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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쉬게 하는 지혜(잠언 15장 1절~8절)

by 【고동엽】 202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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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쉬게 하는 지혜(잠언 15장 1절~8절)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확실히 '폭력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온통 깜짝깜짝 놀라 말문이 막힐 끔찍한 일들입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 산책 한번 안심하고 할 수 없게 된 세상입니다. 고요한 별빛을 바라보면서 산길을 거닐던 때도 이제는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저 언덕 위에 외딴집을 짓고 평화롭게 살아보겠다는 식의 목가적인 이야기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겁나고 무서워서 그런 외딴집에 살 수 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행동이 거칠어졌습니다. 언어가 폭력화하였습니다. 마음들이 더없이 악해졌습니다. 확실히 이같은 폭력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일마다 폭력화하고 있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죄악입니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근자에 우리는 '대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렇습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대화가 있어야 한다고들 합니다마는 글쎄요,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제대로의 대화는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은 많은데도 분명 대화부재(對話不在)입니다. 정치세계부터 그렇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눌러서 되는 일들뿐입니다. 약한 자가 별수 없어 굴복하는 것은 볼 수 있지만 그 언제 참된 의미의 대화가 되는 것을 보아보았습니까? 정말로 평화로운 가운데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본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도 힘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대화의 세계에 못살아본 것 같습니다. 참된 대화라면 쌍방이 다 행복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여 불평 속에,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헨리 브란트는 말했습니다. '모든 상담의 팔구십 퍼센트는 분노와 관련된 문제이다.' 심각한 일입니다. 사실이지 오늘의 문제는 정치․경제․교육․문화․사회의 문제라기 보다 결국 '감정'의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가 경제의 문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감정의 문제로 귀결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분이 나쁘다는 얘기지요. 나라를 위해서는 죽지 않아도 기분 나쁘다 하면 목숨을 내겁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앞으로 목사가 될 분들을 가르치면서 가끔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려면 온 교인이 무조건 기분이 좋아야 한다.

기분 나쁘면 천당도 마다한다" ---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기분 나쁘면 교회에 안나옵니다. 지옥을 가든 천당을 가든,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좌우간에 기분이 나쁘면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보다도 기분이 먼저입니다. 감정이 먼저입니다.

어떤 모임에를 가건 어떤 문제에 부닥치건 마지막에는 결국 감정 문제로 충돌하고 맙니다.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기분에 상처를 입고, 건강에 상처를 입습니다. 어느 내과의사가 이야기합디다. 그 의사는 수많은 불치병 환자를 진단해왔고, 진단 결과를 환자에게 알려야 하는 마음의 아픔을 그때마다 겪어왔는데, 그러다 보니 이상한 일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구체적으로 통계를 내본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암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평정을 찾아 지난날을 돌아보며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가 '한 3년 전에 몹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멍드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입맛도 잃고 잠도 빼앗기고, 몇 날 몇 밤을 괴로워했었습니다. 그랬는데 3년 후인 오늘에 와서 그만 불치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납득이 갑니다. 기분 나쁜 감정 ----- 시쳇말로해서 스트레스라는 것을 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감정의 앙금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다가 이삼 년 세월이 지난 뒷날에 그토록 무서운 결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됩니다. 빵의 문제가 아니요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감정의 문제입니다. 흔히들 해결 방법이 대화에 있다고들 합니다.

방향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마는 대화의 효력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대화에 지혜가 없습니다. 대화를 바로 이끌어나갈 위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인격이 없기 때문에 대화에서 말만 무성히 남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대화에 관련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과 우매자(愚昧者)의 말을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1절)" ----- 분노를 삭게하는 대답은 유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대체로 상대편에서 기분 좋게 말하면 나도 기분 좋게 말하고 상대편에서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냅니다. 상대편에서 목소리를 크게 하면 나는 더 크게 합니다. 주거니받거니 하다보면 점점 더 옥타브가 올라갑니다. 보통 사람들의 대인(對人) 심리가 대체로 이러합니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칩니다. 힘에 부쳐 못 당하면 죽으라고 악을 씁니다. 나중 일은 아랑곳없이 당장에 우선 대들고 보자는 심보입니다. 여러분, 상대편이 나를 보고 과격하게 나옵니다. 이럴 때에 나는 웃으면서 부드럽게 한마디합니다. 그랬더니 그 충천하던 분기(忿氣)가 눈 녹듯이 사그라지더라 -----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경험했다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좋은 말 듣고 좋은 말하는 것이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상대편이 격한 소리를 하지만 나는 부드럽게 이야기했더니 그의 분노가 스르르 풀리더라, 이리 같던 사람이 양같이 되더라 ----- 이러한 경험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감정적인 소리로 분노를 격동하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조용한 사람의 마음까지 격동시킵니다. 기분을 나쁘게 합니다. 우매한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이 상하므로 아예 만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전화 받는 것조차 달갑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차분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편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분노를 격동시키는 사람입니까, 분노를 사그라지게 하는 사람입니까?

