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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복음(마태복음 1장 18절~25절)

by 【고동엽】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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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복음(마태복음 1장 18절~2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우리 나라의 옛날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금님이 난을 만나서 신하들과 더불어 서민 복장을 한 채 피란길을 나섰습니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이르러 한 농부의 집을 찾아 며칠 유하자고 청했습니다. 고맙게도 그 농부는 이 일행이 누구들인지도 모르면서 기꺼이 맞아들여 한동안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고 합니다. 임금님은 이 농부가 여간 고맙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정세가 회복되어 환궁하게 되자 임금님은 여전히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농부보고 말했습니다. "그 동안 신세를 많이 졌소.

내가 이 은혜를 갚아야 되겠으니, 소원이 있으면 한 가지 말해보시오. 들어주리다."

농부는 대답했습니다. "제게 무슨 별다른 소원이 있겠습니까? 보시다시피 먹을 것도 넉넉하고 몸도 건강합니다. 여태껏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기어이 소원을 말해보라고 거듭거듭 청했습니다. "굳이 그러하시다면" 하고 농부는 마지못해 말합니다. "며칠 있으면 제 환갑입니다. 아이들이 정성을 모아서 잔치를 해준다고 하니 제가 초청을 하거든 왕림해주십시오."

임금님은 내심 착하고 욕심 없는 농부의 사람됨에 탄복하면서 "알겠소" 하고 돌아갔습니다. 며칠 지나 환갑날, 농부네 집에 난데없이 임금님의 대행차가 이르렀습니다. 그 환갑잔치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농부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예사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사방에서 예물이 바리바리 들어왔습니다. 명예를 얻었을 뿐 아니라 농부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집에 임금님이 다녀갔다고 해서 기념비까지 세웠다 합니다.

복(福)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각 같아서는 그만하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하면 항상 웃고 살아도 되겠는데 풀죽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이럴까? 저는 생각해봅니다. 축복 관념이 잘못되었어요. 행복관이 잘못되었습니다. 가치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복관이나 행복관 자체부터 중생(重生)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화되지 않고, 이것이 복음화 되지 않는 한 평생토록 얼굴 펴고 살 수 없을 것이다 ------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를 믿고 교회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도 아직도 축복관은 예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옛사람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 가치관은 도저히 예수 믿는 사람의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소원이 예수 믿는 것과 관계없고, 그 사람의 행복관이 아예 예수 믿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복음의 개념 ---- '유앙겔리온'을 다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라 합니다. 오늘도 읽습니다마는 여러분, 이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에게는 과연 그 말씀이 들려집니까? 복음의 첫 페이지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과연 여러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준 일이 있습니까? 있어야 기독교인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문제입니다.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소원 성취의 여부도 아니요, 내 깨달음의 문제도 아니요, 내 지식의, 내 교양의, 내 인격의 문제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되는 존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모든 철학과 모든 종교와 모든 사상이 대체로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있고, 또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오시는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길을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평생동안 연구해서 유명해진 신학자가 있습니다.

니그렌이라고 하는 그 신학자의 유명한 저서에 「아가페와 에로스(Agape and Eros)」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니그렌은 이 책 한 권으로 해서 세계 10대 신학자의 하나로 꼽힙니다. 그 내용을 보면 모든 철학, 모든 사상, 모든 종교, 모든 신앙의 구조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려고 하는 길이 있습니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는 길 ---- 도덕과 정결과 수도와 율법과 선행과 적선과 극기와 고행 등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고자 애를 쓰는 모습을 가리켜 에로스라고 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시는 것,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러 인간에게로 오시는 그것, 그리고 우리는 그를 무조건 영접하는 그런 자세를 가리켜 아가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이 복받기 위하여, 천당가기 위하여, 구원 얻기 위하여 내가 좀더 진실하게 선하게 의롭게 깨끗하게 살자 ---- 이런 생각입니까? 성서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이런 태도가 이른바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지고는 평생을 믿어도 깨끗한 웃음 한번 웃을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 진정한 은혜 한번 채울 수 없습니다. 그 신앙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인간에게 오셨습니다. 여기에 아가페가 있고, 여기에 참사랑의 본질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려운 신학적 용어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번역됩니다마는 문제의 요점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 '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름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입니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 그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그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0~11절에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말씀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이에서 비롯됩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여기에 있고, 오늘 우리가 살아갈 생명의 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그는 창조자요, 구원자요, 섭리자요, 보호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끝까지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려 하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복음입니다.

