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선교를 위한 연대와 협력 막10:45. 사49:6
◑도입
▶우선 제 고백의 말을 간단히 하면,
제가 지난 십 수년 동안, 아마 거의 매일 하루에 수십 번, 혹은 백 여번씩
중얼거리는 고백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제 자신을 보면, 죄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거기에다 위선과 독선이 가득한 죄인입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두 번째는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제가 11살 아이 때부터, 고향을 떠나서, 부모님을 떠나서, 단신으로 남한에 내려온 저를,
하나님께서 그저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셔서
목회의 길로, 선교의 길로, 섬김의 길로
제가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아직도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저를, 작은 교회 또는 선교지 곳곳으로 다니게 하시면서,
주님의 심부름을 하게 하시는 것,
그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놀랍고, 너무 크고, 너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고백은, 저는 자격이 없지만,
제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할 자격은 없지만
나도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처럼,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제물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되는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런 세 가지 고백의 기도를, 매일 밤에 자는 중에도,
자다가 깰 때도, 계속 그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제 삶을, 너무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가 11살 때,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주일 성수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목사님이셨던 아버지, 의사이셨던 어머니
다 북한에 계시고, 제 혼자 38선을 넘어서 왔는데,
저만큼 한국과 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저만큼 목회를 마음껏 하고, 저만큼 선교의 일을 마음껏 하고,
구제와 봉사의 일을 많이 하고,
아시아의 교회들과 협력해서 일을 많이 하면서
제가 자신을 돌아보니 ‘어떻게 이런 축복을 주셨습니까?’ 하며 놀랍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던 일들이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사실 11년 동안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역사신학>만 전공했습니다. ‘어거스틴과 역사신학’
그런데 마지막 1년을 남겨두고, 조동진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김목사, 후암교회에 와서 교육목사 하면 안 되겠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목사님,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네, 가겠습니다.’
‘그럼 1년 동안 풀러신학교에 가서, 선교학을 연구하고 오면 좋겠네.’
‘네, 그러겠습니다.’
그래서 역사신학을 오래 연구하던 제가
<선교학>을 추가해서 연구하게 되었는데요,
돌이켜보니, 얼마나 축복된 일이었는지요.
그 후 귀국해서, 조동진 목사님과 함께
거의 모든 선교사역, 선교집회를 참여하면서,
제 눈이 넓어지고,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 전에 저는, 그저 ‘구원, 축복’ 그랬었는데,
창12장에 보면, ‘너를 통해서 천하만민이, 모든 족속이
사49:6절에 ‘네가 이방의 빛이 된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리라’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내가 이들을 아끼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이런 구절들을 묵상하면서
제가 ‘아, 하나님의 마음은, 세계를 향하시는구나.
성자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도, 선교의 하나님이시구나!’ 그걸 깨닫고
제가 선교의 길로 이제껏 걸어오게 하신 하나님은 은혜가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번 선교대회의 주제가 <연대와 협력, 파트너쉽>입니다.
제가 평소에 너무 귀중하게 생각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해와 협력과 연대입니다.
저는 전에는, 그걸 몰랐습니다.
전에 제가 부족하지만
<Partnership Mission Fellowship 동반자 선교 협의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한국세계선교협의회>를 창립할 때, 심부름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한인선교대회>를 할 때도, 심부름을 했습니다. *동참해서 섬겼습니다.
시카고에서 <파트너쉽 미션 컨퍼런스>를 할 때, 제가 주제강연을 했습니다.
일본에 가서도 그랬습니다.
이기적이었고, 배타적이었던 나를, 모두를 품을 수 있게 해 주셨고
모두의 연합과 협력을 위해서, 심부름을 는 것이
제 사명임을 깨달았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연대와 협력만큼 꼭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연대와 협력을 이룰 수 있을까요?
제가 5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시는 그 눈과 마음으로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민족주의 아닙니다. 국가주의 아닙니다.
대한민국도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미국도 아닙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세계를 어떻게 보실까?’입니다.
창12장에서, ‘너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사야에게 ‘내가 남은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은, 작은 일이다. 시시한 일이다.