또한 유순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지혜를 베푼다고 했습니다.

항상 지식을 줍니다. 이러한 사람과 이야기하면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지식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고 합니다. 잠언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말을 하지 아니하면 덕 있는 사람이 된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으로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간혹 '아무개는 참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마는 그 아무개를 보아하니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그 아무개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이 없다는 그것 자체로 이미 반(半) 성자가 됩니다. 구제라는 것도 별것이 아닙니다. 말이 적으면 그것이 바로 구제입니다. 이처럼 침묵만으로도 절반은 되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기어이 말을 하고야 맙니다. 굳이 미련함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미련한 사람의 근본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쏟아내어 자신도 망신하고 많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유순한 대답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이를 생명나무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몇 년을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태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편에서 '미안합니다'라고 단 한마디를 먼저 말했더니 그 몇 년을 두고 쌓여왔던 응어리가 한순간에 풀리더라고 합니다. 미안합니다 --- 이 한마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진작에 왜 못 그랬겠습니까? 간단한 한마디 말이지만 그 말 나오기가 그토록 어렵습니다. 위대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한마디를 못함으로 만신창이가 되도록 싸우니 미련하고 딱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아가 한 옥합의 귀한 향유를 깨뜨려 붓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이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 --- 사랑의 표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시샘을 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읽으십니다. 여자도 낌새를 챕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였는데 그들은 '감히 더러운 여자가' 하고 눈을 흘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감싸시고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고, 여인의 편에 서서 비유까지 들어가며 설명하십니다.

이 눈물겹도록 고마우신 예수님께 마리아는 남은 일생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결국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앞에서 지켜보았고, 장사되어 묻힌 무덤에 맨 처음으로 찾아가 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그 말씀 한마디를 얼마나 고맙게 받아들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생명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에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마디로 영혼이 살고 병이 나아 기뻐 뛰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두려움에 떠는 자에게는 '내니 두려워 말라'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강도를 향해서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위로하십니다. 이 한 말씀들이 곧 한 생명을 구원하게 됩니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미련한 사람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헐뜯어서 아프게 합니다. 얼마 전 김계용 목사님의 추도예배에 참석하여 가까운 친구 한 분의 추도사를 들었습니다. 김계용 목사님은 이러이러한 분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추도사의 마지막 대목을 듣고 저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유머 감각이 풍부한 분이셨지만 단 한번도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유머는 구사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였습니다.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마는 김목사님은 유머가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늘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농담이라고 해서 함부로 지껄여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 또한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 바로 우매자의 소행입니다. 말은 마음의 창입니다. 나의 내부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음이 중생하여야 합니다. 심령이 먼저 중생하여야 합니다. 중생한 심령은 하나님의 뜻부터 생각합니다. 이웃을 먼저 생각합니다. 전체를, 먼 미래를 먼저 생각합니다. 연후에 나를 생각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희락․화평․인내․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바로 그러한 인격에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선한 말을 하게 됩니다.

유명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천주교회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신부가 미사를 집례할 때에 어린아이가 옆에서 시중듭니다. 그런데 이 시중드는 어린아이가 그만 실수를 해서 성례를 행하는 포도주 잔을 엎질렀습니다. 잔은 깨어지고 포도주는 땅에 쏟아졌습니다. 신부가 노하여 그 어린아이의 뺨을 때렸습니다.

"다시는 제단 앞에 나타나지 말라." 크게 나무랐습니다. 아마도 어린아이는 울면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커서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저 유명한 티토 대통령이 그 사람입니다. 어느 큰 도시의 천주교회당에서도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신부는 어쩔 줄 모르고 두려워 떠는 어린아이를 따뜻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면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너는 커서 신부가 되겠구나." 그 어린아이는 커서 이름난 대주교가 됩니다.

