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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요 6:60~71)

by 【고동엽】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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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60~71)

 

두 젊은이가 일주일을 보내면서 너무나 따분하고 지리해서 돌아오는 일요일은 좀 화끈하게 지내자고 다짐을 하고서는 서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둘은 기껏 생각을 한 것이 도박장을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둘이서는 도박장으로 발검을 옮깁니다. 그런데 도박장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교회를 지나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의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요...라는 설교제목을 본 겁니다. 한 청년은 그것을 보는 순간 발이 얼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도박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들어갑니다. 또한 청년은 그냥 도박장으로 들어갑니다. 두 사람이 여기서 달라집니다. 이후로 30년이 지나서 교회로 들어간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을 합니다. 22대 대통령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도박장으로 들어간 사람은 같은 순간에 감옥에서 그 친구의 취임소식을 듣습니다.

인간은 잘못 된 결정을 순간적으로 진실이라고 믿는 착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면에 좋은 결정은 실재라는 기반의 현실에 기반을 둡니다. 분명한 Reality를 아는 것이지요. 그럴 때 바른 결정을 내릴 수가 있는 겁니다.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들, 장애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성품입니다.

사람은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3가지 중요한 성품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정직성입니다. 자신에게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은 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직이 없습니다. 문제의 본질, 핵심을 바로 파악해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직관력에 이야기를 합니다. 바른 직관력이 있는 사람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힘든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좋은 직관력을 갖으려면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가치관이 있을 때 직관을 얻게 됩니다. 통찰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가 있는 겁니다.

세 번째가 성찰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스스로 내린 결정을 무의적으로 뒤엎고 하는 데 그럴 때 마다 대가를 치를 수 있다. 그러므로 깊이 성찰할줄 아는 사람이 선택의 오류를 줄일 수 있다. 한 사건 한 사건마다 우리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입니다. 계속적으로 선택을 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선택을 하면서 언제나 급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을 먼저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급하고 절박한 것 같습니까? 사실은 예수님이 이 땅을 보시면서 무엇이 급한지를 잘 알고 계시는 겁니다. 인간에게 정말로 급한 것이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을 하십니까?

사실 구원이란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급한 문제입니다. 잘 산다 못산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구원은 생명의 문제로써 심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중요한 두 가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약속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믿음이 먼저인 것 같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바른 응답으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간추려 말하면, 주신 약속에 대한 바른 응답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죄를 사했느니라." 고 말씀을 하셨으면, 이제부터 내가 나에 대해서도 사함을 받은 줄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네 죄를 사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니에요, 저는 아직도 죄인입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불신입니다. 성경에는 말씀에 대한 바른 응답의 자세와 불신하는 자세의 좋은 본보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령,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에게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일어나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합시다. 이 때 환자의 반응이, "나는 보통 앉은뱅이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말 한 마디로 내가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라고 말하며 가만히 앉아 있다면 그는 영영 일어나지 못합니다. "일어나라" 말씀하시면, 믿고 바로 움직여서 일어나는 것이 믿음이요, 바른 응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절대 순종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편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경이요, 설교요, 전도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듣지 않은 복음을 어찌 믿으리요, 믿지 않고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요, 전하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들으리요"라고 복음에는 반드시 전하는 자가 있어야만 듣고, 믿음을 가지며, 그리고 구원을 얻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말씀이 있어도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들을 수가 없고, 듣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전하는 자가 있어도 내가 전하는 자를 만나야 하는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요, 기회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말씀이 전해지고 들려져서 여기에 대한 바른 응답, 즉 내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수락을 의미하여 이것이 바른 응답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전해지고, 전도자를 만나고,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마음 문을 여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전해지는 것도, 믿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관하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믿어 질 수도 있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전했다면 생각도 하기 전에 마음 문을 닫아걸고 전혀 받아들이지를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이 좋은 분위기에서 전하고 또 성령이 감동케 하셔야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후에 이 기적을 놓고 중요한 말씀을 직접 전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믿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저는 가끔 어려운 환자를 심방할 때에 빨리 회복하게 되었으면 하고 기도를 하면서 엉뚱하게 예수님은 전도하시기가 쉬웠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장님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며, 앉은뱅이도 문둥병도 다 고치시면서 전도하셨으니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저 위로의 말이나 몇 마디하고 나오려니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환자를 심방할 때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뭔가를 좀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데 빈손으로 가라 하시니 어찌합니까? 그저 가서 "많이 힘드시지만 참고 견딥시다"라는 말만 하고 오자니 정말 답답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면서 복음을 친히 전하셨는데도 믿는 자는 믿고,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묘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렇게 변변치 않는 우리 교역자들이 전하는 설교를 듣고도 믿는 자는 믿습니다. 아니 병원에서 환자를 고치지 못하고 말씀만 전해도 믿는 자는 믿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적이라는 것이 믿음을 갖게 하는 데는 별로 효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동안 예수께서 깜짝 놀랄 기적도 행하셨고 높은 권세와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전하셨지만 사람들은 "어렵도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느냐" 하고 다 물러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군중들이 다 물러가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고 계십니다(요 6: 67). 정말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이 때 그래도 다행스럽게 베드로가 수제자답게 한 마디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 베드로의 바른 응답에 예수님께서 많은 위로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살은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하며,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귀한 말씀을 하셨는데, 군중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물러갔습니다. 이 말씀은 육신을 입으신 말씀, 즉 성육신 된 말씀(incarnated word)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지만, 그러나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왜 믿지 못하고 물러갔습니까? 그것은 내 살은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는 상징적 언어가 그들에게는 통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상징적 언어란, 믿음으로만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그들에게 상징적 언어가 소통되기란 어려웠던 것입니다. 영적으로만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사건으로 경험을 하면서고 예수님을 믿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로 향하는 인생의 결정이 내려지지 아니하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러므로.. 비코우즈 오브 디스... 이전 사건을 말을 합니다. 육장 전체를 보면 이런 겁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들이 중심에 아마도 야 이제는 이스라엘의 해방의 날이로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리고서는 홀로 산으로 가십니다. 그리고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이적을 보고서가 아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닥이다. 그런 다음에 내가 생명의 떡 이로라...