내가 너를 땅끝까지 이르는, 이방의 빛을 삼겠다. 이게 큰 일이다.' 사49:6
이렇게 하나님은, 온 세상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내가 열정이 많고, 은혜를 많이 받고, 막 뜨겁고 그래도
일본사람 미워하고, 중국사람 미워하고, 무슬림을 저주하면
선교의 협력과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 북한과 중국과 무슬림을 미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북, 반공, 반무슬림, 반타종교인 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죠
하나님은 도사(무속인)이던 길선주를 부르셨고,
깡패이었던 이기풍을 부르셨고,
불교와 선도의 지도자를 부르시고,
살인자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하나님은 이렇게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는구나’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을 존경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고,
북한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무슬림을 불쌍히 여기면서, 무슬림 나라에 가서 학교도 세워주고,
먹을 것도 공급해 주면서, 그들을 다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2. 사람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변화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맨날 병자들과, 죄인들과 만나셨습니다.
로마 백부장을 보고도,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 삭게오, 심지어 간음한 여인과 창기와도 만나셨고,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도 만나셨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예수님께 깊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못 박는 로마군병들을 향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하실 수 있었을까요?
평생 죄만 짓고 살았던 한 편 강도를 보고도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
어떻게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셨을까요?
제가 세계 곳곳을 많이 다녔는데, 알마타에서 사역하던 신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가 현지인들을 너무 사랑하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배신자들도 원망하지 않고, 그저 산에 가서 울고, 화장실에 가서 혼자 울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고,
자기를 배신하고 떠났던 고려인 정 모씨가,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왔고,
그를 따라갔던 50명의 교인들도, 돌아왔을 때
신선교사는 ‘제게 사과할 거 없습니다.’
현지인들이 일을 하면서도, 그저 술만 먹고 장난하고 그래서
두 달이면 끝날 공사를, 일곱 달만에 마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선교사는, 그들을 한 번도 욕하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인부들로부터 ‘우리가 평생을 일을 해 왔지만, 욕 먹지 않고 일한 적은 이번 밖에 없다.’
이런 평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마음을 품고, 현지인들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리로부터 감사장도 받았다고 합니다.
▶3. 동역자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변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목회자들끼리도 이것이 절실합니다.
필리핀에 가면, 현지인 동역자들끼리 서로 반목과 질시가 심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둘씩, 전도하러 내보내셨습니다.
혼자 하면 안 되니까, 같이 해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혼자 했던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바나바와 한 번 다툰 일은 있지만,
바나바와, 디모데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디도와,
빌립보 교회와, 마게도냐의 교회와
너희들이 내 기쁨이다, 너희들이 내 사랑이다.. 하면서
모든 동역자들을 다 품었습니다.
자기 혼자 잘났다 그러면, 목회도 안 되고, 선교도 안 됩니다.
사실 바나바는, 아주 악독한 자로 평판이 안 좋았던 사울을 찾아서 동역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생겼던 것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잘 동역하느냐.. 사람들이 놀랐던 것입니다.
동역자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내 눈에 보기에, 저 동역자는 좀 부족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저를 인정하여 동역자로 세워주셨으니까요.’
▶4.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과 눈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기가 괜찮은 사람인줄 압니다.
유교의 전통 속에서, 대한민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요.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자기처럼 못난 자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고전1장에 보면, ‘바울이 무슨 물건이냐, 아볼로가 무슨 물건이냐’ 이때 중성명사를 씁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낫싱, 중성도 아니다. 아무것도 안 된다.
4장에 가면, 만물의 찌기처럼 되었다. scum of the earth 4:13
마치 시궁창에 버려지는 찌끼와 같고, 죄인 중의 괴수다..
‘What a wretched I am 나는 저주 받은 인간이다.’ 롬7:24
*개역에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런 저주 받은 인간 같은 자기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만나주셨다는 겁니다.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나중에 만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중에 로마까지 가라고 사명을 맡겨주셨답니다.
자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긴 것이죠.
그럴 때, 모두와 헙력을 이룰 수 있겠죠.
‘나 같은 배신자, 위선자는 없어!’
이렇게 겸손할 때, 모두와 협력을 이룰 수 있겠죠.
▶5.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늘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왔으므로 충분하다.. 그게 아니죠.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오늘 하나님이 내게, 지금 뭐라고 그러실까?’
