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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열정-마태복음11장29절

by 【고동엽】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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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열정

마태복음11장29절

 

언젠가 신학생들의 세미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구를 정말로 잘 외우는 한 학생이 강사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을 합니다. 지적을 하면 그는 그곳을 정확하게 외웁니다. 나중에 박수를 치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교수가 물어봅니다. 그런데 누구 전도사 그것을 다 믿는 가? 그때 문제가 일어난 겁니다. 주춤하며 대답을 못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지식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가이드 포스트에 나온 글입니다. 미국의 알라스카에 사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름은 스티브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교회를 방문을 하고 믿음으로 살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때 설교의 제목이 겨자씨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이 저리로 가라고 해도 그 믿음으로 옳겨 진다고 하는 설교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듣고서 감동을 합니다. 이런 큰 기적이 작은 믿음으로 시작을 한다는 것을 보면서 그는 생각을 합니다. 나도 저런 믿음을 가지고 시작을 한다고 작정을 하고서는 기도를 시작을 합니다. 그가 사는 마을에 눈이 오면 작은 산에서 눈사태가 나는 겁니다. 온 마을이 걱정을 하지를 아니하는 길이 그 산이 없어지는 것을 그는 압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시작을 합니다. 그가 기도를 한다는 소문이 목사님에게 들렸습니다. 아 이제 새로운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기쁨이 앞서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혹이 저가 기도를 했는데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그게 얼마나 악 영향을 미치려는 지를 그는 압니다. 은근히 걱정이 앞섭니다. 성경에 기록이 된 그 말씀이 아직도 이루어진 것을 그는 보거나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걱정을 안고서 목사님이 기도를 합니다. 그러기를 10일이 지나고 30일이 지나고 그런데 40일을 지내고 나서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가 목사님을 찾아와서는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요즘 하나님은 산을 들어서 옳기 시는 게 아닙니다. 기계로 옳기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근처에 고속도로가 생기는 데 거기에 흙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그 산에 흙을 옳긴 다고 그럽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으로 기도를 하십니까?

사실은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을 하는 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식의 출처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식의 시작을 어디서 하는 가를 말씀을 합니다. 내게 배우라.

시편119편 105절에 이런 기록을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

요즘은 목사님들이 빠쁘냐고 물어보면 영어를 하느라고 그런데요. 성도들이 무엇을 가지고 무장을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성도의 지식을 갗춰야 합니다. 요즘 누가 메이저 리그의 홈런이 어떻고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민주당이 어떻고 과거의 어는 정치인이 어떻고 그런 것을 좀 몰라도 됩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렘15:16)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인도 합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말씀의 기쁨에 드리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50장 4절에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어떻게 도와줄 줄을 나로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실 설교를 하다가 보면 어떻게 설득이 되는 가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설교는 선포적인 성향이 있고 설득적인 성향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국의 많은 교회가 여기에 익숙합니다. 선포에 말입니다. 그래서 좀 설교를 듣고서는 어딘지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것의 공백을 기도를 가지고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는 선포적인 성향과 설득적인 면이 같이 있습니다. 그냥 들어라 그게 아닙니다. 모세가 아무리 선포를 해도 나중에 돌을 들고서는 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는 이야기 합니다. 그는 선포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가 그런 것을 그도 잘 압니다. 그래서 그가 말을 하는 겁니다. 나는 혀가 뻣뻣하고 그럽니다. 그때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 아론입니다. 그런데 그 설득력이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서는 되는 게 아닙니다. 먼저 모세나 아론이 말씀에 설득을 당합니다. 그것을 봐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능력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는 최고의 무기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너는 내게 배우라 내 멍에를 메고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 분은 언제나 당신의 멍에 그것을 약속의 말씀에 두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자 내가 내 자신을 안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지를 못해서 문제입니다. 말씀이 내가 누구인지를 제일먼저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거기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배낭을 꾸릴 때 그때 알아야 합니다. 짐을 싸는 법을 제가 이사를 자주 다니는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다 보니까 그럽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 짐을 잘 싸는 법을 알려줍니다. 예전에 훈련을 가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그게 짐을 잘 싸는 법을 말입니다. 무거운 게 위로 가벼운 것이 아래로 갑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것이 이겁니다. 자 말씀을 들고서 이렇게 싸워라 이겁니다. 그 분은 싸우는 법을 가르치시는 겁니다.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싸움의 도구인가를 알려주시는 겁니다.

