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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마11:1~10)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리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어려움을 당한 어느 가정을 심방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집의 외아들이 어쩌다 불량소년들과 사귀더니 가출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가정은 일시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줄곧 울기만 합니다. 기도하고 위로하고 성경으로 권면도 하고 해서 심방을 마치고 나왔지만 모두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행했던 여집사님 한 분이 뜻밖에도 너무나 담담해 보이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 여집사님이 이야기합니다. "가출한 아들로 해서 울고 있는 저분들이 저는 오히려 부럽습니다. 저는 속을 썩이더라도 그런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 심정을 이해하겠습니까? 바로 얼마 전에 그 여집사님의 아들은 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무리 불량한 자식이라 해도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 언젠가라도 바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가져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기다릴 사람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기다려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밥을 먹고살지만 우리의 영은 소망을 먹고 삽니다. 소망이 없으면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미래지향적인 대망(待望), 저 앞에 있는 이상(理想), 꿈과 환상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나 같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정신은 살지 못합니다. 정신이 살지 못하면 속도 살지 못하고 인격도 살지 못하고 도덕성도 살지 못하고 육체도 병 들어버립니다. 그에 따라 사회도 망하게 됩니다. 아시는 대로 우리가 흔히 불량배라고 말하는 불량소년, 불량청년들에게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있어도 소망이 없기 때문에 인격이 파산한 것입니다.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활 태도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를테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놓고 봅시다.
어느 쪽이 더 열심히 절약을 합니까? 어느 쪽이 돈을 더 아낍니까? 가진 자들이 더 아낍니다. 가진 자들은 더 절약하면 얼마가 되고 더 모으면 얼마가 된다는 기대와 희망이 있어 수전노(守錢奴)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아끼고 저축합니다. 그러나 못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벌어서 먹어치우고 맙니다. 아껴보아야 그렇고 모아봤댔자 별것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일 년 내내 허리끈을 졸라매 보아야 별것 없다는 체념에서 그렇습니다.
소망이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하신 말씀으로는 약속된 미래가 곧 소망입니다. 저는 '희망'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의 성취가 문제입니다. 한낱 꿈과 같이, 한낱 무지개와 같이, 한낱 환상과 같이, 먼 이상과 같이 생각만 했다가 이것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노동자의 낙원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칼 마르크스의 약속은 깨끗이 거짓말로 끝났습니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다 거짓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제는 할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속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소망이라 하더라도, 그 소망이 무산된다면 결국은 허탈과 실망과 절망이 오고 마지막에는 증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약속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성취되어야 하고 실현되어야 하고 실제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타나지 않는 막연한 꿈, 헛된 희망이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무지개를 좇아가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무지개는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 보지 못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바라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것이 실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문제는 대망(待望)의 내용입니다.
또한 그 성취에 대한 바른 이해, 약속과 소망에 대한 바른 이해가 문제요, 그것에 대한 나의 자세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그 소망에 합당한 현실적인 나의 행위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둑 위드라고 하는 웅변가가 많은 사람들을 앞에 하고 희망에 대하여, 인간의 이상에 대하여 연설을 해 나가다가 문득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이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구절일까?' 하고 사람들이 궁금해서 쳐다보니까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도 아닙니다. 로마서 8장 1절도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1절도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전도서 9장 4절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 구절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찾을 필요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산 개와 죽은 사자,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백번 옳은 말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바로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고 그는 내 인격, 내 생명에 대한 지극히 이기적인 소망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유대사람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을 신학적으로는 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오늘도 옛날에도 이것은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Messiah the person' --- 메시야라고 하는 인격을 기다리는 대망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인격의 메시야에는 흥미가 없고 메시야의 나라에 대해서 대망 하는 사상입니다. 'Messianic age' --- 모두가 동등하게 잘먹고 잘살며, 전쟁도 없고 화평하고, 건강하고 오래 살고…… 이런 세대를 대망 하는 사상입니다.
그같이 영광된 복지 사회를, 메시야의 나라만을 기다리는, 말하자면 메시야의 세대를 기다리는 대망 사상인 것입니다.
