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틴 유대교 안에 있었던 다양한 세력들
당시의 세력들을 크게 보면 그 시대에 정권과 결탁되어 연결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우익 세력과 헬레니즘과 정치적 기득권층에 항거하는 인물들로 구성된 좌익세력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선을 기준으로 기득권층인 우익세력에 붙어있는 것이 사두개인, 더 오른쪽이 헤롯당이고 이들에 반대하는 좌익세력에 붙어있는 것이 바리새인이고 더 좌측의 극단에 붙어있는 당이 열심당원이다.
당시에 유대인 계층은 크게 네 가지 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엣세네파는 사실 소수이고 아예 떨어져 나가서 독립적으로 살았으므로 사회에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사회 속에서 영향을 주면서 맞물려 있던 구성인들이 우익 두 부류, 좌익 두 부류인데 우익 사두개파, 극우익 헤롯당과, 좌익 바리새파, 극좌의 열심당이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전체 유대지역의 땅 재산의 3/5 내지 4/5 정도를 헤롯당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사두개인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이권과 연결되어 유대인 중에서는 굉장한 부유층을 형성하였다.
- 하시딤(Hassidim)
- 바리새파(Pharisees)
나사렛 예수의 선포와 행위는 율법을 중시하여 모든 것과 구분 짓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생존권이 달린 갈등을 양산하였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악의로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불가피하게 율법과의 갈등 속에서 살아야 하는 창녀들, 타락한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과 함께 일하는 세리들도 죄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경건의 업적인 선행을 쌓는 것을 통해서 마지막 하나님의 판결 때 그 잘못을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선행을 드러내고 과잉 충성을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의 죄인들과 교제했으며 안식일의 규정을 초월하였으며 정결하라는 계명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또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율법의 외적인 수준만을 생각하고 마음의 정결을 모르는 위선자라고 비난했으며 외식하는 자 또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마23:5, 눅18장).
그러므로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으로 예수님을 판단했고 예수님이 죄인들과 교제하며 안식일의 규정을 파하는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공격해서 그를 제거해 버리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산헤드린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과 이해관계가 달랐던 사두개파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정죄하고 그를 정치적으로 모함하여 로마총독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산헤드린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AD 70년 예루살렘 성이 훼파된 이후에도 각 지역 회당의 정신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들이 해석하는 교리는 일반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았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이런 갈등은 후에 유대교와 기독교가 나뉘어지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3. 사두개파(Sakkucees)
- 기원 및 역사적 배경: 이 종파의 명칭은 다윗시대와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인 사독(Zadok)의 이름에서 발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사두개란 사독 가문의 지지자일 수도 있다. 사두개파는 BC 200년 경 대제사장 및 귀족 가문으로 구성된 당파를 형성했으나 모든 제사장이 다 사두개파에 속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당시 귀족에 해당하는 제사장 가문의 대표자들로 성전을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하스모니안 왕가의 통치자들을 도와서 국사를 돌보기도 했다. 로마 통치 하에서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팔레스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치적인 영향력과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바리새파와 달리 헬라주의를 쉽게 수용하는 입장이었으며 로마 행정부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 신학사상: 이들은 유대종파 가운데 매우 보수적인 종파로 오로지 모세의 성문화된 율법만을 수용하였다. 육체의 부활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했으며 하나님의 예정이나 섭리를 불신한 반면에 성전의 희생제사 의식을 강조하였다.
- 신약과의 관계: 사두개파는 정치적인 집단인 동시에 기독교 교리에 상당히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 교회가 가장 두려워하던 존재가 바로 사두개파였다. 이들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함께 사멸되었다.
4. 열심당 (Zealots)
- 기원 및 역사적 배경: 이 열심당은 BC 37-AD70 년에 활동했는데 이들은 하시딤 내지는 마카비 왕조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은 로마의 팔레스틴 통치를 적극 반대했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로마와 화친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남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들의 종교적인 열정 때문에 열심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특히 납세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정적들과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칼로 테러를 가하곤 하였다. AD 50-70년에 대규모 암살단을 결성하여 유대지방을 약탈하고 테러를 일으켰으며 이들이 일으킨 혁명은 결국 예루살렘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후에 남은 자들이 마사다로 피난하였다가 최후를 맞았다.
- 신학사상: 이들은 유대 신앙과 율법(토라)에 대한 광신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주 끈기있게 자유에 매달려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주와 왕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황제를 주로 인정하고 그에게 세금을 납부한 사람은 누구든지 열심당원들에 의하면 하나님만을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되었다.
