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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엣것을 생각하라(골로새서 3장 1절~4절)

by 【고동엽】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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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엣것을 생각하라(골로새서 3장 1절~4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철학자 파스칼이 인생에 대하여 내린 유명한 정의가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 아마도 그는 인간의 가치와 존재 의미가 생각하는 데에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생각하는 자가 인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각하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이것은 품은 생각의 정도로 인간 수준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키가 크다거나 몸집이 크다고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품은 생각이 원대하다면 체구야 어떠하든 큰 사람입니다.

또 생각이 높고 깨끗한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신분이 고귀하다 해도 그 생각이 천하다면 그사람은 천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파스칼의 정의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그가 지닌 생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의 거점'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즉, 그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사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항상 실제를 생각하고 사실과 진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진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헛된 것을 생각합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 다 지나가 버린 것, 쓸데없는 것에 집착합니다. 생각하는 정도가 높지 못한 사람입니다. 일전에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몇 년 전에 죽은 아들이 간밤에 다녀갔는데, 그날밤에 다시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는 통에 퍽 애를 먹었습니다. 허깨비를 보고 실제와 분간을 못합니다. 이런 사람을 정신병자라 하지 않습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것, 아무 가치가 없는 것, 있다고 할 수조차 없는 것에 집착하여 몰두한다면 이 또한 정신병자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진리만을, 사실만을 생각합니까? 우리의 생각이 헛되고 허망한 것들뿐이라면 우리는 쓸데없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찮고 번거로운 마음에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생각이 없다면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분 중에 13년이나 식물인간으로 지내는 분이 있습니다. 멍하니 앉아 주는대로 먹기만 합니다. 말도 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생각조차 없습니다. 온 집안 사람들이 그로 해서 모두들 걱정이지만 당사자는 아무런 고민도 없습니다.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생각이 있어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또한 네 번째로, 생각과 현실이 분리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은 생각대로, 몸은 몸대로 각각입니다. 도무지 자신이 통제되지 않습니다. 문어발처럼 흐느적거립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지나친 예(例) 같습니다마는, 어떤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결혼 전에 한 청년과 교제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도 여전히 옛 애인이 생각난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신혼여행을 가서도 그 사람 꿈만 꾸었답니다. 꿈이야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지만, 아무리 다짐을 해도 마음을 잡을 수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하소연입니다. 심지어 식탁에 남편과 마주앉아서도 이 사람이 옛 애인이거니 생각해야 입맛이 난답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불행한 사람이지요.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생각은 생각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몸과 생각이 별개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봅시다. 생각하는 대로 몸이 따라 주고,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생각합니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인격자라 하겠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인물이나 건강이나 또는 소유나 능력, 기능, 학벌 등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 ------ 즉, 소속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사람을 만나게 되면 누구 집 자녀인가, 어느 가문의 손(孫)인가를 묻습니다. 명함을 내밀며 수인사(修人事)를 하는 것도 어느 직장, 어느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회적 소속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소속이 나의 나됨을 사회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은 사회적 소속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소속입니다. 정신적 소속의 거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가 항상 그리는 고향은 어디입니까? 틈만 생기면 술집이요, 시간만 나면 놀고자 하는 마음입니까? 또는 언제나 수입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사람을 만날 때에도 출세에 도움이 될까 안될까를 미리 계산해보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무엇에 뿌리박고 있습니까?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origin, 원천적인 생각입니다. 과거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을 고향이라고 부릅니다. 옛것, 뿌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항상 과거를 지향하는 생각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는 미래지향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생각의 거점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생각 가운데 내가 어디에 생각의 거점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인간됨이 결정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위에 것을 찾으라. 위에 것을 생각하라.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집에 비가 샙니다. 아버지가 높은 사다리를 받쳐놓고 기왓장을 고치러 올라갑니다. 어린 아들이 그것을 보니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저도 올라갈께요." 이 아버지는 대단히 교육적인 사람이었나 봅니다. 올라오라고 허락합니다. "사다리를 잘 붙잡고 위만 쳐다보고 올라오너라.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아라, 다른 사람 보지 말고 아버지만 바라보고 올라오너라" 라고 이릅니다.

이 아이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중간쯤에서 문득 내려다보니 더럭 겁이 납니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떨어질 것만 같아 불안합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는 또 소리를 지릅니다.