이 두 사상이 집요하게 대립되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하게 보십시다. 오늘도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고, 메시야의 나라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등이니 자유니 번영이니 하는 것만을 열심히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주어진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당장에는 평등, 자유, 번영이 없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영접해야 하고, 예수가 중요하고, 메시야 그분이 내게 소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노라면 메시야 그 인격, 메시야 그분이 더 중요하고 그분과 나 개인과의 만남, 조용하지만 이 중생의 역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이 사건이야말로 메시야의 나라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요소임을 말씀합니다. 이 사건은 마치 겨자씨와도 같이, 씨뿌리는 것과도 같이,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조용한 가운데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베들레헴에 오셔서 33년 동안 역사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마는 이 조용한 역사가 오늘날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중심이 되고 있고 역사의 심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바 세례 요한에 대한 사건은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는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났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고,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래서 중요한 선지자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는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32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34절)" 라고 말합니다.
그는 메시야를 눈으로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세례를 주었고, 만졌고, 증거하고, 자기의 제자를 예수님께 양보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길을 먼저 인도하기 위해서, 앞길을 밝히기 위해서 왔던 사람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예수의 길을 위하여 먼저 온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가 증거 하는 도중에 간증하는 이야기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라고도 말했고, 비유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에 충만하였도다(요 3:29)"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 1:27)" 라고도 말합니다. 무릎꿇고 예수님의 신끈을 메고 푸는 종으로 봉사하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히 예수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입니다. '이분이 메시야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담대해서 헤롯왕의 부정한 결혼을 책망하고 외치다가 투옥 당하여 고생을 하게 됩니다. 궁전 지하실에 있는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 궁전에서는 많은 궁녀들을 비롯하여 당시 왕실의 족속들이 향락을 누립니다. 전설에 따르면 요한이 갇혀 있던 지하실과 왕궁의 향락 장소와의 사이에는 구멍이 나 있어서 떠들썩한 소리와 음식 냄새가 그대로 지하실에 스며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하실에 갇힌 것도 괴로웠지만 굶겨놓고 음식 냄새만 맡게 하는 것이 더 괴로웠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정의감에 불타는 세례 요한이니 머리 위에서 벌어지는 온갖 더러운 짓거리들을 듣고 본다는 것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에는 살로메라는 여자가 감옥에 찾아가 세례 요한을 유혹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그 감옥에서 숱한 굴욕과 고통을 겪으면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의 본문을 보면 어이없게도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하고요.
어이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성서학자 가운데에는 세례 요한을 동정해서 이렇게 말하는 분도 더러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의 마음이 흔들려서 그런 질문을 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 찾아와서 "메시야가 왔다는데 왜 이렇게 소식이 없습니까? 메시야가 온 것이 분명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하도 성화를 부리니까 "그러면 너희들이 가서 물어 보아라." 이렇게 해서 제자들을 보냈다고 해석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분명 세례 요한의 심경에 변화가 온 것 같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엄청난 질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경험하고 그렇게 예수를 기뻐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감옥에서 고생한다고 해서 심경의 변화가 그토록 쉽게 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좀 성서신학적인 이야기를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그 '다른 이'라고 하는 말의 뜻이 헬라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알로스'요 하나는 '헤테로스'입니다. 알로스라고 하는 말은 수적인 구별로 '똑같지마는 이것이 아니고 저것이다'라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헤테로스라고 하는 말은 질적인 구별, 곧 "우리가 당신을 기다렸지마는 당신이 아닌 아주 질적으로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하는 무서운 뉘앙스가 있습니다.
'다른 이'의 '다른'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왕이 태어났다'고 했을 때의 '다른'과 같은 뜻입니다. 아무튼 요한의 그 질문은 엄청난 질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가졌던 메시야관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메시야, 혁명적인 메시야, 심판적인 메시야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천지개벽이 될 줄 알았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당장에 다 물러가고, 헤롯의 왕궁이 무너지고, 그 옛날 다윗 왕 때와 같이, 솔로몬 왕국 때와 같이, 아니 그보다 더 이상적인 아름다운 메시야의 나라가, 그러한 낙원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식이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면서, 요새 젊은 사람들의 말대로 하면 '화끈하게'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세상이 바뀌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 정의의 사람 요한을 만나 옥문을 열어주고 "그동안 너 수고했다." 이럴 줄 알았던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감옥이라도 방문해줘서 "조금만 참아라" 해주시면 좋겠는데 소식이 없단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못마땅한 것입니다. 영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런 중에 그처럼 심경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그가 너무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면 마음도 약해집니다. 너무 오랫동안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심경에 변화가 오기 쉽습니다.
