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문명과 정치제도
<개선문>
로마문명은 현재의 로마시를 중심으로 출발했다. 그 땅은 그리스의 서쪽에 인접해 있으며 똑같은 지중해적 자연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를 개조한 것이다. 로마인은(인도-유럽족) 그리스인과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인 부족과 함께 기원전 2000년경에 이동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다. 로마는 처음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직접 지배했지만 기원전 5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이어 동료인 이탈리아인과 경쟁을 했는데 기원전 3세기전반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대부분 통일했다. 이 무렵 동방에서는 광대한 헬레니즘 세계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후 2~3세기 사이에 로마는 헬레니즘 세게에 세력을 뻗쳐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지중해 전역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고 있었다.
로마도 자영농민이 중장보병으로서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로마는 이들의 힘으로 지중해 전체를 통합하고 이어 포에니전쟁을 통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여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북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해상제국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세운 상업국가인데, 로마는 100년동안 3차례에 걸친 전쟁끝에 카르타고를 격파했다.
로마의 발전은 1세기말에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거의 완료되었다. 포에니전쟁에서 로마는 여러 차례 궁지에 몰렸고 적장 한니발에게 농락을 당했다. 하지만 강력한 상업제국이었던 카르타고의 해군력에 대항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호적수를 만나 단련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한니발군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잔인성을 몸에 익혔다. 이것이 제국의 행동방식이다.(일본이 조선에 행한 악독한 짓도 제국의 행동방식이라면 제국주의가 얼마나 인류에게 해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내란
계속된 영토확장은 로마사회를 변질시켰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사이에 로마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이어졌다. 그 전반기에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간의 갈등과 투쟁이 주제였다. 정복과 방위의 주된 역할을 맡은 중장보병인 평민이 강력한 발언권 을 가지게 되었다.
귀족의 양보가 계속되어 평민의 정치적 권리는 점차 인정을 받게 되고 민주 정치가 실현되었다. 로마는 그리스와는 달리 농업에 중점을 둔 사회였는데 영토 확장과 더불어 대농장을 가진 유력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유력자들은 정복에 의해 노예를 증가시켰다. 중소 농민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개혁도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약1세기 동안 로마는 유력자들 사이의 항쟁으로 얼룩져서 이 시기를 내란의 1세기라고 부른다.
내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케사르(시저)와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이다. 시저는 군사 원정으로 세력을 길러 독재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후 부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쟁취했다.
내란의 1세기 동안 로마인의 국가는 지중해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적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결전에 나섰다.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을때 로마의 지중해 지배는 결정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린다.
로마 문명 (제국의 흥망과 그리스도교의 성립)
로마제국의 성립
<성베드로 성당>
로마 제국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오리엔트의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리스인의 헬레니즘 세계보다 넓고 훨씬 정비된 제국이었다. 헬레니즘에서 생겨난 세계지배라는 이상이 로마인에 의해 실현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기원후 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의 통치는 순조로눠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이때를 `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특히 2세기에는 5대에 걸친 황제 하에서 영토도 최대로 확대되었는데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건축물들이 이시기에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원형극장이나 다리, 공중 목욕탕 등을 즐겨 만들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스포츠나 연기를 보고 즐기며 풍요롭게 생활했다. 기원후 79년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매장되었던 품페이가 18세기에 발굴되었는데 이 도시를 보면 당시 시민들의 수준 높은 생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지나치게 확장되었다.일단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회복이 어려웠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다른 민족이 침입하자 군사력이 부족했다. 3세기가 되자 혼란이 시작되었다. 제국 안의 모든 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융화를 꾀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제국은 황제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오리엔트풍의 전제 국가로 변화를 시했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제국은 4세기 말에 완전히 분열하여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었다. 동로마 제국은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북방에서 이민족(게르마니아인)이 침입하는 가운데 476년에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 문명을 계승하여 이후 1000년지속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성립
<카타콤 내부>
로마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제국은 종교를 이용하여 속주들의 단결을 꾀했다. 원래 로마는 종교에 관대한 편이었지만 그리스도교는 황제 숭배를 거절한다하여 심한 박해를 가했다.하지만 박해속에서도 신자의 수는 줄지않고 오히려 그전보다 증가하여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로마가 무너지기전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이용하여 제국을 재건 하기위해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이어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를 국교로 정하였다.
(동방의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생긴 것이 바로 그리스 정교회인것이다.)
콘스탄티노플 ; 13세기 십자군 원정 무렵인 1240년경 비잔틴은 많은 보물을 십자군들에게 약탈 당했다. 또한 1453년에는 자랑거리이던 난공불락의 도시 성벽들이 술탄 메멧 2세(오스만 트루커제국의 왕)의 포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1. 로마의 문화사적 위치와 그 성격
<베네치아광장>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Caesarean operation이라는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딸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정치제도와 법률
1) 정치적 골격
<로마공회장>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모든 용어들을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임.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영국을 제외한 모든 근대 국가(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률적 기저가 됨.
