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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by 【고동엽】 2022. 4. 21.
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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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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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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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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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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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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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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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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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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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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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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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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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국 이스라엘(왕상 12:1-왕하 17:41)
 
 

1. 남북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파와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그들의 단호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솔로몬이 살아 생전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건축사업으로 힘든 부역을 강요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도전에 직면한 르호보암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왕상 12:1-5).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대신들과 상의할 때 그들은 북쪽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구세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보다 더 심한 철권통치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휘어잡을 것을 권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구세대의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옛부터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고 했던가? 구세대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으나 그것이 바람직하다면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르호보암과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지 않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파들이 떨어져 나간다(12:6-15). 어쩌면 솔로몬이 죽자 그동안 느슨하게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남과 북이 다시 분할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르호보암의 강경한 태도를 목격한 여로보암(1세)은 북쪽의 열 지파를 결속하여 이스라엘을 세우고 왕이 된다(12:2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이스라엘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예언자 스마야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만류하면서 북쪽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한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1-24). 사실 르호보암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을 때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남과 북 어느 쪽도 한 쪽을 공격할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 밖에도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아직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 있었으므로 여로보암을 징계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를 있는 그대로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서를 이해하자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짐으로 인해 성서기자는 새롭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솔로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성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의 상황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고, 왕들 역시 남과 북 혹은 북과 남의 순으로 복잡하게 소개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성서학도나 일반 평신도들이 남북왕조를 공부할 때마다 겪는 혼란을 방지하고 이야기의 자연스런 전개를 위해 질서있는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성서의 순서를 따르는 대신 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전개한 다음, 남쪽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서를 대하는 독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글을 읽어갈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에서 제공되는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연대는 학자들간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잘못 계산된 경우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계산법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이 즉위한 때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부터 통치 원년으로 삼는가 하면, 때론 즉위할 때부터 횟수를 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 시작하는 달을 달리했다. 이스라엘은 새해를 니산달(3-4월)부터 계산했으며, 유다는 티쉬리달(9-10월)부터 셈하였다.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이 선왕과의 공동통치 기간부터 계산되는가 하면, 때론 이웃나라와의 비교연대를 사용함으로써 연대계산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연대의 정확한 측정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으며 그 죄의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가를 증언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 정중호 교수가 번역한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연대표를 따르기로 한다.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에 관해 알아보자.
 

2. 여로보암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1세; 927- 906 B.C.E.)은 세겜과 브누엘을 재건축하고 북왕국을 굳건하게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일차적인 조치로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안치한다(12:25-33).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12:28). 여로보암은 바알신의 상징인 송아지상을 가리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가? 그 때 까지만 해도 송아지상은 민중들에게 신(神)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별 부담없이 송아지상 앞에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송아지를 우상으로 여긴다. 물론 성서기자 역시 여로보암을 우상숭배자로 간주하며 이스라엘 왕들이 타락할 때 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다"고 비판한다(왕상16:26). 하지만 생각해보자.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까지 바알을 섬겼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가? 여로보암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벧엘과 단에 송아지상을 세운 것 같다. 그 상(像)은 솔로몬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날개 달린 그룹들로 덮힌 언약궤와, 성전 뜰의 놋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 두 마리의 소형상을 보라(왕상 7:25).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상징(symbol)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행위가 우상숭배로 지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가는 것을 금하고 대신 송아지상을 세웠다. 그는 비록 바알숭배자는 아니었을 지라도 바알종교에서 행하는 송아지 숭배를 야훼신앙에 들여옴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 이것이 그가 신명기사가로부터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이유이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 사건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하겠다(출 32장).
 
 

그림: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예루살렘과 같은 성전이 없음으로 해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없었던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세우고 자기가 지목한 제사장을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다(13:31). 신명기사가는 이 일로 해서 여로보암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한다(13:33-34).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은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내려진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걸리자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에게 보낸다. 이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아히야는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아이가 죽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로보암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죄의 길을 걷게한 책임이란다(14:16). 여로보암을 추대한 아히야가 왜 그를 심판했을까? 아마 실로의 예언자였던 이하야는 벧엘과 단이 여로보암에 의해 성소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종교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던 여로보암은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종교적으로는 불안했다. 그는 금송아지 상을 만듦으로써 북왕국에서의 야훼종교가 바알종교와 혼재되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야훼종교의 위기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에는 예언운동이 본격화되고 이들은 야훼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약은 야훼신앙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왕상 14:25-28). 이스라엘 보다는 유다가 더욱 피해를 보는데 그것은 중요한 무역로가 유다를 통과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금은 보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제 22왕조를 창건한 시삭(Sheshonq I; 935-914 B.C.E.)은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일종의 시위에 그친 것 같다. 내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왕조의 힘을 과시하고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외적으로는 아직 이집트의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곧 물러갔으며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성서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헌에서 성서와 일치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테베에 있는 아문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은 시삭의 광범위한 대외 침공을 서술하고 있다(BAR89-3-32)]
 