우리 한국이 낳은 순교자가 많습니다마는 대표적으로 주기철 목사님을 생각합니다. 일제 말년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4년 반 동안을 감옥에서 많이 고생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고생을 한 것입니다.
일제는 그에게 특별히 잠을 재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을 환하게 켜놓고는 깜빡하면 흔들어대어 계속 눈을 뜨고 있게 했습니다.
잠 못 자는 괴로움이 얼마나 견디기 힘듭니까? 잠 못 자게 하는 고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코에다 물을 들이붓는가 하면 매질은 예사이고 벌겋게 단 인두로 온몸을 지져 태웠습니다.
그렇게 4년 반을 고생하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그가 쓴 글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서 내 영혼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고생이 더 오래 가면 저는 순교하지 못합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맛봅니다. 차라리 어느 순간에 총을 쏴버리든지 목을 치든지 했으면 간단하겠지만,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줄기차게 괴롭힘을 당하다가는 마침내 허물어져서 끝가지 신앙의 정조를 지켜나가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어서 죽여 주시옵소서, 이대로 오래 가면 저는 마침내 순교하지 못합니다 ---- 이 깨끗한 인간성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세례 요한도 그 억울한 고난을 당하다가 지쳐서 그 같은 질문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데에 있습니다.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내가 빠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복지국가도 좋고 잘사는 나라도 좋고 잘사는 사회도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이 산다면 죽을 용기가 있겠습니까? 내가 불행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이 주어진다면 내 불행을 참겠습니까? 내가 죄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이 의인이 되고 내가 멸시를 당해서 다른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메시야의 나라에 들어가겠고, 모든 사람이 메시야의 영광을 누리겠지마는 세례 요한 너 한 사람은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요한 그가 이것을 참을 수 있었을까요? 세례 요한이 이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던 점 ---- 문제는 이것입니다.
또한 그는 영광의 메시야만 바라보았지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메시야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보십시다. 제자들이 와서 그런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여러분 같으면 이 말씀을 듣고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장님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귀를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이런 것 가지고 되겠습니까?
딱부러지게 혁명이 일어나야지요. 뒤집어져야지요. 화끈하게 변화가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까짓 한 사람 두 사람 병이나 고치는 것으로야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또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거두절미하고 이 소리뿐입니다. 요한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도 힘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너는 조금만 참으면 된다." 이런 보장이 빠졌어요. "너 고생 많이 한다. 네 수고는 내가 알아주마." 이런 소리 한마디쯤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장님이 눈을 뜨는 일,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눈뜬 사람의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기쁨을 세례 요한은 자기 기쁨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잘되는 것을 보고 부모들은 기뻐합니다. 나 아닌 그 누군가가 영광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마치 내 영광처럼 기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메시야 나라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조급합니다. 우리 모두가 조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있고 하나님의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의 시간과 그의 방법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썩어지는 밀알이 자라나는 것처럼 이루어집니다. 조용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불만스러워하지 마십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까지 제자들은 끈질기게 물어봅니다. 나라의 임하심이 지금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셨고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만 말씀하십니다.