2) 로마법의 발달 단계
*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그것은 12표법.
㉠ 불문법: 종교적 관습과 혼합되어 매우 엄격한 神法 (jus divinum)의 시기.
㉡ 법의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신법은 시민법 (jus civile)으로 됨. 12표법을 선두로 법과 관습의 성문화 시작.
㉢ 로마의 법률 기관의 확장. Praetor직 창설.
㉣ 영토적 팽창과 함께 이민족의 관습이 고려되기 시작. 따라서 로마의 사법제도는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
㉤ 이리하여 만민법 (jus gentium)이 발생.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으로 완성.
㉥ 자연법 (jus naturale) :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거기서부터 유래. 실정법보다 우월한 고정법임. 나아가 자연법은 자연권에 연결.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된 로마법 대전 대성. 이가 각국의 입법의 근간이 됨.
3) 즉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구성.
㉠ 시민법: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 시민법은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
㉡ 만민법: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을 정의함. 이 법은 시민법보다는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의 이민족 거주자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 보충.
㉢ 자연법: 이 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믈임. 스토아 철학에 그원을 둠.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락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치체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하면서, 이 법은 국가보다 앞서며,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고상한 업적에 속한다.
로마문명과 정치제도
<개선문>
로마문명은 현재의 로마시를 중심으로 출발했다. 그 땅은 그리스의 서쪽에 인접해 있으며 똑같은 지중해적 자연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를 개조한 것이다. 로마인은(인도-유럽족) 그리스인과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인 부족과 함께 기원전 2000년경에 이동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다. 로마는 처음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직접 지배했지만 기원전 5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이어 동료인 이탈리아인과 경쟁을 했는데 기원전 3세기전반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대부분 통일했다. 이 무렵 동방에서는 광대한 헬레니즘 세계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후 2~3세기 사이에 로마는 헬레니즘 세게에 세력을 뻗쳐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지중해 전역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고 있었다.
로마도 자영농민이 중장보병으로서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로마는 이들의 힘으로 지중해 전체를 통합하고 이어 포에니전쟁을 통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여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북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해상제국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세운 상업국가인데, 로마는 100년동안 3차례에 걸친 전쟁끝에 카르타고를 격파했다.
로마의 발전은 1세기말에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거의 완료되었다. 포에니전쟁에서 로마는 여러 차례 궁지에 몰렸고 적장 한니발에게 농락을 당했다. 하지만 강력한 상업제국이었던 카르타고의 해군력에 대항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호적수를 만나 단련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한니발군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잔인성을 몸에 익혔다. 이것이 제국의 행동방식이다.(일본이 조선에 행한 악독한 짓도 제국의 행동방식이라면 제국주의가 얼마나 인류에게 해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내란
계속된 영토확장은 로마사회를 변질시켰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사이에 로마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이어졌다. 그 전반기에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간의 갈등과 투쟁이 주제였다. 정복과 방위의 주된 역할을 맡은 중장보병인 평민이 강력한 발언권 을 가지게 되었다.
귀족의 양보가 계속되어 평민의 정치적 권리는 점차 인정을 받게 되고 민주 정치가 실현되었다. 로마는 그리스와는 달리 농업에 중점을 둔 사회였는데 영토 확장과 더불어 대농장을 가진 유력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유력자들은 정복에 의해 노예를 증가시켰다. 중소 농민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개혁도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약1세기 동안 로마는 유력자들 사이의 항쟁으로 얼룩져서 이 시기를 내란의 1세기라고 부른다.
내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케사르(시저)와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이다. 시저는 군사 원정으로 세력을 길러 독재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후 부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쟁취했다.
내란의 1세기 동안 로마인의 국가는 지중해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적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결전에 나섰다.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을때 로마의 지중해 지배는 결정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린다.
