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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아랍

by 【고동엽】 2022. 4. 21.

이스라엘과 아랍

 

 

이인섭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가까운 이스라엘, 먼 아랍

따스한 지중해의 바람과 평화로운 올리브 나무(성경의 감람나무)의 땅 팔레스타인, 이 곳에서 연일 심상치 않은 뉴스가 전해져 오고 있다. 뉴스를 접하는 사람 중에는 ‘혹, 제3차 대전이 일어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아마겟돈(현지명 므깃도)을 떠올리며 이런 걱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건너야 할 요르단 강(성경의 요단강), 젖과 꿀이 흐르는 그리운 땅, 돌아갈 고향 등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을 찾는 사람의 눈에는 그리 풍요롭지도,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그 땅을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아주 친근한 고향쯤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나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는 모두 가 보지 못한 땅, 돌아갈 내 고향 땅같이 여기는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하겠고,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이 선택받은 백성의 기업이라고 성경에서 보아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흔히, 매스컴에서 이 역사적인 땅에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힘들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를 전해 들을 때는 뉴스를 접하는 이의 마음까지 뭉클하게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보통 이스라엘에게 보다 후하고, 좋은 나라쯤으로 생각하는 선입견이 우리에게 굳어져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익숙해진 지명 때문에, 그리고 혈통적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친근감을 느끼다 못해 막연한 선입견으로 그들의 편을 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만약 우리가 이런 마음이라면 우리는 치유되기 힘든 종교적 집단 이기주의에 심취되어 있는 셈이 아닐까? 오늘날 매스컴은 서구, 특히 미국의 시각으로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우리가 듣는 세계의 뉴스란 대부분 미국의 유명 매스컴이 전하는 내용을 앵무새 수준으로 옮기고 있을 뿐이라는 데 유념해야 한다. 또, 미국은 이스라엘의 대부라고 여겨질 정도로 친 이스라엘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미국의 매스컴과 영화산업을 주도하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선전과 같은 뉴스를 듣는 우리가 이스라엘은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고, 팔레스타인은 테러나 일삼는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집단이기주의나 강대국의 패권주의 논리를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

비극의 불씨

이스라엘과 아랍 민족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혈통적으로 서자이지만 장남인 이스마엘은 오늘날의 아랍 민족의 조상이고, 차남이지만 적자인 이삭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다. 이런 적자와 서자의 자손들이 중동에서 오늘까지 반목하며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고 살고 있는 셈이다. ‘팔레스타인’(구약 성경의 ‘블레셋’)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지명이다. 전쟁과 반목으로 점철된 이곳에서 오늘날 과거 그 어느 때에 못지 않은 치열한 생존경쟁과 독립운동이 그치지 않고 있다는데 대해서 우리가 객관적인 관심을 갖기보다 편견을 가지고 판단해 왔다면 다시 한번 그 반목과 질시의 땅에 객관적인 마음과 눈을 돌려야겠다. 구약 성경을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 때부터 여호수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보다 풍요로운 땅을 찾아 이주하다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바에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은 농경 정착민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와 유목민이 살던 땅이었다. 이방민족이 들어와 정착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정해진 이웃이 없이 살아가는 당시의 아랍 유목민들의 습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정착했었지만, 로마제국의 침공으로 다시 흩어지게 되고, 전 세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영토 확장

