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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성령 충만한 사람(사도행전 2장 37~47절)

by 【고동엽】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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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한 사람(사도행전 2장 37~4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세상에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법을 길에다 비교한다면,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넓은 길도 좁게 사는 자에게는 언제나 좁은 길이 됩니다.

국법이란 가장 넓은 길이며 그보다 좁은 길은 도덕법이며 더 좁은 길은 성령의 법입니다. 국법에 걸려서 문제가 되고 있다면 그는 기독교인의 자격이 벌써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은 더욱 좁아서 이를 지키는 자는 그 어떤 법에도 저촉되지 아니합니다. 법은 그 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언제나 자유를 주며 범하는 자에게는 고통을 주는 법입니다. 넓은 길이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성령을 따르는 자의 길은 언제나 좁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를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자연은 자연 법칙에 의하여 다스리시며, 동물은 본능에 의하여 다스리고 인간은 이성에 의하여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은 성령에 의하여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에 이끌리어서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윤리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의 종교요, 신비의 종교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되라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 원동력인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듣지 못한 복음을 어찌 전하며 체험하지 못한 일에 증인으로 설 수 없고 받지 못한 생명을 어찌 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성령이 이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키라"가 아니라 "지키리라"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끊고, 버리고, 받고, 행하고, 이기고 하는 의지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시고, 감당하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16 : )

언젠가 술을 많이 하던 분이 새로 교회에 6개월간 나오셨는데 저를 만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직장대항 술마시기 대회에 출전하여 연 4년을 일등한 술독 인생입니다. 그런데 술은 계속 마시면서 아내의 권고로 교회에 나갔는데 이상한 것은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재미가 나더니 점점 술맛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술을 끊게 될까 걱정입니다"라고. 그렇습니다. 내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입맛이 변하듯 내 근본 인간의 중심에 변화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행위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은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선행은 결코 스스로의 공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할 자가 없다"(고전 12:3)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 자체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믿음도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문제가 많고 오해가 많은 예정론도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를 두고 풀이할 것이 아니라 성령론 안에서 해석해야만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정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안에서 해석하려 하면 일종의 철학이 되고 맙니다. 다만 성령의 살아 계신 역사, 그의 능동적이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역사 안에서 풀이할 때 쉽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로마서 8장을 예정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자세히 상고하면 예정장이기 이전에 실상은 성령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며 그리스도께만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생명과 신비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시작인 초대교회는 위대한 선생이나 사상과 교훈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온전히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시작되었다고 성경은 증거 하여 줍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인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점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과 생활과 모임 속에 현존해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대체로 요한복음과 요한 사상에 나타난 대로 미루어보면 성령은 역사적으로 육신을 입어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존재의 양상을 달리하여 지금 그들 중에 임재하여 계시다고 믿었고 사도 바울의 사상을 종합해 보면 그는 앞으로 재림하실 심판주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늘 존재의 양상을 달리해서 영으로 그들 안에 임재하여 계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을 받게 되면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게 되며 그의 구속 사업의 효과가 그 사람에게 나타나게 된다고 증거 하는 것이 사도 요한의 주장이고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앞에 있을 기업에 오늘 참예하게 되고 영원한 선민적인 특권에 들어간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상인 것입니다.

칼 발트는 성령과 그리스도를 주․객관적 계시로 하여 중심적인 해석을 내려서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이를 개개인의 심령에 적응시켜서 효과 있게 하고자 주관적 계시로서 역사하시는 역사가 곧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어떻든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성령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신비주의요 귀신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한 허황된 교리가 되고 맙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증거함에 생명적인 근거가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역의 연장이며 계속인 것입니다. 물론 성령은 천지 창조에, 선지자들의 예언에, 하나님의 사람들의 지혜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내가(自我)가 없어지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이 많은 듯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가 없어지고 자아의식이 흐려지며 무아(無我) 지경에 들어가는 줄로 생각하는 예가 많은데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옛 사람인 나는 없어지며 죽어집니다. 그러나 참된 자아인 하나님의 아들(롬 8 : )은 살아나고 그 하나님의 아들의 자아 인식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몽롱해지는 역사가 아니라 확실해지며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자아 의식이 희미해지고 몽롱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샤마니즘에서 온 이방 사상입니다.