 

   나답(905-904 B.C.E.)은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으나 바아사의 쿠데타에 의해 곧 왕위에서 물러난다. 나답의 실책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서기자는 그가 아버지 여로보암 처럼 범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 16:25-31). 여로보암과 나답의 기타 행적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가를 기록한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을 참고하란다(14:19; 15:31).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서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써 여로보암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바아사가 등장한다.
 

3. 바아사(시므리왕조)


    혁명에 성공한 바아사(903-882 B.C.E.) 역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는 유다를 침략한다. 그러나 유다 왕 아사(906-907 B.C.E.)의 요청을 받은 다마스커스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자 바아사는 유다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22년간 치리한 바아사를 이어 엘라(881-880 B.C.E.)가 왕이 되었으나 2 년만에 시므리에 의해 좇겨난다(왕상 16:8-9). 결국 바아사 왕조는 24년만에 종막을 고하고 혁명에 성공한 시므리 왕조가 이어진다. 시므리(880 B.C.E.) 또한 7일 만에 오므리에 의해 물러남으로써 바야흐로 오므리 왕조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여로보암왕조-바아사왕조-시므리왕조(927-880)로 이어지는 긴박한 역사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상황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정치적·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정국은 불안했으며 따라서 개인사병제도가 발달했다. 왕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무력을 장악한 자가 혁명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지리적으로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던 북왕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다에 비해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역성혁명이 군사지도자(charismatic leaders)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예언자에 의해 지명되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말기에 무신이 정권을 잡자 결국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지고 가 혼란해졌던 경우와 흡사하다. 따라서 통치권의  빈번한 교체는 정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의 부(富)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왕국 유다는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므리(879-869 B.C.E.)는 왕이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유다와 군사동맹과 무역동맹을 체결한다(왕상 16:24). 아시리아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 왕조는 군사적으로 강대하여 이스라엘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여 놓았으며, 이후 50여년간 유다는 오므리 왕조의 속국처럼 지내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는 아합에 의해 전성기를 누린다.
 
 

4. 오므리 왕조와 아합


    오므리의 뒤를 이은 아합(868-854 B.C.E.)은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종교의 신봉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서기자는 그가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왕 가운데 가장 악한 일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이세벨로 인해 야훼신앙이 극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왕상 16:28-34). 그러나 대외적으로 볼 때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서기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III; 858-824 B.C.E.)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리아 제국과 동맹군에게 약 2,000대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차대를 파견할 정도로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ANET, 278-279). 이세벨의 활약 역시 대단해서 야훼의 선지자들을 거의 제거하다시피 했으며 바알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가나안의 종교를 이스라엘에 전파하는데 앞장선다(왕상 16:31-33). 아합은 두로와 시돈 뿐만 아니라 유다와도 혼인 정책을 펴서, 유다의 여호람과 그의 딸 아달랴를 혼인시킨다.
 
 
 

[그림: 사마리아 근처에서 발견된 이스라엘의 지붕해 선박. '야훼의 배'라고 새겨진 이 그림은 아합이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참조. 왕상 22:48-49). BAR93-2-28]
 
 

