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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강 심판의 날을 대비하라(4:12-13)

by 【고동엽】 2022. 4. 16.

제26강 심판의 날을 대비하라(4:12-13)

 

4:12-13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결과적 의미를 주는 단어입니다. 앞에서 나온 내용에 대한 결과로써 다음에 나오는 내용처럼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앞에 나온 다섯 번에 걸친 하나님의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이러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은 결과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을 보시겠습니다.
(4:12)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우선 여기서 말한 "이와 같이," 또는 "이것을"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점을 먼저 밝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 또는 "이것을 행하리니"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무엇을 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우선 이것이 바로 앞에 기록된 재앙들, 즉 지나간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일으키셨던 다섯 가지 재앙들을 가리킨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 다섯 가지 재앙들은 이미 과거에 다 일어났던 것들입니다. 그 다섯 가지 재앙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여태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똑같은 재앙을 보낸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 소용 없는 노릇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와 같이," 또는 "이것을"이라는 말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미래적인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아모스가 이 말을 하면서 아마도 손가락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라." 다시 말해서 "너희의 이 더러운 제단을 내가 무너뜨려버리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상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여기서는 아모스가 일부러 "이것"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불안과 공포를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은 어떤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같은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여기서 그 효과를 한껏 더 강조하기 위해서 같은 내용의 말을 한 번 더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앞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재앙과는 질적으로 다른 훨씬 더 혹독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괜히 누가 다가와서 다짜고짜 이런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십시다. "당신, 요즘 형편없어. 이따가 나 좀 봐." 그러면 괜히 더 신경쓰이고, 상대편이 이따가 무엇이라고 할지를 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아모스도 극적인 효과를 더 주기 위해서 딱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하지 않고 모호한 말로 "이와 같이," "이것을" 행하리라고 말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라는 말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닥칠 혹독한 심판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모스가 더욱더 큰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일부러 모호란 말로써 암시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수사학적인 표현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고 한 말 중 "네게"라는 말이 단수로 사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라는 말에서도 "네게"라는 말이 단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너희"라는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단수를 쓰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충대충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남김없이 다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좀더 무서운 극적 효과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단수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은 아닌 줄 압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여러 번 회개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참된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심판주로서 저들에게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치시는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셔서 너희를 치러오실 터이니 너희는 하나님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렘21:13)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저버리고 계속 범죄의 길을 걷고 있는 이스라엘을 무찌르실 대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을 다른 대적의 손에서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의 적이 되셔서 저들을 손수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암5:17을 한번 찾아보시겠습니다.
(암5: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심판주로 이스라엘을 만나실 때에 거기에는 울음 소리가 날 것입니다. 왜 울음 소리가 나겠습니까? 하나님이 저들의 대적이 되셔서 저들을 살육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 옛날 애굽에서 하나님의 신이 애굽 가운데로 지나실 때에 모든 애굽인들이 장자를 잃고 우는 울음 소리가 진동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암9:1을 찾아봅니다.
(암9: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단 곁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의 가증스런 제단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요, 축복도 아닙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심판을 당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13절로 넘어갑니다. 이제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나타나실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하나님이신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4:13)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대저"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큰 대(大)자에 막을 저(抵)자를 쓰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라면 "크게 막는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말 사전에 보면 "대체로 보아서," "무릇"이라는 뜻으로 해석을 해놓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어떤 뜻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대저"는 히브리어 "키"(  )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히브리 말의 원 뜻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 제일 끝에 나오는 송영이 있습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때의 "대개"가 무슨 뜻입니까? 대략, 대충이란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 나오는 "대저"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왜냐하면"이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가 지금 이러이러한 간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를 드린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으로 우리가 "대개"라는 말을 붙여서 암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저"라는 말 대신에 우리가 잘 아는 현대어 "왜냐하면"이란 말을 넣어서 12절 마지막 부분부터 다시 읽어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왜냐하면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좀더 쉽게 설명드리면 이런 뜻이 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해라, 준비해라. 왜냐하면 네가 만나는 하나님은 시시한 분이 아니시다. 산들을 지으시고, 바람을 창조하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단단히 준비하고 하나님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여라."