어떤 분이 우스갯소리를 합디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시려거든 거기에 철망을 치든지 하셔서 손을 못 대게 만드실 것이지 왜 따먹게 만드셔서 말썽을 일으키시느냐고요. 그래서 제가 "무슨 질문을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질문하지 말고 차라리 사람을 강아지 묶어두듯 묶어두면 숫제 선악과에 가까이 가지 못했을 것이 아니냐고 하시지요."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하면 개가되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지금 개가되고 싶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까" 하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고 사랑이 있고, 그리고 믿음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 인격적 관계 안에서의 구원, 그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계시하시고 가르치시고 훈련하시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때로는 직접 인도하시며, 우리가 오늘 당하는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로 깨닫게 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다, 너는 나의 자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구원한다 ----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끊임없이 임마누엘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에서 보좌에 가만히 앉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올라오기를 팔짱끼고 기다리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요,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요,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가운데도 '탕자의 비유'에서만 기다리는 아버지로 나타났을 뿐, 모든 비유가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십니다. 동전 한닢을 찾을 때까지 찾으십니다. 환자를 찾아가서 치료하십니다.

찾아가시는 하나님, 치료하시는 하나님, 그 구체적이요 창조적인 사랑의 행위 속에 참사랑의 구체적인 계시, 결정적인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가 바로 거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유교 사상에 철저한 어느 중국사람이 하루는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유교학자가 중생을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보고 하도 감사해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그사람은 비유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더랍니다.

"내가 이 험한 세상을 방황하면서 진리를 찾아 헤맸고, 생명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실족해서 우물에 빠져버렸습니다. 손을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지나가던 사람이 들여다보면서 '전생에 죄가 많구만. 업보요, 업보'하고는 가버립니다. 다시 소리를 질렀더니 한 사람이 지나가다 들여다 보면서 '이사람아, 그러기에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오늘 실수를 거울삼아 차후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나.' 그러고는 가버립니다. 그래서 또 소리를 질렀더니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더니 나를 건져내주지 않겠습니까? 그래, 저는 깨달았습니다. 첫 사람은 석가모니요, 두 번째 사람은 공자님이요,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깨닫고 예수를 믿기로 했지요."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의 죄를 꾸짖기나 하고 잘못됐다고 책망이나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입니다. 그 임마누엘의 뜻과 존재 양식이 그러할진대 우리는 그 임재 양식을 똑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셨습니다. 오셨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셨다는 뜻입니다. 엄청난 희생입니다. 빌립보서 2장 7절 이하에 보면 그는 스스로 비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의 유명한 기독론입니다.

비었다 ---- '에케노센'이라는 말입니다. 공(空)이요 empty입니다. 있으나 없는 것으로, 힘이 있으나 힘이 없는 것으로, 의인이나 죄인으로, 알고 있으나 모르는 것으로, 영원하신 분이 시간적 존재 안에 작아지고, 그리고 죄인이 됩니다. 비웠습니다. 본래적 존재와 능력과 그 모든 권세를 비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 진리요, 크리스마스의 뜻입니다.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인이 되셨습니다. 죄인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에게 선물을 줄 수도 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선행(善行)이라는 것이 있지마는 마지막에 가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의(義)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이런 부인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사이가 참 좋아서 7년 동안을 잘살다가 어찌어찌되어 남편이 그만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고, 다른 여자가 생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주일에 한번은 집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나갑니다. 부인은 그런 남편을 정성껏 잘 모셨습니다. 음식도 잘 대접하고 옷도 다려드리고 피곤해 보여서 보약도 달여드립니다. 그러고 나면 남편은 또 나가버립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루는 부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좀 잘하시지 그랬습니까?" "잘하는데요." "잘하시니까 어떻습니까?" "참 더럽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남편이 더럽게 보이지 않아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더러운 자를 사랑하려면 나 자신의 깨끗함을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이 더러움의 책임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고 전혀 그 생각 없이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본 기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디다. 미국에서 있은 일인데, 에이즈 환자가 있고 그 아내는 의사입니다. 바삐 돌아가다 보니 남편이 밖으로 나돌다가 에이즈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내는 '당신이 이렇게 된 것은 내 책임입니다. 당신이 병들어 죽어 가는데 나만 깨끗해서, 나만 더 살아서 뭐하겠어요?'하고 같은 환자가 되어서 같이 가자며 여전히 부부 관계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아내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 몇 푼 줬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쓰다 남은 돈 몇푼 던져줬다고 구제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를 포기하시고 죄인과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물질이 아닙니다. 아가페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인과 함께 거하시고보니 아시는대로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지요. 좋지 못한 이름을 가지시기도 했습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 거했다고 해서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받았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갔다가 갖은 비난과 좋지 않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천한 여자까지도 사랑하신 나머지,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를 맨처음으로 만나주시는 엄청난 사랑으로 말미암아, 쓸데없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요새까지도 입을 가만두지 못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가 수상하다고요.