때와 기한과 방법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 바 아니다, 너희는 다만 너희 할 일을 하라 ---- 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불만이 없어야 됩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길, 그 고난의 길, 조용한 길, 하나님이 정하신 그 계획과 경륜 앞에 불만이 없는 사람, 그리고 주의 주시는 역사에 실족하지 않는 사람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께서 크리스마스의 거룩한 말구유에 나심을 불만하지 마십시다.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조금의 이의도 제기하지 말 것입니다. 나 하나가 썩어지는 밀 알이 된다고 할 때에 사양하지 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저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때마다 가장 귀중하게 한번씩 생각 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을 보십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으리라" 라고 계시 받을 때에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처녀가 잉태함으로 약혼자에게 배척을 당하건, 원인 모를 임신으로 해서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건, 그 어떤 변을 당하건 개의치 않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 위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나 하나는 그대로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 바로 이 마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이요 성탄을 바로 맞는 길일 것입니다. 이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마11:1~10)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리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어려움을 당한 어느 가정을 심방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집의 외아들이 어쩌다 불량소년들과 사귀더니 가출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가정은 일시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줄곧 울기만 합니다. 기도하고 위로하고 성경으로 권면도 하고 해서 심방을 마치고 나왔지만 모두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행했던 여집사님 한 분이 뜻밖에도 너무나 담담해 보이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 여집사님이 이야기합니다. "가출한 아들로 해서 울고 있는 저분들이 저는 오히려 부럽습니다. 저는 속을 썩이더라도 그런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 심정을 이해하겠습니까? 바로 얼마 전에 그 여집사님의 아들은 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무리 불량한 자식이라 해도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 언젠가라도 바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가져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기다릴 사람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기다려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밥을 먹고살지만 우리의 영은 소망을 먹고 삽니다. 소망이 없으면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미래지향적인 대망(待望), 저 앞에 있는 이상(理想), 꿈과 환상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나 같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정신은 살지 못합니다. 정신이 살지 못하면 속도 살지 못하고 인격도 살지 못하고 도덕성도 살지 못하고 육체도 병 들어버립니다. 그에 따라 사회도 망하게 됩니다. 아시는 대로 우리가 흔히 불량배라고 말하는 불량소년, 불량청년들에게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있어도 소망이 없기 때문에 인격이 파산한 것입니다.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활 태도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를테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놓고 봅시다.
어느 쪽이 더 열심히 절약을 합니까? 어느 쪽이 돈을 더 아낍니까? 가진 자들이 더 아낍니다. 가진 자들은 더 절약하면 얼마가 되고 더 모으면 얼마가 된다는 기대와 희망이 있어 수전노(守錢奴)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아끼고 저축합니다. 그러나 못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벌어서 먹어치우고 맙니다. 아껴보아야 그렇고 모아봤댔자 별것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일 년 내내 허리끈을 졸라매 보아야 별것 없다는 체념에서 그렇습니다.
소망이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하신 말씀으로는 약속된 미래가 곧 소망입니다. 저는 '희망'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의 성취가 문제입니다. 한낱 꿈과 같이, 한낱 무지개와 같이, 한낱 환상과 같이, 먼 이상과 같이 생각만 했다가 이것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노동자의 낙원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칼 마르크스의 약속은 깨끗이 거짓말로 끝났습니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다 거짓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제는 할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속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소망이라 하더라도, 그 소망이 무산된다면 결국은 허탈과 실망과 절망이 오고 마지막에는 증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약속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성취되어야 하고 실현되어야 하고 실제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타나지 않는 막연한 꿈, 헛된 희망이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무지개를 좇아가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무지개는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 보지 못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바라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것이 실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문제는 대망(待望)의 내용입니다.
또한 그 성취에 대한 바른 이해, 약속과 소망에 대한 바른 이해가 문제요, 그것에 대한 나의 자세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그 소망에 합당한 현실적인 나의 행위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둑 위드라고 하는 웅변가가 많은 사람들을 앞에 하고 희망에 대하여, 인간의 이상에 대하여 연설을 해 나가다가 문득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이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구절일까?' 하고 사람들이 궁금해서 쳐다보니까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도 아닙니다. 로마서 8장 1절도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1절도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전도서 9장 4절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 구절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찾을 필요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산 개와 죽은 사자,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백번 옳은 말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바로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고 그는 내 인격, 내 생명에 대한 지극히 이기적인 소망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유대사람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을 신학적으로는 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오늘도 옛날에도 이것은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Messiah the person' --- 메시야라고 하는 인격을 기다리는 대망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인격의 메시야에는 흥미가 없고 메시야의 나라에 대해서 대망 하는 사상입니다. 'Messianic age' --- 모두가 동등하게 잘먹고 잘살며, 전쟁도 없고 화평하고, 건강하고 오래 살고…… 이런 세대를 대망 하는 사상입니다.
그같이 영광된 복지 사회를, 메시야의 나라만을 기다리는, 말하자면 메시야의 세대를 기다리는 대망 사상인 것입니다.
