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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리를 통한 전도설교 /옥한흠 목사 (요 3:16)

by 【고동엽】 202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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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리를 통한 전도설교
옥한흠 목사 (요 3:16)

지난 해 위도에서 서해 훼리호가 침몰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었습니다. 그 보도를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만약에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
저들이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낚시질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 주일을 휴일로 생각하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낚시질을 갔다가 참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 날이 자신들에게 최후의 날이 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다음 세계가 있고 그 다음에는 신앙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영영 상실해 버렸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하나님 앞으로 갔을 때 하나님도 난처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죽으면 난들 어쩌란 말이냐!” 하나님도 속수무책이셨을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 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흙으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만물 가운데 짧은 한 생을 살다가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가르치라고 심부름꾼으로 저를 세우셨습니다.
제가 이 시간 무슨 말씀을 드려도 그런 입장에서 제가 섰다는 것을 여러분이 인정하셔야 합니다. 또한 저를 통해 여러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헤아리는 태도로 들으셔야 합니다.
그 전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못 들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영원한 운명을 이 말씀은 결정합니다.

이런 가정을 좀 해 봅시다. 위도에 놀러온 관광객이 떠나려는 때에 숙박집 아주머니가 손님들을 배웅하러 부두까지 따라 나왔습니다. 아주머니는 시집와서 지금까지 섬에서 살았습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다 보니 어느 정도는 일기에 대하여 예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아침에 보니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았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더 심해질 것 같았습니다. 아주머니는 행여 손님들이 ‘돈 벌기 위해 더 잡아 두려는구나’ 생각하면 어쩌나 염려가 되었지만 손님들을 위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위험할 것 같으니 하루 더 묵고 내일 가세요.”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아주머니가 돈 벌기 위해서 그런다, 괜찮을 것이다’ 하면서 그냥 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니 너무 진지합니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군요. 제가 아주머니 말대로 내일 떠나겠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시한 사람들은 죽었고 귀를 기울여 들은 사람은 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결정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오늘 제가 그 아주머니와 똑같은 심정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영원히 죽고 사는 문제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경만 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지 말기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때 눈이 마주치고 마음이 통하면 고개도 끄떡여 보세요. 하나님과 눈이 마주치고 마음이 통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히 사는 축복을 받을 것에 대한 사인입니다. 자, 이제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들어오실 때 4영리라는 작은 소책자를 받으셨습니다. 이 작은 책자를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4영리라는 말은 구원받는 네 가지 영적 원리를 정리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 원리들이 깨달아지는 축복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제 1 원리를 먼저 보겠습니다.

자연계에 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제 1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라는 말 대신에 ‘나’라는 말을 대신 넣어서 읽어 봅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오셨습니다. 이 사랑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여러분 인생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 불만족할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잘못되는 것의 대부분이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인생살이에서 고독을 느끼고 삶의 허무를 느끼고 방황할 수 없는 이유도 사랑의 부재에 원인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찾아 헤매입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사람을 찾아 결혼을 합니다. 이 사람이다 싶어 결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끔은 사랑에 금이 가고 권태도 느낍니다. 실망을 느낍니다. 설사 그렇게 깊은 단계가지 가지는 않더라도 이상스럽게 찾아오는 내 마음의 공백은 채울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남편도 그 공백을 채워주지를 못합니다. 왜 사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나의 아내, 남편, 부모, 자식도 채워줄 수 없었던 마음의 공백을 채워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그 분이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 사랑이 저를 울리고 지금도 가슴 뭉클하게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다만 그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사실만을 확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는 잘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랑은 모르고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몰라도 받기만 하면 됩니다. 받으면 그 사랑이 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인간은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고 가지고 살아가며 끝내 그 운명에 이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멸망을 거두시고 영생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10:10)”
예수 그리스도, 그만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맨 밑에 나와 있는 말씀을 봅시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

제 2 원리를 봅시다.