로마 문명 (제국의 흥망과 그리스도교의 성립)
로마제국의 성립
<성베드로 성당>
로마 제국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오리엔트의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리스인의 헬레니즘 세계보다 넓고 훨씬 정비된 제국이었다. 헬레니즘에서 생겨난 세계지배라는 이상이 로마인에 의해 실현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기원후 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의 통치는 순조로눠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이때를 `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특히 2세기에는 5대에 걸친 황제 하에서 영토도 최대로 확대되었는데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건축물들이 이시기에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원형극장이나 다리, 공중 목욕탕 등을 즐겨 만들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스포츠나 연기를 보고 즐기며 풍요롭게 생활했다. 기원후 79년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매장되었던 품페이가 18세기에 발굴되었는데 이 도시를 보면 당시 시민들의 수준 높은 생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지나치게 확장되었다.일단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회복이 어려웠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다른 민족이 침입하자 군사력이 부족했다. 3세기가 되자 혼란이 시작되었다. 제국 안의 모든 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융화를 꾀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제국은 황제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오리엔트풍의 전제 국가로 변화를 시했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제국은 4세기 말에 완전히 분열하여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었다. 동로마 제국은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북방에서 이민족(게르마니아인)이 침입하는 가운데 476년에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 문명을 계승하여 이후 1000년지속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성립
<카타콤 내부>
로마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제국은 종교를 이용하여 속주들의 단결을 꾀했다. 원래 로마는 종교에 관대한 편이었지만 그리스도교는 황제 숭배를 거절한다하여 심한 박해를 가했다.하지만 박해속에서도 신자의 수는 줄지않고 오히려 그전보다 증가하여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로마가 무너지기전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이용하여 제국을 재건 하기위해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이어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를 국교로 정하였다.
(동방의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생긴 것이 바로 그리스 정교회인것이다.)
콘스탄티노플 ; 13세기 십자군 원정 무렵인 1240년경 비잔틴은 많은 보물을 십자군들에게 약탈 당했다. 또한 1453년에는 자랑거리이던 난공불락의 도시 성벽들이 술탄 메멧 2세(오스만 트루커제국의 왕)의 포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1. 로마의 문화사적 위치와 그 성격
<베네치아광장>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Caesarean operation이라는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딸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정치제도와 법률
1) 정치적 골격
<로마공회장>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모든 용어들을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임.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영국을 제외한 모든 근대 국가(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률적 기저가 됨.
2) 로마법의 발달 단계
*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그것은 12표법.
㉠ 불문법: 종교적 관습과 혼합되어 매우 엄격한 神法 (jus divinum)의 시기.
㉡ 법의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신법은 시민법 (jus civile)으로 됨. 12표법을 선두로 법과 관습의 성문화 시작.
㉢ 로마의 법률 기관의 확장. Praetor직 창설.
㉣ 영토적 팽창과 함께 이민족의 관습이 고려되기 시작. 따라서 로마의 사법제도는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
㉤ 이리하여 만민법 (jus gentium)이 발생.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으로 완성.
㉥ 자연법 (jus naturale) :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거기서부터 유래. 실정법보다 우월한 고정법임. 나아가 자연법은 자연권에 연결.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된 로마법 대전 대성. 이가 각국의 입법의 근간이 됨.
3) 즉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구성.
㉠ 시민법: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 시민법은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
㉡ 만민법: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을 정의함. 이 법은 시민법보다는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의 이민족 거주자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 보충.
㉢ 자연법: 이 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믈임. 스토아 철학에 그원을 둠.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락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치체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하면서, 이 법은 국가보다 앞서며,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고상한 업적에 속한다.
로마문명과 정치제도
<개선문>
로마문명은 현재의 로마시를 중심으로 출발했다. 그 땅은 그리스의 서쪽에 인접해 있으며 똑같은 지중해적 자연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를 개조한 것이다. 로마인은(인도-유럽족) 그리스인과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인 부족과 함께 기원전 2000년경에 이동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다. 로마는 처음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직접 지배했지만 기원전 5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이어 동료인 이탈리아인과 경쟁을 했는데 기원전 3세기전반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대부분 통일했다. 이 무렵 동방에서는 광대한 헬레니즘 세계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후 2~3세기 사이에 로마는 헬레니즘 세게에 세력을 뻗쳐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지중해 전역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고 있었다.
로마도 자영농민이 중장보병으로서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로마는 이들의 힘으로 지중해 전체를 통합하고 이어 포에니전쟁을 통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여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북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해상제국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세운 상업국가인데, 로마는 100년동안 3차례에 걸친 전쟁끝에 카르타고를 격파했다.
로마의 발전은 1세기말에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거의 완료되었다. 포에니전쟁에서 로마는 여러 차례 궁지에 몰렸고 적장 한니발에게 농락을 당했다. 하지만 강력한 상업제국이었던 카르타고의 해군력에 대항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호적수를 만나 단련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한니발군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잔인성을 몸에 익혔다. 이것이 제국의 행동방식이다.(일본이 조선에 행한 악독한 짓도 제국의 행동방식이라면 제국주의가 얼마나 인류에게 해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내란
계속된 영토확장은 로마사회를 변질시켰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사이에 로마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이어졌다. 그 전반기에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간의 갈등과 투쟁이 주제였다. 정복과 방위의 주된 역할을 맡은 중장보병인 평민이 강력한 발언권 을 가지게 되었다.
