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젊은이의 경우
눅 9:57-62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
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
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대강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토요일이면 대망의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참 많은 사람들이 고대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아무도 모르게 호젓이 오셨습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오신 것도 아니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아주 짧은 인생을 살고 그 인생도 철두철미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12제자들을 아주 강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께서 그렇게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앙인이 가야할 길과 제자의 삶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보시고 우리들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신앙의 길이 잘 가고 있는지 한번 자신을 돌아다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길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때는 오늘같이 여관이나 숙박시설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민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행은 하룻밤 유숙할 곳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 마다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만 제자들은 격분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우리가 누군데“하는 자존심이 작동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발휘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제자들인데 우리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가 하는 자존심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 나서 “이 동네를 쓸어버리자”하고 말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생각이고 발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유숙할 곳을 찾아 처량하게 발길을 옮기고 있을 때 세 사람의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여기 나오는 세 젊은이의 모습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첫째 젊은이
이 젊은이는 예수님께 오더니 본문 57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하고 말합니다. 그 말은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하는 각오를 피력한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아주 확실했고 분명했고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힘을 얻고 용기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씩씩하고 용기 있는 젊은이 입니까. 과연 젊은이답습니다. 젊은이는 이런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같은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 이 세상을 효과적으로 살아가려 해도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이 용기입니다. 저는 이렇게 용기 있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언젠가 TV 프로를 보니까 고등학교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사회자가 여학생들에게 여학생이 보는 남학생의 추한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학생들이 대답하기를 “용기 없고 박력 없는 남자”, “여학생들 앞에서 얼굴이 붉혀지고 벌벌 떠는 남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여성이 보는 남자다운 모습은 용기 있고 대담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이 젊은이의 모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찾아 왔습니다. 와서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 친구가 “왜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너무 용기가 없는 너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가 없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 친구에게 믿음과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결단력도 없고 용기도 없는 모습으로 보여서 인생을 맡기고 따라갈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갑니다. 그런 남자 친구에게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흔쾌히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기에 여자 친구가 그렇게 미덥지 않게 보느냐 물으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음식점에 가서, 커피 집에 가서 뭘 주문할 때 언제나 이 남자 친구는 여자 친구에게 네가 먼저 시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똑같이 시키겠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하면 어디서 몇 시에 만나느냐 약속할 때 언제나 네가 먼저 말해라, 그러면 나는 따라가겠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이 여자친구는 이 남자 친구에게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무슨 남자가 이러냐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남자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오늘 만나거든 뭘 먹을래 하고 묻지 말고 평소 그 친구가 좋아하는 것으로 “돈가스 둘” 하고 시켜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날 때는 전화해서 “오늘 오후 6시까지 시청 앞으로 나와”하고 전화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남자는 때로 이런 용기나 박력이나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그런 태도는 좋지 않지만 때로 이런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신뢰가 나오고 믿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용기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청년을 보십시오. “주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리이다“하고 찾아 왔습니다. 얼마나 믿음직하고 용기가 있습니까. 이만하면 제자가 될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래, 어서 오너라. 나에게는 너 같은 제자가 필요하다”하고 반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유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나는 오늘 하룻밤 잠잘 집이 없다”하고 제자가 되겠다는 것을 정중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제의를 왜 거절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젊은이에게서 용기도 보셨고 박력이나 패기도 보셨는데 어딘지 모르게 이 젊은이의 모습에서 허점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서 성급하고 신중하지 못하고 희생정신이 없는 내용 없는 신앙을 가진 젊은이임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용기나 패기나 박력만 가지고 됩니까.
이 청년이 듣기에는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인기도 좋고 죽은 자도 살리고 문둥병자도 고치고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군중으로 환영을 받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예수의 제자가 되면 아주 영광스럽고 장래성도 있고 잘하면 출세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가 지금 예수님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모르고 달려가서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했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님이 지금 당장 잠잘 곳도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울 좋은 영광만 보았고 겉모습만 보고 제자가 되겠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구체적인 신앙이 없는 것을 보시고 정중하게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정열적인 신앙을 원하십니다. 좀더 용기 있고 열광적이고 박력 있고 투철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보다 먼저 내용이 충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겉에서 화려하고 열광적인데 속은 빈약한 신앙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20년, 30년 된 신앙의 경력보다 오늘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삶을 유지하고 있고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가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젊은이에게서 보는 모습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모습이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젊은이
첫 번째 젊은이를 돌려보내고 예수님은 두 번째 젊은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이 젊은이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장사지내고 따르겠다.” 고 합니다. 여기 보면 참 이상한 모습이 나옵니다. 먼저 젊은이는 따르겠다고 해도 거절하시더니 나중 사람에게는 나를 따라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차이가 있다면 먼저 젊은이는 내용 없는 열광주의자라면 후자는 내용은 있는데 용기가 없는 사람 같습니다. 간혹 보면 성도 중에 일어서서 따를만한 용기가 없는 분이 있습니다. 스스로 결단하고 수고하고 땀 흘릴 용기가 없는 분이 있습니다.