5. 엘리야의 활약
 

    야훼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한다. 길르앗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3년동안의 가뭄을 선포한다(왕상 17:1). 엘리야가 행한 첫번째 신탁(oracle)이 가뭄 선포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알신의 유입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 수단으로 가뭄을 선포한다. 원래 바알신은 '비' 혹는 '폭풍'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바알을 섬겨야 했다.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다(참조. 왕상 20:23). 야훼는 이제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까지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임을 만방에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나중에 비가 오게 하는 것도 농경문화에 젖은 가나안 사람들과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야훼의 주권은 무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자 까치들이 떡과 고기를 날라 준다(왕상 17:2-7). 그 음식을 먹고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향한다. 그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대책없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판이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빵을 만들어 자기를 달랜다. 어디 될법이나 하는 일인가? 마지막 먹거리를 달라니. 그러나 엘리야의 근엄한 요구에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깨닫고 그의 말대로 한다. 엘리야의 말대로 했더니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왕상 17:8-16).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주며, 엘리야는 기적을 베풀어 밀가루와 기름을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에게도 까마귀를 구해준 선비가 구렁이에게 목숨을 빼앗길 찰라 까마귀가 종을 침으로써 그를 구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요 일종의 '전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고대인에게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그저 친하게 다가오는 '생활이야기'일 수 있다. 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와 같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를 할 때 논리적이지 못하며 기적이 진행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사실 기적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기적을 발생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소개되는 바알선지자와 엘리야와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게 해주는 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건은 신약의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하다. 물고기 다섯마리와 떡 두 덩어리로 오천명을 먹였다는 기사 역시 음식이 갑자기 많아졌다든가 아니면 분배되는 과정에서 음식이 불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전혀 없다(마 14:13-21; 15:32-38;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그저 수 많은 사람들이 먹었으며 음식이 남은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왕하 4:42-44에서도 소개된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과부의 집에 기름이 넘치게함으로써 재산을 안겨준다.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베푼 기적은 단순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수단이다. 엘리야의 활동은 그 기적을 통해 돗보이게 된다. 금세기의 천재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기적설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신약성서에 소개되는 기적사건은 기적 자체에 그 강조점이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위한 부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림: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갑자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에 옮긴 후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 위에 엎드린 다음 하나님께 아이의 혼을 돌려달라고 기도하자 아이는 다시 살아 난다. 자기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본 과부는 이제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왕상 17:17-24). 이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엘리사에게도 나타난다. 수넴여인의 아이가 죽자 엘리사는 아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왕하 4:32-37). 예수께서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요 11:38-44).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고대로부터 흔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엘리야, 엘리사, 예수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일키겠다고 위험한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기도 한다. 때론 과거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일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종교인에게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세상은 늙은이와 병자로 가득찰 것이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기가막힌 삶을 영위할 것이다.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주인공은 죽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하건만 결국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국의 진시황를 보라. 아무리 불로초를 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 다만 죽는 날 까지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다. 아합왕조에 들어서면서 야훼 신앙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결정적인 일을 하시고자 예비적인 조치로 아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일은 따라서 성서기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과 당시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실제로 믿을까 ?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된다.

    엘리야가 말한대로 삼년만에 기근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왕상 18:1). 아합은 모처럼의 비를 만나 자기 신하인 오바댜와 함게 초지(草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자 아합은 엘리야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냐?" 아합의 물음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고 응수한다(왕하 18:16-18).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아 자기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자'가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결전장이 전개된다. 아합이 400명의 바알 예언자를 갈멜산에 모으니, 엘리야는 그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라면 야훼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좇으라"(18:21). 엘리야의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세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야훼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선조들이 섬겼던 이방신을 섬길가를 결정하라.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길 것이다"(수 24:14-15). 이에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야훼를 섬기고자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훼를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한 판 승부를 건다. 송아지 한 마리를 각각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나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광란의 기도를 한다(왕상 18:28).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는 흔히 발견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처방을 해왔다. 독주를 마시는가 하면, 때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춤과 노래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환각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중얼대기도 한다. 신점자(diviner), 샤먼(shaman), 혹은 예언자들(prophets)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 바알의 선지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외침에도 바알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엘리야 차례다.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얹고 거기에다 물을 갖다 붓는다. 저녁 때가 되자 그가 야훼의 응답을 부르짓자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주변의 흙까지 모두 태워버린다(18:30-39). 내기에서 이긴 엘리야는 언제 힘이 생겼는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기손 계곡에서 몰살을 당한다(18:40). 너무도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순식간에 죽어 없어졌다. 야훼를 거스린 벌일까? 야훼를 거슬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 모두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측에도 끼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소년십자군까지 조직해서 싸움터로 내보냈던 기독교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동안 무려 일곱차례나 계속되었다(A.D. 1074-1291). 그들은 아마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도 승리를 안겨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아마 더이상의 갈멜산 싸움이 필요없었다고 믿었나 보다. 우리는 엘리야의 활약을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수집된 일종의 '전설'이다. 전설은 사건자체보다는 그 뒤에 있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기도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세벨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한다(18:41-19:2). 엘리야는 급히 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여 광야로 들어간다. 로뎀나무아래에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을 갖다 준다(19:4-7). 그가 호렙산에 이르러 굴속에 거할 때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을 왕으로 삼을 것이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엘리사를 택하라는 것이다(19:9-18). 이제 오므리 왕조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예후왕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성서기자의 귀뜸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대로 우선 엘리사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는다(19:19-21).