또한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육신적인 모든 생각이 다 없어지고 마침내 자기가 신(神)이 되는 것 같이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것은 불교사상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충만한 사도 바울이 고리도전서 9장 27절에서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감히 그 누가 인간성을 다 초월하였다고 말할 것입니까?

성령의 역사는 마술적이거나 기계적인 역사가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격적인 역사입니다. 성령과 나는 언제나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내가 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충만함"이란 본래 물리적인 용어입니다만 성령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의 자유를 전체로 그에게 바치고 말 때 결국 그가 나를 온전히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지식도, 내 감정도, 내 의지도 다 그가 자기의 뜻대로 지배하게 될 때 이를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초대교회에 있었던 성령 충만한 역사가 어떤 것이었던가를 구체적으로 살피도록 하십시다.

먼저는 경건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는 순간 경건하여 졌습니다. 본문에는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방종이나 난동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경건하여졌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함 즉 경건이란 유대 사상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용어입니다. 하나님을 한마디로 표현해서 거룩한 하나님이라 했고 인간이 하나님께 바르게 나아가서는 자세를 종합적으로 경건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죄가 있어서 형벌 때문에 두려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다 합친 마음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자의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사회생활 전체가 성전 안에 있는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영으로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영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면서 사는 자의 생활 모습을 가르킨 말입니다. 진실과 사랑과 겸손의 모든 덕을 종합한 표현입니다.

성령에 이끌리고 보니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성전 안으로 화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사도적 권위 곧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종말적이며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그리스도의 권위에 굴복한 신앙 고백적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생활 안에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주라고 계속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행하는 사도들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에서 두려움으로 대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다음은 언어의 변화입니다. 방언의 역사가 있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모름지기 베드로 사도는 아람말로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자들이 모두 자기 나랏말로 들었습니다. 15개국 이상의 여러 지방에서 모였던 무리들이 다 자기네 말로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분의 특수한 재주도 능력도 아닙니다. 요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대화를 열어 주셔서 복음을 듣고 깨닫게 하셨다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한 내용이 아닌 자기의 정욕에 의한 이야기로서는 방언에 의한 의사 소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전해진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어떻게 내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설명되었고 복음의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안에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며 굳게 닫혔던 마음 문이 열리면서 진실한 대화가 통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성령이 역사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찬미가 있고, 감사가 있고 그리고 행복도 있었습니다. 눈물이 아니라 기쁨, 슬픔이 아니라 감사가 넘쳤던 것입니다.

대화가 끊어진 오늘의 교회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래도 성령의 역사가 계신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어 서로 통하는 교회와 방언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난 교회입니다. '이적(테라스)'이란 말은 놀라운 일을 가르키는 말이고 표적(세메이온)이란 보이지 않는 진리와 능력이 보이도록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공관 복음은 대개로 "테라스"라고 표현했고, 요한복음은 표적 즉 "세메이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적을 표적으로 아는 것이 또한 성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나타난 표적은 먼저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역사의 계속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된 증거로 나타난 것이고 또한 그들의 살아있는 믿음의 표식이며 좀더 나아가서는 사랑과 긍휼이 능력을 동반하여 이같이 기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랑, 구체적인 믿음의 증거입니다. 형식만 아니라 내용이 있고 내용만이 아니라 열매가 있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찬 예식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표적은 언제나 성례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그들의 정욕이 제거된 일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내 것을 가지고 내 것이라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기심이 제거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 의식으로 의식구조가 달라진 것입니다. "나"라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우리"라는 그리스도의 몸된 의식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자기 중심주의가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그리스도 중심주의가 다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에게로 향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웃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를 즐겨 희생하면서 자기 소유를 주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능력에 따라서 분배되는 사회가 아니라 온전히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주는 사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인간의 필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필요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이웃의 필요를 보게 되며 특히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그리스도적인 이웃의 필요에 끌려서 자기 소유에 대한 인색한 마음이 없어지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그 속에서 보람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내가 꼭 전도해야 될 사람, 내가 봉사하지 아니하면 쓰러질 사람, 내가 구원하지 아니하면 안될, 멸망될 사람이 눈앞에 보여서 견딜 수 없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필요, 교회의 필요, 사회의 필요에 끌리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즉 열심히 배웠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성령은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마술적으로 무엇을 알게 하는 역사가 절대로 아닙니다.