작가이자 교육가이기도 한 풀턴 쉰(Sheen, Fulton J.)이 그 사람입니다. 그의 저서 「The Life of Christ」는 매우 훌륭한 책이라서 저도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마는 우리 개신교계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에는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의 방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친절한 말을 해야 합니다. 한 갤런(gallon)의 쓴 약보다 한 방울의 벌꿀이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나 상대방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데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세 황금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좀 거창한 감이 있습니다마는 내용인즉 평범합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자 할 때에는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 이 문이 '황금문'입니다. 첫번째 문은 하고자 하는 말이 참말이냐를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생각지도 않고 말부터 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유포합니다. 참말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문은 과연 꼭 필요한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황금문을 통과하면 정말로 귀한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문은 친절한 말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친절을 떠난 말이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 안에서 되는 말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철저히 사랑 안에서 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황금문입니다.

무릇 말을 하고자 할 때에는 상대방의 장점부터 살피고 이해하며 듣는 자세로 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인내한 후에 말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신혼부부가 첫날밤을 맞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로 약속을 합니다. "우리의 결혼생활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오." "어떻게 하면 평탄할까요?" 그래서 한가지 합의를 합니다. "서로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따지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하루가 지난 다음에 말하기로 합시다." 지금 당장 말하고 싶지만 24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다시 생각하여 말하기로 서로 맹세한 것입니다. 이 한 가지만 지키며 살았는데도 그 부부는 일생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약간이라도 언짢은 일이 있으면 들어오는 문간에서부터 큰소리가 나는 것이 예삿일이 아닙니까? 하루만이라도 참으면 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1분을 참아도 훌륭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속전속결입니다. 당연히 좋지 않습니다. 그 파급효과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함부로 지껄인 말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불과 같다, 혀와 같다, 키와 같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번 질러 놓은 불은 순식간에 번져갑니다.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입니까? 파급효과를 생각하고 친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둘째, 신중하고 정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내 분노부터 쉬게 한 다음에 말해야 합니다. 평화로운 마음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교우 몇 분과 함께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들 한참 열을 올리면서 이야기하는데 한 분이 돌아앉아서 무슨 약인가를 먹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약을 먹는 것이오?" "방금 저분이 하는 말이 하도 기가 막혀 이 약을 먹고 마음을 진정시켜서 30분 후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만하면 참 훌륭합니다. 존경할 만한 어른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내 마음에 조용한 평화가 깃들기 전에는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한 가운데 하는 말은 열 번이면 열 번 다 실수하게 됩니다. 엄청난 파급효과를 내기 때문에 나도 상하고 남도 상하게 됩니다. 나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깃들기 전에는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셋째, 침묵의 지혜(the wisdom of silence)가 필요합니다. 윈스턴 처칠 경은 '입으로 나오는 말은 뱉지 않고 꿀꺽 삼켜도 배탈 나는 일이 없다'고 재미있게 말한 바 있습니다. 침묵해서 후회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말입니다. 말한 것은 후회될 때가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참은 것은 후회되는 일이 없습니다. 침묵이 필요합니다. 나 혼자 소화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조심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이성이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감정에 있습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꾸짖었더니 며느리가 끝까지 말대꾸를 합니다. 시어머니가 속이 상해서 "너 정말 꼬박꼬박 말대답 할 거냐?"하고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그랬더니 며느리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어머니, 말대답이 아니라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론과 이치가 무슨 소용입니까? 가만히 보면 똑똑한 사람이 문제가 더 많습니다. 어떤 부인은 똑똑함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잃어버립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가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그 여자보다 내가 훨씬 더 나은데 남편은 왜 나보다 그 여자를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해주었습니다. "남자는 약간 백치미(白痴美)가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 똑똑한 것은 질색입니다. 밝은 이론도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입니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원천적인 문제입니다. 기분의 문제일진대 어찌하겠습니까? 똑똑해서 망한 사람 참 많습니다. 아무쪼록 말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를 쉬게 하는 말과 분노를 격동케 하는 말이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깊이 새겨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경건을 되찾아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의 파급효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요 내가 진리를 전매특허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 말만 옳은 것이 아니요 남의 말도 얼마든지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조심스럽고 겸손하고 온유한 가운데 말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 개 같은 마음, 격동하는 마음 상태에서는 성경말씀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한참 부부싸움을 하고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러느냐"라고 해보십시오. "당장 예수 믿는 것 그만두겠다"라고 할 것입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 말합시다. 나 자신을 살피면서 겸손하게 말합시다. 과연 내가 해야 할 말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말합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그 파급효과에 대하여 책임을 질 것입니다. 언제나 섬기는 자세로 친절과 사랑을 담아서 할 것입니다. 분노한 세대를 쉬게 할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분노를 쉬게 하는 지혜(잠언 15장 1절~8절)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확실히 '폭력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온통 깜짝깜짝 놀라 말문이 막힐 끔찍한 일들입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 산책 한번 안심하고 할 수 없게 된 세상입니다. 고요한 별빛을 바라보면서 산길을 거닐던 때도 이제는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저 언덕 위에 외딴집을 짓고 평화롭게 살아보겠다는 식의 목가적인 이야기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겁나고 무서워서 그런 외딴집에 살 수 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행동이 거칠어졌습니다. 언어가 폭력화하였습니다. 마음들이 더없이 악해졌습니다. 확실히 이같은 폭력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일마다 폭력화하고 있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죄악입니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근자에 우리는 '대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렇습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대화가 있어야 한다고들 합니다마는 글쎄요,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제대로의 대화는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은 많은데도 분명 대화부재(對話不在)입니다. 정치세계부터 그렇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눌러서 되는 일들뿐입니다. 약한 자가 별수 없어 굴복하는 것은 볼 수 있지만 그 언제 참된 의미의 대화가 되는 것을 보아보았습니까? 정말로 평화로운 가운데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본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도 힘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대화의 세계에 못살아본 것 같습니다. 참된 대화라면 쌍방이 다 행복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여 불평 속에,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헨리 브란트는 말했습니다. '모든 상담의 팔구십 퍼센트는 분노와 관련된 문제이다.' 심각한 일입니다. 사실이지 오늘의 문제는 정치․경제․교육․문화․사회의 문제라기 보다 결국 '감정'의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가 경제의 문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감정의 문제로 귀결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분이 나쁘다는 얘기지요. 나라를 위해서는 죽지 않아도 기분 나쁘다 하면 목숨을 내겁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앞으로 목사가 될 분들을 가르치면서 가끔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려면 온 교인이 무조건 기분이 좋아야 한다.