지난주일 왜 예배에 나오지 못했느냐고 물으면 피곤해서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늦잠을 자다가 그만 늦어져서 나오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과 다투었는데 기분 나빠서 빠졌다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신앙생활이 유지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나약한 신앙에서 어떻게 무슨 힘이 나와서 큰일을 하고 무슨 용기로 십자가를 지는 아픔을 감수하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용기입니다. 이것이다 했으면 태도를 분명히 하고 쫓아갈 만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스러운 십자가는 지지 못할망정 그리스도인으로 오늘 같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출 32:장을 보면 이 대목은 차라리 없었더라면 참 좋았겠다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을 내려오지 않습니다. 산 아래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다 모두 지쳤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아마도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셨을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가셨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모세를 대신할 후계자 뽑는 일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모세가 죽었으니 모세의 하나님도 떠나버린 줄로 알았습니다. 그때는 백성들의 생각이 이렇게 성숙하지 못해서 유치했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금덩어리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금송아지가 우리의 하나님이다“하고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이 대목을 아주 예민하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이렇게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에 모든 백성들이 다 찬성했겠습니까. 거기에 아론도 있고 장인도 있었고 100부장, 천부장 그리고 지파 장로들 70여명이나 있는데 그 일이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그때 누가 반대했다 하는 그런 이야기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모두 일사불란하게 금송아지를 만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내용을 유추해 보는 것입니다. 생각한 결과 그때 거기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때 거기에 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극심하게 반대했었다는 것입니다. 훌이 누구냐 하면 아말렉과 전쟁할 때 여호수아와 함께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들고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백성 앞에 나서서 목숨을 걸고 “좀더 기다려보자, 이것은 죄다, 이러면 벌을 받는다.”하고 극렬하게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친애굽파 백성들이 훌을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 32장 이후를 보면 이 훌에 대해서 다시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 이 훌이 순교를 한 것입니다.
그때 아론도 훌과 함께 같이 반대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훌이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고 그만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앞장을 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론이 누구입니까. 말 잘하기로 하나님도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같이 애굽에 대사로 파견된 사람이 아론입니다. 아론은 말은 잘하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진리가 왜곡되고 하나님이 욕을 당하고 이렇게 하면 장차 이 백성이 큰 진노 받을 것이 분명 한데 그래서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데 훌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니 순간 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돌에 맞아 죽을까봐 하라는 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결과로 그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아 3천명이나 재앙으로 죽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말을 잘한다면 그 달변으로 위기의 때 일어나서 이것은 죄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하고 설득해서 마음을 돌이키게 해야 그것이 말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는 사람은 허구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말을 잘하는 사람은 대부분 용기와 의지력이 없다고 그럼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주일날 왔다 갔다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용기의 삶이고 이것이다 하고 작정했으면 장애물이 있어도 넘어가는 결단력과 의지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신앙인들에게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젊은이에게서 내용은 있는데 일어서서 주님을 따를 만한 용기가 없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 지금 돌아가시려고 하는지, 아니면 돌아가실 때가 가까웠는데 돌아가시면 장사지내고 따르겠다는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 따를 만한 용기가 없는 젊은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젊은이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 번째 젊은이
세 번째 젊은이는 따르겠는데 먼저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하고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유명한 말씀으로 이 청년을 교훈시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그 말은 신앙생활에서는 조건이나 핑계나 구실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은 구실이 많고 핑계가 많은 분이 있습니다. 뭘 좀 하자고 하면 “시간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정말 시간이 많은 사람은 주님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환락을 좇거나 불필요한 일에 집중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시간이 없는 분이 여러 가지를 맡아서 일합니다. 하는 사람은 더 많이 하고 하지 않는 사람은 한 가지도 못합니다. 문제는 핑계입니다. 이것이 내가 할일이다 정했으면 조건이나 핑계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엄청난 명령을 받고 상당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명령은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고민한 그는 마침내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조용히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만일 그때 아내에게 자초지종 상의했더라면 그날 큰 차질이 빚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고민하다가 어차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피할 길이 없음을 알고 고민하다가 그냥 혼자 시행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성경을 보면 그 즉시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그날 그 부름을 받고 집에 가서 아내와 가족들과 상의했더라면 그가 결단 내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상당한 장애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가족과 상의하면 모든 일이 그르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길이다 작정되었으면 불필요한 핑계나 장애물들은 극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신앙인이 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거기에는 용기도 결단력도 신앙의 내용도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 나타난 세 사람의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 꼭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 젊은이는 용기는 있는데 내용이 없고 또 한 젊은이는 내용은 있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젊은이는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핑계가 많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제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이 한해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여기 이 세 젊은이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신앙의 길에서는 때로 용기와 결단력과 희생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나를 기꺼이 투자하고 바쳐지는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그런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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