디아스포라 이후 1,90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다. 20세기 초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아오던 아랍 지역에 독립 국가가 속속 등장했다. 그런 중에 세계 1차 대전에서 영국의 편이 되어 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살았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갈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19세기 헝가리에 살던 유대인 데오도르 헤르즐을 중심으로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되어, 다윗이 수도로 정하고 유대인의 고향으로 각인된 예루살렘의 시온산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펼쳐졌다. 고향에 조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정치적 노력의 일환으로, 데이비드 벤 구리온은 유대인들의 귀향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1882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인구는 고작 3만 명에 불과했으나 1948년 건국 당시 유대인의 인구는 60여 만 명에 이르게 된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대 아랍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은 아랍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모순된 이중외교를 하고 있었다. 즉 1914년부터 1916년 사이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인 맥마흔은 요르단과 사우디 북부 지역인 히자즈의 통치자, 샤리프 후세인1)과 10차례에 거쳐 서한을 주고받았다. 이 비밀 서한에서 영국은 아랍인들이 오스만제국에 대한 봉기를 요구하고 아랍국가의 독립을 약속한다. 한편, 영국은 유대인이 영국을 지원하는 대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민족향토를 재건하는 원칙에 동의한다’는 약속을 한다. 이는 1917년에 영국 외무부 장관이었던 발포어가 영국 시오니스트 기구의 의장이었던 로스췰드 경에게 보내는 서한에 담겨 있었다. 이 내용이 발표된 것이 바로 발포어 선언이 된 것이다. 이후 유대인은 우간다, 남미, 팔레스타인 지역 등 여러 후보지 중에서 자신들의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세울 것을 결정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통치하고 있었는데, 1947년 11월 29일 유엔은 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 지역, 아랍 지역, 국제 사법권이 관할하는 예루살렘 시 등 세 지역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영국이 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위임통치를 끝내기 하루 전인 1948년 5월 14일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이는 마치 유목민들이 거주할 자리를 옮겨다니다가 정착하듯이 이 지역에 들어와 정착한 다음, 그 곳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자 오랜 세월 자신들의 땅으로 여기고 정착해 온 아랍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1948년 5월 15일 영국이 위임통치를 끝내고 철수하던 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주변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제1차 중동 전쟁을 감행했다. 그렇지만 예상 밖으로 전세는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에게 주도당하였다. 결국 1949년 2월 14일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가 이스라엘과 로도스 섬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하여 제1차 중동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때 이스라엘은 국경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휴전선을 확정했을 뿐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국경이 정확하지 않은 나라로 간주된다. 이후 아랍세계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1956년, 1967년, 1973년 세 차례나 더 전쟁을 했지만, 열강의 지원과 생존권의 문제로 단결된 이스라엘은 늘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특히, 6일 전쟁으로 불리는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은 이스라엘이 아랍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입지를 마련했다. 이스라엘 군은 기습선제공격으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연합군을 단 6일 동안에 제압했고,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전 지역과 시리아의 골란고원,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차지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영토는 건국 당시보다 8배나 확대되었다.

1967년 11월 22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 전쟁 중에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하라고 242호 결의안을 확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늘날까지 이런 유엔 안보리의 결의를 무시하고 점령지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렇게 점령한 팔레스타인 점령지는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이 평화협상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아랍세계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1964년 결성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기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의 민중 저항운동 인티파다

아랍세계는 네 차례의 패전 후 이스라엘 앞에서 무기력해졌다. 이제 아랍세계는 더 이상 이스라엘과 전쟁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단지 코카콜라와 리바이스 등 유대인이 운영하는 세계적인 회사의 물건을 불매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투쟁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또 이스라엘은 네 차례의 전쟁을 통해 아랍세계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인한 후 아랍 세계와의 국경을 확정하려는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79년 이스라엘, 미국, 이집트의 수뇌들은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만나 협상을 체결함으로써 아랍세계와 처음으로 관계를 정상화시켰다.

이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민중적 투쟁을 시작했다. 1987년 12월 9일 팔레스타인 점령지인 가자지구의 칸 유니스 난민촌에서 왈리드 아부 살림이라는 11세 소년이 이스라엘 군의 실탄을 머리에 맞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발단으로 ‘돌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인티파다(민중봉기)가 시작되었다. ‘인티파다’란 아랍어 단어는 ‘떨림’, ‘동요’, ‘전율’ 등을 의미하는데, 이 말이 현재 팔레스타인 민중봉기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20여 년 동안 점령지에서 억압을 받아오던 팔레스타인 민중이 이스라엘에 대항해 저항을 시작하자 여성과 어린이들까지도 총구를 들이대는 이스라엘 군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게 되었다.

