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감옥에 간 베드로! (행 4:1-12)
사도행전을 일면 '성령행전'이라고 부릅니다. 1장은 성령에 대한 약속이고, 2장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불같은 성령강림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3장은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활동 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장을 보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고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때부터 한번에 삼 천명이, 오 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큰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찰나적인 순간에 초대교회에 고난이 닥쳐온 것입니다. 복음의 세력이 확장되는 그만큼 하나님의 교회가 크게 부흥되어지면 그만큼 사탄의 역사도 강력하게 일어나는 법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으로 몰려든 군중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일어난 사건을 본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때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몰려와 두 사도를 체포해 감옥에 잡아넣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감옥에 간 베드로!▶입니다.
초대교회 처음 박해가 시작된 것이 이 사건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크게 부흥되어 가는 그 순간 돌연히 고난의 찬 서리와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게 된 것입니다.
신학자 '벵겔'은 이 고난이 시험(test)이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축복을 받을 때 하던 것처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요16:33절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의 고별사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왜 그렇습니까? 하늘에 상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교회의 생명력 중 하나가 바로 이 세상에서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로 본문의 예루살렘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역사로 하나님의 위대한 교회 운동이 지금 막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때, 사탄은 마침내 포문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이 교회가 겪는 첫 박해요, 환란이요, 시련입니다.
▶1절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말할 때에" 여기 사도들이란 베드로와 요한을 가리키는 말로 복음의 사자들로서 주님의 대리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도들에게 박해가 가해진 것입니다.
여기 '백성'이란 '가난한 대중'을 뜻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전파의 특색입니다(눅4:18-19). "말할 때에"는 현재진행형으로 그들이 아직도 말하고 있는 때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 동안에 성전 가운데서 사태가 급변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본 절에서 복음 전파에 대한 최초의 반대세력이 누구인가를 세밀히 밝히고 있습니다.
⑴'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에 속한 권력자들로서 성전에서 모든 예배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⑵'성전 맡은 자'란 성전 수비대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로 성경 주석을 보면 '수호장'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면 청와대 경호실장 정도 되는 높은 자리입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성전 맡은 자는 로마군대의 장교로 보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요세푸스에 의하면 제사장 가운데서 임명된 사두개파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어째든 당시 성전 맡은 자는 대제사장 다음가는 높은 자리였습니다.
⑶'사두개인들'입니다.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서 '종교합리주의, 세속주의, 현세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부활도 없고, 영도 없고, 천사도 없고, 천당도 없다고 주장하는 종파입니다.
"이르러" 이 말은 어떤 사태를 진압하기 위하여 적의에 찬 마음을 가지고 급작스럽게 몰려왔다는 뜻입니다.
당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로마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친 로마주의자들 이었습니다.
▶2절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우리를 죄악의 사슬에서 풀어서 부활의 생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단은 우리 속에 와서 죄악의 씨를 심으려 왔다가 예수의 피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맙니다. /믿/
사단은 타락한 천사입니다. 그러므로 영물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머리를 굴리면 사단은 박수를 칩니다. 그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 속에 들어가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사두개인은 그 당시 엘리트 그룹들입니다.
이들이 사도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제발 '예수 부활만은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미혹합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십자가의 피묻은 복음 대신에 교양강좌나 시국강연 같은 것을 전하게 합니다. 이것이 마치 세련되고 수준 있는 것처럼 보이나 교회를 병들게 만듭니다. 이러한 마귀의 수법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여기 "싫어하여"란 말은 '분개함, 흥분함'을 의미하는 말로서 '심히 격노하고, 크게 불안해하였다'는 뜻입니다. 왜 그들이 분개하고, 흥분하고, 또 불안하고 싫어했습니까?
①사도들이 자신들의 교리와는 반대되는 핵심적인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아주 위협적인 사건이었습니다.
②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였는데 그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전하기 때문에 싫어했습니다.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했습니다.
