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탄생
5개 아랍국가 군대들이 이스라엘의 탄생을 주시했다. 시오니즘은 그 고토를 쟁취했으나, 이스라엘 건국을 둘러싼 전쟁은 험난한 이 나라의 장래를 예언했다.
1948년 5월 14일 늦은 오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지역에서는 어디서나 침묵이, 긴장과 동시에 기대에 가득찬 고요가 감돌고 있었다. 북부의 옛 도시 사파드에서 남부 네게브 사막의 황무지에 이르기까지, 구 예루살렘의 꾸불꾸불 한 골목길에서 새 도시 텔아비브의 햇빛 내리쬐는 광장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곳곳의 65만 유대인들이 라디오 주위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정각 오후 4시 잡음을 뚫고 그들의 오랜 지도자 다비드 벤 구리온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노전사(老戰士)는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 유대민족의 민족적, 역사적 권리와 국제연합의 ....... 결의에 의하여 우리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수립하고, 그 나라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을 선포한다"
그들의 기대는 충족되었고, 그들의 긴장은 일순 사라져 버렸으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 - 이제 이스라엘 국가의 시민들인 - 은 벌떡 일어나 시오니즘 송가, 언제나 마음 속에 맴돌고 있는 희망의 노래 '하티크바'를 부르며 그 순간을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사실 국가 탄생의 그 순간에, 희망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무기처럼 보였다.
이 신생국에 대항하여 5개 아랍국가의 군대가 이미 국경에 집결하여 전쟁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기고는 전차, 항공기와 경중의 대포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을 바다에 던져 넣어 버리겠다고 장담했다. 마치 이러한 위난을 강조라도 하려는 듯 벤구리온의 목소리가 전파에서 사라지고 몇 분이 지나자 신경을 긁어대듯 울리는 공습경보가 텔아비브의 공기를 찢었고, 수천 명의 시민들이 대피소를 찾아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이 경보는 사실이 아니었고 폭격기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4000만의 인접 아랍인들이 그들을 몰아낼 결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랍지도자들은 유엔이 설정한 이스라엘 국경을 '피의 전선'으로 바꾸고,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깃발을 역사의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리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바 있었다.
종말과 시작
다비드 벤 구리온이 이스라엘 독립을 선포하기 조금 전, 다른 의식이 텔아비브 북쪽 80 Km 에 위치한 항구도시 하이파에서 거행되었다. 그곳에서는 말쑥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한 영국 신사, 마지막 팔레스타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엘런 커닝엄경이 휘하 부대의 한 분견대로부터 경례를 받았다. 뒤이어 그는 모터보트를 타고 지중해를 향해 출발했으며, 앞 바다에는 순양함 한 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간단한 의식과 더불어 성지에 대한 31년간의 영국통치는 종지부를 찍었다. 영국통치는 제1차대전중에 시작되었다. 1917년 12월 영국 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팔레스타인을 터키의 손아귀에서 탈취하고, 영국 외상 아서 벨푸어가 유대계 영국인 과학자 차임 와이즈만에게 했던 약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뒷날 '벨푸어선언'으로 구체화된 이 약속은 같은 해 이미 정식으로 발표된 바 있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영국정부는 유대민족의 민족적 본거지를....... 설립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고려할 것이나....... 팔레스타인의 기존 비 유대계 공동체들의 민권과 신앙권을 손상시킬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족주의의 부활을 후원하겠다는 영국의 결정은 온갖 상황을 거치면서 구체화되었다. 1890년대말부터 여러 나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성지로의 유대인 이민을 후원하는 범 세계적 시오니즘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세계적인 화학자 와이즈먼 이었는데, 그는 영국의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시오니즘의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제1차대전중에 와이즈먼은 몇 가지 중대한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함으로써 영국의 전쟁노력에 공헌했고, 밸푸어 선언이 발표된 것도 어느 정도는 그의 영향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들도 있었는데, 그중에도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이 연합국 편으로 전세계 유대인의 지지를 규합하려는 런던 당국의 희망이었다. 따라서 세계대전과 붕괴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의 전략적인 중동영토를 지배하려는 영국의 관심이 시온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열광적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게 되었다.
시오니즘 노선에 동정적이었던 밸푸어는 이 기회를 포착했고, 이렇게 해서 대영제국은 수십년 동안 그 반동을 느끼게 될 새 국가건설이라는 실험에 뛰어들게 되었다. 1922년 국제연맹은 성지에 대한 영국의 잠정적 권리를 인정하고, 밸푸어선언의 원칙들의 실행을 위임했다.
