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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카운트 다운(시 39:4-7) 옥한흠 목사 전도설교

by 【고동엽】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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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가을이 되었습니다. 가을에는 풍성한 결실과 더불어 우리 인생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을의 메마른 나뭇잎을 보면서 인생을 관조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서 진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자연은 있다가 없어지는 추상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실상입니다.

  계절의 가을이 찾아오듯 우리 인생에도 가을은 다가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우리 인생이 저렇게 떨어질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우는 석양을 보며 우리 인생도 저렇게 저물 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덧없기 그지없는 인생이 왜 이렇게 덧없을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가을을 생각하고 열매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다윗은 두 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 기도는 7절입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다윗이 드린 기도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강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건강을 요구하고, 물질의 풍성함을 기도하고, 지혜의 충만함을 간구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거꾸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다윗의 기도가 잘못된 듯 보이지만 다윗은 믿음의 거장입니다. 다윗이 바로 본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연약함을 알 때보다 강한 때가 없습니다. 강하다고 생각할 때보다 사실은 또 약한 때도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착각하면 자기도 남도 망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실 한없이 연약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읍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지극히 겸손한 자가 되어 살아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힘을 얻고 세상을 이기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연약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1.다윗은 자기 인생이 짧다는 데서 연약함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긴 듯 싶으나 지극히 짧은 세월입니다. 5절에 다윗은 자기의 날이 손 넓이만 해서 없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연수는 70-80년입니다. 앞에서 보면 긴 듯 싶으나 지나놓고 보면 지극히 짧은 세월입니다.

  벌써 금년도 9개월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제는 부부가 결혼한지 6년이 되는 날입니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흘러가 버린 시간들입니다. 자, 이토록 짧게 지나가 버리는 세월을 위인들이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에단이라는 철학자는 ‘인생은 한 생(一生)이라서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바이런은 ‘인생은 텅빈 거품, 만추의 낙엽, 꽃과 열매는 떨어지고 벌레먹어 낡음만 남는 비애’라고 노래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초라한 배우로 으시대며 무대 위에 나타났다가 그 후에는 영영 소식없이 사라지는 배우’라고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인생의 시간들을 이렇게 분류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부모 밑에 있는 시간이 15년, 20년은 잠으로 소일하고, 5년은 늙어 무능하여 일 못하고, 15년은 먹고 쉬고 즐기고 겨우 15년만 사람 구실을 한다. 요즘은 TV 때문에 7-8년을 빼앗긴다. 결국 인간은 5-8년만 사람 구실을 할 뿐이다.”

  솔직히 인생은 별것 아닙니다. 뜨는지 모르게 져버리는 태양입니다. 내 인생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지식도, 명예도, 권세도 인생의 무상함을 막지는 못합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을 때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는 늙기 전에 먹고 즐기자 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입니다. 둘째는 겸손함으로 어떻게 살까를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했을 때에 하나님은 비웃으셨습니다. 인생은 교만하면 안됩니다. 겸손하게 짧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알렉산더처럼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은 겸손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2.다윗은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 연약함을 배웠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풀지 못한 최대의 수수께끼입니다. 죽음을 이긴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존 메사츄세츄 대학의 밀턴 메이어는 ‘오늘의 위대한 사상’이라는 책에서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죽음에 대하여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은 역사 없습니다. 수천 년 전과 지금과 동일합니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고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가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사람들은 동일하게 죽음으로 자기의 생명을 마감합니다.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를 찾아온 죽음 앞에 무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모세는 죽음에 대하여 시편에 기록하기를 “주께서 저희가 홍수처럼 쓸어가나이다 저희는 잠깐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시 90:5)”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말이 이해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보고서의 자료를 보니까 이 지구상에 하루에 120만 명이 사망을 합니다. 매초에 30명입니다. 인천보다 큰 도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하루에 120만 명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게 홍수처럼 쓸어가 버립니다. 지금 세계 각국이 페스트 전염병 때문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인도에서는 벌써 몇백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오고 있습니다. 중국, 북한에서도 환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질병이 아무리 대단해도 하루에 120만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태풍이 아무리 거세어도 120만을 하루에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홍수처럼 그렇게 많은 인원을 쓸어가는 것입니다. 그 홍수의 물결에 언제 내가 휩쓸려갈지 모릅니다.