- 신약과의 관계: 누가복음 4:14-15절에 갈릴리 사람들로 언급되고 있는 셀롯인 시몬이 등장하는데 이 시몬이 바로 열심당이다(눅6:15, 행1:13). 또한 가나안인이란 말로도 사용되는 가나안인이란 말은 ‘열렬하다, 열심있다’ 등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에서 비롯된 용어이다(마10:4, 막3:18).
사도행전에서는 자객으로도 사용되었다(행21:38). 로마인들의 눈에 열심당원들은 도둑과 노상강도, 테러리스트로 보여질 수 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AD73년에 사멸되었다.
5. 헤롯당(Herodians)
- 기원 및 역사적 배경: 이들은 헤롯 왕조의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헤롯과 그의 왕조를 지지하였기에 유다의 헬라화와 외국의 통치를 수용하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부를 독점하였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신학사상: 이들은 종교적인 분파가 아니라 정치적인 분파이다.
- 신약과의 관계: 마태복음 22:16, 마가복음3:6, 12:13 등에서 예수님의 대적으로 이들을 언급하고 있다.
6. 엣센파(Essenes)
- 기원 및 역사적 배경: 이들은 BC 2세기-AD 70년에 마카비 시대에 발흥하였다. 대략 4천여 명이 유대 고을과 도시에 흩어져 살았으며 일부는 사해사본이 발굴된 쿰란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사두개파 제사장들의 좋지 않은 평판에 대한 반발 때문에 대두하게 되었다.
- 신학사상: 이들은 가장 엄격한 종교적인 분파로 심지어 결혼까지 자제하였고 금욕주의로 일관하였다. 공동체의 청빈을 신봉하였고 자신들이야말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언약의 계승자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바리새파 보다도 더욱 엄격한 안식일법을 준수하였고 정결의식, 매일 기도 및 계속적인 구약 연구등을 지켰으며 매우 묵시적인 경향을 띠었다.
7. 산헤드린 공의회
산헤드린 공의회란 유대인 최고 자치 의결기관이다. 황제나 헤롯이나 총독 같은 외부 세력 말고 유대공동체에서 가장 높은 정치기관이 산헤드린 공의회였다. 이들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파 사람 등 유대사회의 지도자급 사람들 71명으로 구성되었다.
공식적인 주권은 로마나 헤롯왕이 갖고 있었으나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법적 기능과 입법적 기능, 그리고 행정적 기능까지 갖고 어느 선까지는 자치적으로 정치를 했다.
당시에 로마의 권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죄를 범했을 때 외에는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할 때, 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말한 것은 산헤드린 공의회를 말한 것이다.
요 18:3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8. 대제사장
유대인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였기 때문에 과거 구약의 에스라 이래로 대제사장이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주역이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사두개파였다. 이들은 종교적인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신구약 중간기의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마카비, 로마의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적인 투기꾼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대제사장의 직분을 돈으로 사기도 했으며 아론 계열의 레위인이 대제사장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물론 경건한 대제사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억압 속에서 대부분이 영적 제사장의 직분을 망각한 채 시대의 탁류 속에 침몰되어 갔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은 로마나 헤롯가문과 결탁해서 정치적인 야욕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성전에서 제물을 팔아서 돈을 버는 장사치로 전락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 있었다.
9. 율법학자들(서기관, 율법교사, 랍비)
헬라주의 시대의 유대교 역사에서 율법학자들의 위치는 매우 주요했다. 율법학자들이 BC 2세기에 형성된 여러개의 그룹들, 즉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세네파 사람들과 쿰란 공동체 등을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시작은 포로시대 이후의 유대교를 율법 위에 확실하게 세워놓은 에스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자 서기관이었다(에스라7:11). 율법학자들의 위치가 발전된 것은 헬라주의와의 만남과 대결에서 온 결과였다.
헬라정신의 강력한 영향에 대하여 독자적인 교훈을 율법 속에서 찾으려고 했을 때 옛 제사장의 가르침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서를 연구하고 객관적이며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희랍인들의 정신적인 도구와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런 맥락에서 희랍인들이 선생의 권위를 인정하여 철학의 학파를 형성한 것처럼 율법학자들 가운데서도 명망있는 이름들을 통하여 현자, 율법교사, 대가, 랍비 등으로 불리워진 것이다. 이들은 가문이나 혈통이 아니라 오직 지식과 능력에 따라서만 율법학자가 될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제사장 출신 뿐 아니라, 서민, 상인, 수공업자, 심지어 이방인 개종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천막 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스승을 통하여 랍비라 일컬어졌으며 랍비라 칭함을 받으면 학자의 긴 옷을 입을 수 있었고 회당에서 강단의 상석에 앉았다. 백성들은 언제나 이들의 말에 순종했으며 그들은 상당수 산헤드린에 진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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