여러분,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명예, 의, 다 버릴 때에만 가능합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역사입니다. 오늘 임마누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온전히 창조적인 역사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요셉이 그를 영접하여 보호하고 ---- 이런 장면들을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전부가 다 이적입니다.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의롭다 하는 사랑이올시다.

아가페 ---- 말없이 '임마누엘'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엄청난 고난이 있고, 하나님의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희생 없는 사랑을 운위하는 것은 부질없는 감상(感傷)에 불과합니다. 희생이 아니고는 사랑이 없음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희생적 사건, 이 고난에의 동참과 죄악을 감당하시는 이 역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청년이 군대에 나갔다가 그만 부상을 당하면서 실명(失明)하게 됩니다. 수술을 받기는 합니다마는 의사가 말하기를, 수술은 하겠으나 자네는 두 눈 다 상했기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청년은 소리소리 지르면서 몸부림칩니다.

장님으로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나으니 죽여달라고 악을 씁니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붕대를 풀 때에 의사가 말합니다. "자네는 장님이 될 뻔 했지만 고맙게도 눈 하나를 기증하는 사람이 있어서 한쪽 눈은 실명을 면하게 될 것 같네." 그러니까 청년은 다시 발악합니다. "애꾸눈으로 살면 뭘해요? 병신인데요" 하고 소리소리칩니다.

"고마운 줄이나 알게" 하고 의사가 붕대를 풉니다. 눈앞이 뿌옇게 보입니다. 점점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앞에 어머니가 서 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눈 하나가 없습니다. 청년은 비로소 깨닫고 감사합니다. "애꾸눈도 좋습니다! 장님도 좋습니다! 병신도 좋습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분이 여기에 있다면, 나는 이대로 만족합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사건을 마음으로부터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 죄인 너를 의롭다 하노라 ---- 우리에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임마누엘은 오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저 말구유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아들이요 너는 내 딸이다 ---- 이 구체적인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를 영접하게 될 때에, 나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를 믿고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 앞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새롭게 우리에게 확증을 주십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여기에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  

임마누엘의 복음(마태복음 1장 18절~2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우리 나라의 옛날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금님이 난을 만나서 신하들과 더불어 서민 복장을 한 채 피란길을 나섰습니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이르러 한 농부의 집을 찾아 며칠 유하자고 청했습니다. 고맙게도 그 농부는 이 일행이 누구들인지도 모르면서 기꺼이 맞아들여 한동안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고 합니다. 임금님은 이 농부가 여간 고맙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정세가 회복되어 환궁하게 되자 임금님은 여전히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농부보고 말했습니다. "그 동안 신세를 많이 졌소.

내가 이 은혜를 갚아야 되겠으니, 소원이 있으면 한 가지 말해보시오. 들어주리다."

농부는 대답했습니다. "제게 무슨 별다른 소원이 있겠습니까? 보시다시피 먹을 것도 넉넉하고 몸도 건강합니다. 여태껏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기어이 소원을 말해보라고 거듭거듭 청했습니다. "굳이 그러하시다면" 하고 농부는 마지못해 말합니다. "며칠 있으면 제 환갑입니다. 아이들이 정성을 모아서 잔치를 해준다고 하니 제가 초청을 하거든 왕림해주십시오."

임금님은 내심 착하고 욕심 없는 농부의 사람됨에 탄복하면서 "알겠소" 하고 돌아갔습니다. 며칠 지나 환갑날, 농부네 집에 난데없이 임금님의 대행차가 이르렀습니다. 그 환갑잔치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농부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예사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사방에서 예물이 바리바리 들어왔습니다. 명예를 얻었을 뿐 아니라 농부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집에 임금님이 다녀갔다고 해서 기념비까지 세웠다 합니다.