자 성경을 에베소서에 봅니다. 6장10절에서 20절을 읽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을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구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使臣)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말씀의 사도였습니다. 소아시아, 로마, 그리고 서바나(스페인)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 옛날, 교통도 불편하고 어려운 때에, 그 숱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당시로 말하자면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한 말씀, 이것은 곧 검입니다. 말씀을 검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전도여행도 하나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어떤 권력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세상정욕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흔히 그러하듯 자기와 더불어 싸우는 것도 아니고, 혹은 자기 욕심 같은 것과 싸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까짓 자기 욕심 하나 정복하자고 일생을 다 바치는 그런 유의 사도 바울도 아닙니다.

바울이 싸우는 대상이 무엇인지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12절)"---우리가 씨름하는 대상은 악의 영입니다. 악령과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세계에서 악한 세력이 세상을 향하여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고, 또 악한 세력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말씀의 검으로 다스려서, 그들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싸움에서 절대적 무기는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비유로써 말씀합니다. 악령의 지배하에 있는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전신갑주를 입어라,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무장을 해야 한다,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이 본문을 다 읽으신바, 그 무장은 이렇습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라'---온몸을 갑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방어적이고 소극적입니다. 공격적인 무기는 오직 하나입니다.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고 하지요? 뒤로 물러서면서 방어하려고만 하다가는 끝내 못 견딥니다. 결국은 공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무기는 오로지 말씀 하나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생각한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검이었습니다. 말씀의 검이 곧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주 어려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전도여행 때에도 많은 시험이 있었고 많은 질문과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전부 말씀으로 이기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많이 기억하셨던 것 같습니다. 요절을 많이 외셨던 것 같아요. 옛날에는 성경을 가지고 다녔던 것도 아닐 텐데,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많이 알고 계셔서 그 때마다 척척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 : 4)"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 4 : 4)"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 : 10)"----이렇게 전부 성경을 인용하시어 말씀으로 대답하심으로 승리하시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는 어려움의 시험을 이렇게 이긴다. 그것을 너희도 배워라 이겁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말씀은 구원의 절대적 요소였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오직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듣지 못한다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괌 섬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괌의 중앙쯤에 보면 산언덕에 굴이 하나 있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요꼬이라는 일본군인 한 명이 있었는데, 전투 중에 자기 부대의 사람들이 거의 죽고, 생존자는 적에게 항복을 했답니다. 그런데 요꼬이는 총 하나를 가지고 이 굴로 도망을 쳤습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무려 27년 동안을 혼자 살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비행기가 오르락내리락하며 날아가니까 전쟁이 계속되는 줄로만 알고, 전시에 대비하여 군인들이 훈련하느라 빵빵 총을 쏘니까 그 소리를 듣고는 '이거,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구나'하고 나무열매를 따먹으면서 그렇게 27년을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이 끝났다"하는 한마디 소식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27년 동안을 짐승처럼 살다가 결국 요꼬이는 그 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다시 세상에 나온 그가 얼마나 후회하였겠습니까? 어쨌든 그가 가지고 있던 유품이 그곳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복음 한마디를 제때에 듣지 못함으로 그는 차차 죽어갑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다시 로마서 10장 14절을 보세요.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들음이 중요하고 들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절대 우선입니다.

