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강 원인과 결과를 통한 심판의 논증(1)(3:3-8)
3:3-8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선지자 아모스의 선지자적인 권위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천하 만사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이 없이 이루어지는 결과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그것을 하나의 결과로 볼 때에 거기에 해당하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암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이 하나의 결과라면 그 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이것이 바로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아모스는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아모스가 그대로 입다물고 있으면 화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나야! 너는 니느웨를 쳐서 외쳐라."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되었습니까? 여러분, 고전9:16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우리가 사도 바울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그에게 화가 미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입다물고 그대로 있으면 우리에게 화가 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선 본문 말씀의 전체적인 골격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그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3∼6절을 보면 일곱 가지의 질문이 등장을 합니다. 드고아에서 목자로 양을 치던 아모스는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서 누구라도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아모스가 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아모스가 의도하는 바에 수긍하도록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무엇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까? 수사학적인 질문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우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냐, 아니냐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컨데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대답이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 "아니오"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동행을 하겠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대답은 "아니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이 동행할 때는 반드시 그 전에 원인이 되는 사건, 즉 함께 만나서 같이 가기로 뜻을 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일이 없으면 같이 갈 수가 없지요. 또 4절 경우를 보십시다.
(3:4)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대답이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 역시 "아니오"입니다. "사자가 움킨 것이 없다. 그런데도 수풀에서 부르짖겠느냐?" 부르짖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반대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 사자가 수풀에서 부르짖을 때에는 사자의 손아귀에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까? 움킨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잡아먹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1:2을 보시기 바랍니다.
(암1:2)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으실 경우에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는 심판의 대상이 이미 들어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말하는 심판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의 손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3절에서 6절까지는 일곱 가지의 질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3절은 사람을 예로 들어서 질문하고 있고, 4절과 5절은 동물을 예로 들어서 네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은 성을 예로 들어서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합쳐서 일곱 가지 질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7은 무슨 수라고 했습니까? 완전수라고 했습니다. 충분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충분한 설명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 듣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곱 가지 질문을 다한 뒤에 결론적으로 7절에서 아모스는 자기의 예언이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7절은 질문이 아니라 서술로 되어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 8절은 두 개의 서술과 두 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에 따른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 가지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경고에 따른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자를 무서워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삿3:20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어떠한 태도로 받았는지 살펴보십시다.
(삿3:20) 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왕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일어서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늘 이와 같은 기본적인 마음 자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받은 자는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셨으니까 선지자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뿐입니다. 이럴 경우에 하나님이 원인이 되고, 선지자는 그 결과가 됩니다.
옛날 평양시에는 유명한 명물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대동강의 모란봉에는 하늘을 가르는 듯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예수! 천당!" 이러한 외침이었습니다. 이 용어를 전매특허처럼 사용한 목사님이 누구였습니까? 최권능 목사님이셨습니다. 본명은 최봉석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다녔습니다. 조금도 쉬지 아니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손발이 얼어붙는 추운 겨울에도 목사님은 언제나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전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 목사님을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루라도 최 목사님의 외침을 듣지 못하면 허전함을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최 목사님이 "예수! 천당!"이라고 하는 소리를 하지 않을 때 즐겨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는 평양 거리를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대학 교수였으며, 인텔리 목사였던 채필근 목사님이 하루는 평양 시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최권능 목사님이 그 옆으로 다가가서는 있는 힘을 다해서 외쳤습니다. "예수! 천당!" 채필근 목사님이 그 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채필근 목사입니다." 그때 최권능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채 목사는 목사지만 벙어리 목사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시간 고요히 반성해보십시다. 나는 어떤가? 나는 말만 성도지, 혹시 벙어리 성도는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물론 중요합니다. 교회 봉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실천과 행동의 인물이 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선지자 아모스의 선지자적인 권위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천하 만사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이 없이 이루어지는 결과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그것을 하나의 결과로 볼 때에 거기에 해당하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암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이 하나의 결과라면 그 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이것이 바로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아모스는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아모스가 그대로 입다물고 있으면 화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나야! 너는 니느웨를 쳐서 외쳐라."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되었습니까? 여러분, 고전9:16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우리가 사도 바울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그에게 화가 미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입다물고 그대로 있으면 우리에게 화가 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선 본문 말씀의 전체적인 골격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그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3∼6절을 보면 일곱 가지의 질문이 등장을 합니다. 드고아에서 목자로 양을 치던 아모스는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서 누구라도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아모스가 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아모스가 의도하는 바에 수긍하도록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무엇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까? 수사학적인 질문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우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냐, 아니냐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컨데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대답이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 "아니오"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동행을 하겠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대답은 "아니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이 동행할 때는 반드시 그 전에 원인이 되는 사건, 즉 함께 만나서 같이 가기로 뜻을 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일이 없으면 같이 갈 수가 없지요. 또 4절 경우를 보십시다.
(3:4)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대답이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 역시 "아니오"입니다. "사자가 움킨 것이 없다. 그런데도 수풀에서 부르짖겠느냐?" 부르짖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반대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 사자가 수풀에서 부르짖을 때에는 사자의 손아귀에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까? 움킨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잡아먹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1:2을 보시기 바랍니다.
(암1:2)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으실 경우에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는 심판의 대상이 이미 들어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말하는 심판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의 손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3절에서 6절까지는 일곱 가지의 질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3절은 사람을 예로 들어서 질문하고 있고, 4절과 5절은 동물을 예로 들어서 네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은 성을 예로 들어서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합쳐서 일곱 가지 질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7은 무슨 수라고 했습니까? 완전수라고 했습니다. 충분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충분한 설명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 듣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곱 가지 질문을 다한 뒤에 결론적으로 7절에서 아모스는 자기의 예언이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7절은 질문이 아니라 서술로 되어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 8절은 두 개의 서술과 두 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에 따른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 가지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경고에 따른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자를 무서워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삿3:20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어떠한 태도로 받았는지 살펴보십시다.
(삿3:20) 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왕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일어서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늘 이와 같은 기본적인 마음 자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받은 자는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셨으니까 선지자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뿐입니다. 이럴 경우에 하나님이 원인이 되고, 선지자는 그 결과가 됩니다.
옛날 평양시에는 유명한 명물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대동강의 모란봉에는 하늘을 가르는 듯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예수! 천당!" 이러한 외침이었습니다. 이 용어를 전매특허처럼 사용한 목사님이 누구였습니까? 최권능 목사님이셨습니다. 본명은 최봉석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다녔습니다. 조금도 쉬지 아니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손발이 얼어붙는 추운 겨울에도 목사님은 언제나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전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 목사님을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루라도 최 목사님의 외침을 듣지 못하면 허전함을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최 목사님이 "예수! 천당!"이라고 하는 소리를 하지 않을 때 즐겨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는 평양 거리를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대학 교수였으며, 인텔리 목사였던 채필근 목사님이 하루는 평양 시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최권능 목사님이 그 옆으로 다가가서는 있는 힘을 다해서 외쳤습니다. "예수! 천당!" 채필근 목사님이 그 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채필근 목사입니다." 그때 최권능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채 목사는 목사지만 벙어리 목사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시간 고요히 반성해보십시다. 나는 어떤가? 나는 말만 성도지, 혹시 벙어리 성도는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물론 중요합니다. 교회 봉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실천과 행동의 인물이 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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