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25강 이스라엘에 내린 다섯번째 재앙(4:11)

by 【고동엽】 2022. 4. 16.

제25강 이스라엘에 내린 다섯번째 재앙(4:11)

 

4: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 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내리신 마지막 다섯번째 재앙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4:11을 보면 다른 글씨보다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단어 두 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성읍"이라는 단어와 "내가"라는 단어입니다. 왜 작게 쓰여져 있습니까? 원문에는 그 단어가 없다는 뜻입니다. 단지 번역하는 과정에서 본문의 뜻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첨가한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 작게 적어놓은 것입니다.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의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우선 "내가 너희 중의 무너뜨리기를"이라고 했는데 무엇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까? 뒤에 보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 성읍들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원문에 없는 성읍이라는 단어를 작게 첨부해놓았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후반부는 좀 어색합니다. 전반부의 주어가 무엇입니까? "내가"입니다. 그런데 후반부는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어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앞의 "내가"라는 말과 뒤의 "하나님이"라는 당사자가 서로 다른 인물인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어색한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단어 뒤에 원문에 없는 "내가"라는 대명사를 주어로 첨가해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뒷부분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주어로 보지 않고 형용사로써 무너뜨림을 수식하는 단어로 보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의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그리고 나서 여기에 사용된 "하나님"이라는 낱말을 최상급의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최고라고 하는 최상급의 의미를 부여해줄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땅"이라고 하면 "최고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땅 가운데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신 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땅이라고 하면 여러 땅 가운데서 최고의 기름진 땅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바람"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준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아주 강한 바람, 즉 무서운 폭풍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무너뜨림"이라는 말도 어떤 뉘앙스를 주겠습니까?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무서운 무너뜨림"이라는 의미로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구절의 의미가 아주 명백해집니다. 또 원문에도 없는 "내가"라는 대명사를 일부러 첨부해야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우리가 조금 달리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소돔과 고모라의 무서운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제 생각에는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가 우리말 성경보다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최상급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문맥에 적합하다고 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창19:24∼29에 보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19:24∼29)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
이 말씀 중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완전히 멸망당해서 재기불능의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되었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속담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29: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
(사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사13:19)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렘49: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의 멸망된 것같이 거기 거하는 사람이 없으며 그중에 우거할 아무 인자가 없으리라
(렘50:4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무너지게 한 것같이 거기 거하는 사람이 없게 하며 그중에 우거하는 아무 인자가 없게 하리라
제가 물어봅니다.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자연적인 재앙을 사용하셨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그것은 극심한 지진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유황과 불이 비처럼 쏟아지고,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올라오는 모습은 굉장히 심한 지진이 일어날 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만약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지진과 관련이 된다면 아모스 4장에 나타난 다섯번째 재앙도 지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땅에는 지진이 굉장히 많습니다. 아모스서에서도 지진에 관한 묘사가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암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 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암8:8)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같이 솟아오르며 애굽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암9: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다 지진과 관계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도가 높은 대지진을 머리에 연상하면서 본문 11절을 읽어보시면 더 잘 이해가 될 줄 압니다. "내가 너희 중에 지진을 보내어 성읍들을 무너뜨리기를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를 지진에 의해 완전히 무너뜨린 것처럼 하였다." 이러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지진에 의해서 성읍들이 다 무너지고 난 이후에 벌어진 참상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너희가 불 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슥3:2에 보면 이와 비슷한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슥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따라서 이 표현도 역시 그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하나의 속담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불 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불 붙는 가운데서"라고 했습니다. "지금 불이 활활 타고 있는 데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큰 재앙을 의미합니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습니다. 순식간에 다 살라버릴 기세로 타들어갑니다. 무서운 재앙이 들이닥친 것을 의미해줍니다. 그 다음에 "빼낸 나무 조각"이라는 말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겨우 가까스로 구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재앙 가운데서 겨우 극소수가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이러한 극심한 재앙을 당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한 마음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변함없이 끝 부분에 무슨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까?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섯 번에 걸친 그 모든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그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준엄하게 심판하실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주 하나님 만나기를 너희가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한 말씀 가운데 한 가지만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성경적인 자세이겠습니까? 우선 우리가 잘못된 태도를 먼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첫번째 잘못된 태도는 반항적인 태도입니다. 흔히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실패를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하나님께 반항하기 쉽습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정말 내게 이런 식으로 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회를 저주하며 또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불평을 늘어놓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은 결코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결국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잘못된 태도는 도피적인 태도입니다. 진정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몰두함으로써 그 재앙을 잊어 버리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을 잊어 버리려고 주로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술입니다. 밤새도록 술을 퍼마심으로써 고통을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술을 그렇게 마신다고 해서 그 고통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술이 깨고 나면 고통은 더해질 뿐입니다.
세번째 잘못된 태도는 의지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 뜻대로,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징계를 한번 이겨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드리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 방식대로 벧엘에 가서, 길갈에 가서 제물을 드림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당할 때 어떠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까?
첫째로, 그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어겼습니다.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혼이 났습니다.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요나야, 네가 가는 그 길은 잘못된 길이다. 너의 방향을 돌이켜라. 회개해라." 이와 같이 우리에게 징계의 채찍이 주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에 내가 너무 교만하지 않았는지, 내가 너무 세상일에 분주하여 하나님을 멀리하지는 않았는지,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로 죄악된 길에서 떠나 바른 길로 가게 하시려는, 우리를 바로잡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몸이 병들면 약을 씁니다. 그리고 정신이 병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사랑의 채찍을 가합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는 역경을 맞이할 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징계를 느끼면서 거기에 순종하고 뉘우치는 법입니다.
사55:6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바로 그때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입니다. 그때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이것을 알고서 더욱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행여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반항하지 마세요. 다른 것으로 고통을 잊으려고 하지 마세요.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교훈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