"위를 보아라, 나를 쳐다보아라. 다른 것은 보지도, 생각하지도 말아라." 이렇게 하여 이 어린아이는 자기를 내려다보며 미소짓고 있는 아버지만 쳐다보면서 마침내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위를 바라봅시다. 앞이 가로막히고 뒤로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입니까? 위를 바라봅시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러해야 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미 죽었고" ---- 옛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위엣것' '땅엣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들입니까? 이 용어들은 아주 상징적이며 신학적인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땅'이라 함은 세상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5절 이하의 말씀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라고 가르칩니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런 것들이 땅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거점, 이런 생각들을 땅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배로 하나님을 삼는 것,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는 것" 이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너희는 죽었다'고 하십니다. 죽었다는 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을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념도 없고, 감각도 없고, 생각도 없고, 기대도 없습니다. 이것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름은 가졌으면서도 세상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저 아쉽고 먹고 싶고 가지고 싶고 놀고 싶고 가고 싶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땅의 것, 땅에 대해서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땅의 것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주 무감각합니다. 이것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위엣것'은 영원한 것, 미래적인 것, 하늘나라에 속한 것, 약속된 미래를 뜻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이고 신령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래적 생명의 현실성을 의미합니다. 죽음이 현실인 것처럼, 미래의 생명도 현실적임을 잊지 맙시다. 죽음은 허상(虛像)이 아닙니다. 추상(抽像)이 아닙니다. 미래에 있는 것이면서도 현재보다도 더 실제적이고 심각한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돈이 있다 하여, 그 있는 것이 완전한 내것입니까? 높은 지위에 있다 하여 그것이 영속(永續)합니까? 이것들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요, 현실적인 것입니다.

이와 함께 내세에 대한 문제, 하늘나라에 대한 문제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닥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절박하고도 급선무한 일입니다. 최우선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위엣것을 생각하라" 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위엣것을 생각하라'는 이 말씀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우리의 생각과 목적과 뜻이 모두 위에 속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도, 소망도 소원도, 자랑도 기쁨도, 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 위엣것을 찾고 위엣것을 바라보고 위엣것을 생각하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엣것을 계속 찾으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는 반드시 여러분을 맞아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절)."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구속받은 나, 파란 곡절과 그 많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고이고이 붙들어서 인도해주시고 사랑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나, 그 아름다운 나 자신,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로운 내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약혼한 여자가 신랑을 생각하듯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약혼한 여자는 신랑과 함께 지낼 생각으로 마음이 꽉 차 있습니다. 얼마 후에는 친정 부모를 떠나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쉬워 울고만 지낸다면 그런 답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멀어지는 세상 아쉬워할 것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미래를 바라보고 기뻐하는 바로 그 순간, 거기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바울은 간증합니다. 그는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현재의 고난은 비교가 안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함께'라는 말이 세 번 나타납니다. 의미상으로는 네 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살리심을 받았다" ---- 중생입니다. 과거와의 모든 인연이 끊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현재적인 하늘의 생명을 말합니다. 이것은 현재의 일입니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그와 함께 있는 미래의 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 항상 위에 속한 것이어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그 많은 훈련을 쌓으면서 어느 순간을 생각합니까? 앞에 있는 영광, 앞에 놓인 골인지점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어 최후의 영광을 얻습니다, 그것이 순간의 일이요, 우연한 일입니까? 영광된 순간을 바라보고 그토록 많은 고통을 인내합니다.

저는 이번 아시안 게임 중에 매우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나라 국가대표 선수 가운데 150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금메달을 따낸 선수의 태반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스포츠 선교회에서 일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렇게도 피곤하고 괴로운데도 불구하고 밤 12시에 종교관에 나와서 한 시간씩 눈물로 기도하더랍니다. 게임에 앞서 몹시 불안해할 때 "주님이 너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 담대히 나가 싸워 이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평안할 수 없더라고 합니다.

이것을 정신의 승리, 신앙의 승리라고들 합니다. 이렇게 승리한 선수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기도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히며, 엄청난 선교 역사를 수행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또한 응원하는 분들을 생각해봅시다. 선수들과 완전히 혼연일체입니다. 선수들이 넘어지면 내가 넘어지는 것 같고, 매맞으면 내가 맞는 것 같고, 이기면 마치 내가 이긴 듯 기뻐합니다. 하나가 됩니다.

