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유대인들의 변론! (롬 3:1-8)
바울 사도는 2장에서 유대인들의 위선에 대해서 비난을 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내세우는 선민의식과 율법의 자랑, 그리고 할례의식으로서 이방인들과 차별의식을 갖고 있는 민족인데, 행하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 그들이 '이방인들 보다 무엇이 월등하고 우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고,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을, 좋은 전통을 물려받았다 할지라도 그 법을 지키지 않으면 결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마음속에 해서 행하는 자가 이면적 유대인이요 참 유대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표면적 유대인은 참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인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부의 가죽을 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참 유대인이 되는 길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참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참 유대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의,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가진 사람만이 참 유대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할례 의식도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든든히 붙드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참 유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당시 표면적인 유대인들을 몹시도 언짢게 만들었습니다. 저들의 감정이 대단히 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많은 공격을 받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의 반발(문)등을 대화체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할/
①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인가?(1)
사실 그동안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선민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징표로 알았고, 또 그것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울의 책망을 듣고 분이 일어났습니다.
본 절의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이 선민이라고 우월감을 가지고 교만했는데, '그런 전통적인 것이, 그러니까 형식적인 할례가 너희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런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반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 유대인들이 도대체 이방인보다도 나은 것이 뭐가 있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이러한 것들을 따지는 것입니다.
②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민족입니다(2).
여기 첫째는 차례로 말하는 첫째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2절은 '1절에서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의 질문에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구약 성경이요, 계시, 언약, 율법, 제사제도가 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바울이 지금 논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 그 언약대로 오신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가장 크신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제일 먼저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복중에 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오리라고 예언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유대 땅,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성경의 예언대로 오셨건만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주신 메시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배척을 했고 원수 노릇을 자행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오신 예수를 믿지 않고 착각 속에 할례의식이니 선민이니 하는 우월감에 빠져 있는 동족을 보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은 그 말씀대로 믿고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지킬 뿐 아니라 만민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 '맡았음이니라'는 농장의 모판과 비유되는 말입니다. 모판에서 모를 길러서 모든 논에 이양을 합니다. 농사꾼이 처음에는 모판에만 종자를 심어 거름을 주고 정성껏 기릅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모판의 모를 뽑아 논에 옮겨 심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맡겼다는 것은 모판으로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양하라는 의무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회피한 채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진 무엇인가 나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면 개인도, 단체도, 국가도 망합니다. 세금을 내야 국가 살림을 합니다. 고치고 건설할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나와서 국가를 지켜야 국민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맹의 눈을 떠야 합니다. 즉 배워야 앞으로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는 국민이 해야 할 의무가 있고, 가정이나, 직장이나, 단체에도 해야 할 의무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무를 제쳐놓고 이익과 권리만을 주장한다면 한 길, 천 길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했으며 그들의 율법 그 자체가 구원인 것으로 착각했으며 이방인들보다 무엇인가 나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시장 어귀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며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행위를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위선에 대하여 그들의 행위가 곧 불의요, 거짓이며, 불신과 교만을 들어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바리새인이 옳다면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만들겠느냐?' '하나님이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주심이 거짓된 것이냐?'고 맹렬하게 꾸짖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사람은 거짓되나 하나님은 진실하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누구입니까? 롬9:8절에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을 받은 유대인들이 그 종교적 우월감과 민족적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왔으나 그를 배역함으로 오늘날 그 메시야 예수를 받아들인 교회가 바로 신령한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요1:9-11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절에 보면, 그를 영접하는 자가 있었으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13절에서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유대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주장하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할/
③유대인들의 반발은 무엇인가?(3).
유대인들이 지금 바울에게 하고 있는 반발은 '유대인 가운데 많은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다 버림을 받는다고 했는데, 너의 말대로 믿지 아니했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버림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인들에게 약속해주신 그 많은 것들이 다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그 약속을 다 폐기해 버리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냐? 왜 너는 하나님을 그와 같이 변덕스러운 분으로 만드느냐?' 지금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미쁘심, 즉 성실하심과 거짓 없으심이 폐하고 말겠느냐?'는 말입니다. /아멘!/
④'그럴 수 없다'고 강조한 바울의 설명은?(4)
3절의 물음에 더 큰 의미의 대답은 '유대인들이 나은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인데, 그 말씀이 성취되어 예수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믿지 않는다고 예수께서 구주 되심이 취소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바울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 시5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난 후 선지자 나단에게 죄를 지적 당하고 크게 회개하고 통회하면서 지은 시인데, 그는 회개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죄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의가 얼마나 크고 태산 같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범죄자 다윗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약속대로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선물인 예수를 보내주셨는데, 그들은 끝까지 믿지 않고 대적했으며 이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단 말인가? 입이 있거든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의롭다 함을 얻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감히 판단과 참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되었다, 거짓이다, 가장이다'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머리로써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한다면 하나님의 본체를 대적하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할/
⑤이어지는 유대인들이 반문이 무엇인가?(5)
'우리가 믿지 아니해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 계획,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그 일이 이루어졌다면 무슨 말할 것이 있겠느냐? 우리가 벌받아야 하느냐? 오히려 우리가 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죽어야 할 몸이 아니냐? 그래야 너희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장본인이 누구냐? 내가 아니냐?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너희들이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희들은 나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 내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억지 논리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그와 같은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파는 반역죄를 범함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게 되었고, 또 그 죽음이 곧 인류의 구속을 이루는 것이 되었으니 이런 의미에서 가롯 유다는 반역자, 배신자라고 말 할 것이 아니라 공로자로써 상급을 주어야 할 게 아니냐는 비뚤어진 질문입니다. /할/
⑥바울은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신 분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6-7).
하나님은 결코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세상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을 원하십니다. 사30:18절에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아멘!/
6절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불의를 조작해서 당신의 의를 드러내고, 진실된 의가 결핍된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이 세상을 공정하게 심판 할 심판주가 될 수 있겠느냐?'는 바울의 반문식 대답입니다.
7절에서 '나'는 사도 바울이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주장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를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팔아먹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종살이를 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이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을 하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이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셉아, 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은 우리 덕분이다. 우리가 너를 애굽에 팔지 아니했다면 네가 어떻게 총리대신이 될 수가 있었겠느냐? 네가 총리대신이 된 것은 다 우리가 너를 애굽에 팔았기 때문인 줄 알아라. 그러니 너는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악까지라도 바꾸어서 구원 계획을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지, 내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죄 값을 반은 것처럼, 또 요셉의 형들도 자기 동생을 종으로 팔아먹은 죄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아멘!/
⑦괴변으로 일관하는 유대인들(8).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8절 괄호 속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바울을 중상하고 모략했습니다.
'바울은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조장하는 사람'이라고 비방을 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몹시 강조했고,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대인들 사이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도 폐하고, 선행도 부정하고, 도덕도 부인한다는 잘못된 오해를 사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의 마지막 결론은 8절 끝 에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아니하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면서 죄를 정당화시키는 유대인들은 진노의 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할/
우리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고,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자기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곧 사랑의 면과 의의 면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과 저주가 있습니다. 복음에는 구원과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결과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성격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과 행위의 동기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인간의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사람은 목적이 선하면 그 수단이 악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그 수단도 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목적이면 그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자꾸만 악을 행해야 한다'는 궤변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울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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