배워서 알되 알게 하며, 깨닫게 하며, 기억나게 하여 생활 속에서 열매 맺게 하는 역사가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충만히 받았다고 생이 저절로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배우셨고 또 그 지혜가 점차 자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교만은 벌써 성령이 떠난 자의 교만한 죄인 것입니다.

성령은 들은 바를 알게 되며 소화하게 합니다.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성령강림후) 알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는 식욕이 왕성하여져서 먹어도 더욱 더 먹고 싶어지는 것이며 그야말로 꿀맛 같은 입맛을 가지게 됩니다. 식탁 앞에서 수저를 가지고 찌그럭대는 것은 벌써 병든 증거입니다. 건강한 심령들은 열심히 모여서 더욱 배우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에 역사 하신 성령이 성경을 읽는 자의 마음에 다시 역사하심으로써 비로소 성경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의 마음 눈을 열어 주실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열심히 증거 하였습니다. 특히 환난과 역경 속에서 고난의 선교적 의미를 깨닫고 이 거룩한 역사에 자기가 가담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는 사도 바울은 괴로움을 기뻐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고난을 기뻐하며 감수하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참는 정도만이 아니라 고난을 이겼고 고난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통달한 철학이나 달관한 인생관 때문이 아니라 고난의 선교적인 의미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초대교인들은 핍박과 환난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으며 기도의 응답도 들은 것입니다. 핍박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성령이 지시하시는 길로 인도받게 된 것입니다. 핍박 중에서 담대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과 복음 선교의 큰 역사가 그 환난을 통하여 확장된다는 소중한 진리를 알게 될 때 그들은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1장에서 자기가 로마 옥에 갇히게 된 것이 결코 손해 되는 일이나 불행한 재난이 아니며 이 사건 때문에 복음에 진보가 되었다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선교적 의미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고난의 뜻을 알게 하며 성령의 역사로 그 고난을 통하여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궁극적 목적은 선교에 있으며 선교의 목적은 구원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이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미쳐서 복음은 전할 때에 새 술에 취했다고 평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을 근심케 말고 온전히 순종하여 불로 일으켜서 충만한 사람이 되고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역사가 나타날 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성령 충만한 사람(사도행전 2장 37~4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세상에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법을 길에다 비교한다면,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습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넓은 길도 좁게 사는 자에게는 언제나 좁은 길이 됩니다.

국법이란 가장 넓은 길이며 그보다 좁은 길은 도덕법이며 더 좁은 길은 성령의 법입니다. 국법에 걸려서 문제가 되고 있다면 그는 기독교인의 자격이 벌써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은 더욱 좁아서 이를 지키는 자는 그 어떤 법에도 저촉되지 아니합니다. 법은 그 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언제나 자유를 주며 범하는 자에게는 고통을 주는 법입니다. 넓은 길이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성령을 따르는 자의 길은 언제나 좁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를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자연은 자연 법칙에 의하여 다스리시며, 동물은 본능에 의하여 다스리고 인간은 이성에 의하여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은 성령에 의하여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에 이끌리어서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윤리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의 종교요, 신비의 종교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되라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 원동력인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듣지 못한 복음을 어찌 전하며 체험하지 못한 일에 증인으로 설 수 없고 받지 못한 생명을 어찌 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성령이 이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키라"가 아니라 "지키리라"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끊고, 버리고, 받고, 행하고, 이기고 하는 의지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시고, 감당하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16 : )