복(福)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각 같아서는 그만하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하면 항상 웃고 살아도 되겠는데 풀죽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이럴까? 저는 생각해봅니다. 축복 관념이 잘못되었어요. 행복관이 잘못되었습니다. 가치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복관이나 행복관 자체부터 중생(重生)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화되지 않고, 이것이 복음화 되지 않는 한 평생토록 얼굴 펴고 살 수 없을 것이다 ------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를 믿고 교회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도 아직도 축복관은 예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옛사람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 가치관은 도저히 예수 믿는 사람의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소원이 예수 믿는 것과 관계없고, 그 사람의 행복관이 아예 예수 믿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복음의 개념 ---- '유앙겔리온'을 다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라 합니다. 오늘도 읽습니다마는 여러분, 이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에게는 과연 그 말씀이 들려집니까? 복음의 첫 페이지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과연 여러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준 일이 있습니까? 있어야 기독교인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문제입니다.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소원 성취의 여부도 아니요, 내 깨달음의 문제도 아니요, 내 지식의, 내 교양의, 내 인격의 문제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되는 존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모든 철학과 모든 종교와 모든 사상이 대체로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있고, 또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오시는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길을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평생동안 연구해서 유명해진 신학자가 있습니다.

니그렌이라고 하는 그 신학자의 유명한 저서에 「아가페와 에로스(Agape and Eros)」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니그렌은 이 책 한 권으로 해서 세계 10대 신학자의 하나로 꼽힙니다. 그 내용을 보면 모든 철학, 모든 사상, 모든 종교, 모든 신앙의 구조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려고 하는 길이 있습니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는 길 ---- 도덕과 정결과 수도와 율법과 선행과 적선과 극기와 고행 등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고자 애를 쓰는 모습을 가리켜 에로스라고 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시는 것,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러 인간에게로 오시는 그것, 그리고 우리는 그를 무조건 영접하는 그런 자세를 가리켜 아가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이 복받기 위하여, 천당가기 위하여, 구원 얻기 위하여 내가 좀더 진실하게 선하게 의롭게 깨끗하게 살자 ---- 이런 생각입니까? 성서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이런 태도가 이른바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지고는 평생을 믿어도 깨끗한 웃음 한번 웃을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 진정한 은혜 한번 채울 수 없습니다. 그 신앙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인간에게 오셨습니다. 여기에 아가페가 있고, 여기에 참사랑의 본질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려운 신학적 용어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번역됩니다마는 문제의 요점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 '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름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입니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 그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그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0~11절에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말씀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이에서 비롯됩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여기에 있고, 오늘 우리가 살아갈 생명의 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그는 창조자요, 구원자요, 섭리자요, 보호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끝까지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려 하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복음입니다.

어떤 분이 우스갯소리를 합디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시려거든 거기에 철망을 치든지 하셔서 손을 못 대게 만드실 것이지 왜 따먹게 만드셔서 말썽을 일으키시느냐고요. 그래서 제가 "무슨 질문을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질문하지 말고 차라리 사람을 강아지 묶어두듯 묶어두면 숫제 선악과에 가까이 가지 못했을 것이 아니냐고 하시지요."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하면 개가되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지금 개가되고 싶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까" 하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고 사랑이 있고, 그리고 믿음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 인격적 관계 안에서의 구원, 그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계시하시고 가르치시고 훈련하시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때로는 직접 인도하시며, 우리가 오늘 당하는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로 깨닫게 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다, 너는 나의 자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구원한다 ----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끊임없이 임마누엘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에서 보좌에 가만히 앉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올라오기를 팔짱끼고 기다리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요,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요,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가운데도 '탕자의 비유'에서만 기다리는 아버지로 나타났을 뿐, 모든 비유가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십니다. 동전 한닢을 찾을 때까지 찾으십니다. 환자를 찾아가서 치료하십니다.

찾아가시는 하나님, 치료하시는 하나님, 그 구체적이요 창조적인 사랑의 행위 속에 참사랑의 구체적인 계시, 결정적인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가 바로 거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유교 사상에 철저한 어느 중국사람이 하루는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유교학자가 중생을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보고 하도 감사해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그사람은 비유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더랍니다.

"내가 이 험한 세상을 방황하면서 진리를 찾아 헤맸고, 생명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실족해서 우물에 빠져버렸습니다. 손을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지나가던 사람이 들여다보면서 '전생에 죄가 많구만. 업보요, 업보'하고는 가버립니다. 다시 소리를 질렀더니 한 사람이 지나가다 들여다 보면서 '이사람아, 그러기에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오늘 실수를 거울삼아 차후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나.' 그러고는 가버립니다. 그래서 또 소리를 질렀더니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더니 나를 건져내주지 않겠습니까? 그래, 저는 깨달았습니다. 첫 사람은 석가모니요, 두 번째 사람은 공자님이요,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깨닫고 예수를 믿기로 했지요."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의 죄를 꾸짖기나 하고 잘못됐다고 책망이나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입니다. 그 임마누엘의 뜻과 존재 양식이 그러할진대 우리는 그 임재 양식을 똑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셨습니다. 오셨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셨다는 뜻입니다. 엄청난 희생입니다. 빌립보서 2장 7절 이하에 보면 그는 스스로 비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의 유명한 기독론입니다.

