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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강) 스데반의 설교!① (행 7:1-29)

by 【고동엽】 2022. 3. 10.

(제19강) 스데반의 설교!① (행 7:1-29)

 

행7장은 온통 스데반 집사에 대한 기록입니다. 1-60절까지인데 굉장히 긴 절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공회에 끌려 왔습니다. 공회 앞에서 스데반은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릎 쓰고 유대인들의 잘못되어진 신앙 관을 깨뜨리기 위하여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아브라함을 모독하고 성전과 모세 율법을 훼방한다는 비방에 대하여 구약의 인물들 하나하나를 예로 들면서 이스라엘의 구속 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아브라함을 모독하고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훼방하는 무리들'이라고 몰아 세웠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스데반은 자신들이 '구약 성경'의 전통에 충실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의 땅을 제시하신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심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문장보다는 율법의 본정신을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고, 유대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성전의 개념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데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 제사 드리는 장소로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지 결코 건물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성전에 대한 미신적 숭배의식을 타파'하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라는 건물에 대하여 집착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성전이나 의식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2절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성전 밖에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애굽의 요셉과 광야의 모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점진적으로 나타나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룬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의 요점을 말한다면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계시하시고, 그 후에는 그의 가족을 통해서, 그 후에는 선민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통하여, 그 후에는 율법의 의식을 통하여, 계시하였다가 마침내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모든 역사는 이 목표를 행하여 움직였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을 어떤 성산(시온산, 그리심산)이나 성전에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어디서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온 요셉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은 10명의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아 애굽에 팔려 갔으나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의 가족들을 구원했을 때에 비로소 그가 그 가족의 구원자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버린바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었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여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그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아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구약사론적인 설교입니다. 설교는 1-53까지 이어집니다. ◀제목소개!▶

 

▶1절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이것들이 사실이냐?" 이것은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첫째, 네가 정말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느냐?
둘째, 모세가 우리에게 준 이 율법을 고치겠다고 했느냐?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영웅과 같은 존재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이며, 그들에게 율법을 전수해 준 장본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모독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신13:10).
셋째, 나사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을 너도 믿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이 공회에서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거짓 증인들이 증언한 내용(6:13-14)을 물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면 당연히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율법에는 '율법을 훼방하고 성전을 모독한 죄는 마땅히 죽을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은 것은 그 당시에도 재판 관례에 따르면 피고에게는 고소한 내용에 대해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재판장인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고소 내용에 대한 사실성여부를 공식적으로 물었습니다. ▶2절부터는 스데반의 설교가 나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변증설교입니다. 그의 설교는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을 들어서 구속 역사적으로 명쾌하게 증거 했습니다.

 

▶2-4절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공회에 모인 사람들을 겸손하고 공손하게 부른 칭호입니다. 특히 '부'는 공회의 종교지도자들을 지칭한 것이고, '형'은 모든 참관 자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그들은 독이 올라서 스데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분을 내거나 욕설에 맞서지 않고 성령의 인도 따라 정중히 예의를 갖추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스데반의 이 설교가 70인 역을 바탕으로 하여 헬라어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지방에서는 헬라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지식층들에게서는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또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론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공회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유대인이며 종교지도자들이었고, 또 스데반이 구약을 설교한 것으로 보아 히브리어로 설교했을 것이라고 주장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부름에 대하여(창11:18-창12:4) 설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란에 오기 전에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떠나오다가 하란에서 얼마동안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이 하란에서 다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창12:1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두 번째 불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두 번, 세 번 부르시는 일도 많습니다.
왜 족장들의 대한 설교를 시작한 것입니까? 히브리 민족의 뿌리는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포괄적인 이름은 이스라엘이며 그 원조는 히브리 사람 아브라함입니다(창14:13).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았지만 그보다 앞서 하나님은 히브리 사람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선택교리를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유대인은 선민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히브리인이란 '강 건너 물 건너 온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유브라데스 티그리스 강을 건너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하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노라 하면 무조건 따라 갑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아브라함부터 살펴보자고 한 것입니다.
①아브라함은 먼저 그가 살고 뿌리를 박고 있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는 첫 번째 소명을 받았습니다.
'떠난다.'는 말은 두 가지의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여행을 가는 것은 떠나긴 하는데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습니다. 우리가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을 장가보내는 것도 부모를 떠나가는 것이지만, 다시 부모에게 돌아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두 번째 개념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 그것을 얻기 위해 아쉬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고 '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할 때 떠남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떠나가지만 돌아오는 떠남이 있고 다시는 돌아올 필요가 없이 완전히 버려야 되는 개념이 있습니다. 믿음은 후자, 즉 완전히 떠남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다시는 생각지도 말고, 다시는 그것을 붙잡지 말고, 다시는 그리로 돌아가지도 말아야 되는 영적인 측면의 떠남'을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이런 떠남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 장사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 데라가 외출하고 없는 사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우상을 모두 부숴 버렸습니다.
어떤 절대자의 힘에 이끌리어 너무나 큰 사고를 저지른 후 아브라함이 제정신이 나서 생각해 보니 큰일 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크게 혼날 것을 생각하고 근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전설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어째든 아브라함은 창12: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난하고 무지한 상황에서 찬란하고 중요한 곳으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갈대아 우르는 세계가 자랑하는 인류 문명의 발생지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집안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합쳐져 흐르는 비옥한 땅, 델파지역인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요한 집안이요 사회에서 인정받는 그런 집안입니다.
고고학자들의 반증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그곳은 그때 당시 벌써 포장도로와 상수도의 시설과 난방장치와 바퀴 달린 탈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공중목욕탕, 도서관, 공연장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풍요하고 문화가 발달된 곳에서 사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불러서 어디로 보냅니까?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사막지대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이 풍요하고, 삶이 윤택하고, 분주한 삶의 현장에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그분과 교제할 수도 없기에 하나님은 사막으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복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창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떠나라'는 요구와 '가라'는 지시는 명령입니다. 이런 요구와 명령을 순종하기가 정말 어려운 명령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순종하기가 쉽고 어려운 것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요구와 지시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
⑴본토: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고 뛰놀던 선조 대대로 살아온 활동의 근거지인 고향을 말합니다.
⑵친척: 서러울 때 도와주고, 의논하고 충고도 해주고 더위와 추위를 가려주고 편히 쉬도록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집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의지하고 보호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같으면 쉽게 떠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멘 하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히1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방향을 몰랐다는 말씀이 아니고 지시한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데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간 도적이 발각되어 생각할 틈도 없이 도망가듯이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해득실, 좋고 나쁜 것, 따져보지 않고, 원망 불평할 겨를도 없이 그저 기쁜 맘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12: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혈통적, 신앙적 자손을 많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일에 만사형통하고 번창하고 크게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될지라.' 샘 줄기의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인데 '복의 출처'라는 의미입니다. ▶창12: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너를 돕고 너를 위하여 염려하는 자는 복을 주어 잘되게 해 주시고, 너를 막고 헤치는 자는 네가 저주하여 막고 헤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위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을 싼 보자기와 같습니다.