그리스인의 가치관은 세상과는 다릅니다. 누가복음 15장 16절에는 탕자의 비유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을 아무리 들여다본다고 해결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서 주님은 다른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 잘못을 하고서 돌아오는 가치관을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자 아들은 그 절망의 순간에 무엇을 얻는 겁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만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과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넘지 못하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아니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절망은 그때가 하나님의 능력의 기회를 보는 순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먹이신 사실을, 믿고 생각하면 영원한 생명을 내게 주셨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이지만, 믿음 없이 생각하면 그저 식사 한 끼 얻어먹었다는 것 외에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과 사랑이 전제되어야 상징이 주는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해서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하는데, 그들의 마음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육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예수님께서는 직선적으로 심판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이 그들에게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육신적인 것만을 요구했으니까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잘 살고, 출세하고, 병이 낫고, 나라가 독립되는 육신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혁명은 안중에도 없으시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니 더 이상 따라다녀서 육신적으로 별 이익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전설까지 있습니다. 가룟 유다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능력 정도면 충분히 우리들을 잘 살게도 할 수 있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으신데, 가만히 계시니 어떻게 하든 십자가에 못 박도록 사건을 몰고 가면 그 때에는 할 수 없이 무엇인가 보여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말없이 그 십자가를 지셨으니 가룟 유다의 후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자살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그럴 법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속적이고 육적인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육신적인 것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면, 건강보다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무엇을 준다고 해서 나의 몸 일부를 내어줄 수 있습니까? 정말 몸이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몸이지만 일단 죽고 나면, 즉 영혼 없는 몸, 생명 없는 몸이 되면 아무 쓸모가 없어 땅에 묻어 버립니다. 결국 영이 문제요, 생명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영은 살리는 것이요, 육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은 실망했고 물러가게 된 것입니다.

물러간 또 하나의 이유는 소극적 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먼저 표적을 구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찾아보면 이적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다소 이해하기가 어렵고 표적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다고 해도 끝까지 알아보겠다는 자세였어야 했는데 물러갔습니다. 어렵다고 도중하차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우리들의 최후 문제입니다. 그 동안 계속해서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다 와서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가 버립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첫째는 인간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영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성은 하나님께서 시작이 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하나님안에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성취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은혜의 빛 진리의 빛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자가 영성이 충만한 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주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인 진리에 근거를 해야 합니다. 이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가 40일 100일을 금식을 했는데 그때 이런 일이 있어서 이렇게 주님이 응답을 주셔서 이것이 진리다. 그게 말씀에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근거로 모든 것이 이끌려야 한다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영성은 타인 중심적 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이기적입니다. 그것은 영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것이 영성의 본질입니다. 자기를 근거하는 삶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말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니 우리가 ..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쉬운 말로 말씀에 만족을 합니다. 내가 이해를 하지를 못합니다. 도저히 이것은 어찌해야 좋을지 나는 모릅니다. 그런데 말씀이 그러니 여기서 만족을 합니다.