귀족의 양보가 계속되어 평민의 정치적 권리는 점차 인정을 받게 되고 민주 정치가 실현되었다. 로마는 그리스와는 달리 농업에 중점을 둔 사회였는데 영토 확장과 더불어 대농장을 가진 유력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유력자들은 정복에 의해 노예를 증가시켰다. 중소 농민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개혁도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약1세기 동안 로마는 유력자들 사이의 항쟁으로 얼룩져서 이 시기를 내란의 1세기라고 부른다.
내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케사르(시저)와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이다. 시저는 군사 원정으로 세력을 길러 독재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후 부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쟁취했다.
내란의 1세기 동안 로마인의 국가는 지중해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적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결전에 나섰다.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을때 로마의 지중해 지배는 결정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린다.
로마 문명 (제국의 흥망과 그리스도교의 성립)
로마제국의 성립
<성베드로 성당>
로마 제국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오리엔트의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리스인의 헬레니즘 세계보다 넓고 훨씬 정비된 제국이었다. 헬레니즘에서 생겨난 세계지배라는 이상이 로마인에 의해 실현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기원후 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의 통치는 순조로눠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이때를 `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특히 2세기에는 5대에 걸친 황제 하에서 영토도 최대로 확대되었는데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건축물들이 이시기에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원형극장이나 다리, 공중 목욕탕 등을 즐겨 만들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스포츠나 연기를 보고 즐기며 풍요롭게 생활했다. 기원후 79년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매장되었던 품페이가 18세기에 발굴되었는데 이 도시를 보면 당시 시민들의 수준 높은 생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지나치게 확장되었다.일단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회복이 어려웠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다른 민족이 침입하자 군사력이 부족했다. 3세기가 되자 혼란이 시작되었다. 제국 안의 모든 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융화를 꾀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제국은 황제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오리엔트풍의 전제 국가로 변화를 시했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제국은 4세기 말에 완전히 분열하여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었다. 동로마 제국은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북방에서 이민족(게르마니아인)이 침입하는 가운데 476년에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 문명을 계승하여 이후 1000년지속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성립
<카타콤 내부>
로마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제국은 종교를 이용하여 속주들의 단결을 꾀했다. 원래 로마는 종교에 관대한 편이었지만 그리스도교는 황제 숭배를 거절한다하여 심한 박해를 가했다.하지만 박해속에서도 신자의 수는 줄지않고 오히려 그전보다 증가하여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로마가 무너지기전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이용하여 제국을 재건 하기위해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이어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를 국교로 정하였다.
(동방의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생긴 것이 바로 그리스 정교회인것이다.)
콘스탄티노플 ; 13세기 십자군 원정 무렵인 1240년경 비잔틴은 많은 보물을 십자군들에게 약탈 당했다. 또한 1453년에는 자랑거리이던 난공불락의 도시 성벽들이 술탄 메멧 2세(오스만 트루커제국의 왕)의 포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1. 로마의 문화사적 위치와 그 성격
<베네치아광장>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Caesarean operation이라는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딸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정치제도와 법률
1) 정치적 골격
<로마공회장>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모든 용어들을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임.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영국을 제외한 모든 근대 국가(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률적 기저가 됨.
2) 로마법의 발달 단계
*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그것은 12표법.
㉠ 불문법: 종교적 관습과 혼합되어 매우 엄격한 神法 (jus divinum)의 시기.
㉡ 법의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신법은 시민법 (jus civile)으로 됨. 12표법을 선두로 법과 관습의 성문화 시작.
㉢ 로마의 법률 기관의 확장. Praetor직 창설.
㉣ 영토적 팽창과 함께 이민족의 관습이 고려되기 시작. 따라서 로마의 사법제도는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
㉤ 이리하여 만민법 (jus gentium)이 발생.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으로 완성.
㉥ 자연법 (jus naturale) :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거기서부터 유래. 실정법보다 우월한 고정법임. 나아가 자연법은 자연권에 연결.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된 로마법 대전 대성. 이가 각국의 입법의 근간이 됨.
3) 즉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구성.
㉠ 시민법: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 시민법은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
㉡ 만민법: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을 정의함. 이 법은 시민법보다는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의 이민족 거주자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 보충.
㉢ 자연법: 이 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믈임. 스토아 철학에 그원을 둠.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락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치체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하면서, 이 법은 국가보다 앞서며,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고상한 업적에 속한다.
