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제17강 심판의 철저성(3:13-15)

by 【고동엽】 2022. 4. 16.

제17강 심판의 철저성(3:13-15)

 

3:13-15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딴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다시 한번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2:13∼16에서 잘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암2:13∼16)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 우리가 생각해볼 본문에서는 행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얕은 꾀를 써서 제단의 뿔을 잡고 살아남아보겠다고 생각한다든지, 또는 튼튼하게 세운 어떤 궁궐 속에 숨어서 재난을 피하려고 하는 모든 생각이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만큼 철두철미하다는 것입니다. 더럽고 곪은 부분을 하나도 남김 없이 완전히 도려내 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하신 의지가 오늘 본문 속에서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검토를 해봅니다.
13절을 읽어봅니다.
(3:13)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13절은 두 개의 명령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듣고." 들으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잘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대로 증거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동사 "증거하라"는 말의 원뜻은 "경고하다"라는 뜻입니다. 죄의 심판이 임박했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너희는 듣고"라고 할 때 "너희가"는 누구이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을 경고해야 할 당사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몇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아모스의 예언을 듣고 있는 청중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그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증거하라"는 뜻으로 풀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듣고 자기에게 경고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설득력이 없는 줄 압니다.
둘째, 3:7과 관련해서 선지자들로 본 견해입니다.
(암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즉 하나님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미리 보이시고, 또 보이신 그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경고하라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 견해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만, 아모스서에는 언제나 아모스가 혼자서 사역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다른 선지자들과 협동해서 나타나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견해도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점이 없잖아 있습니다.
셋째, 3:9에 나온 이방 나라, 즉 아스돗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게 파견된 조사단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들이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서 사마리아 성 내의 모든 포학과 겁탈을 다 목격하였기 때문에 이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라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나라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삼았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없잖아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이라는 말의 의미를 수사학적인 용법으로 보는 견해가 더욱더 바람직할 줄 압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실질적으로 누가 꼭 있어가지고 그 사람에게 듣고 경고하라는 임무를 준 것이 아니라, 메시지의 효과를 나타나기 위해서 가상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입니다. 3:9에서 이러한 표현이 쓰여져 있습니다. "아스돗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게 광포해 이르기를." 누가 광포해 이르는 사람입니까? 실제로 꼭 그렇게 하기를 바라면서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실제로 사람들을 보내서 그들을 다 초청해 오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좀더 쉽게 설명을 해봅니다. 우리가 흔히 이런 말을 쓰지요. "야!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한번 물어보아라." 실제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좀더 극적인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가상적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수사학적인 표현(rhetorical expression)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됨으로써 오늘 본문에는 심판주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또 심판을 받게 될 피고로서 야곱의 족속이 등장합니다. 아울러 "너희는"이라는 말로 표현된 가상적인 증인들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법적이 효과가 더욱더 강해지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무슨 말로 표현을 했습니까?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여!"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요,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고 하는 뜻으로 그렇게 부릅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칭호들 가운데서 특히 언약적인 칭호라고 일컬어집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 그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만군(萬軍)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확실합니다. 때로는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의 군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천체, 즉 해와 달과 별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아모스가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으로서 천지의 모든 군대의 세력을 다스리시고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에 닥칠 심판의 집행자로서 권위가 있으시고 위력이 있으십니다. 반드시 그것을 이루시고 마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심판을 받아야 할 피고인 이스라엘을 무엇이라고 표현했습니까? "야곱의 족속"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서 야곱이라고는 말을 아모스가 특별히 사용하게 된 이유는 야곱과 14절에 나오는 벧엘과 특별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과 벧엘의 관계의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배고픈 형 에서를 유혹해서 장자의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그는 또 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형 대신에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일 때문에 먼길을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황량한 벌판을 혼자서 방황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해가 졌습니다. 야곱은 피곤하고 지친 몸을 가눌 길이 없어서 벌판의 돌을 베개삼아 누웠습니다. 아마도 무척이나 자기 집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쓸쓸하고 황량한 벌판에 혼자 있다는 생각 때문에 미치도록 외로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야곱이 꿈속에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닥다리 하나가 땅 위에 서 있었습니다. 꼭대기는 하늘 위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닥다리 꼭대기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 사닥다리 위에는 하나님께서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야곱은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베개로 삼았던 돌을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일생을 건 감격적인 서원을 했습니다.