이 두 사상이 집요하게 대립되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하게 보십시다. 오늘도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고, 메시야의 나라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등이니 자유니 번영이니 하는 것만을 열심히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주어진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당장에는 평등, 자유, 번영이 없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영접해야 하고, 예수가 중요하고, 메시야 그분이 내게 소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노라면 메시야 그 인격, 메시야 그분이 더 중요하고 그분과 나 개인과의 만남, 조용하지만 이 중생의 역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이 사건이야말로 메시야의 나라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요소임을 말씀합니다. 이 사건은 마치 겨자씨와도 같이, 씨뿌리는 것과도 같이,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조용한 가운데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베들레헴에 오셔서 33년 동안 역사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마는 이 조용한 역사가 오늘날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중심이 되고 있고 역사의 심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바 세례 요한에 대한 사건은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는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났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고,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래서 중요한 선지자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는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32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34절)" 라고 말합니다.
그는 메시야를 눈으로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세례를 주었고, 만졌고, 증거하고, 자기의 제자를 예수님께 양보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길을 먼저 인도하기 위해서, 앞길을 밝히기 위해서 왔던 사람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예수의 길을 위하여 먼저 온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가 증거 하는 도중에 간증하는 이야기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라고도 말했고, 비유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에 충만하였도다(요 3:29)"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 1:27)" 라고도 말합니다. 무릎꿇고 예수님의 신끈을 메고 푸는 종으로 봉사하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히 예수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입니다. '이분이 메시야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담대해서 헤롯왕의 부정한 결혼을 책망하고 외치다가 투옥 당하여 고생을 하게 됩니다. 궁전 지하실에 있는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 궁전에서는 많은 궁녀들을 비롯하여 당시 왕실의 족속들이 향락을 누립니다. 전설에 따르면 요한이 갇혀 있던 지하실과 왕궁의 향락 장소와의 사이에는 구멍이 나 있어서 떠들썩한 소리와 음식 냄새가 그대로 지하실에 스며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하실에 갇힌 것도 괴로웠지만 굶겨놓고 음식 냄새만 맡게 하는 것이 더 괴로웠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정의감에 불타는 세례 요한이니 머리 위에서 벌어지는 온갖 더러운 짓거리들을 듣고 본다는 것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에는 살로메라는 여자가 감옥에 찾아가 세례 요한을 유혹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그 감옥에서 숱한 굴욕과 고통을 겪으면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의 본문을 보면 어이없게도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하고요.
어이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성서학자 가운데에는 세례 요한을 동정해서 이렇게 말하는 분도 더러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의 마음이 흔들려서 그런 질문을 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 찾아와서 "메시야가 왔다는데 왜 이렇게 소식이 없습니까? 메시야가 온 것이 분명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하도 성화를 부리니까 "그러면 너희들이 가서 물어 보아라." 이렇게 해서 제자들을 보냈다고 해석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분명 세례 요한의 심경에 변화가 온 것 같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엄청난 질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경험하고 그렇게 예수를 기뻐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감옥에서 고생한다고 해서 심경의 변화가 그토록 쉽게 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좀 성서신학적인 이야기를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그 '다른 이'라고 하는 말의 뜻이 헬라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알로스'요 하나는 '헤테로스'입니다. 알로스라고 하는 말은 수적인 구별로 '똑같지마는 이것이 아니고 저것이다'라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헤테로스라고 하는 말은 질적인 구별, 곧 "우리가 당신을 기다렸지마는 당신이 아닌 아주 질적으로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하는 무서운 뉘앙스가 있습니다.
'다른 이'의 '다른'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왕이 태어났다'고 했을 때의 '다른'과 같은 뜻입니다. 아무튼 요한의 그 질문은 엄청난 질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가졌던 메시야관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메시야, 혁명적인 메시야, 심판적인 메시야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천지개벽이 될 줄 알았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당장에 다 물러가고, 헤롯의 왕궁이 무너지고, 그 옛날 다윗 왕 때와 같이, 솔로몬 왕국 때와 같이, 아니 그보다 더 이상적인 아름다운 메시야의 나라가, 그러한 낙원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식이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면서, 요새 젊은 사람들의 말대로 하면 '화끈하게'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세상이 바뀌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 정의의 사람 요한을 만나 옥문을 열어주고 "그동안 너 수고했다." 이럴 줄 알았던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감옥이라도 방문해줘서 "조금만 참아라" 해주시면 좋겠는데 소식이 없단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못마땅한 것입니다. 영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런 중에 그처럼 심경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그가 너무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면 마음도 약해집니다. 너무 오랫동안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심경에 변화가 오기 쉽습니다.