[사람은 죄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도 ‘사람’이라는 말을 빼고 ‘나’라는 말로 읽어봅시다. [나는 죄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모든 사람 중에는 저와 여러분들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사람답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답게 태어나지 못했고 사람답게 살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교제하면서 살아가야할 인간이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고, 또 그렇게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자연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다른 교제의 대상을 찾아 방황하는 것입니다.
집 안에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애완견을 키우는지 아십니까? 외로워서 그렇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아파트에 살며 애완견 여러 마리를 키우는 부인에게 예수님 믿고 교회를 나오시라고 전도를 했더니 개 때문에 못나간다고 하더랍니다.
개들이 사납게 짖자 아파트 주민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결국 그 부인은 개를 포기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는 않고 다른 것들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70이 넘은 목사님이 재혼하시는 걸 본 일이 있습니다. ‘얼마나 더 사신다고 결혼인가? 주책스럽게 70이 넘어 무슨 결혼인가? 여기가 미국도 아닌데 ... ’ 생각을 했는데 그 목사님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외로우면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친구로 삼아 교제하시려고 만든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자기도 망했고 후손된 우리도 영원히 망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생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방황하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증거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합니다. 소극적으로는 무관심합니다. 불신자는 어떤 형태로든 이 두 가지에 속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태어나 있는 것 자체가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결렬되어 내가 하나님처럼 살았습니다. 그 결과가 영원한 지옥이지만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것 자체가 내가 받게 된 죽음입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죽음에는 세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①첫째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그가 어떤 신분과 처지에 있든지 관계없이 죽은 것입니다. 눈에 어떻게 보여도 죽은 것입니다.
②둘째는 육신적인 죽음입니다. 줄기에서 잘려진 꽃과 같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영적인 죽음이라면 그 꽃이 시들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 육신적인 죽음입니다. 인간은 70-80년 인생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꽃이 시드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인생이 시들어 죽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랫만에 사람을 만나면 어린 아이가 부쩍 커버린 사실에 놀랍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늙고 시들어 버린 것입니다. 죽음을 향하여 그만큼 다가선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가야 합니다. 거역할 수 없고 막을 길이 없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보내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육신이 왜 죽을까요?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증거입니다.
③셋째는 영원한 멸망의 죽음이 있습니다. 화병에 꽂힌 꽃이 시들면 모아다가 아궁이에 불태우게 됩니다. 육신의 생명이 있을 때 생명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이내 죽어버린 영혼들을 마귀가 와서 쓸어다 집어넣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끝장입니다. 아무도 그 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테는 그가 쓴 ‘신곡’에서 지옥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상태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들이 원줄기에서 끊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마지막 아궁이에 던져져 불태워지는 사실도 깨닫지 못합니다. 단지 며칠 피었다 지는 꽃과 같이 육신의 삶만을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만큼 무식합니다. 태어날 때 죽은 몸이요, 육신이 죽고 영원히 죽어 멸망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6:23)”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에 빠진 인간의 멀어진 간격을 사람들은 선행, 철학, 종교 등의 방법으로 좁혀보려고 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이 간격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 제 3원리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 3 원리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나)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은(나는) 그를 통하여 당신(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도둑은 자기 죄를 스스로 벗지 못합니다. 공범은 남의 죄를 짊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죄인 아닌 자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자기의 죄, 남의 죄 어느 것도 담당할 수 없습니다.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로 안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가 기독교 외에 없습니다. 죄는 죄없는 분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내가 미워한 대상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할 때 당사자와 그 문제가 해결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죄 용서를 위해, 구원을 위해 제시한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5:8)”
이 사실을 예화를 통해서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버지와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온유했고 성품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난폭했습니다. 형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동생은 집을 나가 제맘대로 살았습니다.
어느날 늦은 밤이었습니다. 모두 깊이 잠든 형의 집 대문을 누군가 심하게 두드렸습니다. 나가보니 동생이었습니다. 반갑게 맞이해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불을 켰습니다. 불빛 아래서 동생을 보니 그는 온 몸이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다른 사람과 심하게 싸우다 사람을 죽인 뒤 도망쳐 온 것입니다.
그 때 밖에서 경찰이 문을 열라고 소리쳤습니다. 형은 동생을 살릴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윽고 형은 말했습니다. “빨리 네 옷을 모두 벗어라!” 동생이 옷을 모두 벗자 피묻은 옷을 형이 입으며 말했습니다. “내 옷을 네가 입어라! 그리고 너는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숨어 있거라”
드디어 경찰이 들어와 형을 잡아갔습니다. 재판이 열려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형은 간수에게 편지를 주며 동생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형이 자신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형집행이 끝난 뒤였습니다. 울며 돌아서는데 간수가 형의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너 대신 내가 죽는다. 너의 피묻은 옷을 내가 입고 네 죄를 대신하여 내가 죽는다. 너는 내 깨끗한 옷을 입었으니 이제는 죄 짓지 말고 바르게 살아가거라.”
동생은 형의 옷을 입고 그 형이 죽지 않았으면 살았을 거룩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 형의 역할을 우리 예수님이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고린도전서15:3-6)”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부활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성인(聖人)은 되셨을지 모르나 나를 구원한 구원자는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세 가지 원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 4 원리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1:12)”
믿는다는 것은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지금 이 시간 이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이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2:8-9)”
지금 곧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3:20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전도자의 두드림은 예수님의 두드림입니다. 그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당신에게 오셔서 제 입술을 통해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9페이지 아래에 나와 있는 두 개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번째 그림을 보면 보좌에 내가 앉아 있고 사방으로 점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인생이 만사가 요지경입니다. 모든 일이 흩어지고 틀어집니다. 제멋대로입니다.
오늘날은 여자 운전자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운전면허를 따고 아내를 연습시킬 때는 아무리 다정한 부부라도 많이 다툰다고 합니다. 남편이 보니 불안하기 짝이 없으니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또 아내는 남편이 잔소리를 하니 더 불안하게 운전합니다.
불안한 사람에게 핸들을 맡기면 불안합니다. 인생은 미래를 모르고 잠시 후의 일도 알지 못하니 불안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내 맘대로 살아가니 장님이 핸들을 잡은 격입니다. 그러니 제멋대로요, 만사가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른쪽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좌에 십자가가 놓여있고 그 앞에 나는 겸손히 내려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 인생을 예수님이 책임지고 이끄십니다.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5:11-13)”
구원의 주님이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전도카페
글쓴이 : 박성도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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