(창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그리고는 그곳 이름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본시 벧엘은 이와 같이 좋은 의미로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야곱, 즉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좋은 관계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벧엘은 이스라엘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 왕국으로 분리될 때부터 우상예배의 중심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의 창건왕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두 개 만들어서 하나는 북쪽 단에 두고 다른 하나는 남쪽 벧엘에 두어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했습니다. 그때 부터 북방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왕상12:25∼2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상12:25∼29)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와 같은 우상숭배의 중심이며, 그릇된 종교의 중심지인 벧엘은 당연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3:14)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는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의 뿔들을 꺾어 버린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성막 안에는 두 개의 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막의 외소에 있고 하나는 성막의 내소에 있습니다. 밖에 있는 단을 번제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것은 향단이라고 합니다. 향단은 제사장만 들어가서 향을 피우는 곳이기 때문에 일반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출27:1∼3을 읽어봅니다.
(출27:1∼3)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지며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
이것은 번제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번제단은 성막 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할례 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번제단에는 네 개의 뿔이 있습니다. 본시 이 뿔은 희생제물로 드릴 짐승을 제단에 매어 놓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단 뿔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출21:12∼14)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여기서 말하는 한 곳은 어디를 말합니까? 도피성을 말하지요. 그 다음에 여기서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고 한 말씀을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말씀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두 곳을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왕상1:50)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왕상2:28) 그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 저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뿔을 잡으니 이는 저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좇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좇았음이더라
따라서 제단 뿔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제단 뿔을 잡을 경우에는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단의 뿔들도 꺾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희망조차도 이제는 다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제사는 그것이 이방신을 위한 것이었든, 또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든 간에 아무것도 하나님께서 기뻐 열납하지 아니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 왕을 책망할 때에도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낫다고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15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3:15)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딴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친다는 동사의 주어는 1인칭입니다. 누가 친다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 줄 압니다. 첫째로, 대적의 손에 의해서 치는 것입니다. 3:11∼12에 자세한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
(암3:11∼12)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두번째, 지진으로 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암2:13)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암8:8)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암9: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이스라엘의 지배 계급은 약한 자들을 착취하고 겁탈해서 여름 궁과 겨울 궁을 건설했습니다. 여기서 여름 궁과 겨울 궁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2층으로 된 건물을 가리키는 말로서 아래층은 겨울용으로 사용하고, 위층은 선선한 다락방으로 여름 궁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삿3:20) 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또 한 가지는 철마다 지역이 다른 곳에 별장을 두어 살듯이 계절마다 궁전을 옮겨 이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류계급들은 왕들 못지않게 좋은 집들을 짓고 호화스럽게 살았다고 합니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것을 보면 아모스 시대 이전에는 집들의 크기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모스 시대에는 큰 집과 작은 집의 차이가 판이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들의 호화로운 집들은 상아 궁이라는 말로써 표현되어 있습니다. 왕상22:39에 보면 아합 왕이 살던 궁을 상아 궁이라고 했습니다.
(왕상22:39) 아합의 남은 행적과 무룻 그 행한 일과 그 건축한 상아 궁과 그 건축한 모든 성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모스 시대에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시대로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대단히 부강하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곳곳에 상아를 이용해서 장식을 한 많은 집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암6: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한 집들, 여름 궁, 겨울 궁, 상아 궁 등 큰 궁들이 결딴나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본문이 말씀하는 의도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가지고 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번 정리해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죄의 심판이 임박했고 그 심판의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고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옛날 니느웨 사람들이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지만 요나의 외침을 듣고 저들은 즉시 죄에서 떠났습니다.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랐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회개하고 죄에서 돌아섰을 때 하나님은 저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획된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켰습니다.
하물며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아모스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였던들 하나님은 저들을 틀림없이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리해서 드디어 주전 722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대적 앗수르의 손에 의해서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함으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겠습니다. 혹시 이 시간 내가 이스라엘처럼 자기 교만, 또는 자기 도취에 빠져 있지 않는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행동은 이스라엘과 같지 않는지를 반성해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