    엘리야를 떠나간 아합은 그 사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잃었던 성읍을 되찾는다(왕상 20:34). 재미있는 것은 아람사람들이 야훼를 '산의 신'으로 여겼던 것이다(20:23). 그래서 산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면 자기네들이 이길 수 없단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평지로 유도하여 전투를 했지만 결국 아람이 패한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산의 신'으로 알려진 야훼는 이제 산에서 뿐만 아니라 '평지의 신'도 된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20:1-30).
 
 

[그림: 엘리야의 승천]
 
 

6. 아합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아합에게 근심거리가 생겼다.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아합의 궁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나물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제안을 한다. 포도원을 넘긴 대신에 다른 곳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그것이 마음에 안들면 돈으로 그 값을 처준다는 것이다(왕상 21:1-2).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나봇이 순순히 내놓지 않자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눕는다(21:3-4). 전쟁의 용사 아합도 남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생병이 난 것이다. 이를 본 이세벨은 "그것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두고 보란다. 이세벨은 못된 짓을 골라하는 불량배 두명을 데려다가 나봇을 모함하고 사람들 앞에서 돌로 쳐죽임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21:5-16). 아합은 이세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데 성공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달려가 그가 이세벨과 함께 나봇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21:17-26).
 
 

[그림: 사마리아 북부의 산당이 있었던 곳]
 
 

7. 아합과 미가
 

    아합이 죽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아람군대가 다시 쳐들어 온 것이다(왕상 22장). 아합은 당시 사이가 좋았던 유다의 여호사밧 왕(877-853 B.C.E.)에게 기별하여 함께 아람을 물리치자고 제안한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로 올라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하기에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불러 신점(神占)을 행하도록 명한다. 다윗시대까지는 제사장에 의해 행해지는 제비신점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신점을 행한 것 같다. 왕들은 전쟁하러 가기 전에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의 결과에 대해 묻고 난 후에 전쟁수행 여부를 결정했다. 신점(divination)의 결과는 아람과 싸워도 좋다는 것이다. 승리할 것이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염려되어 "그 밖에 용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묻자, 아합은 그제서야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한다. 미가야는 아합에게 눈에 가시였다. 길조(吉兆)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흉조(凶兆)만 말하는 미가야를 아합이 좋아할 리가 없다(22:8). 여호사밧의 간청에 미가야를 부르게 되고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 처럼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흔쾌이 대답한다. 이상하다. 늘 흉조만 전한 미가야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예언하지 않는가? 아합은 오히려 불안해서 재차 묻는다. 그러지 말고 참된 예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제 때는 왔다. 왕이 불러서 간 자리! 그것도 전쟁하기 전에 승리의 여부를 묻는 시점에서 예언자 미가야는 야훼의 신탁(oracle)을 전한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할 것이란다(22:20). 여지없이 또 한번의 흉조를 전해들은 아합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라고 한 뒤에 출전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아합은 죽고,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았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개들이 나봇의 시체를 핥은 곳이었다(22:38).

    미가야의 예언에 얽힌 이야기는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를 구별한다. 전쟁하기 전에 신의 뜻을 물을 때 400명의 선지자들은 좋은 말을 함으로써 왕의 환심을 얻지만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다.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는 그가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으면 참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 예레미아와 거짓예언자 하나냐와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해진 예언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렘 27-28장). 하나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참예언자였지만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거짓예언자로 판명되고, 예레미야는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으나 나중에 참예언자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래일을 정확히 알아 맞춘다고 해서 참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제시해주는 사람이라야 참예언자가 된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종교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따름이다.
 