로마문명과 정치제도
<개선문>
로마문명은 현재의 로마시를 중심으로 출발했다. 그 땅은 그리스의 서쪽에 인접해 있으며 똑같은 지중해적 자연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를 개조한 것이다. 로마인은(인도-유럽족) 그리스인과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인 부족과 함께 기원전 2000년경에 이동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다. 로마는 처음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직접 지배했지만 기원전 5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이어 동료인 이탈리아인과 경쟁을 했는데 기원전 3세기전반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대부분 통일했다. 이 무렵 동방에서는 광대한 헬레니즘 세계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후 2~3세기 사이에 로마는 헬레니즘 세게에 세력을 뻗쳐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지중해 전역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고 있었다.
로마도 자영농민이 중장보병으로서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로마는 이들의 힘으로 지중해 전체를 통합하고 이어 포에니전쟁을 통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여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북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해상제국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세운 상업국가인데, 로마는 100년동안 3차례에 걸친 전쟁끝에 카르타고를 격파했다.
로마의 발전은 1세기말에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거의 완료되었다. 포에니전쟁에서 로마는 여러 차례 궁지에 몰렸고 적장 한니발에게 농락을 당했다. 하지만 강력한 상업제국이었던 카르타고의 해군력에 대항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호적수를 만나 단련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한니발군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잔인성을 몸에 익혔다. 이것이 제국의 행동방식이다.(일본이 조선에 행한 악독한 짓도 제국의 행동방식이라면 제국주의가 얼마나 인류에게 해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내란
계속된 영토확장은 로마사회를 변질시켰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사이에 로마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이어졌다. 그 전반기에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간의 갈등과 투쟁이 주제였다. 정복과 방위의 주된 역할을 맡은 중장보병인 평민이 강력한 발언권 을 가지게 되었다.
귀족의 양보가 계속되어 평민의 정치적 권리는 점차 인정을 받게 되고 민주 정치가 실현되었다. 로마는 그리스와는 달리 농업에 중점을 둔 사회였는데 영토 확장과 더불어 대농장을 가진 유력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유력자들은 정복에 의해 노예를 증가시켰다. 중소 농민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개혁도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약1세기 동안 로마는 유력자들 사이의 항쟁으로 얼룩져서 이 시기를 내란의 1세기라고 부른다.
내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케사르(시저)와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이다. 시저는 군사 원정으로 세력을 길러 독재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후 부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쟁취했다.
내란의 1세기 동안 로마인의 국가는 지중해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적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결전에 나섰다.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을때 로마의 지중해 지배는 결정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린다.
로마 문명 (제국의 흥망과 그리스도교의 성립)
로마제국의 성립
<성베드로 성당>
로마 제국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오리엔트의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리스인의 헬레니즘 세계보다 넓고 훨씬 정비된 제국이었다. 헬레니즘에서 생겨난 세계지배라는 이상이 로마인에 의해 실현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기원후 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의 통치는 순조로눠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이때를 `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특히 2세기에는 5대에 걸친 황제 하에서 영토도 최대로 확대되었는데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건축물들이 이시기에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원형극장이나 다리, 공중 목욕탕 등을 즐겨 만들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스포츠나 연기를 보고 즐기며 풍요롭게 생활했다. 기원후 79년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매장되었던 품페이가 18세기에 발굴되었는데 이 도시를 보면 당시 시민들의 수준 높은 생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지나치게 확장되었다.일단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회복이 어려웠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다른 민족이 침입하자 군사력이 부족했다. 3세기가 되자 혼란이 시작되었다. 제국 안의 모든 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융화를 꾀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제국은 황제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오리엔트풍의 전제 국가로 변화를 시했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제국은 4세기 말에 완전히 분열하여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었다. 동로마 제국은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북방에서 이민족(게르마니아인)이 침입하는 가운데 476년에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 문명을 계승하여 이후 1000년지속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성립
<카타콤 내부>
로마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제국은 종교를 이용하여 속주들의 단결을 꾀했다. 원래 로마는 종교에 관대한 편이었지만 그리스도교는 황제 숭배를 거절한다하여 심한 박해를 가했다.하지만 박해속에서도 신자의 수는 줄지않고 오히려 그전보다 증가하여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로마가 무너지기전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이용하여 제국을 재건 하기위해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이어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를 국교로 정하였다.
(동방의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생긴 것이 바로 그리스 정교회인것이다.)
콘스탄티노플 ; 13세기 십자군 원정 무렵인 1240년경 비잔틴은 많은 보물을 십자군들에게 약탈 당했다. 또한 1453년에는 자랑거리이던 난공불락의 도시 성벽들이 술탄 메멧 2세(오스만 트루커제국의 왕)의 포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1. 로마의 문화사적 위치와 그 성격
<베네치아광장>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Caesarean operation이라는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딸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정치제도와 법률
1) 정치적 골격
<로마공회장>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모든 용어들을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임.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영국을 제외한 모든 근대 국가(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률적 기저가 됨.
