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가기 |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성탄절 전도설교)
마1:18-21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핵심이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은
곧 성경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막연한 것이 되어선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영혼이 달려 있고, 영생이 달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대상인 예수를 바로 알 때
우리의 삶속에 참된 구원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고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생각하며
은혜받기 원합니다.
본문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출생을 조사합니다.
부모가 누구이고 어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심지어 혈액형이 무엇인지도 알아봅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출생신분이란 사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출생신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기 쉽게......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론 이해되지 않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하기로 약속을 한 후
서로 동거하기 전에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결혼 전에 임신을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지만 결혼 전이라도 남녀가 서로 동거하면 임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선 남자를 알지 못하는
즉 남자와 동거한 적이 없는 여자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인데
그것도 성령을 통해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말은 예수님은 사람의 실수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말입니다.
보통 아이의 출생은 어떠한 과정을 거칩니까?
남녀가 서로 동거함으로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서로 결합하여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아이는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진 부모의 성격과 기질을 갖고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인간의 유전자,
즉 죄성을 갖고 태어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완전한 하나님이요,완전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완전한 인간이 되실수 있는 것은 죄성을 갖지 않은 것에서 확인 할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부터 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에서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을 구원할 구세주로서의 조건을 완전히 갖춘 참 하나님, 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도, 부처도 그 어떤 성인도 죄성을 갖고 태어나 죄 때문에 고민하고 고뇌하다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참 하나님이자 죄성이 없는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있으니
그분만이 인류의 구원자가 되실수 있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시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말씀속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도할때 죄에서 구원받고 회개하라는 말은 잘 하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너무 원색적이고 사람들의 귀를 거슬리는 말이기 때문에
다른 표현으로 접근 합니다.
전도할때 하는 말 중에 "교회 다니십시요" 라는 말은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입니다
또한 "교회나가야 겠다" 는 말은 "내가 예수 믿어야 겠다"라는 말과 동일한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예수 믿겠다" 라는 말은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믿으면 가장 먼저 경험하는 것이
바로 "내가 죄인이구나"하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관심도 없고 믿을 생각도 없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안 믿겠다” 는 말은 다른 말로 “나는 죄가 없다” “예수가 필요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역사상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불신자가의 마음이 예수와 만나는 스파크의 지점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통곡과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고,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다 그랬으리라 믿습니다.
통곡과 눈물의 의미를 아십니까?
왜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며 눈물이 납니까?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제가 예수 믿기 전에 교회가면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우는 모습을 가끔 봤습니다.
그땐 처량해 보이고 극성맞다는 생각도 들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 받고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나니까
기도하면서 우는 사람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세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걸 깨닫고 회개할 때 비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우리 마음에서 역설적인 감동을 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했는데 그가 나를 사랑할 때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 사랑이 느껴질때 그 사랑앞에 굴복하지 않을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향해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조용히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기 전에 형편없는 삶을 산 사람이라도
이 사랑을 경험하면 다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이 없으며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런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옛날에는 참 마음이 부드럽고 사랑이 많았는데
세상 살다보니 마음이 굳어지고 이렇데 강팍해졌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다보니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나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마음이 딱딱해지고 아무에게나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다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상처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상처를 치료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세상에서 경험한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수 없는 완전한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을 오해하지 마세요!
그분의 사랑이 느껴질 때 그 사랑을 받아들이세요!
그분을 거절하지 마십시요.
그 사랑이 여러분을 치료하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성탄을 기념하는 오늘
나를 죄와 고통과 저주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고 말없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주신 그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넘쳐나길 축복합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회복해야 할 전도 설교 - 이동원 (0) | 2022.03.21 |
---|---|
사영리를 통한 전도설교 /옥한흠 목사 (요 3:16) (0) | 2022.03.21 |
스데반 집사의 전도 설교(행7장1-53) (0) | 2022.03.21 |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눅 14:15-24) (0) | 2022.03.21 |
십자가 은혜로 살자(사49:8) (0) | 2022.03.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