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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죄인의 친구(마가복음 2:13-17)

by 【고동엽】 2023.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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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친구(마가복음 2:13-17)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산다고 생각합니다. 사랑 없는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살아야 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사랑 없는 생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란 가장 많이 듣는 말이지만 또한 이것처럼 알 수 없는 것도 없습니다. 일생을 배워도 다 알 수 없고, 일생을 사랑 속에서 살면서도 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많이 듣고 이야기하면서 어려운 것은 그 사랑에도 거짓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진실이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사랑의 상실, 사랑의 배신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진실만이 존재해야지 만약 거짓이 섞여 있다면 미움만도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두 가지 상징적 사건에 의해서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실 때 말구유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탄의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큰사랑을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고난절 때마다 우리가 다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십자가 사건입니다. 피흘림, 고난, 아픔, 죽으심과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며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한 분명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더 더욱 귀한 것은 그의 일생 전체가, 말씀이나 행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는 빌립보서에서(빌 2:6-8) 그리스도를 설명하기를 "그는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이면서도 단계적으로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7절에서 "자기를 비었다"고 하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있는 자가 없는 자로서, 할 수 있는 자가 할 수 없는 것으로, 다 알면서도 모르는 자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만을 취한 것이 아니고 사람과 같이 된 것입니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며, 할 수 없는 자인 것처럼 보여졌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의인으로서 죄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죄인가 같이 되신 깊고 오묘한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내용을 대표적으로 설명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흔히 아가페의 사랑이라 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사랑의 단어가 종류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부부 사랑, 형제 사랑, 부자간의 사랑 등 종류에 따라 어원도 다르고 단어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희생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때는 아가페라고 합니다. 이것은 특수한 의미를 담아서 쓰는 용어로 감상이나 낭만이 결코 아닙니다. 아가페가 무엇이냐고 헬라어 사전을 뒤져봐도 확실치가 않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만이 오직 아가페의 정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행동으로 기다린 것이나 찾은 것만이 아니고 같이 되신 것입니다. 즉 자기를 포기하시고 같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낮추시는 굉장한 희생입니다. 이 엄청난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셔서 버려지고 소외된 인간을 만나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부름에 그치지 않고 제자를 삼으셨고 희생하시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사랑은 말이 없습니다. '같이 되었다'라는 것은 같이 먹고, 같이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구제가 아니며 단순히 긍휼히 여긴다는 뜻도 아닙니다. 공감대를 이루면 같이 산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에게 큰 선물을 주신 것도 아니고 나사로처럼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아니고 죽을병을 고쳐주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마태의 집에서 같이 잡수셨습니다. 여기서 오묘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된다'라는 문제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16년간 목회를 했었습니다. 하루에 심방을 가장 많이 한 날은 34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종일 다니다가 보면 대개 점심을 약속하게 됩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바로 다음 집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후 그 집에서는 식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 묻지도 않고 그냥 막국수를 시켜왔습니다. 부잣집 음식이면 사양을 할 수 있지만 어려운 집일수록 그 집에서 대접하는 것을 사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점심을 미리 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대접하는 사람 앞에서는 설명이 잘 통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같이 갔던 일행은 다 먹지 못했는데 저만 혼자 그 국수를 다 먹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준다는 것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내가 주는 것을 저쪽에서 받아주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요. 이것이 더 어렵습니다. 잔칫집일 경우에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음식이 모자라도 걱정입니다만 그것보다도 음식을 잔뜩 장만했는데 손님이 없다면 더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달라는 사람도 문제지만 주겠다는데 안 받겠다는 사람이 더 미운 것입니다.

오늘 마태는 특별히 받은 것은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셔서 같이 잡수신 것만으로 아주 만족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마태가 받은 은혜입니다. 저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내가 저와 함께 한다는 뜻이며, 저가 내 집에 오셨다는 것은 나도 그 분의 집에 초대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왕의 아들의 잔치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청했는데 오지 않아서 사람들을 시켜 거리로 나가 절름발이, 병신 등 자격이 있든 없든 되는 대로다 청해 오라고 했습니다. 단, 내가 주는 예복을 입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초청 받았다는 것만 가지고 초청 받을 자격이 있고 주인이 보낸 옷만 입고 가면 합격입니다. 여기에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었다는 사건은,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 보면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거리에 다니는 창녀를 데려다가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창녀는 계속 품행이 좋지 않지만 호세아는 계속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는 더러운 여자를 사랑하다가 더러운 사람이 되었고 창녀는 호세아의 사랑을 받다가 선지자가 됩니다.