여기 예수 옆에 3자가 쓰여 있는 성경 밑에 보시면 <예수 안>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안에서 즉 믿음 안에서'란 말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역사적 사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 안에서'란 말은 '예수님을 기초로 하여'란 뜻이며, 예수께서 그의 안에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부활 복음을 전하니까 아주 흥분하고 분개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렵게 예수님을 빌라도의 재판에 넘겨주었고, 판결에 의해 십자가 사형을 행한 지 불과 일곱 주일 밖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귀찮은 예수 일당을 없애버렸고 사건이 마무리 된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예수가 부활했다고 제자들이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예수가 살았을 때보다 백 배나 더 날뛰며 온통 예루살렘을 예수의 분위기로 만들고 있는 것을 봤을 때, 그들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더 기가 막힌 것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외쳐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사도들의 말이 옳고 예수가 부활했다면 저들은 설 곳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③그들이 싫어한 이유는 '성전 맡은 자'는 성전에서 옳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자기들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3절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유대인들은 밤에 심문이나 재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붙잡았으나 날이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어 두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잡혀 끌려 간 곳은 당시 말만 들어도 기가 죽는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이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러한 종교 재판은 성전 서쪽 성벽 밖에서 모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본 절에서 두 단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저희를 잡으매"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잡고, 가둠'은 초대교회 때 사탄이 교회 핍박에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10:17-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잡히고 옥에 갇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으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감옥을 두려워해서 십자가의 피묻은 복음을 감추어서는 안됩니다. 서머나교회 교부였던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갑은 로마 총독이 박해하여 '예수를 모른다'고만 하면 '풀어준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나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예수를 믿고 살아온 지 86년이지만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 그를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그는 스스로 불길을 향하여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고통 중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들이 나를 태우는 이 순간에 내 생명을 다하여 주님을 간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4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우리 생각 같아선 전도하다 잡혀갔으니 전도 받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우리도 잡혀간다고 도망할 것 같은데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할/
예수님의 부활의 도를 증거하던 사도들은 잡혀 투옥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의 입에서 전해졌던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살아 있어서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운동하기 시작했습니다(히4:12). 그 결과 예수를 믿는 성도의 수가 5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120명이었고 행2:41절에서는 3천명이 되었고, 본 절에서는 5천이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신앙에 박해와 압제가 가해지면 질수록 수가 더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코 기독교는 박해한다고 진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부흥의 결과로 가져오게 됩니다.
▶5-6절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재판하기 위하여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나라 최고 재판소인데 한 지파에서 6명씩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제사장이 회장을 맡습니다.
여기 관원이란 대제사장을 가리키고, 장로는 원로로서 모세가 백성의 재판 처리를 위해 '덕과 경험을 지닌 자'를 세운 데서 시작된 지파의 우두머리로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부를 대표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집단이고, 서기관은 율법과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율법학자, 성경전문가를 말합니다.
①'대제사장 안나스'는 주후 7년에서 15년까지 공식적으로 대 제사장 직에 있었으며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한 재판에 깊이 개입했던 퇴임원로입니다. 그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산헤드린 공회를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입니다(요18:13-24).
②'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서 주후18-36년 사이에 장인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의 실제적인 직무를 감당한 자입니다.
③'요한'은 다른 기록에는 '요나단'으로 나옵니다. 그는 안나스의 아들로서 가야바의 뒤를 이어 주후36년부터 대 제사장직을 맡았습니다. 안나스는 교활한 정치적 수완을 이용하여 로마 정부에 비위를 맞추며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을 사위에서 아들로 물려주며 세속적인 영화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문중" 사두개인의 가문과 초기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주동한 집단입니다. 예수님을 잡아죽일 때도 이들이 모여서 죽이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이제 7절부터 재판의 신문이 시작됩니다.
▶7절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의 재판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긴 옷을 입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이 높은 단상 위에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앉았고, 베드로와 요한을 낮은 마룻바닥 위에 서서 질문을 받는 형태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예수님의 이런 질문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받았습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신 다음에 마21:23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우리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은 유보하신 체 그들에게 되물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 오히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너희가'라는 말과 '너희 같은 백성이'란 말은 무지하고 멸시받는 계층을 가리키는 경멸조의 표현입니다.
▶저들이 베드로에게 묻고 있는 심문의 초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슨 권세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느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구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느냐?'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 속에는 종교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권세로 병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른 신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므로 모세의 율법에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신13:1-3). 또 하나는 정치적인 의미인데 '공회에 허락 없이 어찌 종교적 행사를 주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뉘 이름으로 했느냐?" 당시 최고 종교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의 이름을 최고의 불경스러운 이름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신성 모독 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사도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계략이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이라 한다면 이단 사실을 퍼뜨리는 죄가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대답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정죄하려는 악한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들이 이름을 밝히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진리의 문제로 심문을 받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밝히 말하여야 할 책임이 사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설교를 하는 것이 8-1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8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그 자리는 보통의 자리가 아닙니다. 공회원들은 아주 자신 있게 심문합니다. 이들은 얼마 전에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인 사람들입니다. 이번에도 그들이 사도들을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이 말씀은 제사장들을 중심으로한 무리들, 베드로와 요한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그들이 무섭지 않았고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살기가 등등한 그들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들 앞에서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협박을 받고 있는 그 상황에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권력자들 앞에서 그들이 문제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지금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증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 받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요한을 바라보며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묻자 주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여기서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나를 따르라'는 말은 '죽음이 네 앞에 기다린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뜻입니다. 그 때 베드로의 영혼 깊숙이 그 사명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아멘!/
지금 베드로가 자신의 담력이나 인품이나, 웅변술로 말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이 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강하고 담대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믿/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할/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충만하여'란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은 엡5: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이 충만하여 공회원들에게 대답하자 그들은 매우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13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①이 말은 당시의 권세 자들을 인정하여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 부른 것입니다. ②또 책망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백성들을 다스린다고 앉은 관원들, 또 백성을 대표한다는 장로들, 그러니까 백성들을 지도한다고 이끌어 준다고 하는 너희들이 바르게 이끌어 주라는 의미입니다.
