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 (행 4:13-22)
오늘 본문은 3장에 있었던 사건과 연관되어 나오는 내용입니다.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가는데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향하여 구걸을 합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자 순간 그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 앞에 유대 군중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예수의 이름의 능력이 무섭구나! 예수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이런 분위기가 온 예루살렘 성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사도를 잡아 심문합니다.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떤 능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이 엄청난 기적을 보면서 울부짖듯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낫게 해준 일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고, 심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같으면 억울하다고 펄쩍 뛸 만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도들은 기뻐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일로 인하여 공회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감옥에 들어간 것이 더 넓게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정말 사도다운 발상이요 제자다운 발상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아멘!/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즉 공회의 허락도 없이 이런 종교집회를 열고 하느냐?'는 그들의 질문 앞에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 대답 속에는 그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걷고 뛸 수 있었던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 때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영원한 교회의 머릿돌(기초석)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죄를 해결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행4:12절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할/
우리는 위인들을 존경합니다. 그 이름들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의 사상이 우리의 생각에 새로운 활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이 남긴 말씀들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삶이 나의 삶의 지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더 귀한 이름이 '예수'입니다. 그 분은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⑴우리는 '길'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먼 길을 가는 나그네요 행인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여행지도가 필요하고 또 안내자가 필요하고 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인생은 여행하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인생길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그 길에는 반드시 안내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인 천국을 향하여 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에게 안내자요 길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믿/
⑵'진리'가 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속에 진실한 자유가 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할/ 진리 되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동행하시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이 검이 되어 마귀 궤계를 물리치고 승리하게 됩니다. 구약에 나오는 불레셋 장수 골리앗의 큰 칼 보다도 하나님을 강하게 믿는 믿음을 가진 다윗의 물맷돌이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진리는 강합니다. 진리는 이기고 승리하게 만드십니다. /할/
⑶'생명'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 되신 주님 앞에 날마다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그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이름이 죽을 영혼을 살립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로, 영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이름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12절에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13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저희가'는 산헤드린 공회원을 가리킨 말로 당시 사도들을 직접 심문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이 능력이 어디서 나온 능력인가? 8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의 지혜로 확신 있게 분명하게 주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은 말 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기탄 없이 성령이 충만해서 영적인 지혜를 가지고 짧은 말로 하나님의 복음을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향하여 당당한 위세로 심문했지만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말을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강해지고 담대해 집니다. 여기 '기탄 없이 말함'이란 말의 '헬'어로 '페르레스안'이란 단어로 이 말은 '모든'과 '연설'을 뜻하는 합성어로서 '모두 남김없이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하였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아주 당당한 태도로 분명하고 말에 확신이 찬 능력 있는 설교를 했습니다. 사실 그 자리는 죄인으로 서 있는 자리입니다. 일반 재판 과정은 심문하는 재판관이 기탄 없이 말하고 죄인은 그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배경은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사실 이들이 처음부터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겁쟁이요 비겁자이며 배신자입니다. 보통 사람의 수준도 안 되는 그 이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번에 변했습니다. 모든 고통과 고난과 협박과 공포 앞에, 죽음 앞에서도 떨지 않는 아주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됐습니다. 세상 어떤 힘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공회원들은 죄인으로 서 있으면서도 자신 있게 변론하는 베드로의 태도에 대해 기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눅21:14-15절에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기탄 없이 말한 것은 주님이 미리 말씀하신 사실이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할/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현대말로 바꾸면 가방 끈이 짧은 배움이 없는 무식한 사람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이 없고 무식했습니다. 율법도 정규의 학문을 배운 일이 없으며 특별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도 아니었습니다.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말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라 말하고 예수그리스도가 이 사람을 살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엄청난 도전의 메시지를 외쳤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문적인 지식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있으나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학문이 어떤 진리를 제시할 수는 있으나 학문이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말씀이고 성령이며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적인 학문과 지식도 갖추어야 하지만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땅의 지식보다 하늘의 지식, 육신의 지식보다 영적인 지식, 세상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더 잘 알 수 있고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범인'이란 말은 3등 인생이란 말로 갈릴리 출신임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당시 갈릴리 근방은 서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꼬방'촌입니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술주정뱅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무식한 자들을 들어 크게 쓰십니다.
