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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시는 일(요한복음 9장 1절~12절)

by 【고동엽】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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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시는 일(요한복음 9장 1절~12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하다면 어느 정도로 행복하며, 불행하다면 어느 정도로 불행합니까? 또한 여러분은 스스로를 쓸모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전혀 쓸모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본문은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아무리 불행해도 이 사람만큼 불행할 수 없고, 아무리 자기를 쓸모 없다고 생각해도 이 사람만큼 철저하게 무용지물(無用之物)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화려함이라든가 아름다움, 기쁨이라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 강단을 아름답게 장식해놓은 꽃을 봅니다. 우리들 가정에서도, 남의 집 담장에서도, 꽃은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우리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처럼 일상적인 꽃 한 포기의 아름다움조차 평생 느껴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을 바라보고 감격해할 수 없는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40년 동안을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 책임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누구를 탓해야 합니까? 적어도 본인 잘못은 아닙니다.

스스로는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없이 평생토록 이 고생을 해야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왜 나만 장님이어야 하고 나만 고생하고 나만 불행해야 하는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가지면 무엇하고 많으면 무엇합니까? 잘살고 출세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뭇 사람이 추구하는 욕망과 꿈이 이 사람한테는 다 쓸데없습니다. 누군가가 던져주고 가는 동전 한 닢, 그 선행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말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살 이유가 있으면 무슨 수로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고통이라고 하는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순간순간 당하는 멸시가 전부입니다.

과거를 추억할 거리도 없으려니와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미래에 대한 보장이나 바램도 없습니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하루하루의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무의미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불행하고, 철저하게 무가치한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동정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다만 추상적인 토론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내셨을까?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을까? 이렇게 된 불행의 원흉(元兇)이 어디에 있을까? 이런 문제로 시비를 벌이다가 겨우 한다는 소리가 "전생에 죄가 많았나보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이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들이 내 불행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추상적인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까? 누구 죄 때문이냐고요? 부모 죄냐, 본인 죄냐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이 사람한테는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습니까?

만약 입을 열어 말한다면 그에게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 당신들은 조상이 깨끗해서 눈뜨고 나왔소?' '당신들이 나 보다 의로운 게 뭐요?' 그러나 이 사람은 한마디 대꾸조차 없습니다. 왜입니까? 억울한 소리를 워낙 많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하든 흉을 보든, 자기 손위에 떨어지는 적선밖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죄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하는 질병관(疾病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가 누구의 죄인가 ---- 부모 죄인가, 본인, 혹은 사회의 죄인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소경은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전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이 불행한 사람 앞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누군가가 말했어야 합니다. '누구 죄냐'를 따지기 전에 꼭 해야할 말 ---- 본문에는 그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왜 이 말이 없습니까? '주님께서 이 사람 눈을 뜨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 아니면 '이처럼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습니까?' 한마디 할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말은 한마디도 없이 엉뚱한 시비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말하기를 우리는 남의 고난을 볼 때에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고 합니다. 첫째, 그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 한다는 것입니다. 불행과 죄를 직결시켜 버립니다. 내 문제에 대해서는 의(義) 때문이라 하고,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진리를 위하여 고생한다 하고, 남이 고생할 때에는 벌받은 것이라고 죄 문제로 돌려버립니다.