기분 나쁘면 천당도 마다한다" ---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기분 나쁘면 교회에 안나옵니다. 지옥을 가든 천당을 가든,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좌우간에 기분이 나쁘면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보다도 기분이 먼저입니다. 감정이 먼저입니다.

어떤 모임에를 가건 어떤 문제에 부닥치건 마지막에는 결국 감정 문제로 충돌하고 맙니다.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기분에 상처를 입고, 건강에 상처를 입습니다. 어느 내과의사가 이야기합디다. 그 의사는 수많은 불치병 환자를 진단해왔고, 진단 결과를 환자에게 알려야 하는 마음의 아픔을 그때마다 겪어왔는데, 그러다 보니 이상한 일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구체적으로 통계를 내본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암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평정을 찾아 지난날을 돌아보며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가 '한 3년 전에 몹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멍드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입맛도 잃고 잠도 빼앗기고, 몇 날 몇 밤을 괴로워했었습니다. 그랬는데 3년 후인 오늘에 와서 그만 불치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납득이 갑니다. 기분 나쁜 감정 ----- 시쳇말로해서 스트레스라는 것을 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감정의 앙금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다가 이삼 년 세월이 지난 뒷날에 그토록 무서운 결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됩니다. 빵의 문제가 아니요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감정의 문제입니다. 흔히들 해결 방법이 대화에 있다고들 합니다.

방향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마는 대화의 효력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대화에 지혜가 없습니다. 대화를 바로 이끌어나갈 위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인격이 없기 때문에 대화에서 말만 무성히 남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대화에 관련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과 우매자(愚昧者)의 말을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1절)" ----- 분노를 삭게하는 대답은 유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대체로 상대편에서 기분 좋게 말하면 나도 기분 좋게 말하고 상대편에서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냅니다. 상대편에서 목소리를 크게 하면 나는 더 크게 합니다. 주거니받거니 하다보면 점점 더 옥타브가 올라갑니다. 보통 사람들의 대인(對人) 심리가 대체로 이러합니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칩니다. 힘에 부쳐 못 당하면 죽으라고 악을 씁니다. 나중 일은 아랑곳없이 당장에 우선 대들고 보자는 심보입니다. 여러분, 상대편이 나를 보고 과격하게 나옵니다. 이럴 때에 나는 웃으면서 부드럽게 한마디합니다. 그랬더니 그 충천하던 분기(忿氣)가 눈 녹듯이 사그라지더라 -----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경험했다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좋은 말 듣고 좋은 말하는 것이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상대편이 격한 소리를 하지만 나는 부드럽게 이야기했더니 그의 분노가 스르르 풀리더라, 이리 같던 사람이 양같이 되더라 ----- 이러한 경험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감정적인 소리로 분노를 격동하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조용한 사람의 마음까지 격동시킵니다. 기분을 나쁘게 합니다. 우매한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이 상하므로 아예 만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전화 받는 것조차 달갑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차분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편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분노를 격동시키는 사람입니까, 분노를 사그라지게 하는 사람입니까?