노인 한 분이 휴양차 오색 약수터 근방으로 가셨답니다. 자녀들이 거기서 편히 쉬고 안정하시라고 보내드린 것이지요. 그런데 그만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운동경기를 응원하다 돌아가셨습니다.

몹시 흥분한 나머지 심장이 멎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할 정도로 몰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아이덴티파이 (identify),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내가 동일인(同一人), 하나가 됩니다.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가 영광을 누리면 나도 함께 영광을 누립니다. 둘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의 영광으로 다가옵니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엣것을 잊으라,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땅의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땅은 하늘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땅의 문제가 땅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는 땅에서 짓습니다. 흙을 갈아엎고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햇빛은 위에서 비칩니다. 비도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래서 땅의 곡식을 자라게 합니다. 땅에 속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가끔 산에 가 보면 멧돼지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멧돼지가 도토리나무 밑에서 도토리 몇 개를 주워먹었습니다. 이 미련한 멧돼지가 도토리가 땅에서 나는 줄 알고 땅을 마구 파헤칩니다. "야, 이놈아. 도토리는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다. 땅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라고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어디 말이 통해야 말이지요.

땅의 문제가 땅에서 해결됩니까? 부부간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만의 문제입니까? 하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간에 불화가 생겼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땅의 문제는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땅의 문제는 하늘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 명예도, 사랑도, 복잡다단한 모든 문제들이 다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엣것을 찾으십시오.

땅을 사랑하는 자는 땅뿐 아니라 하늘도 잃어버립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 하늘을 생각하는 자, 하늘로 향하는 자는 하늘뿐 아니라 땅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보고 세상은 간혹 미쳤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새 술에 취하였다" 라고도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

예수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항상 하늘을 생각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10)." 뜻을 하늘에 두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을 얻으셨으며 땅도 얻으셨습니다.

위엣것을 찾으십시다. 위엣것을 생각하십시다. 주님께서 나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나의 나됨의 실존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영광 가운데 함께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위엣것을 생각하라."  

위엣것을 생각하라(골로새서 3장 1절~4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철학자 파스칼이 인생에 대하여 내린 유명한 정의가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 아마도 그는 인간의 가치와 존재 의미가 생각하는 데에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생각하는 자가 인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각하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이것은 품은 생각의 정도로 인간 수준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키가 크다거나 몸집이 크다고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품은 생각이 원대하다면 체구야 어떠하든 큰 사람입니다.

