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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강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애가(5:1-3)

by 【고동엽】 2022. 4. 16.

제27강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애가(5:1-3)

 

5:1-3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모스는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대적의 손에 의해서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고했었습니다. 물론 아모스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밝혀주었습니다. 그것은 포학과 겁탈과 학대 등 사회적인 불의와 부정 때문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허한 형식적인 종교 행위를 비웃었습니다. 또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참된 경배,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을 거부했다는 사실도 지적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을 심판주로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겠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선지자 아모스가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이겠습니까? "그 녀석들 잘 죽었다!"고 하면서 박수를 치는 것이 옳을까요? 만약에 여러분이 선지자 아모스의 입장에 서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록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그래도 남과 북으로 갈라지기 전에는 한 동족이요, 아모스와 함께 피를 나눈 형제들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본문 5:1을 읽어봅니다.
(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애가를 불러주었습니다. 애가는 슬픈 노래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가서 부르는 조가, 또는 장송곡입니다. 이 시점에서 아모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애가를 지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불러주는 것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아모스가 지은 애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서 우선 5장 전체를 내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은 줄 압니다. 5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1∼17절이고, 후반부는 18절부터 27절까지입니다. 전반부에서는 아모스가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애가를 지어부른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아모스를 정신병자 취급을 하면서 아모스의 말에 별반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치하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낯선 선지자가 나타나서 몇 마디 질책한 뒤에 "이제 너희는 다 죽은 송장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위해서 장송곡을 불러주겠다"고 하니까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모스는 후반부 18∼27절에서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번영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질책하면서 그들에게 꿈에서 깨어나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5장의 전반부는 애가, 후반부는 책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애가라고 제목을 붙인 전반부의 전체적인 골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5:1∼17까지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Ⅹ형 구조(chiastic structure)로 되어 있습니다.
      A. 1∼3 애가
         B. 4∼6 권면
            C. 7 책망
                 D. 8a∼d 찬미(하나님이 능력)
                    E. 8e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D'. 9 찬미
            C'. 10∼13 책망
         B'. 14∼15 권면
     A'. 16∼17 애가