고전1:27절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예수님보고도 꼭 이렇게 말했는데, 제자들보고도 이렇게 말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닮았다는 말입니다.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이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전에 보니까 산에서 도를 닦더니' 이렇게 말했다면 곤란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전에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전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하더니 예수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주와 늘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를 닮아갑니다. /믿/
▶14절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앉은뱅이로 있다가 나은 사람이 이 자리에 같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변명도 부인도 할 수 없습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예수가 머리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지식으로 머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슴까지 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한 간증이 있다는 것은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삶에 간증이 될 수 있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가 구원이라는 사실이 삶의 일부분이요 체험이요 변할 수 없는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힐난한 말이 없는지라" '질문한 말이 없다'는 말로, 그들이 사도의 증거에 대하여 반박할만한 아무런 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도무지 책잡을만한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3-14절을 종합해보면 ⑴사도들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사실을 보게 했고, 듣게 했고, 알게 함으로 저들의 도전을 꺾었습니다.
⑵예수와 함께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⑶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에 앉은뱅이였던 자가 사도가 말한 것들에 대한 산 증거로서 그들의 목전에 당당히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산 증인이 옆에 서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은 어떻게 힐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공회에서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즉 석방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입니다.
▶15절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공회'는 '큰 심판의 집'이라는 뜻으로 결국 '재판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공회원들은 사도의 변증에 대해 마땅히 답변할 고소거리를 찾지 못하자 자기들끼리 의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명한 것입니다.
현대말로 표현하면 법적 증거가 확실하지 못하므로 보충 수사하기 위해 석방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교만함과 어리석음을 다시 느낍니다. 그들은 병 나은 사람을 직접 보았습니다. 재판은 물증만 확실하면 이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었으면 '아! 뫘구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가 정말로 메시아구나!' 깨닫고 회개했어야 할 터인데 모여서 의논이나 한다니 갑갑한 일입니다.
▶16절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본 절은 공회원들의 고민입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여기에 공회원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조적인 두 그룹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의 무리입니다. 그들은 돈이 있고 권력이 있습니다. 정치력도 있었고, 군대의 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무엇이나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강국인 로마의 세력까지 업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저들의 세력은 아무도 당할 자가 없습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두 번째 무리는 아무 힘도 없어서 붙잡혀와 심문을 당하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세상은 아무도 그들을 겁내지 않았고, 두려워하거나 주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속엔 세상을 뒤엎을 폭탄의 불꽃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세상으로는 큰 힘을 지니고 있는 집단이 세상 적으로 아무 보잘것없는 이런 나약한 집단을 보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①저들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 성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도들을 벌한다면 그들은 민심을 잃을 것이고, 또 백성들이 자신들을 돌로 칠 염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는 여론이 무서운 것입니다. 국민의 관심이 어디 있느냐? 국민의 욕구가 무엇인가? 지금 국민이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가를 정치하는 사람들은 빨리 빨리 알아야 합니다. 당시 공회원들은 이런 국민들의 여론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②"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자신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사람이 걷고 뛰고 있으니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은 힘이 있습니다. 진실은 결단코 거짓을 이깁니다. 거짓이 진실을 숨기거나 가리 울 수 없습니다. 공회원들도 양심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표적은 기적과 이적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 앉은뱅이의 일어섬을 의미합니다.
▶17절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가?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나타나는 표적을 의미합니다. 사도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는데 그것을 내버려두면 주의 복음이 점점 널리 전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예수를 죽인 피 값이 공회원들에게 돌아가고 그들의 권위가 떨어지고 유대교는 소멸될 위기가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회원들이 생각다 못해 사도들을 위협하여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아무에게도 말하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저희를 위협하여" 가지고 있는 권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들을 공갈 협박한 것입니다. 드디어 저들은 타협안을 내어놓았습니다. 두 사도를 놓아주는 대신에 예수를 전파하거나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조건입니다. 저들은 이러한 조건을 위협적으로 내어놓았습니다.