또 생각이 높고 깨끗한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신분이 고귀하다 해도 그 생각이 천하다면 그사람은 천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파스칼의 정의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그가 지닌 생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의 거점'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즉, 그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사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항상 실제를 생각하고 사실과 진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진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헛된 것을 생각합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 다 지나가 버린 것, 쓸데없는 것에 집착합니다. 생각하는 정도가 높지 못한 사람입니다. 일전에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몇 년 전에 죽은 아들이 간밤에 다녀갔는데, 그날밤에 다시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는 통에 퍽 애를 먹었습니다. 허깨비를 보고 실제와 분간을 못합니다. 이런 사람을 정신병자라 하지 않습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것, 아무 가치가 없는 것, 있다고 할 수조차 없는 것에 집착하여 몰두한다면 이 또한 정신병자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진리만을, 사실만을 생각합니까? 우리의 생각이 헛되고 허망한 것들뿐이라면 우리는 쓸데없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찮고 번거로운 마음에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생각이 없다면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분 중에 13년이나 식물인간으로 지내는 분이 있습니다. 멍하니 앉아 주는대로 먹기만 합니다. 말도 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생각조차 없습니다. 온 집안 사람들이 그로 해서 모두들 걱정이지만 당사자는 아무런 고민도 없습니다.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생각이 있어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또한 네 번째로, 생각과 현실이 분리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은 생각대로, 몸은 몸대로 각각입니다. 도무지 자신이 통제되지 않습니다. 문어발처럼 흐느적거립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지나친 예(例) 같습니다마는, 어떤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결혼 전에 한 청년과 교제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도 여전히 옛 애인이 생각난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신혼여행을 가서도 그 사람 꿈만 꾸었답니다. 꿈이야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지만, 아무리 다짐을 해도 마음을 잡을 수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하소연입니다. 심지어 식탁에 남편과 마주앉아서도 이 사람이 옛 애인이거니 생각해야 입맛이 난답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불행한 사람이지요.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생각은 생각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몸과 생각이 별개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봅시다. 생각하는 대로 몸이 따라 주고,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생각합니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인격자라 하겠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인물이나 건강이나 또는 소유나 능력, 기능, 학벌 등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 ------ 즉, 소속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사람을 만나게 되면 누구 집 자녀인가, 어느 가문의 손(孫)인가를 묻습니다. 명함을 내밀며 수인사(修人事)를 하는 것도 어느 직장, 어느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회적 소속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소속이 나의 나됨을 사회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은 사회적 소속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소속입니다. 정신적 소속의 거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가 항상 그리는 고향은 어디입니까? 틈만 생기면 술집이요, 시간만 나면 놀고자 하는 마음입니까? 또는 언제나 수입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사람을 만날 때에도 출세에 도움이 될까 안될까를 미리 계산해보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무엇에 뿌리박고 있습니까?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origin, 원천적인 생각입니다. 과거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을 고향이라고 부릅니다. 옛것, 뿌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항상 과거를 지향하는 생각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는 미래지향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생각의 거점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생각 가운데 내가 어디에 생각의 거점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인간됨이 결정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위에 것을 찾으라. 위에 것을 생각하라.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집에 비가 샙니다. 아버지가 높은 사다리를 받쳐놓고 기왓장을 고치러 올라갑니다. 어린 아들이 그것을 보니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저도 올라갈께요." 이 아버지는 대단히 교육적인 사람이었나 봅니다. 올라오라고 허락합니다. "사다리를 잘 붙잡고 위만 쳐다보고 올라오너라.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아라, 다른 사람 보지 말고 아버지만 바라보고 올라오너라" 라고 이릅니다.

이 아이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중간쯤에서 문득 내려다보니 더럭 겁이 납니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떨어질 것만 같아 불안합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는 또 소리를 지릅니다.

"위를 보아라, 나를 쳐다보아라. 다른 것은 보지도, 생각하지도 말아라." 이렇게 하여 이 어린아이는 자기를 내려다보며 미소짓고 있는 아버지만 쳐다보면서 마침내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위를 바라봅시다. 앞이 가로막히고 뒤로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입니까? 위를 바라봅시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러해야 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미 죽었고" ---- 옛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위엣것' '땅엣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들입니까? 이 용어들은 아주 상징적이며 신학적인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땅'이라 함은 세상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5절 이하의 말씀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라고 가르칩니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런 것들이 땅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거점, 이런 생각들을 땅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배로 하나님을 삼는 것,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는 것" 이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너희는 죽었다'고 하십니다. 죽었다는 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을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념도 없고, 감각도 없고, 생각도 없고, 기대도 없습니다. 이것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름은 가졌으면서도 세상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저 아쉽고 먹고 싶고 가지고 싶고 놀고 싶고 가고 싶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땅의 것, 땅에 대해서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땅의 것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주 무감각합니다. 이것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위엣것'은 영원한 것, 미래적인 것, 하늘나라에 속한 것, 약속된 미래를 뜻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이고 신령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래적 생명의 현실성을 의미합니다. 죽음이 현실인 것처럼, 미래의 생명도 현실적임을 잊지 맙시다. 죽음은 허상(虛像)이 아닙니다. 추상(抽像)이 아닙니다. 미래에 있는 것이면서도 현재보다도 더 실제적이고 심각한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돈이 있다 하여, 그 있는 것이 완전한 내것입니까? 높은 지위에 있다 하여 그것이 영속(永續)합니까? 이것들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요, 현실적인 것입니다.