8. 아하시야와 바알신앙
 

    아합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853-852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성서기자의 눈에 악행을 일삼은 왕으로 그려진다. 그 악행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으며 바알을 섬기고 야훼를 거슬렸다는 것이다(왕상 22:51-53). 이로써 열왕기상은 막을 내린다. 곧 이어 열왕기하는 아하시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한다. 대략 2년 정도 통치한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자 사람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제붑에게 그 병이 낫겠는가를 묻고자 한다(왕하 1:1-2). 신하가 에그론으로 향할 때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제붑에게 물으러(신점을 구하러) 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아하시야의 병사들을 하늘의 불로 응징한다(1:5-14). 두 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100여명이 죽은 다음에야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나와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싸움 역시 바알과 야훼 신앙의 대립이다. 아히시야는 자신이 병을 얻자 별생각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바알제붑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의 뜻을 묻는 신점(divination) 뿐만 아니라, 때론 병을 치료하기도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함으로써 일종의 의사(witch-doctor)역할을 겸했다. 엘리야 역시 종합적 기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야훼를 섬기고 있는 엘리야에게 묻지 않고 바알에게 신점을 구하고자 했던 아하시야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성서기자는 아하시야의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바알제붑에게 신탁을 구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이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의도하는 '전기예언서'에 해당된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기 보다는 야훼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성서기자에 의해 선택되며, 나머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손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람(851-840 B.C.E.)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다에도 같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성서는 두 왕을 서로 다른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여호람(852-841 B.C.E.)이 곧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 증거로 동일한 이름을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자형'으로 생각한다면 아하시야의 누이와 결혼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여호람은 한 인물이 된다. 자세한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서술에 따라 이스라엘의 여호람시대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9. 엘리사의 활약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호람은 약 11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하시야 이후 약화된 오므리 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여호람이 통치하는 기간에 엘리사 선지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왕하 2:11), 엘리사가 그의 영감을 이어받는다(2:9). 엘리사의 행적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행한 것과 유사하다. 엘리야가 자기 겉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왔듯이(2:8), 엘리사 역시 자기 옷으로 요단강을 가르고 다시 건너간다(2:12-14).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물을 깨끗하게 한다.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단다(2:19-22). 당시의 예언자들은 풍수지리에도 밝아서 물줄기를 찾기도 했으며, 때론 주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 어린 소년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하고 놀리자 두 마리의 암콤이 숲에서 나와 그 아이들을 찢여죽였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출현한다(2:23-25). 이런 이야기들이 왜 소개되고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댄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경고성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신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 이후 이스라엘은 점점 약화되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반기를 든다(왕하 3:4-5). 여호람은 모압을 징벌하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원병을 청한다(3:7).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 셋이 모압을 징벌하고자 행군을 하다가 물이 없어 고초를 겪자 엘리사가 수원지를 알려주기도 한다(3:16).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도 이스라엘은 모압을 무찌르지 못한다. 연합군이 키르하르셋에서 공격을 감행하자, 위기에 직면한 모압왕은 왕이 될 아들을 자기들의 신(神) 그모스(Chemosh)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3:27).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이었다. 인신제물을 바쳐서라도 심기일전하려는 모압의 태세에 이스라엘은 주춤하여 공격을 멈추고 후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엘리사에 대한 열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야기로 전개되며 엘리사의 비범한 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엘리사는 예언자 수련생이 죽자 어려움에 처한 그의 미망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얻어오게 한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우게 하여 그 기름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생활비에 보태도록 조치한다(왕하 4:1-7).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것 처럼(왕상 17:15-16) 엘리사도 기름으로 가난한 여인을 구한다. 엘리사는 자신이 수넴에 거할 때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던 여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배려한다. 잘 크던 아이가 어느날 원인 모르게 죽게 되자 아이 위로 자기 몸을 덮어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왕하 4:37).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것 처럼(왕상 17:21-22) 엘리사도 그렇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또한 독이 든 음식을 해독하는가 하면(왕하 4:38-41), 20개의 보리떡과 한 자루의 채소로 무려 100명을 먹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자기의 스승 엘리사의 영감을 물려받았다지만 지나치게 스승의 이적을 거의 그대로 답사한다. 우리가 볼 때 따분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성서기자는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닥친 10가지의 재앙을 약간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반복적으로 소개하듯이, 이번에도 엘리사의 능력이 엘리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엘리야 전승과 엘리사 전승으로 따로따로 전해지다가 에브라임 전승을 이어받은 예언자 그룹에 의해 수집된(편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스승으로, 또 한 사람은 제자로 말이다.