언젠가 술을 많이 하던 분이 새로 교회에 6개월간 나오셨는데 저를 만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직장대항 술마시기 대회에 출전하여 연 4년을 일등한 술독 인생입니다. 그런데 술은 계속 마시면서 아내의 권고로 교회에 나갔는데 이상한 것은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재미가 나더니 점점 술맛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술을 끊게 될까 걱정입니다"라고. 그렇습니다. 내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입맛이 변하듯 내 근본 인간의 중심에 변화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행위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은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선행은 결코 스스로의 공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할 자가 없다"(고전 12:3)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 자체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믿음도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문제가 많고 오해가 많은 예정론도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를 두고 풀이할 것이 아니라 성령론 안에서 해석해야만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정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안에서 해석하려 하면 일종의 철학이 되고 맙니다. 다만 성령의 살아 계신 역사, 그의 능동적이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역사 안에서 풀이할 때 쉽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로마서 8장을 예정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자세히 상고하면 예정장이기 이전에 실상은 성령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며 그리스도께만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생명과 신비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시작인 초대교회는 위대한 선생이나 사상과 교훈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온전히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시작되었다고 성경은 증거 하여 줍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인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점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과 생활과 모임 속에 현존해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대체로 요한복음과 요한 사상에 나타난 대로 미루어보면 성령은 역사적으로 육신을 입어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존재의 양상을 달리하여 지금 그들 중에 임재하여 계시다고 믿었고 사도 바울의 사상을 종합해 보면 그는 앞으로 재림하실 심판주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늘 존재의 양상을 달리해서 영으로 그들 안에 임재하여 계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을 받게 되면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게 되며 그의 구속 사업의 효과가 그 사람에게 나타나게 된다고 증거 하는 것이 사도 요한의 주장이고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앞에 있을 기업에 오늘 참예하게 되고 영원한 선민적인 특권에 들어간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상인 것입니다.

칼 발트는 성령과 그리스도를 주․객관적 계시로 하여 중심적인 해석을 내려서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이를 개개인의 심령에 적응시켜서 효과 있게 하고자 주관적 계시로서 역사하시는 역사가 곧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어떻든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성령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신비주의요 귀신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한 허황된 교리가 되고 맙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증거함에 생명적인 근거가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역의 연장이며 계속인 것입니다. 물론 성령은 천지 창조에, 선지자들의 예언에, 하나님의 사람들의 지혜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내가(自我)가 없어지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이 많은 듯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가 없어지고 자아의식이 흐려지며 무아(無我) 지경에 들어가는 줄로 생각하는 예가 많은데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옛 사람인 나는 없어지며 죽어집니다. 그러나 참된 자아인 하나님의 아들(롬 8 : )은 살아나고 그 하나님의 아들의 자아 인식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몽롱해지는 역사가 아니라 확실해지며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자아 의식이 희미해지고 몽롱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샤마니즘에서 온 이방 사상입니다.

또한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육신적인 모든 생각이 다 없어지고 마침내 자기가 신(神)이 되는 것 같이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것은 불교사상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충만한 사도 바울이 고리도전서 9장 27절에서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감히 그 누가 인간성을 다 초월하였다고 말할 것입니까?

성령의 역사는 마술적이거나 기계적인 역사가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격적인 역사입니다. 성령과 나는 언제나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내가 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충만함"이란 본래 물리적인 용어입니다만 성령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의 자유를 전체로 그에게 바치고 말 때 결국 그가 나를 온전히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지식도, 내 감정도, 내 의지도 다 그가 자기의 뜻대로 지배하게 될 때 이를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초대교회에 있었던 성령 충만한 역사가 어떤 것이었던가를 구체적으로 살피도록 하십시다.

먼저는 경건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는 순간 경건하여 졌습니다. 본문에는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방종이나 난동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경건하여졌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함 즉 경건이란 유대 사상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용어입니다. 하나님을 한마디로 표현해서 거룩한 하나님이라 했고 인간이 하나님께 바르게 나아가서는 자세를 종합적으로 경건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죄가 있어서 형벌 때문에 두려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다 합친 마음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자의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사회생활 전체가 성전 안에 있는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영으로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영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면서 사는 자의 생활 모습을 가르킨 말입니다. 진실과 사랑과 겸손의 모든 덕을 종합한 표현입니다.

성령에 이끌리고 보니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성전 안으로 화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사도적 권위 곧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종말적이며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그리스도의 권위에 굴복한 신앙 고백적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생활 안에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주라고 계속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행하는 사도들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에서 두려움으로 대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다음은 언어의 변화입니다. 방언의 역사가 있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모름지기 베드로 사도는 아람말로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자들이 모두 자기 나랏말로 들었습니다. 15개국 이상의 여러 지방에서 모였던 무리들이 다 자기네 말로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분의 특수한 재주도 능력도 아닙니다. 요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대화를 열어 주셔서 복음을 듣고 깨닫게 하셨다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한 내용이 아닌 자기의 정욕에 의한 이야기로서는 방언에 의한 의사 소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전해진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어떻게 내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설명되었고 복음의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안에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며 굳게 닫혔던 마음 문이 열리면서 진실한 대화가 통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성령이 역사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찬미가 있고, 감사가 있고 그리고 행복도 있었습니다. 눈물이 아니라 기쁨, 슬픔이 아니라 감사가 넘쳤던 것입니다.