실제 이스라엘에 대항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은 이전에도 여섯 차례나 있었지만 1987년 인티파다는 단기간에 특정지역이나 특정 계층에서 일어났던 종래의 팔레스타인 민족봉기와는 사뭇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스라엘 측의 강경 진압, 대량검거, 추방에도 불구하고 봉기가 2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동 예루살렘 등 점령지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점, 어린이, 학생, 여성, 노동자, 상인, 지식인, 농부 등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다는 점, 돌만을 무기로 하여 거의 비폭력으로 이스라엘 탱크에 대항했기 때문에 아랍권은 물론 세계 여론의 동정과 지지를 획득했다는 점에서 1987년 이후의 인티파다가 이전의 산발적 민족 봉기와는 구별된다고 하겠다. 1987년 말 이래 전개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는 그 동안 많은 가시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요르단의 주권 포기 선언(1988. 7. 31), 팔레스타인 민족 평의회의 팔레스타인 국가 선언(1988. 11. 12) 등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평화협상 테이블로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인티파다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정치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2)

이런 민중봉기는 팔레스타인에서 단회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민중이 대 이스라엘 항쟁전선에 나서는 것을 인티파다라고 한다. 2000년 9월 29일에도 아리엘 샤론이 알-아끄사 사원 방문을 강행하여 제 9차 인티파다가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아랍-이스라엘 평화협상

1991년 10월 30일에서 11월 2일 사이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아랍-이스라엘 평화협상을 위한 회담이 개최되었다. 11차례나 거듭된 이 회담에서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점령지를 반환해 주는 대가로 이스라엘의 항구적이고 완전한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라고 아랍세계에 주문하고 있다.

1993년 6월 이스라엘 총선거에서 온건파인 노동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자, 이츠하크 라빈이 새 수상이 되었다. 그는 온건한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고, 이스라엘이 평화를 지키며 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의 노력의 결실로 1993년 9월 13일 백악관에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수상과 마흐무드 압바스 PLO 집행위원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주재하에 상호 존재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예리코(성경의 여리고) 지역, 가자(성경의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제를 허락한다는 평화 협상문에 서명했다. 이스라엘이 PLO를 팔레스타인 정통 대표기구로 인정한 셈이다. 이후 1993년 9월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 직접 협상에 나서 “땅과 평화를 교환한다”라는 슬로건 하에 오슬로 협정을 맺었다. 오슬로 협정에서 양측은 1999년 5월까지 가자와 예리코 지역 등의 요르단 강 서안(West Bank)을 단계적으로 이양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1998년 10월에서 1999년 9월 4일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와이 리버에서 두 차례에 걸쳐 평화협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명기하게 되었다. 이 협정에서는 이스라엘 군이 점령지에서 단계적으로 철군한다는 점과 2000년 2월까지 팔레스타인의 지위를 최종적으로 협상해서 종결하기로 했다.

한편, 평화협상이라는 화해의 제스처를 빌미로 이스라엘은 이웃 요르단과 1993년 11월 초 경제협력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하고, 평화조약의 대강을 논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평화 조약 이후 요르단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인정하면서 같은 아랍인인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외국인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스라엘은 미국의 외교적 영향력과 힘을 통해 레바논과 시리아와도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해결해야 할 과제들