둘째, 남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심이 없습니다.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관대한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판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얼마나 어려울까, 얼마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까?' 하고 그 깊은 고통을 이해해줄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셋째, 자기를 예외시합니다. 나와 저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생각하고, 상대방을 쉽게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이러한 실수가 오늘의 본문에도 있습니다. 풀턴 쉰(Sheen, Fulton John) 주교가 이런 말하는 것을 책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신비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라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괴로워할 때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러분, 고통이라고 해서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재산을 잃었다고 믿음까지 잃는 것이 아니요, 건강을 잃었다고 사상까지 잃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다'라고만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이며 얻는 것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고통이 고통 되는 까닭은 철저한 상실에 있습니다. 물질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요,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입니다.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손해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 자체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고 계시는가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 앞에 취하신 태도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 문제를 철학적 난제(難題)가 아닌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십니다. 이사람이 얼마나 불행한가, 얼마나 아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 문제냐 아니냐, 무엇 때문이냐, 누구 때문이냐 ---- 분석해서 생각할 문제도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십니다. 철저하게 쓸모없는 존재와도 같은 이 소경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보이는 현상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일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신앙고백 가운데서 늘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하나님의 일이 있고, 사람들 눈에는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께는 쓸모가 있으며,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나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하여 귀중한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나면서부터 소경된, 이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 개별적으로 경륜하시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두 눈과 두 다리가 멀쩡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은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그래도 불행합니까? 그래도 쓸모가 없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고통은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경륜밖에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불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당하는 현실을 통하여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실패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성공입니다.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 과거를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미래적 의미를 생각하십니다. 심지어 미래적 원인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여기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놓고 그의 과거가 무엇이냐, 조상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곧 미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합시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이 원인이었고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아무리 두고두고 시비해보아야 이 추상적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파헤친들 더욱더 오리무중(五里霧中)이요, 하나님밖에 누가 알겠습니까? 이제 쓸데없는 변론을 버립시다. 그리고 미래적인 의미를 생각합시다. 미래적인 하나님의 경륜과 선교적 의미, 그 구속사적인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토론을 중지시키십니다. 제자들이 '누구 죄입니까? 본인 죄입니까, 부모 죄입니까?'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도 저도 아니라고 쟁론을 거부하셨습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그만 두게 하시고,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자세로 이 문제를 대하십니다.

저는 인천에서 16년여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제가 부목으로 있다가 원목이 되었을 때, 앞서 원목으로 계시던 목사님은 원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젊어서 실수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았습니다마는 그 원로 목사님께서 늘 제 뒤에서 잘 밀어주시고 받들어 주셨기에 큰 실수 없이 16년 동안 목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 저를 도와주신 것 가운데에 특별히 귀한 것은 매일 새벽 4시부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새벽기도회는 제가 인도하지만 목사님은 꼭 앞자리에 나와 조용히 그저 끝까지 기도하곤 하셨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으셨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눈이 하얗게 와서 길이 무척 미끄러운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목사님이 새벽기도회에 가시려고 문을 열고 나서니 사모님이 말립니다. 그 댁에서 교회까지 가려면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눈길에 실족하실까봐 사모님이 극구 만류하십니다.

목사님보다 두 살 많으신 사모님이 거의 꾸짖다시피 해서 잡아끌어도 목사님은 막무가내입니다. "미끄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가야지" 하시면서 지팡이를 짚고 나섭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문밖에서 몇 발짝 걷다가 그만 삐끗하는 바람에 호되게 넘어지셨습니다.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사모님이 문을 열면서 목사님을 보시고는 놀랍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한바탕 원망을 합니다. 가시지 말라고 했는데 부득부득 고집을 부리시다가 그예 일을 당했다고, 내가 뭐랬느냐고 나무라십니다.

묵묵히 들으시던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보 여보, 시비는 들어가서 하고 우선 나를 좀 끌어들여주시오. 욕을 해도 들어가서 해야지, 지금 나더러 어쩌라는 거요?"

여러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시비를 벌이고 있을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쟁론 그만하고, 이제 이 현장에서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적극적으로 대하십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창조적인 기회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만드십니다. 높은 차원의 세계로 옮겨 놓으십니다.

고난은 기회입니다. 위기가 바로 창조의 기회요, 실패가 새로운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성공으로 오기보다 실패로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아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고난 당하는 사람을 보십니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스스로 고난 당하고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특별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나타낸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요즘처럼 쌀쌀한 겨울 저녁, 군밤이나 군고구마, 하다못해 땅콩 한 주먹이라도 사 가지고 들어가서 가족이 함께 오순도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 이것이 사랑이요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소박한 행복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은 채 살아갑니까? 물질이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 풍요가 곧 삶의 풍요는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가난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그것은 봉사의 기회요,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요,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전달하고 싶습니까? 모두가 부하게 살고, 모두가 높은 지위에만 있다면 내게 불같이 뜨거운 마음이 있더라도 사랑을 나타낼 길이 없습니다. 사랑을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중국대륙이 가난하고 북한 땅이 가난합니다.