▶18절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감옥에서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 경계했다는 말은 '이들을 이대로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여기 '도무지'는 '절대로'란 전제로서 위협적인 말입니다. '너희들 만약 한번만 더 그 이름으로 떠들고 다니면 그땐 당장 사형이다.' 이렇게 의역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이것 외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입니다. 진리를 대항하고 감추려는 자들입니다. ▶왜 진리에 대항하려 했는가? ⑴자기가 비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 불의와 부정과 잘못된 악이 있기 때문에, 빛이 오면 악은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⑵진리인줄 알지만 내게 불이익이 올 때 진리를 거부합니다. 내 이익이 없어지고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진리인 줄 알면서도 진리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와 싸워서 이겨본 사람은 없습니다. 진리 앞에서는 방법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오래 대결할수록 갈등이 심해집니다.
⑶진리에 대한 올바른 방법은 겸허하게 자기를 수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성경은 회개라고 말합니다. 회개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된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회개하라'고 할 때 그 회개의 대가로 '벌을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대가로 '축복을 준다'는 것이고 '용서를 준다'는 것이고 '구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하라면 두려워합니다. 자기의 존재가 다 무너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바꾸려고 생각하지 않고 진리를 바꾸려고 하고, 진리를 왜곡하려고 하고, 거부하려고 합니다. 회개하고 거듭나서 예수를 영접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바꾸어 보려고 하고 성경을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당시 사도들이 얼마나 예수 이름을 잘 가르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잘 가르쳐 깨우쳤을 때, 성장하는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공갈협박하면서 도무지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도들이 기가 죽어서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석방해 주는 것만이 고마워서 굽실굽실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9-20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여러분, 도대체 어디에서 이러한 용기와 담대함이 나오는 것입니까?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뒷걸음쳐 꽁무니를 빼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런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용기입니다. 그들은 앉은뱅이가 일으킴을 받는 표적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심을 직접 확인하였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이처럼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곧 능력입니다. 우리는 어린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린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삼상17장은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판 승부를 가리기 위해 진을 치고 공격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장입니다.
당시 전세가 얼마나 위급했던지 왕이 직접 나가 전쟁을 진두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고 있던 이새의 막내아들인 다윗이 자기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에 출전한 형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이 온갖 욕설을 다 퍼부으면서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무서워 떨고 있을 뿐, 그 누구 한 사람 나서서 대응하거나 싸우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골리앗은 9척 거인 장사로서 보기만 해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골리앗을 향하여 어린 다윗이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이 있었는데 이 싸움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총동원해 봐도 골리앗이 절대 이기고 어린 다윗은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막상 붙고 보니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자가 진정으로 강한 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가 강한 자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할/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합니다. 대통령이 보내는 편지에는 대통령의 서명이 있습니다. 그 서명은 곧 대통령의 권한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소년 다윗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삼상17:47절에 보면 다윗은 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이 전쟁이 골리앗과 이스라엘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싸움이라면 승산이 없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 하나님과의 싸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면 상대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블레셋과 하나님과의 싸움으로 믿고 나갔던 다윗은 크게 승리하여 이스라엘은 풍전등화 위기에서 건져낸 구국공신이 되었습니다.
누가 강한 자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 자입니다. 또 여호와의 능력을 꼭 붙드는 자입니다. 시37:24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할/ 오늘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도 하나님이 붙들어 쓰는 자이기에 이런 강하고 담대한 용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②사도들은 이미 주님께 명령을 받은 몸이므로 다른 사람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이미 주님께만 순종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담대하게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얼마나 용기 있는 대답입니까? 여기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 임재 앞에 서 있다는 신전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의 위대한 신앙가인 요셉이 이 신전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당시 보디발 집에서 요셉이 가정 총무로 일하고 있을 때, 그에게 홀딱 반해버린 보디발의 처가 동침하자고 끈질기게 유혹을 합니다. 그때 요셉이 말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며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여기 '판단한다'는 말은 '분석하고, 분별해 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공회원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신앙 안에서 바로 서라는 경고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큰 권위를 두었고, 비중을 두었고,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 우선주의요, 하나님 제일주의입니다.