    시리아의 나아만 장수가 문둥병이 들어 이스라엘로 찾아오자 그를 요단강에 목욕하게 함으로써 치료해준 이야기(왕하 5:1-27), 예언자 수업을 하고 있는 생도가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을 요단강에 빠뜨리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로 건져낸 이야기(6:1-7),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람왕과 싸울 때 엘리사가 나서서 적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로잡은 이야기(6:8-23)들이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람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성중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들을 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6:24-29). 여호람이 엘리사를 원망하자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다시 원상회복될 것을 예언한다(7:1-2). 나중에야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마병 소리를 잘못 듣고 자진 철수했다는 소식을 문둥이들로부터 전해듣는다(7:3-20).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정형적인(stereotyped) 스타일로 반복되면서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여호람의 모습은 주변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가 한 때 바알의 신상을 제거함으로써 야훼를 공경하는 듯 했으나(3:2), 오므리 왕조의 종교적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여호람은 엘리사에 의해 거부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시대가 전개된다.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879-840 B.C.E.)에 이르는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이 생긴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페니키아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남쪽의 유다와도 평화적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다마스커스와 모압에 대한 군사행동을 할 때 요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와 여호람이 결혼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서기자의 눈으로 볼 때 오므리 왕조야 말로 야훼에게 가장 혐오스런 왕조였다. 시돈의 공주 이세벨에 의해 바알종교가 활개를 쳤고 아합은 그녀를 위해 사마리아에 바알신전을 세우기까지 했다. 아합왕조은 솔로몬 통치의 말기와 유사하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여 왕궁의 부를 누리고자 했으며, 이세벨의 부정과 부패를 묵인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아합이 죽자 오므리 왕조는 점점 약해지다가 여호람은 예후의 혁명으로 죽게 된다. 이제 성서기자는 예후 왕조에게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그것도 결국 허망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림: 오므리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
 
 

10. 예후의 미완성 종교개혁
 

    선지자 엘리사가 수련생가운데 한 사람을 예후(839-822 B.C.E.)에게 보내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왕하 9:1-10). 예후는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로 당시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밑에서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여호람은 요단 동편에서 시리아(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는 도중 부상하여 이스라엘에 있는 겨울 궁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지지를 받은 예후는 왕이 아픈 사이 급습하여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한다(9:11-26). 때마침 유다의 아하시야(840 B.C.E.)가 여호람을 위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와 있었다. 아하시야가 예후의 반란을 보고 도망하자 예후는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9:27-29). 악명높은 이세벨 역시 예후의 손에 의해 죽고(9:30-37), 그는 아합의 아들들을 몰살함으로써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의 서막을 올린다(10:1-17). 엘리사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찬탈한 예후였기에 그가 할 일은 우선 바알숭배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성소에 모으고 모두 몰살하고 목상을 제거한다(10:18-28). 그러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해 성서기자로부터 충분한 칭찬을 받지 못했다(10:29). 예후는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토판.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있다]

<자세한 그림: bar91159>
 
 

    예후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유다의 아하시야마저 살해함으로써 남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주변국가와의 동맹관계도 곧 깨짐으로써 고립되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858-824 B.C.E.)의 침입을 받아 굴복하고 만다. 아시리아의 블랙 오벨리스크(Black Obelisk; 일종의 전승비)에 의하면 살만에셀에게 이스라엘 왕 예후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이후 예후 왕조는 줄곳 친아시리아 정책을 고수한다. 예후의 굴복으로 인해 아시리아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야훼종교의 혼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821-80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시리아의 세력이 크게 강대해져서 이스라엘을 유린한다. 그들은 기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일만명의 보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을 초토화시켰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왕하 13:7). 그러나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810-783)가 서방 원정을 시도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었고, 이 때를 이용해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 반격을 가한다. 그러나 왕권을 하사엘(843-806)로부터 이어 받은 시리아의 벤하닷(2세, 806-?)이 유다로 쳐들어오자 여호아하스는 시리아에게 굴복하고 사신과 물품을 보내 화친하고자 한다(아벡전투; 왕상 20:26-43). 그러나 시리아 왕이 직접 조공을 선별하려고 하자 여호아하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왕성을 보호한다(왕상 20:1-25). 그 후 여호아하스는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22:1-38).

    그 뒤를 이어 요아스(804-789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요아스는 시리아에게 빼앗긴 영토 일부를 회복하지만 아직 시리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왕하 13:24-25). 요아스는 아시리아의 아닷니라리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세력을 유지한다.
 