이렇게 구성된 아랍국의 바로 중심부에 팔레스타인이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처음에는 성지문제 토의를 전쟁후까지 기꺼이 미루어 두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권력정치의 현실이 표면화되었다. 영국은 중동에 대해 또 다른 제3의 언질을 자국과 그의 전시동맹국 프랑스에게 주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랍의 항의를 묵살하고 런던과 파리는 중동을 분할하여 나누어 가졌다. 영국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이집트에 대한 종주권을 계속 유지할 생각이었고 이에 더하여 이라크, 요르단 동쪽의 팔레스타인 지역 (트랜스요르단), 팔레스타인 자체,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와 동부 해안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점령했다. 아랍의 군주와 추장들은 격분하여 이 배신을 비난했다. 그러나 두 서양 강대국에 도전할 힘이 없었던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점차 성장하고 있던 유대인 정착지에 그들의 분노를 돌렸다.
1922년쯤에는 약 8만 5000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었다. (약 65만 명의 아랍인들 가운데서) 그중 대다수의 유대인 들은 세기가 바뀔 무렵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반유대 난동을 피해온 피난민이었거나 성서시내 이후 계속 성지에 남아있던 유대인의 후손이었다. 그 나머지는 현대 시오니즘 운동의 후원하에 2년전부터 들어온 이상주의적 이주민들이었다.
급증하는 유대인들에 놀라고, 영국의 중동정책에 원한을 품은 팔레스타인의 아랍 지도자들은 1920년에 반유대 폭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성지에서 야기된 첫번째 폭동이었다.
2차대전 전후의 사태
그러나 1930년대까지는 유대이민의 홍수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었다. 새로 들어선 나치독일 정부의 반유대 정책에 자극되어 독일에 거주하던 수십만 유대인들이 1933년과 1939년 사이에 고향을 탈출했고, 그중 상당수가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그런데 제2차대전 직전이었던 1939년초에 영국은 팔레스타인 정책을 변경했다. 다가오는 전쟁에 아랍의 지원이 다급해진 런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백서를 발표하고 그 뒤 5년간의 이민수를 7만 5000명으로 제한 했다. 그 시기에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이 나치점령하의 유럽에 갇히게 되었고, 그중 600만 명은 히틀러의 집단수용소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 군대가 유대민족에 대한 궁극적인 위협임을 깨달은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영국군에 입대했다. 히틀러에 대항하는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한편, 독일의 광기에서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하려는 시온주의 조직의 노력도 가중되고 있었다. 남부 유럽의 항구 몇 개가 개방되어 있던 전쟁 초기에 이들은 물이 새고 간신히 바다를 건널 만한 소형선박을 이용하여 유대난민들을 몇 차례 팔레스타인에 밀입국 시키려 시도했다.
이 난민들 중에서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대인들의 불법이민을 저지하기로 결심한 영국당국은 팔레스타인 연안에 강력한 해상 순찰망을 조직하여 처음에는 밀입국자들을 강제로 출항지로 돌려보냈으며, 그 뒤에는 중앙아프리카 영국령으로 보냈다. 영국의 이러한 몰인정한 처사가 일으킨 분노의 물결이 유대인 거주 팔레스타인을 휩쓸었다. 유대대행기구 (Jewish Agency)의 군사조직인 유대국민군 (Haganah)은 점차 공격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2차대전이 끝난 후인 1945년에 영국이 정책을 변경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을 때 유대인들이 느꼈던 격분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6년 전에는 아랍 제 5열에 대한 영국의 공포가 런던의 정책을 지배했던 반면, 이제는 석유자원이 풍부한 중동에 대한 소련 침투의 공포가 유럽에서 집을 잃은 나머지 유대인들을 성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무기를 잡았다. 전과 같이 아랍 습격대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압제자들이라 생각하는 자들을 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목표는 영국군과 그 시설들이었다. 1946년과 1947년에 지하 테러조직의 대원들이 나라 안을 돌아다니며 10만 영국 주둔군을 대상으로 기습 및 폭탄공격이라는 유혈작전으로 쌓여있던 원한을 발산했다. 테러조직인 이르군, 즈바이, 레우미와 슈테른은 아랍인들에 대한 폭력운동을 가중시켰다.
한편 벤구리온과 골다 메이어 (두사람 모두 뒷날 이스라엘 수상이 되었다) 같은 또 다른 전투적 시온주의자들은 무기를 나라 안으로 밀반입하고, 영국 순찰함을 피해 난민들을 잠입시키며, 영국정책에 반대하는 세계여론을 일으키는 활동에 그들의 정력을 집중했다. 정책을 완화시키지 말라는 아랍인들, 시온의 대문을 활짝 열라는 유대인들, 시온주의자들을 지지하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등 - 사방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영국은 1947년에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회부했다.
