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강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10:4-9)
10:4-9
정월 이십 사 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국 땅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나이가 많은 연고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벨론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너무나도 참담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슬픔에 잠겨서 세 이레 동안에 좋은 음식을 먹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다니엘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때는 "정월 이십 사 일에"라고 했습니다. "정월"을 바벨론 말로는 니산월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말로는 아빕월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월에 큰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때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다니엘은 유월절이 있는 정월에 제 2의 출애굽, 곧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생각하면서 삼 주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십 사 일에." 그러니까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한 때는 언제였겠습니까? 정월 삼일이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세 주를 정하고 기도하기로 결심했는데 세 주 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으니까요.
다니엘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힛데겔"은 티그리스 강을 가리킵니다. 아카드 말로 "힛"은 강을 뜻합니다. 티그리스 강 남쪽에는 유브라데 강이 있습니다. 이 두 강 사이를 우리는 메소보다미아 지방이라고 부릅니다.
창2:14의 말씀을 보십시다.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에덴 동산에 흐르는 두 강의 이름이 하나는 힛데겔이고, 하나는 유브라데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은 날이 서늘하실 때 에덴 동산을 거니시면서 아담과 함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 힛데겔에 있는 다니엘에게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기도하시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이때 다니엘은 소란스러운 도심을 피해서 힛데겔 강에 가서 조용한 가운데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서울을 떠나서 조용한 기도원을 찾아 기도에 전념하는 것과 같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눈을 들어서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아마도 열린 하늘 문 사이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늘 문이 활짝 열리면서 황홀한 광경이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광경인지 보십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니엘이 밝히지를 않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분이 입으신 옷이라든지 그 분의 모습을 통해서 그 분이 누구인지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세마포 옷을 입었고." 세마포 옷은 흰색이었습니다. 성결을 의미합니다. 흠과 티가 없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우바스는 아라비아에 있는 지명입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에서 유기라고 하면 안성을 떠올립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정금이라고 하면 우바스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 분의 허리에는 최고로 좋은 우바스 정금 띠를 둘렀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분의 몸은 금빛 찬란한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얼굴은 광채가 나는 모습입니다.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분은 모든 것을 환하게 살피십니다. 그 분은 억울한 의인은 신원해 주시고 악인은 심판하십니다.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여기서 놋은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놋과 같이 단련된 발로 악인을 짓밟으시며 심판하십니다.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그 분의 음성은 권능의 소리, 위엄이 있는 소리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그와 같은 소리로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다시 오실 그때도 그 분은 그 권능의 소리로 무덤에서 죽은 자들을 깨우실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다니엘이 묘사하고 있는 이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밧모 섬에 있는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과 다니엘이 본 그 분의 모습이 너무 비슷합니다. 두 곳을 비교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계1:13-16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단10:5-6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우리는 두 곳에 나타난 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볼 수 있겠습니다.
계1:13-16 단10:5-6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의 눈은 불꽃 같고." "횃불 같고."
그러니까 다니엘이 묘사하고 있는 그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이십니다. 장차 우리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실 때도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5절에서 우리 예수님은 무슨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 다시 오실 때도 사람의 모양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이상 가운데 나타난 세상의 왕들은 무슨 모양으로 나타났습니까? 짐승의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자같이 생긴 짐승, 곰같이 생긴 짐승, 표범같이 생긴 짐승, 또 쥬라기 공원에서나 나오는 무시무시한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환난, 시련, 아픈 마음 등을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공룡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무서워서 감히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도 기쁜 마음으로 우리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다니엘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와 주신 우리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찾아와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실 줄 믿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다니엘은 지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마도 다니엘의 곁에는 시중드는 사람들이 늘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나이는 지금 90세에 가깝습니다. 누군가가 곁에서 도와주어야 할만큼 늙었습니다. 게다가 다니엘은 바벨론과 바사에서 총리 대신을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곁에는 시중드는 사람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 교회가 위치한 인사동에 잠시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놓칠 수 없다고 저도 나가 보았습니다. 여왕은 예정된 시간보다 한시간 가량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본 것은 고작 엘리자베스 여왕이 쓴 파란 모자 꼭대기부분 뿐이었습니다. 경호원에 둘러싸여 있어서 무엇이 보여야지요? 다니엘도 나라의 고관을 지낸 분이니까 여러 사람들에게 보호를 받으면서 힛데겔 강가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다니엘 혼자만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이상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성경에 또 나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사울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다니엘과 함께 한 사람들은 다니엘이 본 이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특이한 현상을 느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크게 떨며"입니다. 둘째는 "도망하여"입니다. 셋째는 "숨었었느니라"입니다. 다니엘과 함께 하던 자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모두들 떨면서 그 자리를 피해 다 숨어버렸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젊으니까 쉽게 도망칠 수 있었지만, 다니엘은 연로해서 뛰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혼자 남아서 그 광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 몸에 힘이 빠졌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빛 앞에서 어찌 힘이 안 빠질 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다니엘의 얼굴은 본시 동안이었습니다. 다니엘서 1장에 보면 다니엘은 열흘 동안에 채식과 물만 먹었지만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 얼굴이 더 윤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그 좋던 얼굴빛이 어떻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썩은 듯 하였고." 죽은 사람같이 되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지 않습니까?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완전히 기진맥진 했습니다. 아무리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시 죄인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이사야도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다 죄인이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에스겔도 하나님의 임재의 이상을 보았을 때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또 사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었을 때 감히 눈을 들어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니엘도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되었을 때 바라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기운이 다 빠져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다니엘은 그 옛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힘이 빠져버리고 깊이 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공로로 말미암아 이처럼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가까이 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공로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이 은혜에 감격하면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이 하루를 승리하는 복된 우리들의 모습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월 이십 사 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국 땅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나이가 많은 연고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벨론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너무나도 참담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슬픔에 잠겨서 세 이레 동안에 좋은 음식을 먹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다니엘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때는 "정월 이십 사 일에"라고 했습니다. "정월"을 바벨론 말로는 니산월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말로는 아빕월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월에 큰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때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다니엘은 유월절이 있는 정월에 제 2의 출애굽, 곧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생각하면서 삼 주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십 사 일에." 그러니까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한 때는 언제였겠습니까? 정월 삼일이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세 주를 정하고 기도하기로 결심했는데 세 주 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으니까요.