2) 로마법의 발달 단계
*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그것은 12표법.
㉠ 불문법: 종교적 관습과 혼합되어 매우 엄격한 神法 (jus divinum)의 시기.
㉡ 법의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신법은 시민법 (jus civile)으로 됨. 12표법을 선두로 법과 관습의 성문화 시작.
㉢ 로마의 법률 기관의 확장. Praetor직 창설.
㉣ 영토적 팽창과 함께 이민족의 관습이 고려되기 시작. 따라서 로마의 사법제도는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
㉤ 이리하여 만민법 (jus gentium)이 발생.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으로 완성.
㉥ 자연법 (jus naturale) :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거기서부터 유래. 실정법보다 우월한 고정법임. 나아가 자연법은 자연권에 연결.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된 로마법 대전 대성. 이가 각국의 입법의 근간이 됨.
3) 즉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구성.
㉠ 시민법: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 시민법은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
㉡ 만민법: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을 정의함. 이 법은 시민법보다는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의 이민족 거주자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 보충.
㉢ 자연법: 이 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믈임. 스토아 철학에 그원을 둠.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락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치체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하면서, 이 법은 국가보다 앞서며,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고상한 업적에 속한다.
로마문명과 정치제도
<개선문>
로마문명은 현재의 로마시를 중심으로 출발했다. 그 땅은 그리스의 서쪽에 인접해 있으며 똑같은 지중해적 자연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를 개조한 것이다. 로마인은(인도-유럽족) 그리스인과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인 부족과 함께 기원전 2000년경에 이동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다. 로마는 처음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직접 지배했지만 기원전 5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이어 동료인 이탈리아인과 경쟁을 했는데 기원전 3세기전반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대부분 통일했다. 이 무렵 동방에서는 광대한 헬레니즘 세계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후 2~3세기 사이에 로마는 헬레니즘 세게에 세력을 뻗쳐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지중해 전역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고 있었다.
로마도 자영농민이 중장보병으로서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로마는 이들의 힘으로 지중해 전체를 통합하고 이어 포에니전쟁을 통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여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북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해상제국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세운 상업국가인데, 로마는 100년동안 3차례에 걸친 전쟁끝에 카르타고를 격파했다.
로마의 발전은 1세기말에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거의 완료되었다. 포에니전쟁에서 로마는 여러 차례 궁지에 몰렸고 적장 한니발에게 농락을 당했다. 하지만 강력한 상업제국이었던 카르타고의 해군력에 대항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호적수를 만나 단련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한니발군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잔인성을 몸에 익혔다. 이것이 제국의 행동방식이다.(일본이 조선에 행한 악독한 짓도 제국의 행동방식이라면 제국주의가 얼마나 인류에게 해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내란
계속된 영토확장은 로마사회를 변질시켰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사이에 로마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이어졌다. 그 전반기에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간의 갈등과 투쟁이 주제였다. 정복과 방위의 주된 역할을 맡은 중장보병인 평민이 강력한 발언권 을 가지게 되었다.
귀족의 양보가 계속되어 평민의 정치적 권리는 점차 인정을 받게 되고 민주 정치가 실현되었다. 로마는 그리스와는 달리 농업에 중점을 둔 사회였는데 영토 확장과 더불어 대농장을 가진 유력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유력자들은 정복에 의해 노예를 증가시켰다. 중소 농민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개혁도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약1세기 동안 로마는 유력자들 사이의 항쟁으로 얼룩져서 이 시기를 내란의 1세기라고 부른다.
내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케사르(시저)와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이다. 시저는 군사 원정으로 세력을 길러 독재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후 부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쟁취했다.
내란의 1세기 동안 로마인의 국가는 지중해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적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결전에 나섰다.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을때 로마의 지중해 지배는 결정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린다.