그러니까 처음에는 A-B-C-D-E의 순서로 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그것과 역순으로 D'-C'-B'-A'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한 마디로 X형 구조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의 고도로 발달된 시작법입니다. 표현 기법이라는 말입니다. X형 구조 가운데서 가장 복판에 있는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가 절정입니다. 가장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를 염두에 두면서 오늘은 우리가 5:1∼3의 말씀을 좀더 자세히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1∼3절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절은 애가의 서두입니다. 여기에는 애가의 주인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가의 주인공은 이스라엘 족속입니다. 그 다음에는 선지자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앞으로 아모스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애가,' 즉 죽은 사람을 슬퍼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말을 들으라"고 요청하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주의를 환기하도록 요구하는 말입니다. 2절은 애가의 내용입니다. 문자 그대로 애가의 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3절은 애가의 이유입니다. 여기에서는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애가를 지어부르는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 명의 군사가 나가서 백 명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구백 명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끔찍한 광경 때문에 아모스는 애가를 지어서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1절부터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애가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족속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세요. 지금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죽어 있습니까? 살아 있습니까? 엄연히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자랑하고 있을 때입니다. 암6:1∼6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모스는 이런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애가를 불러주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저들이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살아 있다고 안심하고 자만하느냐? 내가 보기에는 너희는 다 죽어 빠진 송장, 썩어 냄새나는 송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뜻으로 아모스가 애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우리 나라에도 옛부터 사람이 죽으면 전문적으로 곡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비슷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노래를 짓습니다. 그것을 애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곡하는 사람이 부르게 됩니다. 성경에서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대하35:25)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렘9:17∼2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이는 시온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수욕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 대저 사망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와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너는 이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떨어지고 거두지 못한 뭇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신약 성경 눅23:27을 찾아봅니다.
(눅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길을 걸어가시는데, 그 뒤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랐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들 가운데는 정말로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으로 우는 여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직업적으로 곡하는 여성들도 동원되지 않았나 추측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곡하는 자들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다소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본문 2절로 넘어갑니다. 여기에는 애가의 내용, 애가의 실제적인 가사가 적혀 있습니다.
(5: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여기에 보면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라고 했습니다. 시제가 미래형입니까? 아닙니다. 과거형입니다. 이미 엎드러졌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엎드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엎드러졌다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왜 엎드러져 있는 것입니까? 기어가려고 엎드린 것입니까? 땅바닥에서 헤엄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이 성경에서 무슨 뜻으로 사용되었는지 찾아봅니다. 엎드러졌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 지은 애가에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삼하1:19)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삼하1: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너의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삼하1: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삼하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착고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렘9:22) 너는 이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떨어지고 거두지 못한 뭇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애2:21) 노유는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육하셨나이다
(겔11:10) 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국문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상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엎드러졌다는 말은 전쟁 중 칼에 맞아 엎드러진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곱게 죽는 것이 아니라, 칼에 맞아 비참하게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는데 계속해서 보니까,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엎드러진 상태가 완전히 치명적인 상태라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을 보세요.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 힘으로도 일어나지 못하고, 그렇다고 일으켜 세워줄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동료들도 다 쓰러졌습니다. 누구 한 사람 일으켜 세워줄 사람이 없습니다. 완전한 패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무슨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까?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을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종종 부르기도 합니다.
(렘18:13)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열방 중에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렘31: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렘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 들로 돌아오라
왜 이스라엘을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을까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할머니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 않고, 왜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처녀란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까?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창 꽃다운 나이입니다. 죽을 때도 아닌데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비극적인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할머니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이렇게 말했다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죽을 때가 되어 죽었구나." 별로 슬픈 느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 꽃다운 나이, 죽을 때가 안된 처녀가 죽었으니까 더욱 슬픈 감정이 솟구쳐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처녀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비극적인 면을 더욱더 강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성경에 보면 처녀로 죽음을 인해서 아주 슬퍼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데 누구의 딸이 처녀로 죽었습니까?
(삿11:39∼40)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남의 땅이 아니라, "자기 땅"에 던져졌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공격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침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를 공격했다면 자기 땅에 던지웠다가 아니라 어떤 말이 나와야 합니까? "남의 땅에 던지웠다"고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땅이란 어디를 가리킵니까? 가나안 땅, 본시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땅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에게 패해서 엎드러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욱더 비극적인 면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또 보세요.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관예배를 가보셨지요? 몇 사람이 관을 양쪽에서 들고서 얼마나 조심을 합니까? 균형을 잘 잡아서 천천히 관을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확 집어던진다고 했습니다. 짐짝을 집어던지는 것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경멸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거들떠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고 했습니다. 누가 엎드러진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우겠습니까? 동료들도 다 쓰러졌습니다. 대적들이 믿고 있는 이방신이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우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우겠습니까? 이미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저버리셨습니다. 따라서 도대체 누가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 3절을 읽어봅니다.
(5: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는 아모스가 애가를 지어서 부른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백 명이 남았다, 열 명이 남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천 명 가운데 구백 명이나 되는 인원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또 백 명 가운데 구십 명이나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만큼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천 명," "백 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사용하는 말입니까? 군대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삼상8:12)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18: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삼상22:7)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삼하18:1) 이에 다윗이 그 함께 한 백성을 계수하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 위에 세우고
(삼하18:4)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선히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왕하11:4)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보내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고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서 맹세케 한 후에 왕자를 보이고
(왕하11:19) 또 백부장들과 가리 사람과 호위병과 온 국민을 거느리고 왕을 인도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내려와서 호위병의 문 길로 말미암아 왕궁에 이르매 저가 왕의 보좌에 앉으니
제가 한번 물어봅니다. 이스라엘에 천부장, 백부장 같은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누구의 권유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출18:21)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권유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천부장, 백부장과 같은 군사 제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아모스서로 돌아갑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보니까 "나가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나가는 것입니까? 무엇하러 나가는 것입니까? 농사지으러 나가는 것입니까? 고기잡으러 나가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싸우러 나가는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나간다는 말이 전쟁터에 나간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삼상8: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삼상18:30)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삼하18:2∼4) 그 백성을 내어보낼 새 삼분지 일은 요압의 수하에 삼분지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삼분지 일은 가드 사람 있대의 수하에 붙이고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백성들이 가로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선히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삼하18:6)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그러니까 오늘 아모스 본문에 나오는 천 명의 정체는 결국 무엇입니까? 농사꾼이 아니라 군인들, 전사들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본래 천부장, 백부장이 각 지파별, 족속별로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니까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또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는 지파별로 군대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별로, 지역별로 나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읽었던 삼하18:1∼3를 보면 싸움터에서 군사 중 절반이 죽더라도 누가 죽지 않는 한 패망했다고 볼 수 없습니까? 예, 왕이 죽지 않는 한 절반 정도의 일반 군사들이 죽어도 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0분의 9가 죽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 군사 없이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불가능하지요. 완전 패망입니다.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아모스는 3:12에서 무엇이라고 표현했습니까?
(암3: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또 4:11에서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암4: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 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애가를 지어 부른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여러분, 노벨 상 이야기를 아시지요? 1888년 4월이었습니다.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불란서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사망기사가 대문짝 만하게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은 알프레드 노벨이 아니라, 그의 형인 루드비히 노벨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문사에서 착각을 하고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리드 노벨이 죽었다고 터무니없는 기사를 내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노벨에게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그 기사의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노벨을 가리켜 "죽음의 상인," "살인마"라고 혹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명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해서 그것을 팔아서 갑부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혹평해 놓았습니다. 노벨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로 환원해서 노벨 상을 만들기로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신문에서 말하듯이 죽음의 상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보는 눈과 세상이 나를 보는 눈은 이처럼 엄청나게 다를 수 있습니다. 노벨에게 있어서 그 신문의 엉터리 기사가 큰 다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기사가 없었던들 그는 살인마라는 악명을 남기며 무덤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만해서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오기를 부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번쯤 우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가? 지금 남들은 내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과연 나를 인정하고 계실까?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조용히 반성해보는 시간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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