 

▶4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명을 받고 하란에 와서 그의 식구들이 좀 살았습니다. 그곳 하란에서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데라를 하나님이 지시한 땅 가나안에 들어감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상 섬기는 데라가 죽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5절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다 버리고 떠나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발붙일 만큼의 땅도 유업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만 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때까지 75세가 되었음에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와 그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창12:7절에서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또 창15:4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귀한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치의 땅도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아들도 없었지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나아간 것'입니다. ▶그 당시 정황은 이렇습니다.
⑴아직도 아브라함에게는 자손이 없었고 그 후 여러 해가 지나도 사라는 잉태하지 못했습니다.
⑵아브라함 자신이 이 땅의 나그네였고 방랑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낯선 땅에 온 사람처럼 살았으며 항상 이사를 다녔으며 그의 것이라고 부를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⑶그의 후손도 오랫동안 그 땅을 소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백 년 후에' 그들이 돌아와서 '이 땅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셨으나 그 당시까지는 아니었습니다(7절).
⑷그들이 그 땅을 소유로 얻기까지에는 많은 곤경과 어려움에 직면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을 하였고 낯선 땅에서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이삭이 출생한 날부터 계산하여 "사백 년이 끝날 때에 내가 그들을 종으로 삼고 있는 나라를 심판하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⑴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이미 계획되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유산도 없었고 후사도 없었을 때이지만 그는 이 두 가지를 가지게 될 것이라 약속되었습니다. 전자는 약속의 땅이요, 후자는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해서 이 두 가지를 이미 소유했던 것'입니다.
⑵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더디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확실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약속들은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적절한 시기에 성취되고야 맙니다. /믿/
⑶하나님의 백성이 일시적으로 곤경 속에 있을지라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출하시고 그들을 압제하던 자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6절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땅 한 평도 주시지 않고 약속만 주었는데 그것도 앞으로 400년 뒤에나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400년 동안 그 땅은 그냥 두고 너희 후손들은 애굽에 가서 종살이하고 난 다음에 그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①연단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400년 동안 연단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야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과 연단을 통과해야 합니다.
②어떤 학자들은 가나안 원주민들 등쌀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릴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고 그 그늘 밑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양육한 것이라고 합니다. 고센 땅은 언약 받은 백성의 땅이기에 저주가 오지 않았습니다.

 

▶7절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며 많은 고난과 연단을 받은 후에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많은 연단과 훈련과 고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안 주십니다.