대화가 끊어진 오늘의 교회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래도 성령의 역사가 계신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어 서로 통하는 교회와 방언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난 교회입니다. '이적(테라스)'이란 말은 놀라운 일을 가르키는 말이고 표적(세메이온)이란 보이지 않는 진리와 능력이 보이도록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공관 복음은 대개로 "테라스"라고 표현했고, 요한복음은 표적 즉 "세메이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적을 표적으로 아는 것이 또한 성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나타난 표적은 먼저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역사의 계속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된 증거로 나타난 것이고 또한 그들의 살아있는 믿음의 표식이며 좀더 나아가서는 사랑과 긍휼이 능력을 동반하여 이같이 기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랑, 구체적인 믿음의 증거입니다. 형식만 아니라 내용이 있고 내용만이 아니라 열매가 있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찬 예식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표적은 언제나 성례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그들의 정욕이 제거된 일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내 것을 가지고 내 것이라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기심이 제거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 의식으로 의식구조가 달라진 것입니다. "나"라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우리"라는 그리스도의 몸된 의식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자기 중심주의가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그리스도 중심주의가 다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에게로 향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웃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를 즐겨 희생하면서 자기 소유를 주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능력에 따라서 분배되는 사회가 아니라 온전히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주는 사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인간의 필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필요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이웃의 필요를 보게 되며 특히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그리스도적인 이웃의 필요에 끌려서 자기 소유에 대한 인색한 마음이 없어지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그 속에서 보람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내가 꼭 전도해야 될 사람, 내가 봉사하지 아니하면 쓰러질 사람, 내가 구원하지 아니하면 안될, 멸망될 사람이 눈앞에 보여서 견딜 수 없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필요, 교회의 필요, 사회의 필요에 끌리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즉 열심히 배웠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성령은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마술적으로 무엇을 알게 하는 역사가 절대로 아닙니다.

배워서 알되 알게 하며, 깨닫게 하며, 기억나게 하여 생활 속에서 열매 맺게 하는 역사가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충만히 받았다고 생이 저절로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배우셨고 또 그 지혜가 점차 자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교만은 벌써 성령이 떠난 자의 교만한 죄인 것입니다.

성령은 들은 바를 알게 되며 소화하게 합니다.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성령강림후) 알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는 식욕이 왕성하여져서 먹어도 더욱 더 먹고 싶어지는 것이며 그야말로 꿀맛 같은 입맛을 가지게 됩니다. 식탁 앞에서 수저를 가지고 찌그럭대는 것은 벌써 병든 증거입니다. 건강한 심령들은 열심히 모여서 더욱 배우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에 역사 하신 성령이 성경을 읽는 자의 마음에 다시 역사하심으로써 비로소 성경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의 마음 눈을 열어 주실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열심히 증거 하였습니다. 특히 환난과 역경 속에서 고난의 선교적 의미를 깨닫고 이 거룩한 역사에 자기가 가담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는 사도 바울은 괴로움을 기뻐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고난을 기뻐하며 감수하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참는 정도만이 아니라 고난을 이겼고 고난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통달한 철학이나 달관한 인생관 때문이 아니라 고난의 선교적인 의미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초대교인들은 핍박과 환난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으며 기도의 응답도 들은 것입니다. 핍박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성령이 지시하시는 길로 인도받게 된 것입니다. 핍박 중에서 담대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과 복음 선교의 큰 역사가 그 환난을 통하여 확장된다는 소중한 진리를 알게 될 때 그들은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1장에서 자기가 로마 옥에 갇히게 된 것이 결코 손해 되는 일이나 불행한 재난이 아니며 이 사건 때문에 복음에 진보가 되었다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선교적 의미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고난의 뜻을 알게 하며 성령의 역사로 그 고난을 통하여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궁극적 목적은 선교에 있으며 선교의 목적은 구원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이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미쳐서 복음은 전할 때에 새 술에 취했다고 평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을 근심케 말고 온전히 순종하여 불로 일으켜서 충만한 사람이 되고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역사가 나타날 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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