 
 


 

[지도: 앗시리아 시대의 팔레스틴]
 
 
 

11. 여로보암 2세의 활약


    요아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여로보암 2세(788-748 B.C.E.)이다. 시리아와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잃어가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번영의 때를 맞는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제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도 했다(왕하 14:28). 이로써 나라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아시리아와의 협력관계로 정치 또한 안정되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치세 말기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아의 세력이 부상하면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었고 경제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는 사회의 특권층에만 한정되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민중들은 과중한 세부담으로 궁핍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왕국 말기에 예언활동을 했던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였다(호 1:4-5; 암 7:8-9).
 
 
 

[그림: 시내사막 근처인 쿤틸러트 아줘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의문의 그림과 글자. 왼쪽은 이집트의 베스신(수호신)으로 여겨지며 하프를 타고 있는 여인은 아세라 여신으로 보여진다. 그림옆에 새겨진 문자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통해 민간신앙에서는 아세라가 야훼의 파트너(consort)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전 9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과 문자는 문법적인 문제점과 함께 그 내용의 복합성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민간신앙이 복잡하게 혼재되었음을 보여준다. BAR91-5-58]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스가랴(747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6개월 만에 살룸의 쿠데타로 물러난다. 이로써 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 2세-스가랴(839-747 B.C.E.)에 이르도록 존속한 예후왕조는 막을 내린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바알신앙이 자취를 감춘듯 했으나 아시리아와의 화친정책으로 이방종교가 다시 이스라엘로 유입되기도 했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았으나 통치말기의 사회적 혼란과 부패로 이스라엘 왕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예후왕조 이후의 왕들은 단명한 왕조를 형성했다. 이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쿠데타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스가랴를 몰아낸 살룸(747 B.C.E.)은 1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그 뒤를 이은 므나헴(746-737 B.C.E.)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다. 비교적 오랜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므나헴이 아시리아의 티글랏블레셋 3세(일명 불; 744-727 B.C.E.)에게 조공을 바친 덕택이었다(왕하 15:19).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지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므나헴은 결국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왕하 15:20).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진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브가히야(736-735 B.C.E.)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베가의 반란으로 죽게된다.
 
 

12.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베가(734-731 B.C.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734 B.C.E.). 이스라엘의 베가는 시리아(아람)의 르손(Rezon)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조를 구했으나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에브라임)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건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른다(사 7-12장). 유다는 아시리아의 원병을 요청하고 그 결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참패한다(왕하 15:29-31; 16:5-9).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기고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로 끌려가게 된다. 티글랏빌레셋의 도움으로 유다는 당분간 안정을 되찾고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싸울것을 결의했으나 유다의 아하스만이 아시리아 편에 섬으로써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이후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채 갖가지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사 8장).
 
 
 

[그림: 앗시리아의 군인들]
 
 

13.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의 멸망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로 국한되었고 급속히 쇠망의 길로 치닫는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이 베가를 살해하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호세아(730-722 B.C.E.)는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다(왕하 17:4).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726-722 B.C.E.)는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17: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잡아갔으며 이 때 호세아 왕도 같이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와와 동명이인인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30년간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722 B.C.E.) 백성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절망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행-티글랏빌레셋 3세]
 
 
 

   사마리아를 정복한 아시리아는 민족간의 이주정책을 실시한다(왕하 17:24-41).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건너왔으며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마음대로 설치며 살았던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왔으며 고유의 문화전통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종교는 다원화되고 인종은 혼합되었으며 야훼종교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야훼종교를 지켜줄 정치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성서기자는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혼합정책의 희생물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후 유다인과 구별되는 계기가 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스 4:1-24).
 
 
 

[그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마리아 사람들]
 

맺음말
 

  이스라엘보다는 남쪽의 유다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북방의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상황 역시 불안하여 주변국과 결혼동맹을 맺어 자국의 안녕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바알종교를 비롯한 이방종교가 이스라엘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야훼신앙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이 나타나 야훼의 전지전능한 주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예후왕조에 접어들면서 일시적이나마 야훼종교를 확립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왕권은 예언자들의 지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왕권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반면에 유다는 지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여 있었고 다윗왕통이 비교적 잘 이어졌다. 아합의 딸(혹은 누이)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7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역성혁명은 없었다. 또한 유다에 공동섭정제도'가 있어 왕과 아들이 일정기간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군사력으로는 이스라엘에 뒤질 때가 많았던 유다가 정치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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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s://cafe.daum.net/kmc4755/AT6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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