  이 죽음의 위력 앞에서 내게도 반드시 죽음은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약함을 배울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留心)하리로다(전 7:2)”

  초상집에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떠나겠지’ 하는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집을 떠나면서, 차를 타면서, 오늘도 무사히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누는 인사가 ‘안녕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올 때 준비된 사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소서.’ 이 기도를 거기에 더해야 합니다. 무사하기만 바라지 말고 언제까지 피할 수만 없는 죽음이라면 준비해서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버스나 택시를 타보면 기사들이 어린 사무엘이 기도하는 사진을 붙여놓고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을 써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아빠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준비된 상태로 맞이해야 합니다.

  지난 해 겨울 저는 교통사고를 만났습니다. 2M 언덕 아래로 차가 뒹굴어 버리는데 순식간입니다. 어느 형제가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물었는데 사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짧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죽었구나 할 때에 이미 사고는 난 것입니다. 조금만 더 치명적이었다면 주님 앞에 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생명보험을 들려고 회사를 찾아갔다가 보험액이 비싼 듯 싶어 유보하고 돌아오다가 사고를 만나 죽었습니다. 좀더 살 줄 알고 오다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부르실지 모릅니다. 내 죽음을 내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무사하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부르실 때 ‘준비된 사람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젊은 청년이 28살에 암에 걸렸습니다. 1년 사이에 바싹 말라 버렸습니다. 아편 주사를 맞고 중환자실에서 해골같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대학을 졸업한 사람입니다.

  의사들과 가족들은 다같이 그의 병명이 암이라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다만 몇 달을 치료하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숙였습니다. 그 청년에게 목사님이 가서 예수님을 말하면 비실비실 웃기만 했습니다. 매일같이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몸부림을 치면서도 자기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병원을 나가면 이러이러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계획을 세우고 웃고만 있는 청년 앞에서 목사님은 인생의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인생입니다. 길고 짧은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은 다같이 죽음을 소유한 인생입니다. 오늘 건강하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일지라도 죽음을 소유한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시다.

 

3.인생의 카운트 다운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연약함을 배울 때 인간은 강해지며 보람있게 살 수 있습니다. 죽음과 덧없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해 놓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영의 죽음, 육신의 죽음, 영원한 죽음이 순서적으로 옵니다. 오늘 아무리 신세대로서 발랄함을 자랑해도 이 죽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미시간 대학에 다니는 교포 학생들을 데리고 아름다운 호숫가에 가서 3박4일 동안 수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꿈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보여 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했기에 저는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혜를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머리 위에 있는 파란 나뭇가지를 하나 꺾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지를 들고 “이것이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를 물었습니다. 존재 자체에서 끊겨졌으니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 파랗게 싱싱하니까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죽음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가지가 나무에서 끊겨졌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고 살아갑니다. 육체적 죽음은 풀의 꽃과 같이 70-80년이면 마르고 시들어 버립니다. 꺾여진 인생이라는 나무는 70-80년 인생밖에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원히 사는 생명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살아있는 꺾여진 가지는 생명이 아닙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입니까?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죽음도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푸르러도 반드시 메마른 때가 옵니다. 농부가 불태우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이 육신적인 죽음 뒤에 심판을 하십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준비하고 있습니까?

  그날에 여러분은 누구를 부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스데반은 주 예수를 불렀습니다. 전도자 무디는 “아, 아름답구나. 어린 아이들이 뛰논다. 정말 저것이 천국이구나.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어. 나는 간다”고 하며 천국으로 갔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하늘나라에서 전보가 왔어. 빨리 오래. 나 간다. 우리 아름다운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했습니다.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나폴레옹은 조세핀을 불렀습니다. 조세핀이 누구입니까? 나폴레옹을 사랑하는 척하며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불렀습니다. 그 사실을 나폴레옹이 알았다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불란서의 철학자 볼테르는 불가지론자입니다. 하나님, 천국, 지옥 등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에 ‘나는 이제 지옥으로 간다’ 소리치고 죽었습니다.