이스라엘과 아랍세계가 지금과 같은 전쟁과 반목상태를 종식시키고 보다 항구적인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합의를 필요로 한다. 대개 화해라 함은 강자가 화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미국의 강력한 매스컴의 힘을 빌어 자신들은 순한 양 같아서 무엇이든 다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팔레스타인이 이런 자신들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연일 폭력을 일삼듯이 선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크게는 아랍세계와, 작게는 당면한 팔레스타인과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중동에 평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7월 25일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마지막 중동 평화회담이 열렸다. 이번 회담의 주요 안건은 ① 1967년 제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반환, ② 헤브론, 예리코 등 7개 도시의 팔레스타인 자치권 확대 문제, ③ PLO 헌장에 이스라엘 전복 규정의 폐기 및 팔레스타인 테러범에 대한 미국의 감시 문제, ④ 팔레스타인 억류자 350여 명의 석방 문제, ⑤ 400여 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과 보상 문제, ⑥ 동 예루살렘의 주권 문제 등이다. 이 모두가 양측이 양보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그 중에서도 양측이 가장 양보할 수 없는 문제는 예루살렘에 대한 주권 문제이다. 이는 양측의 성지인 예루살렘의 상징적 의미에 기인한다. 결국 이 평화회담은 예루살렘 문제에 합의하지 못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최근 이스라엘의 강경파 리쿠르당이 집권하면서 평화협정에 따른 팔레스타인 자치권 이행 절차가 무시되고 있고, 평화협상은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강경책으로 선회한 이스라엘의 입장에 대항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연일 돌을 던지며 저항운동을 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강경 진압에 대해 이슬람 과격단체라 불리는 하마스(이슬람 저항 운동)와 이슬라믹 지하드(이슬람 성전)라는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가 강도 높은 저항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1년 12월 1일과 2일에도 이스라엘 내에서 다섯 차례나 자살 폭탄이 터져 많은 사람이 사상당했다. 우리는 이런 사태에 대한 원인규명 없이 단순한 국제적 테러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그 테러범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런 테러 사건을 저지른 팔레스타인 아랍 사람들을 자신들의 빼앗긴 조국을 회복시켜 보려는 일종의 독립운동을 한 이들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과거 우리 나라가 일본에 대항해 3․1 운동을 벌인 것과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 자살 폭탄을 터뜨린 이름 모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안중근이나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순국행동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들을 단순한 테러범으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자살이 지옥에 가는 죄악이기 때문에 자살 폭탄 테러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테러활동에 대한 비난은 마땅하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독립운동 내지는 순교행위와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나라 잃은 뼈아픈 과거를 경험한 바 있는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그들의 절규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 왔는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하겠다.

현재 지구상에는 13억의 무슬림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다 바꿀 수 없다면 우리는 그들과 어떻게 공존하고 공생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13억의 무슬림이 다 틀렸다고 그들 모두에게 우리의 논리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아랍 연맹 22개 국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런 요구를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을 더 잘 이해하고,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겠다. 우리가 이스라엘은 우리 편이고, 팔레스타인은 마치 적인 양 간주하고 있다면, 우리의 굳어 버린 사고로는 13억이 넘는 무슬림과 아랍인을 향해 한발도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힘이 센 자가 정의로운 자로 간주되는 그런 힘에 의한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과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이런 아랍과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아랍의 현실을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9․11 테러 사태는 미국의 패권주의가 부른 화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자신들만을 위한 정의를 부르짖으며 오만한 자세로 국제사회를 가늠하는 어른 노릇을 해 왔다. 자신과 다르면 누르고, 반대하는 자는 가차없이 말살하는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이런 참사를 부른 것이다. 우리는 이슬람 세계가 10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3대륙을 제패하고 지배한 7~8세기에도 이런 억지는 찾아볼 수 없다. 오늘의 미국은 과거 모든 제국이 그러했듯이 언젠가는 쇠락할 것이다. 역사 속에 사라져 간 많은 제국의 번영과 강대국의 영광이 보여 주듯이 “모든 것은 차면 기운다”라는 아랍 속담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점령지 내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과 점령지 보상 문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국가를 건설하고 오늘날까지도 계속 확장을 시도하는 팔레스타인 점령지 내의 인구 비율은 유대인 82%, 팔레스타인 아랍인 18%로 추산된다. 유대인들은 점령지에서 인구수와 땅의 소유에 의해 자신들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소련, 이디오피아 등지에서 유태인들을 이주시키고 있고 이들을 위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지구 등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 이렇게 건설된 유대인 정착촌은 무려 145개에 이른다.

반면, 현재 팔레스타인 인구는 650만 명으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구는 250만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400만 명은 현재 조국에서 쫓겨나 이국 땅에서 유랑 생활을 하고 있는 난민이다. 이스라엘은 이 난민들의 귀향을 막을 뿐 아니라 아랍인들의 건축까지 법으로 규제하고 있어 자신들의 수적 우위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

또, 이스라엘은 1948년 아랍인들이 살던 지역을 강점했는데, 이 지역에 대한 영토 보상문제는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1967년 중동 제3차 전쟁에서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완전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아랍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보장해 주어야 한다.