민족주의자요, 탈취자요, 폭행자로서 대표적인 죄인입니다. 루시안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 당시의 세리들을 간음하는 자요, 방조자요, 아첨꾼이요, 알랑꾼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정치가들에게 빌어 붙어서 알랑거리며 권세를 얻어 세금을 많이 포탈해 자기와 로마 정부가 나눠먹는 용납할 수 없는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멸시하는 줄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끼리 뭉쳐서 돈으로 향락하고 부도덕한 생활로 만족을 찾으며 살았던 세리들입니다.

이런 세속주의자의 타락적인 인간의 대표인 마태에게 놀라운 것은 그가 골방에서 회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불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세관에서 세금을 받고 있는 직장의 현장에서 마태를 불렀습니다. 회개하고 직장을 버리고 따르라는 얘기도 아니었습니다. 거듭나라, 중생하라는 얘기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나를 좇으라" 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네 신분 그대로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이 불렀다는 그 조건으로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받아들였기에 그는 자기 친구들과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마태의 집에 예수님이 오시느냐였습니다. 만일 "그 곳은 안 된다. 네가 이리 오너라" 하셨다면 문제가 달라졌을 것인데 예수님은 이 집에 오셔서 그의 친구들과 함께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모습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세리들과 함께 먹느냐고 힐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리가 누군지 알고 부르셨습니다. 현장에서 부르십니다.

그 모습 그대로 불러서 제자로 삼았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이 잡수셨습니다. 즉 세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유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벌떡 일어나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엄하게 책망했습니다. 원래 유대 사람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먹는 것은 더 더욱 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아주 깨끗한 것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세리의 집에 가서 메시야가 음식을 함께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큰 사건이었고 큰 타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예, 체통, 위신 등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이 집에 가서 그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예수님은 좋지 못한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죄인의 친구라고 말입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낮에 예수를 만나는 것을 꺼려 밤에 조용히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 다미안은 모로콰이 섬을 지나다가 불쌍한 문둥병자를 만납니다.

그들이 너무 마음에 걸려서 모로콰이 섬으로 들어가서 문둥병자와 함께 살다가 마침내 그도 문둥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먹고, 함께 살다가, 함게 죽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지만 그들은 끝내 애굽으로 가고 맙니다. 예레미야는 그대로 그들을 따라 애굽으로 들어가 외치다가 돌에 맞아 죽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요즘 신학적인 용어로 공감대를 형성해야 됩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쉬운 얘기입니다. 바꿔놓고 서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내 처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에서 느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고난의 연대를 만들어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공동 생활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같이 먹는 데서 시작하여 같이 죽어야 사랑입니다. 죄인이 죄인과 더불어 산다면 죄를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죄인끼리 같은 공동권, 생활권, 공감대를 형성해 봐야 죄인이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대속하사 영생권을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과 함께 다시 말해서 의인이 죄인 속에 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요,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바로 여기에 영생권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부분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전체를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착실한 제자가 되었고 우리가 읽은 신약성경의 제일 첫 권인 마태복음을 기록함으로 그의 신앙고백을 남겼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사람과 같이 되심으로 하나님 됨을 버려야 했습니다. 죄인과 같이 됨으로 의인 됨을 잃어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잃어야 했습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도도한 사람들의 원수가 됩니다. 소외당한 자의 친구가 되기 위해 고관들과 높은 자들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결국은 이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들이 비난할 때 대답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죄인 편을 드셨습니다.

여러분,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신 말씀, 얼마나 소중한 얘기입니까? 병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병자이면서도 스스로 병자인 줄 모르는 사람, 즉 병들고도 아픈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을병이 든 자입니다. 아픈 줄 알아서 의원을 찾고 진실한 고백을 할 때 새로운 처방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자기가 의인이라고 하는 죄인과 죄인이라고 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교만한 의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도도한 바리새인들은 반갑지 않으셨고 비난받고 처절한 죄인인 마태의 집이 마음에 드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 받았을 때 예수님은 불편하셨고 마태의 집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죄인을 의인 되게 하기 위하여 의인이 죄인 되신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을 그가 받으십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그 사랑에 비해서 우리가 주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이 사랑의 열매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의인도 아니면서 의인처럼 행세하고 죄인 중의 괴수이면서도 깨끗한 척하는 저희들, 그러기에 뜨거운 회개의 눈물도 없고 그러기에 주님 앞에 무릎도 꿇을 줄도 모르고 병들고도 의원을 찾을 줄 모르는 미련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간구하오니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귀한 사랑을 깨닫고 우리의 적은 정성을 받으시는 주님, 회개의 눈물을 보시고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며 우리의 영접에 응해주셔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와 함께 살고, 주와 함께 먹고, 마시는 크신 기쁨이 있게 하여 주이옵소서. 그리고 이 은혜에 살고 이 은혜를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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