공산주의 세계는 자유세계보다 가난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 사랑하는 동료 목사님 한 분이 북한에 있는 어느 분한테 백 불을 주었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것은 제 삼 년 봉급입니다. 이것을 정말로 제게 주시는 것입니까?" 하면서 감격해 울더랍니다.

여러분, 가난은 기회입니다. 고난이 봉사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진 것도 기회요 못 가진 것도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모든 형편, 모든 상황이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회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일터가 있고, 새로운 일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라고 일의 필요성을 말씀합니다. 일을 하되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특수성과 밤이 오리니 속히 해야 한다는 시급성을 말씀합니다.

아무리 불행한 여건이라도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났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만남의 관계 ---- 존재와의 만남 속에서 창조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만나는 순간, 주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감격합니다. 이 소경은 참 위대한 사람입니다.

시골에서 김을 매다가 벌레에 물리거나 하면 어른들이 가르쳐 주기를 물린 데다 침을 바르고 흙으로 문지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해독(解毒)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하신 방법이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침을 뱉아서 흙을 이겨 가지고 이것을 눈에다 바르십니다.

바르시고는 이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이 사람은 순종합니다. 눈먼 채로 순종한 것입니다. 눈에 흙을 바른 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십 리 되는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참으로 위대한 믿음입니다.

이 순종,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시는 순간에 말씀하십니다. "믿으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갈 때에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쇠사슬에 묶여서 일생동안 노예로 살다가 죽을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삽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바벨론을 정신적으로 점령하고 메대와 바사를 완전히 정복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바로의 궁전에서 나와 미디안 광야로 쫓겨날 때에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지나간 80년 세월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 앞으로 큰 역사를 이루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가 가진 기회, 내가 가진 현실 ----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의미만 알면, 그리고 믿고 순종하면, 또한 그리스도와 만남의 관계를 이루는 순간에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유를 아는 고통을 당하십니까? 회개합시다. 이유를 모르는 많은 실패를 당하셨습니까? 이제 묵묵히 믿음으로 기다립시다.

지금 당하는 역경이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옵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관계, 존재와의 바른 만남이 있는 순간,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도 쉼 없이, 실패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 말씀에 행동으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  

하나님이 하시는 일(요한복음 9장 1절~12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하다면 어느 정도로 행복하며, 불행하다면 어느 정도로 불행합니까? 또한 여러분은 스스로를 쓸모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전혀 쓸모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본문은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아무리 불행해도 이 사람만큼 불행할 수 없고, 아무리 자기를 쓸모 없다고 생각해도 이 사람만큼 철저하게 무용지물(無用之物)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화려함이라든가 아름다움, 기쁨이라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 강단을 아름답게 장식해놓은 꽃을 봅니다. 우리들 가정에서도, 남의 집 담장에서도, 꽃은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우리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처럼 일상적인 꽃 한 포기의 아름다움조차 평생 느껴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을 바라보고 감격해할 수 없는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40년 동안을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 책임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누구를 탓해야 합니까? 적어도 본인 잘못은 아닙니다.

스스로는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없이 평생토록 이 고생을 해야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왜 나만 장님이어야 하고 나만 고생하고 나만 불행해야 하는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가지면 무엇하고 많으면 무엇합니까? 잘살고 출세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뭇 사람이 추구하는 욕망과 꿈이 이 사람한테는 다 쓸데없습니다. 누군가가 던져주고 가는 동전 한 닢, 그 선행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말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살 이유가 있으면 무슨 수로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고통이라고 하는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순간순간 당하는 멸시가 전부입니다.

과거를 추억할 거리도 없으려니와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미래에 대한 보장이나 바램도 없습니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하루하루의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무의미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불행하고, 철저하게 무가치한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동정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다만 추상적인 토론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내셨을까?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을까? 이렇게 된 불행의 원흉(元兇)이 어디에 있을까? 이런 문제로 시비를 벌이다가 겨우 한다는 소리가 "전생에 죄가 많았나보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이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들이 내 불행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추상적인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까? 누구 죄 때문이냐고요? 부모 죄냐, 본인 죄냐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이 사람한테는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습니까?