아랍민족의 결속
1947년 11월 29일 몇 주일에 걸친 열띤 토론 끝에 유엔총회는 33대 13 (기권10) 으로 팔레스타인을 2개의 독립국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10만 아랍인들의 국가와 와 65만 유대인들의 국가를 따로 만든다는 것이다. 유대인 들에게 있어 이것은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들에게는 할당된 지역은 유대대행기구 (Jewish Agency) 가 제의한 땅보다는 상당히 작았으나, 최소한 유엔의 결정으로 존립 가능한 국가의 출발만은 약속받았고, 그 나라는 히틀러의 살인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생존자들에게는 안식처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에게는 이 결정이 불법무도한 행위, 오랫동안 그들의 땅으로 생각해 온 지역의 강탈이었으며, 피로 보복해야 할 모욕이었다. 즉각 그들은 반격을 가했다. 예루살렘의 아랍 폭도들이 인근의 유대인들을 공격, 살육했고, 아랍 폭탄 테러단이 시장에서 폭발물을 터뜨렸으며, 팔레스타인과 인근 국가에서 규합된 아랍 게릴라들이 유대인 정착촌을 포위하고 교통통신망을 단절했다. 1947년 12월에 이르자 팔레스타인은 사실상 내전상태에 들어갔고, 서서히 철수하고 있던 영국군은 이에 개입하기를 거부하였다.
현위치를 지키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절대절명의 방침이었다. 대부분 소총만으로 무장한 정착촌들은 각기 물러서지 않고 치열한 아랍인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분할결의안 통과에서 국가 선언에 이르는 6개월간 유대인들은 단 한치의 땅도 내주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는 아랍인들에게는 없는 승리의 두가지 열쇠, 즉 단결과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십년에 걸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문제는 유대대행기구 (Jewish Agency)가 관장하고 있었다.
이 기구는 반공식적으로 선출된 기관이었는데, 영국이 떠남과 동시에 나라의 통치권을 행사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때가 되면 공식 정부로 나서게 되게 되어있었다. 비록 테러집단으로 조직된 유대인 반대세력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절대다수는 그 기구의 권위를 인정했고, 그 지도자들은 기구의 지시를 준수하려 노력했다.
팔레스타인과 인접해 있던 아랍 각국은 시오니즘을 혐오한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 했으나, 강력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없었고, 그 결과 그 처럼 작고 어린 국가쯤 쉽게 패배 시킬 수 있다고 그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심각한 과오를 범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단결이 결여된 아랍측에 대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곧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1948년 봄에 유대국민군(Hahanah)은 유엔이 제안한 유대국가내의 모든 중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들이 점령한 도시들에는 중추적인 항구 하이파, 아랍인 도시 욥바, 시리아 국경 부근의 사파드 그리고 예루살렘 신도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신도시는 인접한 보다 작은 구도시와 함께 유엔이 국제지역으로 지정한 곳이었다.
유대인 들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진격함에 따라, 수십만 아랍인들이 도주했다. 그들의 생명과 재산은 안전하리라는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의 보장을 불신하고, 곧 진격하게 될 아랍군의 뒤를 따라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믿으면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황급히 세간을 챙겨 배로, 버스로, 달구지로 또는 자동차로 국경을 넘어 인접국의 안전지대로 흘러 들어갔다. 거기서 그들의 대다수는 강제로 난민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들의 가련한 피난길은 이르군과 슈테른의 잔악무도한 폭행으로 인해서 궤주로 변했다. 두 폭력집단은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의 지시를 묵살하고 1948년 4월 10일 데이르얏신이라는 마을에서 아랍 민간인 254명을 학살했다. 1949년까지 약 50만 명의 아랍인들 - 원래 살고 있던 주민의 75 % - 이 이웃나라로 피난가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탈출했다.
아랍의 폭도들을 저지하는 것과 아랍군대를 패퇴시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와 그것을 사들일 돈이었다. 그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는 1948년 초 골다 메이어를 미국으로 파견했다. 불과 한 달 동안 회오리 바람처럼 전국을 순회하며 메이어는 유태계 미국인들로부터 5000만 달러를 모금했다. 그리고 유럽 6개국의 잉여 장비 보관 창고에서 무기 - 기관총, 소총, 바주카포, 나르는 공중요새 B-17 폭격기, 그리고 아이러니칼하게도 나치 십자장을 다윗의 별로 다시 그린 몇 대의 독일제 메서슈미트 전투기들 -을 구입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으로 밀반입 할 수 있던 소량을 제외하고는 절박하게 필요했던 이 물자들은 영국의 공식 철수시점이었던 5월 14일 자정까지는 팔레스타인으로 반입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영국 해군함대는 무기반입을 방지하기 위한 팔레스타인 근해 순찰을 중지하게 되어 있었다. 한편 그 순간은 아랍국가들의 군대가 침공을 개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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