 

▶8절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두 번째 언약을 체결합니다. ①땅의 언약과 ②그 땅에서 살아갈 백성과의 언약인데 '할례 의식'입니다. 창17:8-10절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 언약은 피의 언약입니다.
레17: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할례로서 피의 언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
할례는 '자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이삭을 주시고 그가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이 할례의식을 받아야 유대인들이 말하는 거룩한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보혈로 선민이 되었습니다.
▶왜 지금 스데반집사가 언약을 특별히 언급합니까? ①이스라엘은 할례를 통해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과 ②이 언약은 단순히 의식의 행위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할례문제를 거론한 것은 이스라엘이 모두 할례를 받았으나 의식적인 할례만 받고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51).
마음의 할례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여 믿고 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할/
▶이제 스데반은 이삭과 야곱을 뛰어 넘어 요셉을 자세히 조명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다음에 다시 나옵니다(39절-). 왜 먼저 요셉을 증거하고 있는가? 요셉이 가장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잘 나타낸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배신을 받아 팔려 노예가 되어 보디발장군 집에서 종으로 충성하다가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아버지와 식구들을 불러들여 고센 땅에 거하게 하고 가뭄의 굶주림에서 온 식구들을 건져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서 사망에서 질병에서 실패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9절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창37장부터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요,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자, 같이 걷고 하나님 앞에 선 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를 가리켜 형통 하다고 말합니다.
창39:2-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상황적으로 볼 때 요셉은 끝난 사람입니다. 망하고 실패한 사람입니다. 당시 노예 신분이 가장 비천한 존재입니다. 그런 요셉을 가리켜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형통이란 번영의 사람이란 의미로 앞길이 잘 열리는 것, 잘 되는 것, 성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실패한 자가 아닙니다.
▶9-16절까지는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고센 땅에서 자리를 잡게 한 것과 그의 아버지 야곱의 죽음으로 세겜 땅에 장사하는 것까지 나옵니다.

 

▶10절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 자로 세웠느니라"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참고 걸어가는 자는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요셉을 옥에서 건져냈습니다. 건져낸 정도가 아니라 애굽의 두 번째 치리 자로 세우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총과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14절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의 식구 75명이 건너갔습니다. 400년 후에는 200만이라는 거대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16절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 되니라"
야곱이 죽을 때, 유언하기를 절대로 애굽 땅에 묻지 말고 가나안 땅으로 가지고 가서 묻어달라고 했으므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세겜 땅은 어떤 땅입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곳입니다.
창12:6-7절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17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때가 가까우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는데, 그 때를 정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십니다. 하나님은 일들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정하신 때에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간 건은 기근 때문입니다. 75명이 내려갔는데 하나님이 복 주시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강성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400년 후 약속의 땅으로 떠날 때가 가까웠다는 신호입니다.

 

▶18-19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요셉은 국무총리로 삼은 애굽의 왕조는 '힉소스 왕조'로서 애굽의 본래의 종족이 아닌 셈족이었습니다. 그 왕조는 요셉이 나라와 백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해준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건재할 때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평안히 고센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요셉을 아는 왕조가 무너지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은 고달프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압박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⑴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괴롭힐수록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더욱 창성하여 애굽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⑵산파들에게 남자아이는 출생시 죽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남아들을 살려두고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니 하나님이 산파들의 집을 왕성케 해주십니다.
⑶모든 남자아이는 출생 즉시 강에 던지라고 명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모세가 태어납니다(20).

 

▶20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기억하고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는 복된 자 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애굽 왕 바로의 압제에 원망하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때가 가까이 온 줄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히려 소망 가운데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최고의 영도자 모세가 나옵니다. 출2:2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아름다운지라!' 이 원어는 창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와 같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름답다 좋다'라는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의 완벽한 믿음의 모습을 지녔음'을 암시합니다.

 

▶21-29절까지는 출2장의 사건입니다.
⑴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름(21). 모세가 애굽의 궁궐 공주의 아들이 될 수 없지만 요셉을 모르는 애굽 왕의 이스라엘 민족의 박해는 이렇게 오묘하게 전개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고 인간의 악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감이 중요한 주제입니다.
⑵40년 간 애굽 궁중에서 모든 학술을 배운 모세(22).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로 특별히 모세 5경의 성경을 기록하는데 필요한 인간적인 자질을 당시 최고인 애굽 궁중에서 모두 배우게 됩니다. 당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 것을 아무도 몰랐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구원의 약속 성취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율법 전파의 준비를 이렇게 섬세하게 준비해 가십니다.
⑶애굽사람을 쳐죽이는 모세(24, 출2:11,12). 40세가 된 모세는 동족을 돌볼 생각을 하고 애굽 사람이 모세의 동족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서 모래에 묻어버립니다. 인간적인 학술은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실패를 가져옴을 보며, 스데반은 이스라엘 인들이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모세도 실수가 있음을 증거함으로 예수님은 모세보다 탁월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9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모세는 자기의 조국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살인한 것이 탄로가 되어 신변에 위협을 느껴 그 길로 홍해를 건너 미디안 광야로 도주했습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40년 간을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서 살았으며 그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 그 기간에 모세는 평범한 목동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40년 동안 모세를 지도자로, 당신의 종으로 갈고 닦아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40이라는 숫자는 훈련의 숫자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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