처음 마태복음을 보니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또 낳고 하는 말이 계속되어 혼자말로 "많이도 낳았구나" 하며 읽었습니다. 그러나, 재미가 없어서 마태복음 1장은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도 마태복음을 읽을 때에는 항상 일장은 빼놓고 보았습니다. 후에 좀 성장해서 철이 드니, 마태복음 1장도 하나님 말씀인데 빼고 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유심히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 한 마디가 제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 1:6)라는 구절입니다. 왜 다윗의 아내가 아니고 우리야의 아내입니까? 이것은 요염한 밧세바와 다윗의 사이에서 솔로몬 왕이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본처의 아들이 아니요 첩의 아들이니 그것이 보통 일입니까? 그러나, 다윗과 밧세바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깨끗이 사하시는 순간에 그 사이에서 지혜의 왕이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어렵습니다. 상당한 연륜이 쌓이고 시간이 지나 후에라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갖다 붙이고 쪼개어서는 안 됩니다. 가만히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누군가가 비유하기를 "성경을 볼 때 성미 급한 여인이 생선 조리는 것처럼 하지 말라"고 재미있게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생선을 조릴 때, 성미 급한 사람은 익었는가 하여 자꾸 뒤적거려서 생선 외형을 다 망가뜨려 놓고 맙니다. 생선은 물을 적당히 넣고 알맞게 불을 조정하여 한쪽이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생선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됩니다. 그와 같이 성경이 어렵더라도 끼어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그대로 놓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고 또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므로, 원문을 그대로 두고 이해되는 것만 이해하면 읽어나갈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 단계에서 이해될 것이므로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어렵다고 포기해서 물러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어려운 말씀이란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어렵다는 순간에 벌써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의 결정적인 이 말이 걸림이 되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심판적인 말씀입니다. 이것을 넘어서면 구원을 얻고, 넘어서지 못하면 유감스럽게도 버려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려지고, 듣고 싶고, 그리고 말씀이 즐겁고 감사한 것이 은혜입니다. 항상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이고 온전한 은혜가 있어야만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6:6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겸손하게 만들어 놓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대개 건강하거나 성공했을 때 받지 않습니다. 낙심하고, 병들고 사업에 실패하면 받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오게 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끌어 준다는 말은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한 것은 적극적인 신앙임을 보여 주고 있는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말과 같은 고백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는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레마타 조에스 아이오니온 에케이스"로서 영어로 직역하면 "You have the word of eternal life.(당신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입니다.

즉, 베드로의 말을 풀이하면 영생의 말씀을 당신이 가지고 있으므로 내가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말씀 중심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 하나로 만족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찾는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하나로만 만족할 수 있는 영생의 말씀, 이 말씀은 곧 인격 관계를 말합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주시는 은사가 말씀입니다. 유식한 자나 인격자는 말씀을 좋아하고 교훈을 좋아하고 지혜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유치한 사람은 먹을 것만 좋아합니다. 사실 좋은 말씀 한 마디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러나, 유치한 사람은 말씀의 고귀함과 행복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즉 속죄된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화목하고 사랑의 관계인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생을 말하면서 동시에 오늘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가끔은 친구가 하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그는 미연방 항공국의 조종사 시험관입니다. 극동지역에서는 그에게 시험을 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비행을 조종하는 것이나 비슷한 게 있다. 그것은 언제나 악천후가 와도 절대로 너는 믿지를 마라 자신을 믿는 것은 죽음이다. 그것을 머리에 각인을 시켜라. 계기는 거짓을 말하지 아니한다. 그것이다. 탁월한 감각은 너에게 도움을 주지 아니한다. 더 혼란이 찾아온다. 그러니 계기를 바라보고 계기가... 그것이 지시하는 그 방향이 너의 갈 길이다.

저는 나의 감각이나, 경험이 아닌 것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베드로 그의 고백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감각의 사람이고 감정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믿음이 근거가 되어 알게 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9). 믿고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리 내가 불붙는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한다 하더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믿음으로만 알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감격할 수 있고, 그 사랑이 내게 와서 능력화 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먼 미래의 약속은 믿는 자만이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전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었고, 그리고 알았습니다. 믿었다는 말이 헬라어로 과거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영생의 말씀이 있는 줄 믿었기 때문에 주가 말씀이신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무엇입니까? 제자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뿐이어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은 바라보지 말고, 가지지도 말며 오직 주님만 따라야 하겠습니다.

말씀만으로 만족하고 말씀의 능력, 그 안에서 충만한 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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