‘내가 고통과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려는 중에 있는데,
하나님이 내게, 지금 뭐라고 그러실까?’
스데반이 죽임을 당할 때,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토마스 선교사가 목베임을 당했을 때, 예수님이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이 세상의 관점으로 판단하지 않고,
사실 '고난과 아픔과 슬픔은, 지나고 나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고백하고 또 고백합니다.
‘아,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고난과 슬픔을 당하게 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이상하구나’
제가 사실 1991년 6월, 일본 쇼바라에서 개최된
<제3회일본전도대회>에 가서, 제 간증적인 얘기를 했습니다.
약1천여 명의 일본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1990년 충현교회에서 열린 ‘아시아선교대회’때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들 앞에서
"나는 일본사람을 미워했던 못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뀌어 졌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인간적 또는 문화적 얘기를 하려고, 여기 모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여기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를 원합니다.
오늘 밤에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들은 모두 나의 증인들이다.
너희 일본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은 모두 나의 증인들이다.
너희들은 모두 하나님을 위한 동역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와 선교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흑인과 백인이 분리되어 있을 수 없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나눠져 있을 수 없고,
일본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이 분리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다락방에서 모였던 120명, 아니 3천여명이 다
민족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지만
다 하나가 되어서, 울면서 회개하고, 서로 교제하지 않았습니까.
민족주의, 국가주의는 안 됩니다.
1907년 장대현교회에 1천여명의 신자들이 모였을 때에,
길선주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
저들은 모두 통곡하고, 일본사람들을 미워하던 것도 회개하고,
누구를 미워하던 것도 다 회개하고, 하나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날 밤 제가 부족하지만, 이렇게 제 고백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아, 하나님을 바라보면 되는구나’
◑세계 선교에 있어서, 연대와 협력은 가능한가요?
▶도대체 한국교회의 연대와 협력은 가능한가요?
현실적으로 분석할 때,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의 연합과 협력의 가능성을 어둡게 보지만,
‘선교에 있어서’ 연대와 협력은, 밝게 보고 있습니다.
윗물이 흐려도, 아랫물이 맑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비유가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순수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협력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그네들이, 고향에 주저앉은 사람들보다, 더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초문화적 경험을 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더 쉽게 협력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직 기도의 무릎을 꿇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이루어가시는 선교사들이
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난과 박해와 역경을 몸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이
고난과 박해와 역경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과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교가 무엇일까요? 선교 칠도 宣敎 七道
▶1. 선교란,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민족주의도, 국가도, 고향도!
예수님도 하늘 영광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누추한 이 땅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애굽으로, 피난도 가셨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선교사도, 영국을 떠났고,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도, 미국을 떠났습니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은 아닙니다.
저는 11살 때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품을 떠났습니다.
제가 떠난 지 6년 후에, 아버지는 북한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슬픔이었죠.
그런데 그것이 제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울 수도 있게 되었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고,
이별과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아, 선교란, 버리고 떠나고 찾아가는 것이로구나!’
▶2. 선교란, 찾아가는데 그치지 않고,
그저 찾아가서 1주일 동안 집회하고 돌아오는게 아니라
그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becoming, incarnation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몇 년 전에, 저는 롬8:3절을 읽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죄 있는 사람의 모양이 되셨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으로, 그것도 모자라 ‘죄 있는 사람의 모양’이 되셨는가요.
그렇다면, 유식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의 모양이 되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모양이 되고,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의 모양이 되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성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나환자 되기를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가짜로 그러신 게 아니에요.
검사를 해 보고서 ‘피가 깨끗합니다’ 그러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금년에도 틀렸구나’ 하셨답니다.
선교란, 그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becoming입니다.
▶3. 되는 것만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한 번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평생 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태국에 신홍식 선교사는, 40여년 동안 거기서 살고 있습니다.
거기서 아들도, 손자까지도 다 보았습니다.
‘아, 선교는 함께 사는 거구나’
예수님은 33년 동안 계속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창기와 세리와 같이 식사도 하시고,
죄인들과 같이 지내기도 하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함께 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요1:14
여기서 ‘거하시니’란 dwelling among us, ‘천막을 치시고 사신다’는 뜻입니다.
그게 피곤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으니까,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는 거죠.