로마 문명 (제국의 흥망과 그리스도교의 성립)
로마제국의 성립
<성베드로 성당>
로마 제국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오리엔트의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리스인의 헬레니즘 세계보다 넓고 훨씬 정비된 제국이었다. 헬레니즘에서 생겨난 세계지배라는 이상이 로마인에 의해 실현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기원후 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의 통치는 순조로눠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이때를 `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특히 2세기에는 5대에 걸친 황제 하에서 영토도 최대로 확대되었는데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건축물들이 이시기에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원형극장이나 다리, 공중 목욕탕 등을 즐겨 만들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스포츠나 연기를 보고 즐기며 풍요롭게 생활했다. 기원후 79년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매장되었던 품페이가 18세기에 발굴되었는데 이 도시를 보면 당시 시민들의 수준 높은 생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지나치게 확장되었다.일단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회복이 어려웠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다른 민족이 침입하자 군사력이 부족했다. 3세기가 되자 혼란이 시작되었다. 제국 안의 모든 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융화를 꾀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제국은 황제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오리엔트풍의 전제 국가로 변화를 시했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제국은 4세기 말에 완전히 분열하여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었다. 동로마 제국은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북방에서 이민족(게르마니아인)이 침입하는 가운데 476년에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 문명을 계승하여 이후 1000년지속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성립
<카타콤 내부>
로마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제국은 종교를 이용하여 속주들의 단결을 꾀했다. 원래 로마는 종교에 관대한 편이었지만 그리스도교는 황제 숭배를 거절한다하여 심한 박해를 가했다.하지만 박해속에서도 신자의 수는 줄지않고 오히려 그전보다 증가하여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로마가 무너지기전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이용하여 제국을 재건 하기위해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이어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를 국교로 정하였다.
(동방의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생긴 것이 바로 그리스 정교회인것이다.)
콘스탄티노플 ; 13세기 십자군 원정 무렵인 1240년경 비잔틴은 많은 보물을 십자군들에게 약탈 당했다. 또한 1453년에는 자랑거리이던 난공불락의 도시 성벽들이 술탄 메멧 2세(오스만 트루커제국의 왕)의 포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1. 로마의 문화사적 위치와 그 성격
<베네치아광장>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Caesarean operation이라는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딸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정치제도와 법률
1) 정치적 골격
<로마공회장>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모든 용어들을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임.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영국을 제외한 모든 근대 국가(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률적 기저가 됨.
2) 로마법의 발달 단계
*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그것은 12표법.
㉠ 불문법: 종교적 관습과 혼합되어 매우 엄격한 神法 (jus divinum)의 시기.
㉡ 법의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신법은 시민법 (jus civile)으로 됨. 12표법을 선두로 법과 관습의 성문화 시작.
㉢ 로마의 법률 기관의 확장. Praetor직 창설.
㉣ 영토적 팽창과 함께 이민족의 관습이 고려되기 시작. 따라서 로마의 사법제도는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
㉤ 이리하여 만민법 (jus gentium)이 발생.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으로 완성.
㉥ 자연법 (jus naturale) :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거기서부터 유래. 실정법보다 우월한 고정법임. 나아가 자연법은 자연권에 연결.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된 로마법 대전 대성. 이가 각국의 입법의 근간이 됨.
3) 즉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구성.
㉠ 시민법: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 시민법은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
㉡ 만민법: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을 정의함. 이 법은 시민법보다는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의 이민족 거주자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 보충.
㉢ 자연법: 이 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믈임. 스토아 철학에 그원을 둠.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락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치체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하면서, 이 법은 국가보다 앞서며,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고상한 업적에 속한다.
로마문명과 정치제도
<개선문>
로마문명은 현재의 로마시를 중심으로 출발했다. 그 땅은 그리스의 서쪽에 인접해 있으며 똑같은 지중해적 자연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를 개조한 것이다. 로마인은(인도-유럽족) 그리스인과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인 부족과 함께 기원전 2000년경에 이동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다. 로마는 처음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직접 지배했지만 기원전 5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이어 동료인 이탈리아인과 경쟁을 했는데 기원전 3세기전반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대부분 통일했다. 이 무렵 동방에서는 광대한 헬레니즘 세계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후 2~3세기 사이에 로마는 헬레니즘 세게에 세력을 뻗쳐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지중해 전역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고 있었다.
로마도 자영농민이 중장보병으로서 군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로마는 이들의 힘으로 지중해 전체를 통합하고 이어 포에니전쟁을 통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여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북아프리카에 근거를 둔 해상제국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세운 상업국가인데, 로마는 100년동안 3차례에 걸친 전쟁끝에 카르타고를 격파했다.
로마의 발전은 1세기말에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거의 완료되었다. 포에니전쟁에서 로마는 여러 차례 궁지에 몰렸고 적장 한니발에게 농락을 당했다. 하지만 강력한 상업제국이었던 카르타고의 해군력에 대항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호적수를 만나 단련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한니발군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잔인성을 몸에 익혔다. 이것이 제국의 행동방식이다.(일본이 조선에 행한 악독한 짓도 제국의 행동방식이라면 제국주의가 얼마나 인류에게 해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내란
계속된 영토확장은 로마사회를 변질시켰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사이에 로마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이어졌다. 그 전반기에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간의 갈등과 투쟁이 주제였다. 정복과 방위의 주된 역할을 맡은 중장보병인 평민이 강력한 발언권 을 가지게 되었다.