이와 함께 내세에 대한 문제, 하늘나라에 대한 문제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닥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절박하고도 급선무한 일입니다. 최우선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위엣것을 생각하라" 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위엣것을 생각하라'는 이 말씀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우리의 생각과 목적과 뜻이 모두 위에 속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도, 소망도 소원도, 자랑도 기쁨도, 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 위엣것을 찾고 위엣것을 바라보고 위엣것을 생각하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엣것을 계속 찾으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는 반드시 여러분을 맞아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절)."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구속받은 나, 파란 곡절과 그 많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고이고이 붙들어서 인도해주시고 사랑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나, 그 아름다운 나 자신,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로운 내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약혼한 여자가 신랑을 생각하듯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약혼한 여자는 신랑과 함께 지낼 생각으로 마음이 꽉 차 있습니다. 얼마 후에는 친정 부모를 떠나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쉬워 울고만 지낸다면 그런 답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멀어지는 세상 아쉬워할 것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미래를 바라보고 기뻐하는 바로 그 순간, 거기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바울은 간증합니다. 그는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현재의 고난은 비교가 안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함께'라는 말이 세 번 나타납니다. 의미상으로는 네 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살리심을 받았다" ---- 중생입니다. 과거와의 모든 인연이 끊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현재적인 하늘의 생명을 말합니다. 이것은 현재의 일입니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그와 함께 있는 미래의 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 항상 위에 속한 것이어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그 많은 훈련을 쌓으면서 어느 순간을 생각합니까? 앞에 있는 영광, 앞에 놓인 골인지점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어 최후의 영광을 얻습니다, 그것이 순간의 일이요, 우연한 일입니까? 영광된 순간을 바라보고 그토록 많은 고통을 인내합니다.

저는 이번 아시안 게임 중에 매우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나라 국가대표 선수 가운데 150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금메달을 따낸 선수의 태반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스포츠 선교회에서 일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렇게도 피곤하고 괴로운데도 불구하고 밤 12시에 종교관에 나와서 한 시간씩 눈물로 기도하더랍니다. 게임에 앞서 몹시 불안해할 때 "주님이 너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 담대히 나가 싸워 이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평안할 수 없더라고 합니다.

이것을 정신의 승리, 신앙의 승리라고들 합니다. 이렇게 승리한 선수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기도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히며, 엄청난 선교 역사를 수행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또한 응원하는 분들을 생각해봅시다. 선수들과 완전히 혼연일체입니다. 선수들이 넘어지면 내가 넘어지는 것 같고, 매맞으면 내가 맞는 것 같고, 이기면 마치 내가 이긴 듯 기뻐합니다. 하나가 됩니다.

노인 한 분이 휴양차 오색 약수터 근방으로 가셨답니다. 자녀들이 거기서 편히 쉬고 안정하시라고 보내드린 것이지요. 그런데 그만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운동경기를 응원하다 돌아가셨습니다.

몹시 흥분한 나머지 심장이 멎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할 정도로 몰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아이덴티파이 (identify),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내가 동일인(同一人), 하나가 됩니다.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가 영광을 누리면 나도 함께 영광을 누립니다. 둘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의 영광으로 다가옵니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엣것을 잊으라,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땅의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땅은 하늘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땅의 문제가 땅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는 땅에서 짓습니다. 흙을 갈아엎고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햇빛은 위에서 비칩니다. 비도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래서 땅의 곡식을 자라게 합니다. 땅에 속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가끔 산에 가 보면 멧돼지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멧돼지가 도토리나무 밑에서 도토리 몇 개를 주워먹었습니다. 이 미련한 멧돼지가 도토리가 땅에서 나는 줄 알고 땅을 마구 파헤칩니다. "야, 이놈아. 도토리는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다. 땅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라고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어디 말이 통해야 말이지요.

땅의 문제가 땅에서 해결됩니까? 부부간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만의 문제입니까? 하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간에 불화가 생겼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땅의 문제는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땅의 문제는 하늘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 명예도, 사랑도, 복잡다단한 모든 문제들이 다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엣것을 찾으십시오.

땅을 사랑하는 자는 땅뿐 아니라 하늘도 잃어버립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 하늘을 생각하는 자, 하늘로 향하는 자는 하늘뿐 아니라 땅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보고 세상은 간혹 미쳤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새 술에 취하였다" 라고도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

예수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항상 하늘을 생각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10)." 뜻을 하늘에 두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을 얻으셨으며 땅도 얻으셨습니다.

위엣것을 찾으십시다. 위엣것을 생각하십시다. 주님께서 나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나의 나됨의 실존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영광 가운데 함께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위엣것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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