품꾼은 하루종일 일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품꾼은 기회를 얻지 못해서 하루종일 빈둥거리다가 마지막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인의 입장에서는 이들 모두가 똑같이 고마운 것입니다. 자신의 포도원에 와서 일해주었다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아주 융통성 있게 저들을 공평히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일방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다같이 일하는 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동시에 내 것을 가지고 내 생각대로 합니다. 너와 내가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이며 원망하지 말고 직선적이며 수직적인 관계에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주인과 품꾼 사이에 정확한 공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지극히 은총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일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특별히 늦게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기회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고마운 일이 없습니다. 온전히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공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인권적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주인은 품꾼들이 일한 데에 따라서 품삯을 주었다기보다는 품삯을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주인에게는 품삯이라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에게는 사람들 모두가 다같이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불평은 인간적 평등계산법에서 비롯됩니다. 모두가 저마다 평등하다고 합니다마는, 그실 자기만의 평등계산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불만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막상 평등 의식이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남보다 더 특별하고자 하는 마음이 싹틉니다. 여기에 시기와 질투가 있고, 특권 의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끝없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은혜에 대한 율법적 불평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은 후, 시험 때마다 채점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대체로 다섯 문항 정도의 논술식 시험문제를 내는데 채점할 때에 보면 어떤 학생은 제가 생각하기에 네 문제의 답안은 완벽하게 작성했는데 한 문제를 잘못 쓴 경우가 있습니다. 네 문항의 답안은 완벽하니 만점을 주고 싶다가도 그 학생 스스로가 한 문제를 안 쓴 것을 아는데 만일 만점을 주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는지 생각이 미칩니다. 아마도 읽어보지도 않고 점수를 주는가보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80점만 주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공평한 것입니다. 모두가 바라기는 백 점을 바랍니다. 그러나 잘한 사람에게는 백 점, 못한 사람에게는 영점을 주는 것이 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공의를 실현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따릅니다.
서울 모대학의 한 교수님은 워낙 유명한 교수님이 돼놔서 강의를 할 때마다 천여 명씩이나 되는 학생들이 몰려서 그 강의를 듣습니다. 그분의 강의는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몇 년 전인가 어느 회사에서 그분을 찾아와 사원들을 위해서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해주십사고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그분은 그 회사측에 먼저 강의료로 백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한 시간 강의의 수고료가 십만 원 정도였으니 그 교수님의 요구에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강의는 특별할 뿐더러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는 줄 아느냐면서 끝까지 백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교수님들까지 모두들 그분을 보고 '돌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고집을 부려서 백만 원을 받아냈습니다.
지금도 그 양반의 강의료는 백만 원이라고 하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이 역시 그분에게 있어서는 공평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평이란 참으로 끝없는 이야기이기에 불평이 많은 것입니다. 불평등한 것에 대해서 불평등하게, 공평한 것에 대해서 공평하게 취급하는 것이 공의라고 합니다마는 바로 그 불평등과 공평 때문에 끝없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공평은 본질로 돌아가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 관계에서만 공의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처한 이 상황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나와 너와의 관계는 언제나 공평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역시 언제나 공평한 것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되어지는 일을 보고 상대적으로 비교하면서 불평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것이 엄청난 죄가 된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겸손과 은혜로 하나님의 공의를 수용할 때에 비로소 공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심하게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무 밑에 조그마한 양 한 마리가 오들오들 떨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를 예쁘게 만들어 주신 것은 고맙습니다마는 저는 아무 힘도 없고 약해서 모든 짐승들이 얕잡아보고 마구 잡아먹으려 해서 참으로 힘이 듭니다. 왜 저를 이렇듯 나약하게 창조하셨습니까?"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정말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네 이빨은 옥니로 만들고, 발톱은 갈퀴처럼 만들어주면 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양은 "육식동물이 되어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것은 싫습니다. 저는 그저 풀만 먹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뱀처럼 입 속에 독을 넣어주면 되겠느냐?" "아닙니다. 뱀은 모든 동물들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저는 그렇게 미움을 받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염소처럼 머리에 큰 뿔을 만들어주랴?" "아닙니다.
뿔이 생기면 남을 해치고 싶은 욕망이 생길 터인데 오히려 뿔이 없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양은 가만히 있더니 "이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구를 해할 능력이 있어 그러한 욕망을 지닌 채 살기보다는 차라리 제가 해함을 당하면서 사는 것이 낫겠습니다. 옳지 않은 일을 행하기보다는 옳지 않은 일을 당하면서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공평을 원하고 있습니까?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살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빼앗기면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을 해치면서 살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차라리 해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이란 평등체질이 되어서 남과 같아야만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특별한 체질이 되어서 유별나야만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행복이란 봉사체질이 되어서 늘 남을 섬겨야만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약속대로 내 몫의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평등하게 받아들이고 만족하면 족합니다. 다른 사람이 비록 나보다 늦게 왔지만 그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은혜로 생각하고 같이 기뻐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불평할 것 없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하여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은혜체질의 사람이 될 때에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 역시 또 다른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합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거든 이 역시 더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면 족할 것입니다. 불평등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된 아름다운 생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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