▶신앙은 두 가지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냐? 하나님을 위한 나 자신이냐?'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냐? 내 건강, 내 직업, 내 가정, 내 불안, 내 염려, 내 미래, 내 구원,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도구로 필요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냐?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해서 교회에 찾아 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에 나왔습니까?
▶교회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엄두도 낼 수 없지만 큰 교회에서는 기관별 찬양대회를 합니다. 왜 교회에서 기관별 찬양대회를 합니까? 첫째는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찬양을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찬양을 준비하는 동 안 기관에서 회원들이 교제를 나누고 유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몇 년째 하다보면 찬양하는 분들의 관심이 달라집니다. 가장 큰 관심은 누가 일등을 하느냐 여기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사 결과에 예민해지고, 심사를 공정하게 하기 위해 전문가를 모셔오게 됩니다. 우리는 해봐야 등수에 들지 못하고 들러리만 서니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기관도 생겼습니다.
여러분, 합창을 해서 일등을 하는 것, 이것은 세상 적인 가치관입니다. 교회가 세상 적인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 변질되면 안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입니다. 하나님 우선주의 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으로 내가 산다는 철학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신앙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가치관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중심의 교회는 사람한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교회 안의 다툼은 주님의 영광때문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영광때문이며 사람의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내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결정적인 시간에 판단하기 바랍니다. 성경에 의해, 성령에 의해서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최대의 목표와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야 합니까? 인간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첫째도, 둘째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
'메투헨리'는 '나라의 국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무효'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법은 실지로 그렇게 되어 있답니다. 메투헨리는 그가 쓴 주석에서 '우리 영국에서는 모든 법이 성경에 위배 될 경우 무효가 된다고 했으니 참으로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인간이 만든 법이 중요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로 알았습니다.
20절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고 있습니다. 증인은 보고 듣는 것을 정확하게 전해야 합니다. 바로 전하지 않으면 위증죄가 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병든 자는 고치시고, 죽은 자는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이웃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행한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모든 말씀을 그들은 기억하고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았고, 부활을 보았고, '다시 오시리라'는 재림의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고들은 것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복음이란 이론이나 논리나 철학이 아니라 생명 자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지식적이라기보다는 체험적입니다. /믿/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담대한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히13:6절에"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믿/
▶21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공회원들은 마음속으로 사도들을 죽이고 싶었으나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고친 일에 대하여 백성들이 옳게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처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만일 사도들을 벌한다고 하면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공갈 협박만 하고 놓아 준 것입니다.
여기 '백성을 인하여'는 당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이적을 목격한 군중들의 열기는 대단했는데 그 군중들 때문에 사도들을 벌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보고 삽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니까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29: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믿/
▶22절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 세나 되었더라"
왜 '사십 여세나 되었다'고 했습니까? 이 말은 그 사람이 도저히 가망이 없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나서부터 40년까지 앉은뱅이로만 있었으니 그 다리가 굳어져서 일어날 가망이라곤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걷고 뛰었으니 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느낍니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는 그 무엇이든지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습니다. 치유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의 사건이 이 땅에 임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런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믿/ 우리 모두 이 능력을 붙잡으십시다. /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사도들의 신앙을 배웁시다. 본문에 나오는 공회원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는 저들이 전문가들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전문적으로 섬기는 제사장 율법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만 있는 하나님이요, 전통 속에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종교 의식 속에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베드로의 하나님입니까? 공회원들의 하나님입니까?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성경책 속에 가두어 둡니다. 설교 속에, 기도 속에, 예배 속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내 구체적인 현실 속에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살아 나오시게 해야 합니다. 예배 속에 기도 속에 가 두어 둔 하나님을 내 현실 속으로 모셔 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 한 능력이 있습니다.
루터의 용기의 원천도 여기 있었습니다. 당시 천주교가 얼마나 막강했습니까? 세계를 지배하는 천주교요 왕들 위에 군림했던 교황이었습니다. 그 막강한 권력 앞에 루터는 홀로 섰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와 요한도 바로 이런 믿음의 힘이 그 큰 능력으로 나타난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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