귀족의 양보가 계속되어 평민의 정치적 권리는 점차 인정을 받게 되고 민주 정치가 실현되었다. 로마는 그리스와는 달리 농업에 중점을 둔 사회였는데 영토 확장과 더불어 대농장을 가진 유력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유력자들은 정복에 의해 노예를 증가시켰다. 중소 농민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개혁도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약1세기 동안 로마는 유력자들 사이의 항쟁으로 얼룩져서 이 시기를 내란의 1세기라고 부른다.
내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케사르(시저)와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이다. 시저는 군사 원정으로 세력을 길러 독재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후 부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쟁취했다.
내란의 1세기 동안 로마인의 국가는 지중해 쪽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적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결전에 나섰다.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을때 로마의 지중해 지배는 결정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린다.
로마 문명 (제국의 흥망과 그리스도교의 성립)
로마제국의 성립
<성베드로 성당>
로마 제국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성립되었다. 오리엔트의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리스인의 헬레니즘 세계보다 넓고 훨씬 정비된 제국이었다. 헬레니즘에서 생겨난 세계지배라는 이상이 로마인에 의해 실현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기원후 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의 통치는 순조로눠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이때를 `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특히 2세기에는 5대에 걸친 황제 하에서 영토도 최대로 확대되었는데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건축물들이 이시기에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원형극장이나 다리, 공중 목욕탕 등을 즐겨 만들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스포츠나 연기를 보고 즐기며 풍요롭게 생활했다. 기원후 79년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매장되었던 품페이가 18세기에 발굴되었는데 이 도시를 보면 당시 시민들의 수준 높은 생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지나치게 확장되었다.일단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회복이 어려웠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다른 민족이 침입하자 군사력이 부족했다. 3세기가 되자 혼란이 시작되었다. 제국 안의 모든 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융화를 꾀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제국은 황제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오리엔트풍의 전제 국가로 변화를 시했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제국은 4세기 말에 완전히 분열하여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었다. 동로마 제국은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북방에서 이민족(게르마니아인)이 침입하는 가운데 476년에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 문명을 계승하여 이후 1000년지속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성립
<카타콤 내부>
로마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제국은 종교를 이용하여 속주들의 단결을 꾀했다. 원래 로마는 종교에 관대한 편이었지만 그리스도교는 황제 숭배를 거절한다하여 심한 박해를 가했다.하지만 박해속에서도 신자의 수는 줄지않고 오히려 그전보다 증가하여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로마가 무너지기전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이용하여 제국을 재건 하기위해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이어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를 국교로 정하였다.
(동방의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생긴 것이 바로 그리스 정교회인것이다.)
콘스탄티노플 ; 13세기 십자군 원정 무렵인 1240년경 비잔틴은 많은 보물을 십자군들에게 약탈 당했다. 또한 1453년에는 자랑거리이던 난공불락의 도시 성벽들이 술탄 메멧 2세(오스만 트루커제국의 왕)의 포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1. 로마의 문화사적 위치와 그 성격
<베네치아광장>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Caesarean operation이라는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딸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정치제도와 법률
1) 정치적 골격
<로마공회장>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모든 용어들을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임.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영국을 제외한 모든 근대 국가(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률적 기저가 됨.
2) 로마법의 발달 단계
*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그것은 12표법.
㉠ 불문법: 종교적 관습과 혼합되어 매우 엄격한 神法 (jus divinum)의 시기.
㉡ 법의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신법은 시민법 (jus civile)으로 됨. 12표법을 선두로 법과 관습의 성문화 시작.
㉢ 로마의 법률 기관의 확장. Praetor직 창설.
㉣ 영토적 팽창과 함께 이민족의 관습이 고려되기 시작. 따라서 로마의 사법제도는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
㉤ 이리하여 만민법 (jus gentium)이 발생.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으로 완성.
㉥ 자연법 (jus naturale) :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거기서부터 유래. 실정법보다 우월한 고정법임. 나아가 자연법은 자연권에 연결.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된 로마법 대전 대성. 이가 각국의 입법의 근간이 됨.
3) 즉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구성.
㉠ 시민법: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 시민법은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
㉡ 만민법: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을 정의함. 이 법은 시민법보다는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의 이민족 거주자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 보충.
㉢ 자연법: 이 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믈임. 스토아 철학에 그원을 둠.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락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치체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하면서, 이 법은 국가보다 앞서며,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고상한 업적에 속한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약성경 장별정리 (0) | 2022.04.21 |
---|---|
이스라엘과 아랍 (0) | 2022.04.21 |
팔레스틴 유대교 안에 있었던 다양한 세력들 (0) | 2022.04.21 |
성경과 신조 (0) | 2022.04.21 |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배역과 멸망 (0) | 2022.04.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