수많은 앞서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목사된 1년 만에 제주도로 가셔서 14년 동안
당시 제주도는 외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함께 사셨습니다.
▶4. 선교란, 사는데 그치지 않고 섬기는 것입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 구절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극명하게 잘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존 스토트 박사는 지적하고, 또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환자를 만지면서 섬기시고,
열병환자도 만지시고, 소경의 눈도 만져 주셨습니다.
각색 병자들을 만지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긍휼, 용서, 자비, 사랑으로 또한 섬기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섬길 수 없느냐?’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님의 선교를 보면서,
우리는 선교란, 섬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5. 선교란,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은 선교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선교의 종착역은, 화해와 평화와 통합입니다.
엡1:10절에, 하늘과 땅이 통일된다고 하셨습니다.
엡2장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고 하나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아, 이게 하나님의 목적이구나. 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구나.’
계7장에는, 온 우주의 화해와 평화가 나옵니다.
그때는 모든 피조물(동물, 식물)까지 다 구속함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싸우고 있습니다.
그건 마귀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요17장에서 그렇게 기도하셨죠.
화해와 평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선교의 목적입니다.
▶6. 이것은 제가 만든 말인데요, 제가 선교지를 다니면서 깨닫고 배운 것입니다.
‘아,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교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대화하시며, 교제하셨습니다.
함께 운동도 하고, 탁구도 치고, 축구도 하고..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
저는 이것을 태국에서,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여러 곳에서 경험했습니다.
남미 브라질에서 제자 두 명과, 또 새로 온 선교사와
제가 함께 볼링을 치면서 교제했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단에서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고 시간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모슬렘 지역의 아이들이, 다른 나라 군대는 다 싫어했는데,
영국 군인들은 좋아했답니다.
그들이 자기들하고 축구를 하며 놀아주었기 때문이랍니다.
▶7. 선교7도의 마지막 일곱 번 째는
그들을 위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이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선교입니다.
선교사들이 피를 흘리고, 순교의 제물이 되니까
그 지역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역사에, 순교의 피가 없이, 참된 교회가 세워진 적은
거의 없습니다.
서머나 교회, 조선의 교회, 초기 영국의 교회,
그런 예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이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신 예수님께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이 되는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이
선교가 이루어지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되는 죽음이 없었다면,
19년 후인 1885년 조선 땅에
조선 땅에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먼저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선교사들이, 주님과 현지인들을 위해서
제물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되어 죽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소원하며 살 때
협력과 연합이 안 이루어질 것은 없죠.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세계 선교를 위한 연대와 협력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1.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동역자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과 눈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5.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과 눈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교단의 관점, 신학의 관점이 아닙니다.
개혁신학, 웨슬리 신학 등 모든 신학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죠.
완전한 신학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선교란 무엇입니까?
버리고, 찾아가서, 그들처럼 되고, 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고, 함께 친구가 되고(놀아주고),
마지막으로, 제물이 되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여러 선교사 여러분,
선교지에 따라 많은 고난과 아픔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선교지를 많이 다녔기 때문에, 여러분의 사정을 잘 압니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저는 이 구절을 너무 좋아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난을, 그렇게 기뻐했습니다.
십자가에 미쳤습니다.
우리 선배들이 고난과 아픔과 슬픔을 기뻐했듯이,
오늘날 우리들도, 고난을 좀 기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프랜시스는, 주님이 당하셨던 고난과 같은 고통을,
자기도 좀 당할 수 없을까 해서, 2년 동안 그것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고통을 지니고 죽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나도 좀 그렇게 죽을 수 없습니까?’
‘주님의 고난을 나도 좀 당할 수 없습니까?’
이렇게 살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선교하는 현지인들에게 축복이 되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행복이 되는 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계 각지에서 선교사역, 목회사역, 섬김과 봉사의 사역을 하다가
또한 보내는 선교사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죄악의 세력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쳐 주시고,
인간의 못된 생각 다 물리쳐 주시고,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를 주장해 주셔서
3천명이 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던 역사가,
그 예루살렘 교회에, 안디옥 교회에 나타났던 역사가, 여기서도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으로부터, 빌립보로부터,
선교의 역사가 세계로 퍼져나간 것처럼
그와 같은 축복이 이곳에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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