우리 한국이 낳은 순교자가 많습니다마는 대표적으로 주기철 목사님을 생각합니다. 일제 말년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4년 반 동안을 감옥에서 많이 고생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고생을 한 것입니다.
일제는 그에게 특별히 잠을 재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을 환하게 켜놓고는 깜빡하면 흔들어대어 계속 눈을 뜨고 있게 했습니다.
잠 못 자는 괴로움이 얼마나 견디기 힘듭니까? 잠 못 자게 하는 고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코에다 물을 들이붓는가 하면 매질은 예사이고 벌겋게 단 인두로 온몸을 지져 태웠습니다.
그렇게 4년 반을 고생하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그가 쓴 글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서 내 영혼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고생이 더 오래 가면 저는 순교하지 못합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맛봅니다. 차라리 어느 순간에 총을 쏴버리든지 목을 치든지 했으면 간단하겠지만,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줄기차게 괴롭힘을 당하다가는 마침내 허물어져서 끝가지 신앙의 정조를 지켜나가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어서 죽여 주시옵소서, 이대로 오래 가면 저는 마침내 순교하지 못합니다 ---- 이 깨끗한 인간성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세례 요한도 그 억울한 고난을 당하다가 지쳐서 그 같은 질문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데에 있습니다.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내가 빠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복지국가도 좋고 잘사는 나라도 좋고 잘사는 사회도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이 산다면 죽을 용기가 있겠습니까? 내가 불행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이 주어진다면 내 불행을 참겠습니까? 내가 죄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이 의인이 되고 내가 멸시를 당해서 다른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메시야의 나라에 들어가겠고, 모든 사람이 메시야의 영광을 누리겠지마는 세례 요한 너 한 사람은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요한 그가 이것을 참을 수 있었을까요? 세례 요한이 이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던 점 ---- 문제는 이것입니다.
또한 그는 영광의 메시야만 바라보았지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메시야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보십시다. 제자들이 와서 그런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여러분 같으면 이 말씀을 듣고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장님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귀를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이런 것 가지고 되겠습니까?
딱부러지게 혁명이 일어나야지요. 뒤집어져야지요. 화끈하게 변화가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까짓 한 사람 두 사람 병이나 고치는 것으로야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또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거두절미하고 이 소리뿐입니다. 요한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도 힘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너는 조금만 참으면 된다." 이런 보장이 빠졌어요. "너 고생 많이 한다. 네 수고는 내가 알아주마." 이런 소리 한마디쯤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장님이 눈을 뜨는 일,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눈뜬 사람의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기쁨을 세례 요한은 자기 기쁨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잘되는 것을 보고 부모들은 기뻐합니다. 나 아닌 그 누군가가 영광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마치 내 영광처럼 기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메시야 나라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조급합니다. 우리 모두가 조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있고 하나님의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의 시간과 그의 방법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썩어지는 밀알이 자라나는 것처럼 이루어집니다. 조용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불만스러워하지 마십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까지 제자들은 끈질기게 물어봅니다. 나라의 임하심이 지금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셨고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만 말씀하십니다.
때와 기한과 방법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 바 아니다, 너희는 다만 너희 할 일을 하라 ---- 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불만이 없어야 됩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길, 그 고난의 길, 조용한 길, 하나님이 정하신 그 계획과 경륜 앞에 불만이 없는 사람, 그리고 주의 주시는 역사에 실족하지 않는 사람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께서 크리스마스의 거룩한 말구유에 나심을 불만하지 마십시다.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조금의 이의도 제기하지 말 것입니다. 나 하나가 썩어지는 밀 알이 된다고 할 때에 사양하지 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저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때마다 가장 귀중하게 한번씩 생각 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을 보십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으리라" 라고 계시 받을 때에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처녀가 잉태함으로 약혼자에게 배척을 당하건, 원인 모를 임신으로 해서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건, 그 어떤 변을 당하건 개의치 않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 위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나 하나는 그대로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 바로 이 마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이요 성탄을 바로 맞는 길일 것입니다. 이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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