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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대화 중 중요한 골자만 기록한 것입니다. 전부를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전달되어야 할 구원의 진리는 충분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 이 여인은 복음에 대한 진리를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책망치 않으셨습니다. 이 여인은 미심쩍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신앙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왔어도 괜찮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얻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얻어야 할 것들입니다. 여인은 생수를 예수님에게 구했고 생수되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났습니다.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인생의 갈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벌컥 벌컥 물을 마셔 보지만 그 물은 바닷물과 같아서 갈증만 더해 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여러분에게서 ‘주여 이 생수를 나에게도 주옵소서!’ 하는 기도가 터져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생수되신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지 살펴 봅시다.
1.이 여인은 죄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3-4)”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로 통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십니다. 여인이 육시 정오에 물을 길러 나오자 “물을 달라” 하십니다. 여인은 이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데 물까지 달라는 것이 의아해서 되물었습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렇게 대화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네 남편을 데리고 와라” 이해가 안되는 요구입니다. 왜 이 명령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여인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골방에 있어도 아시고,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아십니다. 창공에 있어도, 은밀한 곳에서 숨어서 일해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부르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 여인은 결혼에 실패한 여인입니다. 처음 남편과 어떤 이유로 헤어졌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다섯 번 결혼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지금은 남편 아닌 사람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900년 전 사회는 살벌한 사회였습니다. 여자가 가정생활에 실패하고 눈밖에 나면 막바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버림받은 여자가 찾아가는 길이 어디겠습니까? 여인은 살기 위하여 무서운 고통도 참아야 했습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도 견뎌야 했습니다. 결국 갈 데까지 가서 이제는 인생살이의 폐인이 되어 종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다섯 남편을 거친 더러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죄를 짓는 여성이 되었습니다. 양심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여인을 찔렀습니다. 눈동자에는 우수가 깃들였습니다. 웃음 뒤에는 슬픔이 깔려 있었습니다. 여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손가락질 할 뿐 누구도 동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와 같은 여인을 만난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사람을 만날 때 사람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긍휼히 여기고 동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날카롭게 죄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탄한 삶을 살면서 뚜렷하게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자기 결백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교만이 눈을 가립니다. 남을 내려다 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도 자신은 관계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볼 때마다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무조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면 결국은 그 그물에 자기도 걸리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식이 마음을 눌렀습니다. 시원한 생수를 갖지 못했습니다.
2.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죄로 인한 자기 고민과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네 남편을 데려 와라” 예수님이 명령하시자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아마 빨리 그 대답이 안 나왔을 것입니다. 깜짝 놀라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여인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습니다.
피할 수 없는 예수님의 눈길 앞에 고개를 숙이고 겨우 말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대답을 예수님이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남편이 없다는 말을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자기를 시인하고 자기 죄를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 앞에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죄없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말해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할 때 그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답변을 들으신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여인의 죄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과거생활을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도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죄를 지었느냐 시시콜콜하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부끄러워 하고 두려워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죄인인 것만 시인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죄를 죄로 고백할 때 그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죄의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죄 용서를 선언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네 남편을 데려와라 하실 수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홀로 죽으셨기에 용서하실 수 있는 권리가 그에게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기에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 53:6)”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제맘대로 살았습니다. 내 욕심대로 목자없이 살았습니다. 내가 보고 옳다 생각하면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가족 식구대로 제맘대로 살았습니다. 그 모든 죄를 주님이 씻기셨습니다.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모든 죄를 십자가로 용서하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우리 중에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나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이 나 때문에 일어난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정치적 상황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나의 죄 때문이라고 시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만큼 큰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우리가 지옥에서 받을 형벌을 그가 받으셨기에 “남편을 데려와라”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죄책감이 있으면 하나 하나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용서하십니까? 완벽하게 용서하십니까? 부모와 자녀라는 인간관계 속에서는 완전한 용서가 용납됩니다. 피가 완전한 속죄를 이루어 주십니다. 이사야 43:25에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죄 용서를 위해서는 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되었을까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죄가 앗아간 생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생명의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의인의 피에서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 의로운 피를 흘릴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의로운 피가 권능이 있어서 어떠한 죄도 용서하십니다. 완전히 용서하십니다. 어떤 죄인도 포용하십니다. 용서한 것에 대하여는 결코 재론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3.용서함 받은 사실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죄씻음을 받으면 마귀는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합니다. 괴로움과 죄책감이 찾아오는 것은 마귀시험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날아갈 듯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대화를 통해 용서받은 희열이 넘쳤습니다. 28절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요 4:28)”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을 피하여 정오에 물길러 나왔던 여인이 사람들 사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용서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짐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의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와보라 외쳤습니다. 완전용서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물도 긷지 않았습니다.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예수님에게 생수를 구했지만 그녀가 원한 생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메시야를 만나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변화를 숨기지 못했습니다. 변화된 모습은 자녀가 알고 남편이 압니다. 못 숨깁니다. 얼굴 표정이 달라집니다. 말이 다릅니다. 놀라운 생명입니다. 생수의 놀라웁니다. 이 생명의 기쁨이 여러분에게도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매일 같이 넘쳐나는 기쁨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소유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죄가 많아도 좋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인간의 문제는 죄인으로서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죄를 더하는 결과입니다. 죄를 죄로 고백하고 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때 그 죄를 주님은 당신의 보혈로 씻기시고 깨끗히 용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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