  죽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 놓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구원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을 때 인간은 비로소 구원 얻습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너는 흙이므로 흙으로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됩니다. 불신자들은 단지 걱정하지 않고 안일하게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예수님을 믿고 인생이 짧은 줄 알고 순간 순간을 보람있게 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허무와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영생 얻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나를 맞을 하나님 나라의 준비를 지금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잠을 자다가 죽어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옷을 다시 못 입어도 천국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갖가지 병에 걸린 사람이 다 있습니다. 사실 건강하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주님이 함께 해주십니다. 내 마음의 공포가 사라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 직전에서도 살아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 그리스도만이 향락하던 인생을 새 삶이 되게 하고 의미 있게 살게 합니다. 그 분 안에서만 죽음의 공포가 해결됩니다. 인생의 허무가 사라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심방을 마치고 좀 피곤하여 쉬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그의 옷에서는 냄새가 나고 보자기에다 무엇을 싸 들고 왔는데 얼굴은 말랐고 행색이 남루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혹시나 걸인인가 하고 “어떻게 오셨나요?”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남루한 그 청년은 “저는 과거가 기가 막힌 사람입니다. 이제 더 살고 싶지 않아서 죽을 방도를 찾고 있는데 누가 종이 쪽지를 주었어요. 마지막으로 한번 읽어 보기나 하자 하고 무심히 보았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더 알고 싶으면 교회로 찾아오라는 말이 있어서 이왕 죽을 바에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어 교회로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보자기를 풀어 어떤 노트를 나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자기의 지난 과거를 기록한 노트였습니다. 국민학교 때 가출하여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 시장을 거점으로 소매치기를 하면서 밑바닥을 헤매며 감옥에도 수없이 드나든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자살하려고 수면제를 먹었는데 깨어보니까 감옥이었다고 합니다. 그 약의 후유증으로 팔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그는 정말 누더기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연극 같지는 않아서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청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30분 가량 예수님을 증거했을 때 그는 예수를 믿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손을 잡고 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그가 서럽게 우는지 저도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참이나 우는 그를 달래서 “오늘 내가 준 성경을 어디서든지 열심히 읽고 다시는 소매치기 노릇하지 말고 기다렸다가 사흘 후 주일이 되면 예배보러 여기 나오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돈을 얻으러 온 사람이 아니잖소?” 하고 그를 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내놓고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불현듯 그를 뒤따라 정신없이 달려갔습니다. 한참을 헤매다 그를 찾아서는 호주머니의 돈을 있는대로 털어주며 “이 돈으로 허기를 면하고 주일날 꼭 교회로 나오세요” 했더니 한사코 사양을 했습니다. 간신히 돈을 건네주고 돌아와서는 그때부터 주일을 기다렸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인생 밑바닥을 헤매던 사람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가를 보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주일날, 부목사인 저는 신자들을 안내하며 그를 기다렸는데 예배시간 5분 전까지도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속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에 그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어거정 어거정 나타났습니다. 어떻게나 반가운지요.

  싱긋이 웃으며 인사하는 그를 자세히 보니 얼굴도 씻고 매무새도 단정히 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배를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3주일 동안을 꼬박꼬박 교회로 찾아 나오는 것을 보고 그때 교회에 알려서 구제비를 타다가 생계에 보태 쓰라고 쥐어 주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장사를 하며 지방을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하루는 그가 저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다음 주간에는 제가 십년이 넘도록 찾아 뵙지 못한 부모님을 찾아가려고 해요. 그래서 제 잘못을 빌고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 새 생활을 시작하겠어요!”

  어떻습니까? 이렇게 예수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한 영혼을 죽음 직전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던 사람도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그의 인생이 180°회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남은 인생을 순간 순간 주님의 뜻에 맡기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죽으나 사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예수를 믿지 않는 형제 자매들이여! 더 이상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맙시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인생을 속고 살지 맙시다. 생명의 주인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죄 용서함을 받고 영원히 사는 영생을 얻으십시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주님 앞에 겸손히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지 못하고 세상의 낙에 취해서 한발은 세상에 걸치고 한발은 예수님에 걸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세상과의 발을 떼십시오. 손 넓이 만한 인생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한 달에 몇십 만원 혹은 몇 백만은 벌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남자 여자 사람 얻어 살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삼성, 현대, 시청을 위해서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인생은 주님을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삶을 살아가지 않을 때 심판 받고 영원한 죽음이 예비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1초에 30명, 하루에 120만 명의 인생의 생명을 거두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생명도 하나, 둘, 분초를 헤아리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단지 무사하게 하루를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떼쓰지 마십시오.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 더 사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받고 살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세상에 내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준비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셔서 가슴 벅찬 천국의 사람을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소유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전도카페
글쓴이 : 박성도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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