또한 유순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지혜를 베푼다고 했습니다.

항상 지식을 줍니다. 이러한 사람과 이야기하면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지식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고 합니다. 잠언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말을 하지 아니하면 덕 있는 사람이 된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으로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간혹 '아무개는 참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마는 그 아무개를 보아하니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그 아무개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이 없다는 그것 자체로 이미 반(半) 성자가 됩니다. 구제라는 것도 별것이 아닙니다. 말이 적으면 그것이 바로 구제입니다. 이처럼 침묵만으로도 절반은 되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기어이 말을 하고야 맙니다. 굳이 미련함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미련한 사람의 근본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쏟아내어 자신도 망신하고 많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유순한 대답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이를 생명나무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몇 년을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태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편에서 '미안합니다'라고 단 한마디를 먼저 말했더니 그 몇 년을 두고 쌓여왔던 응어리가 한순간에 풀리더라고 합니다. 미안합니다 --- 이 한마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진작에 왜 못 그랬겠습니까? 간단한 한마디 말이지만 그 말 나오기가 그토록 어렵습니다. 위대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한마디를 못함으로 만신창이가 되도록 싸우니 미련하고 딱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아가 한 옥합의 귀한 향유를 깨뜨려 붓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이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 --- 사랑의 표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시샘을 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읽으십니다. 여자도 낌새를 챕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였는데 그들은 '감히 더러운 여자가' 하고 눈을 흘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감싸시고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고, 여인의 편에 서서 비유까지 들어가며 설명하십니다.

이 눈물겹도록 고마우신 예수님께 마리아는 남은 일생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결국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앞에서 지켜보았고, 장사되어 묻힌 무덤에 맨 처음으로 찾아가 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그 말씀 한마디를 얼마나 고맙게 받아들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생명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에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마디로 영혼이 살고 병이 나아 기뻐 뛰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두려움에 떠는 자에게는 '내니 두려워 말라'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강도를 향해서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위로하십니다. 이 한 말씀들이 곧 한 생명을 구원하게 됩니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미련한 사람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헐뜯어서 아프게 합니다. 얼마 전 김계용 목사님의 추도예배에 참석하여 가까운 친구 한 분의 추도사를 들었습니다. 김계용 목사님은 이러이러한 분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추도사의 마지막 대목을 듣고 저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유머 감각이 풍부한 분이셨지만 단 한번도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유머는 구사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였습니다.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마는 김목사님은 유머가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늘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농담이라고 해서 함부로 지껄여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 또한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 바로 우매자의 소행입니다. 말은 마음의 창입니다. 나의 내부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음이 중생하여야 합니다. 심령이 먼저 중생하여야 합니다. 중생한 심령은 하나님의 뜻부터 생각합니다. 이웃을 먼저 생각합니다. 전체를, 먼 미래를 먼저 생각합니다. 연후에 나를 생각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희락․화평․인내․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바로 그러한 인격에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선한 말을 하게 됩니다.

유명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천주교회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신부가 미사를 집례할 때에 어린아이가 옆에서 시중듭니다. 그런데 이 시중드는 어린아이가 그만 실수를 해서 성례를 행하는 포도주 잔을 엎질렀습니다. 잔은 깨어지고 포도주는 땅에 쏟아졌습니다. 신부가 노하여 그 어린아이의 뺨을 때렸습니다.

"다시는 제단 앞에 나타나지 말라." 크게 나무랐습니다. 아마도 어린아이는 울면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커서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저 유명한 티토 대통령이 그 사람입니다. 어느 큰 도시의 천주교회당에서도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신부는 어쩔 줄 모르고 두려워 떠는 어린아이를 따뜻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면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너는 커서 신부가 되겠구나." 그 어린아이는 커서 이름난 대주교가 됩니다.