다니엘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힛데겔"은 티그리스 강을 가리킵니다. 아카드 말로 "힛"은 강을 뜻합니다. 티그리스 강 남쪽에는 유브라데 강이 있습니다. 이 두 강 사이를 우리는 메소보다미아 지방이라고 부릅니다.
창2:14의 말씀을 보십시다.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에덴 동산에 흐르는 두 강의 이름이 하나는 힛데겔이고, 하나는 유브라데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은 날이 서늘하실 때 에덴 동산을 거니시면서 아담과 함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 힛데겔에 있는 다니엘에게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기도하시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이때 다니엘은 소란스러운 도심을 피해서 힛데겔 강에 가서 조용한 가운데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서울을 떠나서 조용한 기도원을 찾아 기도에 전념하는 것과 같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눈을 들어서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아마도 열린 하늘 문 사이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늘 문이 활짝 열리면서 황홀한 광경이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광경인지 보십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니엘이 밝히지를 않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분이 입으신 옷이라든지 그 분의 모습을 통해서 그 분이 누구인지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세마포 옷을 입었고." 세마포 옷은 흰색이었습니다. 성결을 의미합니다. 흠과 티가 없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우바스는 아라비아에 있는 지명입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에서 유기라고 하면 안성을 떠올립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정금이라고 하면 우바스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 분의 허리에는 최고로 좋은 우바스 정금 띠를 둘렀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분의 몸은 금빛 찬란한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얼굴은 광채가 나는 모습입니다.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분은 모든 것을 환하게 살피십니다. 그 분은 억울한 의인은 신원해 주시고 악인은 심판하십니다.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여기서 놋은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놋과 같이 단련된 발로 악인을 짓밟으시며 심판하십니다.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그 분의 음성은 권능의 소리, 위엄이 있는 소리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그와 같은 소리로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다시 오실 그때도 그 분은 그 권능의 소리로 무덤에서 죽은 자들을 깨우실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다니엘이 묘사하고 있는 이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밧모 섬에 있는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과 다니엘이 본 그 분의 모습이 너무 비슷합니다. 두 곳을 비교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계1:13-16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단10:5-6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우리는 두 곳에 나타난 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볼 수 있겠습니다.
계1:13-16 단10:5-6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의 눈은 불꽃 같고." "횃불 같고."
그러니까 다니엘이 묘사하고 있는 그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이십니다. 장차 우리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실 때도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5절에서 우리 예수님은 무슨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 다시 오실 때도 사람의 모양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이상 가운데 나타난 세상의 왕들은 무슨 모양으로 나타났습니까? 짐승의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자같이 생긴 짐승, 곰같이 생긴 짐승, 표범같이 생긴 짐승, 또 쥬라기 공원에서나 나오는 무시무시한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환난, 시련, 아픈 마음 등을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공룡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무서워서 감히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도 기쁜 마음으로 우리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다니엘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와 주신 우리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찾아와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실 줄 믿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다니엘은 지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마도 다니엘의 곁에는 시중드는 사람들이 늘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나이는 지금 90세에 가깝습니다. 누군가가 곁에서 도와주어야 할만큼 늙었습니다. 게다가 다니엘은 바벨론과 바사에서 총리 대신을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곁에는 시중드는 사람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 교회가 위치한 인사동에 잠시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놓칠 수 없다고 저도 나가 보았습니다. 여왕은 예정된 시간보다 한시간 가량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본 것은 고작 엘리자베스 여왕이 쓴 파란 모자 꼭대기부분 뿐이었습니다. 경호원에 둘러싸여 있어서 무엇이 보여야지요? 다니엘도 나라의 고관을 지낸 분이니까 여러 사람들에게 보호를 받으면서 힛데겔 강가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다니엘 혼자만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이상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성경에 또 나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사울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다니엘과 함께 한 사람들은 다니엘이 본 이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특이한 현상을 느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크게 떨며"입니다. 둘째는 "도망하여"입니다. 셋째는 "숨었었느니라"입니다. 다니엘과 함께 하던 자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모두들 떨면서 그 자리를 피해 다 숨어버렸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젊으니까 쉽게 도망칠 수 있었지만, 다니엘은 연로해서 뛰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혼자 남아서 그 광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 몸에 힘이 빠졌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빛 앞에서 어찌 힘이 안 빠질 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다니엘의 얼굴은 본시 동안이었습니다. 다니엘서 1장에 보면 다니엘은 열흘 동안에 채식과 물만 먹었지만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 얼굴이 더 윤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그 좋던 얼굴빛이 어떻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썩은 듯 하였고." 죽은 사람같이 되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지 않습니까?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완전히 기진맥진 했습니다. 아무리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시 죄인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이사야도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다 죄인이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에스겔도 하나님의 임재의 이상을 보았을 때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또 사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었을 때 감히 눈을 들어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니엘도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되었을 때 바라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기운이 다 빠져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다니엘은 그 옛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힘이 빠져버리고 깊이 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공로로 말미암아 이처럼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가까이 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공로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이 은혜에 감격하면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이 하루를 승리하는 복된 우리들의 모습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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