여기에 보니까 하나님이 산들을 지으시고, 바람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눈에 보이는 산과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눈에 보이고, 안 보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하나님의 강하신 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산을 지으시고 바람을 창조하신 무한하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무찌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시며." 이 구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라고 하는 것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문맥적으로 보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1) "자기"를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암3:7을 봅니다.
(암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혹하게 심판하시려는 자신의 뜻을 아모스를 통해서 이미 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2) 자기라는 말을 뒤에 나오는 사람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뜻이 무엇인지 환하게 다 아시고, 그것을 지적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완악함을 다 지적해주셨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의거하여 해석한다면 두 가지가 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전자, 즉 "자기"를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에 따라 해석해놓은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실 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해치우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뜻을 미리 다 인간들에게 보이셔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은혜스러운 해석입니다만 여기서 문맥적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대목은 아닌 줄 압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심판주로서, 능력 많으신 분으로서, 무서운 위력을 가진 분으로서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후자의 해석이 더 좋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마음까지도 다 꿰뚫어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겉으로는 제물을 많이 드리고, 십일조를 열심히 드린다고 해도 속마음까지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지극히 당연성을 가진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의 해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을 봅니다. "아침을 어둡게 하며." 이 말씀은 주야가 바뀌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 말이 단순히 하나님은 지구의 자전을 주관하고 계신 분이라는 뜻으로 보기보다는 좀더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 줄 압니다. 아침이라는 것이 언제입니까? 밝은 낮이 되기 바로 직전입니다. 무엇인가 밝은 것을 기4대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와야 할 밝은 낮이 오지 않고 무엇이 된다는 것입니까? 다시 어둠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대가 완전히 꺾여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깊은 절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 됩니다.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라는 말과 비슷한 표현이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욥9: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미1:3)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마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하나님께서 실제로 발이 있어서 땅의 높은 곳을 밟고 있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람이나 번개를 동반한 폭풍으로써 땅의 높은 곳도 마음대로 지나다니신다는 뜻을 의인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이스라엘이 사마리아 성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또 벧엘이 높은 곳에 위치한다 해도 하나님의 발 아래 짓밟힘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대항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자도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13절의 제일 마지막은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를 여기에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 앞에 하나님을 묘사하는 단어가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만군(萬軍)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문자 그대로 군대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의 모든 천체, 곧 해와 달과 별을 자신의 군사로 다스리시고 또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늘의 천군 천사를 군대로 삼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으로서 천지의 모든 군대의 세력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에 닥칠 심판의 집행자로서 강한 힘과 권위와 위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분으로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을 만나러 나오실 터이니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예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셨던 그 다섯 가지 재앙보다도 훨씬 더 극심한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치실 것이니까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암5:1을 읽어보십시다.
(암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지금 아모스의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하나님이 무찌르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체가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무엇을 지어서 부르고 있습니까?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애가를 지어서 5:1에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몇 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사람이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12: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1) 인간의 속 중심을 환하게 꿰뚫어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일까지 살피시고 사람이 하는 행동, 숨은 배후까지 다 살펴보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경건한 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무섭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순전하지 못할 때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무리 그럴 듯하더라도 그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전에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간음했습니다.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의 눈을 가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서 다윗의 죄를 백일하에 드러나게 만드셨습니다. 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주기로 하고 은 30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은밀한 죄를 다 드러내셨습니다. 오늘날 2천 년을 내려오면서 가룟 유다가 은 30냥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은밀한 것까지 다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실 뿐 아니라 그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형벌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고서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의 대적이 되셔서 저들을 벌하신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았기에 진노하신 하나님의 발에 짓밟힘을 당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벌하십니다. 어떤 때는 양심을 통해서 벌하십니다. 어떤 때는 육신에 병을 주시기도 합니다. 사업에 실패도 하게 하시고, 환난을 내리기도 하십니다. 어떤 때는 나라의 법을 통해서 벌하기도 하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또 하나님은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는 영혼까지도 지옥불에 던져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멀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모든 것을 은밀히 살피고 계시는데 어찌 내가 하나님의 눈앞에서 범죄할 수 있으리오!"하고 죄를 멀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 잘못하여 죄를 지으면 즉시 회개합니다. 죄를 묻어두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회개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으면 두려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변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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