만약 입을 열어 말한다면 그에게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 당신들은 조상이 깨끗해서 눈뜨고 나왔소?' '당신들이 나 보다 의로운 게 뭐요?' 그러나 이 사람은 한마디 대꾸조차 없습니다. 왜입니까? 억울한 소리를 워낙 많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하든 흉을 보든, 자기 손위에 떨어지는 적선밖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죄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하는 질병관(疾病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가 누구의 죄인가 ---- 부모 죄인가, 본인, 혹은 사회의 죄인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소경은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전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이 불행한 사람 앞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누군가가 말했어야 합니다. '누구 죄냐'를 따지기 전에 꼭 해야할 말 ---- 본문에는 그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왜 이 말이 없습니까? '주님께서 이 사람 눈을 뜨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 아니면 '이처럼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습니까?' 한마디 할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말은 한마디도 없이 엉뚱한 시비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말하기를 우리는 남의 고난을 볼 때에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고 합니다. 첫째, 그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 한다는 것입니다. 불행과 죄를 직결시켜 버립니다. 내 문제에 대해서는 의(義) 때문이라 하고,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진리를 위하여 고생한다 하고, 남이 고생할 때에는 벌받은 것이라고 죄 문제로 돌려버립니다.

둘째, 남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심이 없습니다.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관대한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판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얼마나 어려울까, 얼마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까?' 하고 그 깊은 고통을 이해해줄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셋째, 자기를 예외시합니다. 나와 저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생각하고, 상대방을 쉽게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이러한 실수가 오늘의 본문에도 있습니다. 풀턴 쉰(Sheen, Fulton John) 주교가 이런 말하는 것을 책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신비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라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괴로워할 때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러분, 고통이라고 해서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재산을 잃었다고 믿음까지 잃는 것이 아니요, 건강을 잃었다고 사상까지 잃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다'라고만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이며 얻는 것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고통이 고통 되는 까닭은 철저한 상실에 있습니다. 물질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요,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입니다.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손해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 자체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고 계시는가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 앞에 취하신 태도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 문제를 철학적 난제(難題)가 아닌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십니다. 이사람이 얼마나 불행한가, 얼마나 아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 문제냐 아니냐, 무엇 때문이냐, 누구 때문이냐 ---- 분석해서 생각할 문제도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십니다. 철저하게 쓸모없는 존재와도 같은 이 소경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보이는 현상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일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신앙고백 가운데서 늘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하나님의 일이 있고, 사람들 눈에는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께는 쓸모가 있으며,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나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하여 귀중한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나면서부터 소경된, 이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 개별적으로 경륜하시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두 눈과 두 다리가 멀쩡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은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그래도 불행합니까? 그래도 쓸모가 없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고통은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경륜밖에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불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당하는 현실을 통하여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실패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성공입니다.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 과거를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미래적 의미를 생각하십니다. 심지어 미래적 원인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여기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놓고 그의 과거가 무엇이냐, 조상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곧 미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합시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이 원인이었고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아무리 두고두고 시비해보아야 이 추상적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파헤친들 더욱더 오리무중(五里霧中)이요, 하나님밖에 누가 알겠습니까? 이제 쓸데없는 변론을 버립시다. 그리고 미래적인 의미를 생각합시다. 미래적인 하나님의 경륜과 선교적 의미, 그 구속사적인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토론을 중지시키십니다. 제자들이 '누구 죄입니까? 본인 죄입니까, 부모 죄입니까?'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도 저도 아니라고 쟁론을 거부하셨습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그만 두게 하시고,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자세로 이 문제를 대하십니다.

저는 인천에서 16년여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제가 부목으로 있다가 원목이 되었을 때, 앞서 원목으로 계시던 목사님은 원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젊어서 실수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았습니다마는 그 원로 목사님께서 늘 제 뒤에서 잘 밀어주시고 받들어 주셨기에 큰 실수 없이 16년 동안 목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 저를 도와주신 것 가운데에 특별히 귀한 것은 매일 새벽 4시부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새벽기도회는 제가 인도하지만 목사님은 꼭 앞자리에 나와 조용히 그저 끝까지 기도하곤 하셨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으셨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눈이 하얗게 와서 길이 무척 미끄러운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목사님이 새벽기도회에 가시려고 문을 열고 나서니 사모님이 말립니다. 그 댁에서 교회까지 가려면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눈길에 실족하실까봐 사모님이 극구 만류하십니다.