비었다 ---- '에케노센'이라는 말입니다. 공(空)이요 empty입니다. 있으나 없는 것으로, 힘이 있으나 힘이 없는 것으로, 의인이나 죄인으로, 알고 있으나 모르는 것으로, 영원하신 분이 시간적 존재 안에 작아지고, 그리고 죄인이 됩니다. 비웠습니다. 본래적 존재와 능력과 그 모든 권세를 비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 진리요, 크리스마스의 뜻입니다.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인이 되셨습니다. 죄인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에게 선물을 줄 수도 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선행(善行)이라는 것이 있지마는 마지막에 가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의(義)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이런 부인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사이가 참 좋아서 7년 동안을 잘살다가 어찌어찌되어 남편이 그만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고, 다른 여자가 생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주일에 한번은 집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나갑니다. 부인은 그런 남편을 정성껏 잘 모셨습니다. 음식도 잘 대접하고 옷도 다려드리고 피곤해 보여서 보약도 달여드립니다. 그러고 나면 남편은 또 나가버립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루는 부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좀 잘하시지 그랬습니까?" "잘하는데요." "잘하시니까 어떻습니까?" "참 더럽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남편이 더럽게 보이지 않아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더러운 자를 사랑하려면 나 자신의 깨끗함을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이 더러움의 책임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고 전혀 그 생각 없이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본 기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디다. 미국에서 있은 일인데, 에이즈 환자가 있고 그 아내는 의사입니다. 바삐 돌아가다 보니 남편이 밖으로 나돌다가 에이즈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내는 '당신이 이렇게 된 것은 내 책임입니다. 당신이 병들어 죽어 가는데 나만 깨끗해서, 나만 더 살아서 뭐하겠어요?'하고 같은 환자가 되어서 같이 가자며 여전히 부부 관계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아내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 몇 푼 줬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쓰다 남은 돈 몇푼 던져줬다고 구제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를 포기하시고 죄인과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물질이 아닙니다. 아가페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인과 함께 거하시고보니 아시는대로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지요. 좋지 못한 이름을 가지시기도 했습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 거했다고 해서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받았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갔다가 갖은 비난과 좋지 않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천한 여자까지도 사랑하신 나머지,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를 맨처음으로 만나주시는 엄청난 사랑으로 말미암아, 쓸데없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요새까지도 입을 가만두지 못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가 수상하다고요.

여러분,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명예, 의, 다 버릴 때에만 가능합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역사입니다. 오늘 임마누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온전히 창조적인 역사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요셉이 그를 영접하여 보호하고 ---- 이런 장면들을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전부가 다 이적입니다.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의롭다 하는 사랑이올시다.

아가페 ---- 말없이 '임마누엘'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엄청난 고난이 있고, 하나님의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희생 없는 사랑을 운위하는 것은 부질없는 감상(感傷)에 불과합니다. 희생이 아니고는 사랑이 없음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희생적 사건, 이 고난에의 동참과 죄악을 감당하시는 이 역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청년이 군대에 나갔다가 그만 부상을 당하면서 실명(失明)하게 됩니다. 수술을 받기는 합니다마는 의사가 말하기를, 수술은 하겠으나 자네는 두 눈 다 상했기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청년은 소리소리 지르면서 몸부림칩니다.

장님으로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나으니 죽여달라고 악을 씁니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붕대를 풀 때에 의사가 말합니다. "자네는 장님이 될 뻔 했지만 고맙게도 눈 하나를 기증하는 사람이 있어서 한쪽 눈은 실명을 면하게 될 것 같네." 그러니까 청년은 다시 발악합니다. "애꾸눈으로 살면 뭘해요? 병신인데요" 하고 소리소리칩니다.

"고마운 줄이나 알게" 하고 의사가 붕대를 풉니다. 눈앞이 뿌옇게 보입니다. 점점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앞에 어머니가 서 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눈 하나가 없습니다. 청년은 비로소 깨닫고 감사합니다. "애꾸눈도 좋습니다! 장님도 좋습니다! 병신도 좋습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분이 여기에 있다면, 나는 이대로 만족합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사건을 마음으로부터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 죄인 너를 의롭다 하노라 ---- 우리에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임마누엘은 오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저 말구유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아들이요 너는 내 딸이다 ---- 이 구체적인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를 영접하게 될 때에, 나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를 믿고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 앞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새롭게 우리에게 확증을 주십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여기에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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