이렇게 요꼬이처럼 듣지를 못하고 죽는 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열정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말씀이 나를 열정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세상에 무장을 하고서 나가야 합니다. 1986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로잔선언이란 것을 했습니다. 열 가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복음으로 무장을 하자는 겁니다. 세상에 나가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자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선언이 무엇이냐? 세상에 나가기 위하여 현대적인 기술을 사용하자는 겁니다. 우리가 현대적인 기술을 사용해서 무장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미디어를 장악을 하고요, 열심히 우리가 인터넷을 장악을 하고요. 쓰레기들이 엄치는 인터넷에 하나님의 복음들로 채워가자는 겁니다. 우리가 방송국에 사장을 만들고 우리가 피디를 만들고 우리가 신문사의 사장들이 일어나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일어나도록 믿음의 열정을 가지고 일어나자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세계적인 선교사가 있습니다. 리빙스턴이라는 분입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16년을 일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강의를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 앞에 섭니다. 그는 한 팔은 사자에게 물려서 쓸 수가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27번의 열대병에 시달린 사람으로 몰골은 말로 표현이 불가한 그런 모습입니다. 학생들이 그를 보는 순간에 보통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도 질문을 하지도 못하고 무거운 침묵의 순간이 그들을 압도합니다. 그저 바라만 보는 그것이 그들을 향한 언어였습니다. 그때 리빙스턴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대답을 합니다. 여러분 내가 그 많은 역경을 미지의 세계에서 그 많은 어려움의 자리에서 나를 붙들어 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그리고 그는 답을 합니다. 가장 고결한 영광을 지닌 귀하신 분의 말씀입니다. 나는 그 말씀을 가지고 승리를 했고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28장20절의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승천을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나는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믿음의 열정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임종을 하면서 끝까지 기도의 손을 풀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성경을 가슴에 간직을 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습니다. 그의 성경에 마28:20에 빈 공간을 이렇게 채웠습니다. “존귀하신 분의 말씀이다. 믿음으로 오늘과 내일이 결정이 된다. 그리고 주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사람이 성공을 지향하면 언제나 불안 합니다. 그리고 늘 쫓기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다가 보면 쉼을 얻는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편하다 자유하다. 자 그런데 여기서 더 깊은 것은 이겁니다. 보상의 문제를 다루는 겁니다.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 가를 말씀을 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저분이 주시는 그런 보상을 우리는 잘 봐야 합니다. 성경은 성공이 아닙니다. 탁월함을 이야기합니다. 탁월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의 최선을 이야기합니다. 공부가 은사인 사람은 최고의 석학의 자리를 위하여 쓰임을 말하는 열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영향력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1858년에 뉴욕의 어느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가 걸립니다. 그래서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리고 시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정말로 힘이 듭니다. 아주 실망의 가운데 태어나고 많은 아이들이 그를 놀리는 일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라는 그가 11살이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말을 아이에게 들려줍니다. 아들아 네가 가진 장애는 장애가 아니란다. 네가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면 그가 너를 도우신다. 함께 하심을 진심으로 믿는 다면 오히려 너의 장애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를 주목을 할 것이다. 너는 역사의 신화와 같은 기적을 남기는 놀라운 삶을 너는 살 것이다. 이렇게 그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23세에 뉴욕의회의 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주지사가 됩니다. 다음으로 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위대한 대통령이 됩니다. 그의 이름이 데어드루 루즈벨트입니다. 믿음의 열정은 이것입니다.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에게 나의 믿음의 문을 여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길을 열어 가셨습니다. 당신을 통하여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길을 오늘도 열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거기에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열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배의 부름 /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참회의 기도 /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방황하던 저희들을 오랫동안 기다려 주시고 주님 앞에 나아올 때에 영접해주시고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그 의로 가리어주시고,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끝까지 사랑해주신 그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에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참회의 기도를 드리오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녀 됐으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영원한 기업을 약속을 받았으나 오늘도 이 땅에 매여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때로는 죄악의 노예가 되고, 혈기의 노예가 되고, 정욕의 노예가 되고,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가 있음을 자복을 하오니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그처럼 소중히 여기시는 생명이건만 스스로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며 자연을 훼손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파괴하고 소홀이 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한 우리의 죄악을 자복하오니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사랑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면서도 증오하고 있으며 근심하는 것이 아무런 의를 이루지 못함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근심의 자리에 있음을 주님 앞에 고백을 드리오니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기적인 생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용서와 사랑만이 길임을 알면서도 또한 화평이 생명의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화하고 용서하지 못 하고 미련하게 불신앙적인 소행에 매여서 살고 있는 우리의 죄악을 주님 고백을 하오니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속량하시고 그 크고 놀라운 의로 새롭게 하옵소서.

 

지금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를 생각하며 참회의 기도를 묵묵히 드립니다.

 

용서의 선언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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