목사님보다 두 살 많으신 사모님이 거의 꾸짖다시피 해서 잡아끌어도 목사님은 막무가내입니다. "미끄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가야지" 하시면서 지팡이를 짚고 나섭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문밖에서 몇 발짝 걷다가 그만 삐끗하는 바람에 호되게 넘어지셨습니다.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사모님이 문을 열면서 목사님을 보시고는 놀랍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한바탕 원망을 합니다. 가시지 말라고 했는데 부득부득 고집을 부리시다가 그예 일을 당했다고, 내가 뭐랬느냐고 나무라십니다.

묵묵히 들으시던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보 여보, 시비는 들어가서 하고 우선 나를 좀 끌어들여주시오. 욕을 해도 들어가서 해야지, 지금 나더러 어쩌라는 거요?"

여러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시비를 벌이고 있을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쟁론 그만하고, 이제 이 현장에서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적극적으로 대하십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창조적인 기회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만드십니다. 높은 차원의 세계로 옮겨 놓으십니다.

고난은 기회입니다. 위기가 바로 창조의 기회요, 실패가 새로운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성공으로 오기보다 실패로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아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고난 당하는 사람을 보십니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스스로 고난 당하고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특별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나타낸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요즘처럼 쌀쌀한 겨울 저녁, 군밤이나 군고구마, 하다못해 땅콩 한 주먹이라도 사 가지고 들어가서 가족이 함께 오순도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 이것이 사랑이요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소박한 행복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은 채 살아갑니까? 물질이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 풍요가 곧 삶의 풍요는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가난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그것은 봉사의 기회요,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요,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전달하고 싶습니까? 모두가 부하게 살고, 모두가 높은 지위에만 있다면 내게 불같이 뜨거운 마음이 있더라도 사랑을 나타낼 길이 없습니다. 사랑을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중국대륙이 가난하고 북한 땅이 가난합니다.

공산주의 세계는 자유세계보다 가난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 사랑하는 동료 목사님 한 분이 북한에 있는 어느 분한테 백 불을 주었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것은 제 삼 년 봉급입니다. 이것을 정말로 제게 주시는 것입니까?" 하면서 감격해 울더랍니다.

여러분, 가난은 기회입니다. 고난이 봉사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진 것도 기회요 못 가진 것도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모든 형편, 모든 상황이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회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일터가 있고, 새로운 일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라고 일의 필요성을 말씀합니다. 일을 하되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특수성과 밤이 오리니 속히 해야 한다는 시급성을 말씀합니다.

아무리 불행한 여건이라도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났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만남의 관계 ---- 존재와의 만남 속에서 창조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만나는 순간, 주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감격합니다. 이 소경은 참 위대한 사람입니다.

시골에서 김을 매다가 벌레에 물리거나 하면 어른들이 가르쳐 주기를 물린 데다 침을 바르고 흙으로 문지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해독(解毒)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하신 방법이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침을 뱉아서 흙을 이겨 가지고 이것을 눈에다 바르십니다.

바르시고는 이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이 사람은 순종합니다. 눈먼 채로 순종한 것입니다. 눈에 흙을 바른 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십 리 되는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참으로 위대한 믿음입니다.

이 순종,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시는 순간에 말씀하십니다. "믿으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갈 때에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쇠사슬에 묶여서 일생동안 노예로 살다가 죽을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삽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바벨론을 정신적으로 점령하고 메대와 바사를 완전히 정복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바로의 궁전에서 나와 미디안 광야로 쫓겨날 때에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지나간 80년 세월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 앞으로 큰 역사를 이루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가 가진 기회, 내가 가진 현실 ----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의미만 알면, 그리고 믿고 순종하면, 또한 그리스도와 만남의 관계를 이루는 순간에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유를 아는 고통을 당하십니까? 회개합시다. 이유를 모르는 많은 실패를 당하셨습니까? 이제 묵묵히 믿음으로 기다립시다.

지금 당하는 역경이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옵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관계, 존재와의 바른 만남이 있는 순간,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도 쉼 없이, 실패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 말씀에 행동으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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