작가이자 교육가이기도 한 풀턴 쉰(Sheen, Fulton J.)이 그 사람입니다. 그의 저서 「The Life of Christ」는 매우 훌륭한 책이라서 저도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마는 우리 개신교계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에는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의 방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친절한 말을 해야 합니다. 한 갤런(gallon)의 쓴 약보다 한 방울의 벌꿀이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나 상대방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데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세 황금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좀 거창한 감이 있습니다마는 내용인즉 평범합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자 할 때에는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 이 문이 '황금문'입니다. 첫번째 문은 하고자 하는 말이 참말이냐를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생각지도 않고 말부터 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유포합니다. 참말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문은 과연 꼭 필요한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황금문을 통과하면 정말로 귀한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문은 친절한 말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친절을 떠난 말이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 안에서 되는 말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철저히 사랑 안에서 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황금문입니다.

무릇 말을 하고자 할 때에는 상대방의 장점부터 살피고 이해하며 듣는 자세로 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인내한 후에 말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신혼부부가 첫날밤을 맞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로 약속을 합니다. "우리의 결혼생활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오." "어떻게 하면 평탄할까요?" 그래서 한가지 합의를 합니다. "서로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따지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하루가 지난 다음에 말하기로 합시다." 지금 당장 말하고 싶지만 24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다시 생각하여 말하기로 서로 맹세한 것입니다. 이 한 가지만 지키며 살았는데도 그 부부는 일생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약간이라도 언짢은 일이 있으면 들어오는 문간에서부터 큰소리가 나는 것이 예삿일이 아닙니까? 하루만이라도 참으면 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1분을 참아도 훌륭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속전속결입니다. 당연히 좋지 않습니다. 그 파급효과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함부로 지껄인 말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불과 같다, 혀와 같다, 키와 같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번 질러 놓은 불은 순식간에 번져갑니다.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입니까? 파급효과를 생각하고 친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둘째, 신중하고 정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내 분노부터 쉬게 한 다음에 말해야 합니다. 평화로운 마음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제가 교우 몇 분과 함께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들 한참 열을 올리면서 이야기하는데 한 분이 돌아앉아서 무슨 약인가를 먹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약을 먹는 것이오?" "방금 저분이 하는 말이 하도 기가 막혀 이 약을 먹고 마음을 진정시켜서 30분 후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만하면 참 훌륭합니다. 존경할 만한 어른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내 마음에 조용한 평화가 깃들기 전에는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한 가운데 하는 말은 열 번이면 열 번 다 실수하게 됩니다. 엄청난 파급효과를 내기 때문에 나도 상하고 남도 상하게 됩니다. 나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깃들기 전에는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셋째, 침묵의 지혜(the wisdom of silence)가 필요합니다. 윈스턴 처칠 경은 '입으로 나오는 말은 뱉지 않고 꿀꺽 삼켜도 배탈 나는 일이 없다'고 재미있게 말한 바 있습니다. 침묵해서 후회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말입니다. 말한 것은 후회될 때가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참은 것은 후회되는 일이 없습니다. 침묵이 필요합니다. 나 혼자 소화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조심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이성이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감정에 있습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꾸짖었더니 며느리가 끝까지 말대꾸를 합니다. 시어머니가 속이 상해서 "너 정말 꼬박꼬박 말대답 할 거냐?"하고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그랬더니 며느리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어머니, 말대답이 아니라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론과 이치가 무슨 소용입니까? 가만히 보면 똑똑한 사람이 문제가 더 많습니다. 어떤 부인은 똑똑함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잃어버립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가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그 여자보다 내가 훨씬 더 나은데 남편은 왜 나보다 그 여자를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해주었습니다. "남자는 약간 백치미(白痴美)가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 똑똑한 것은 질색입니다. 밝은 이론도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입니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원천적인 문제입니다. 기분의 문제일진대 어찌하겠습니까? 똑똑해서 망한 사람 참 많습니다. 아무쪼록 말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를 쉬게 하는 말과 분노를 격동케 하는 말이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깊이 새겨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경건을 되찾아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의 파급효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요 내가 진리를 전매특허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 말만 옳은 것이 아니요 남의 말도 얼마든지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조심스럽고 겸손하고 온유한 가운데 말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 개 같은 마음, 격동하는 마음 상태에서는 성경말씀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한참 부부싸움을 하고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러느냐"라고 해보십시오. "당장 예수 믿는 것 그만두겠다"라고 할 것입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 말합시다. 나 자신을 살피면서 겸손하게 말합시다. 과연 내가 해야 할 말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말합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그 파급효과에 대하여 책임을 질 것입니다. 언제나 섬기는 자세로 친절과 사랑을 담아서 할 것입니다. 분노한 세대를 쉬게 할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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