물 분쟁

아랍 세계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물 부족 지역이다. 사막이 많은 이 지역에서 수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당시 국경 내에 있는 모든 수자원을 개발했지만, 절대량의 물이 부족한 상태여서 레바논과 점령지 팔레스타인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다. 현재 요르단 강 서안(West Bank)의 약 85%의 물은 유태인 정착민을 위해서 쓰이거나, 이스라엘로 송수되고 있는 반면 점령지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주 제한된 양의 물만을 쓰도록 통제를 받고 있다. 한 예로 이스라엘 한 사람이 1년에 사용하는 물은 170㎥(1㎥=1,000ℓ)인데 비해 점령지 팔레스타인 한 사람이 1년 간 사용하는 평균량은 UN이 결정한 최소한의 건강 유지를 위해 필요한 치수에도 못 미치는 25㎥이다.

이스라엘이 매년 1억 입방미터(㎥)의 물을 공급받고 있는 야르묵강 발원지가 골란고원이라 문제이고 갈릴리 호수 위에 위치한 요단강 물줄기도 접경 시리아가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수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상징성

이스라엘은 국경이 정해져 있지 않은 나라일 뿐 아니라, 수도가 두 개인 나라이다. 이스라엘의 수도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텔아비브와 자국이 수도라고 주장하는 예루살렘이 있다. 이스라엘은 1980년 예루살렘 영구 수도법3)을 규정하고, 국제적인 공인을 받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86년 우리 나라에서 개최된 제12차 아시안 게임 입장식 당시 우리 나라가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이라고 전광판에 게시하자 아랍 국가들에게서 빗발치는 지적과 규탄이 들어온 바 있다.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은 현재 알-아크사 사원을 중심으로 해서 아랍 지구인 동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지구인 서 예루살렘으로 구분되어 있다. 또, 예루살렘 구 시가지는 기독교도가 성 분묘교회를 지키고 있고, 무슬림들은 지구와 바위의 돔(꿉바 알-싸크라)과 그 경내(하람 알-샤리프)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유대인이 통곡의 벽을 지키고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아르메니아 교도 지구로 구분되어 있다.4) 예루살렘은 어느 측도 양보하기 어려운 성지이기 때문에 국제기구의 감시하에 관리되는 방법이나 공용지역으로 남지 않는다면 성지를 둘러싼 분쟁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아랍과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아랍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우리가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대해 갖고 있던 막연한 우호심과 동정은 이제 재고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새해를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친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어느 한 편을 들어주게 되면 이스라엘과 아랍의 충돌은 이해되기 어려운 난제로만 남게 될 것이다. 이제 막연하게 중동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들의 오늘을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일이다. 그렇게 바른 이해가 선행되고 나서야 우리의 기도도 바르게 드려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우리의 이해와 노력이 우선되고 나서야 그 충돌과 반목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그 때에야 비로소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어우러지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1) 요르단 전 후세인 국왕의 증조부
2) 1967년 9월, 1974년 11월, 1976년 3월, 1982년 3월, 1985년 9월, 1986년 12월, 1987년 1월 등 이미 일곱 차례에 걸쳐 인티파다로 불리는 팔레스타인 민족 대봉기가 있어 왔다. 1987년 12월에 시작된 인티파다는 엄밀한 의미에 볼 때는 제8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인 셈이다. 송경숙, “인티파다와 팔레스타인 문학”, 한국중동학회논총, 제22권, 1호, 2001, 208-209.
3) 예루살렘은 분할되지 않을 이스라엘의 영구적인 수도라는 법
4) 이시카와 준이치, 종교분쟁지도, 윤길순 옮김, 서울: 자작나무, 1996, 65f.

참고 문헌

송경숙, “인티파다와 팔레스타인 문학”, 한국중동학회논총, 제22권, 1호, 2001, 205-223
손주영, 김상태 편, 중동의 새로운 이해, 서울: 오름, 1999
이시카와 준이치, 종교분쟁지도, 윤길순 옮김, 서울: 자작나무, 1996
정상률, “팔레스타인 지역의 갈등사, 갈등구조 및 평화적 공존방안”, 한국중동학회논총, 제21권, 1호, 103-132.

 

출처 :   https://cafe.daum.net/kmc4755/AT6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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