▶9절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무슨 말인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악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라 40년 동안 걷지도 못한 앉은뱅이를 낫게 해 주었으니 착한 일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돈을 달라고 했으나 돈을 주지 않고 병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돈보다도 건강해져야 근본적인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착한 일입니까? 또 이 병인이 육체 뿐 아니라 영혼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질문하면 다 이야기하겠다는 것입니다.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의 통쾌한 대답을 보십시요! ①"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마다 자주 쓰는 권위 있는 명령문입니다. '알라' 중대성과 사실성을 확실하게 증거 하겠다는 것입니다.
②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③그분은 '바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④그러나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증거야말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는 큰 반발을 일으킬 만한 말입니다.
⑤"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확실한 증거물을 제시한 것입니다. 재판의 승패는 확실한 증거에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니 무식한 베드로였지만 복음의 핵심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내 앞에 서 있는 너희들이 선동하고 백성들을 혼란케 하여 너희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합작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던 나사렛 예수는 굳게 닫힌 돌무덤을 여시고 살아나셨고, 살아나신 그 분께서 앉은뱅이를 살리셨다. 못 믿겠느냐? 바로 이틀 전까지 너희들이 열심히 드나들던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로 너희를 향하여 손을 벌리고 몇 푼의 동전을 구했던 이 사람이 지금 너희 앞에 서 있지 않은가?' 확증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너무나 당당합니다. 나이 어린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씩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베드로가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산천초목도 떤다는 산헤드린 법정에서 이토록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 법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 선고한 법정입니다. 베드로도 그의 생명이 풍전등화 인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클레이'는 말하기를 '용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닥쳐올 위험을 모르는 무모한 용기가 있고, 둘째, 닥쳐오는 위험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더 고차적이고 냉정하고 계산적인 용기가 있다. 베드로의 용기는 이 두 번째의 것이다'고 했습니다.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시118:22절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시인이 예언하기를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바로 버림받은 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건축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해당됩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잘못된 건축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백성들 가운데 특별히 구별함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당시 성전을 맡은 제사장이나 말씀을 필사하는 서기관이나 구별되게 살아가는 바리새인들은 지상교회를 세울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교회 건축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보는 순간 '저 목수의 가문에서 난 아들이 어떻게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있으며, 더구나 유다의 출신도 아닌 갈릴리 지방 출신이며, 그것도 촌 동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역사가 일어나겠는가?' 하고는 그만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벧전2:4-8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머릿돌'은 기초 석으로 그들이 버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교회의 머리로 사용하셨습니다.
▶집을 세우는데 가장 요긴한 돌이 모퉁이 돌입니다. 모퉁이 돌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⑴알파와 오메가 사역입니다. 집을 지을 때 사방에 모퉁이 돌을 놓습니다. 우리 주님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의 중심에 서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⑵모퉁이 돌 위에 기둥이 세워집니다. 집을 세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기둥입니다. 기둥은 어디에 세웁니까? 모퉁이 돌 위에 세워집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의 집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⑶모든 것이 모퉁이 돌에서 하나가 됩니다. 수평적인 모든 것이 모퉁이 돌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수직적인 기둥도 이 모퉁이 돌에서 세워집니다. 원수 되었던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도 아가페 되신 주님의 화목제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아멘!/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본문을 요약한다면 '오직 예수'입니다. 우리는 이 한 구절 속에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기독교의 유일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본문 12절에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의 핵심입니다. ▶왜 '오직 예수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①존재의 유일성: 히13: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중국에 가면 공자의 무덤이 있고, 인도에 가면 석가의 무덤이 있고, 메카에 가면 마호메트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영원한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산 종교가 있고, 죽은 종교가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종교가 있고, 주지 못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교주가 살아 있는 종교가 있고, 교주가 죽은 종교가 있습니다. 교주의 무덤이 없는 종교가 있고, 무덤이 있는 종교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 종교란 생명이 있는 종교를 말하고 생명이 있다는 것은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교주들은 어제는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존재하십니다. /믿/
②구원의 유일성: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구원이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400회, 신약에서 150회, 도합 550이나 나옵니다.
오늘 12절에서도 '천하인간의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은 결코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14:6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③능력의 유일성: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풍랑도 잠잠케 하셨습니다. 권세를 쥔 자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만 살리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살리신 분입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요1: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④사랑의 유일성: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이 사랑을 엡2:4절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밥이나, 옷이나, 돈이나, 몸을 주는 사랑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사랑은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누가 나를 대신 죽어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거기에는 조건도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그 큰사랑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석가, 공자, 마호메트, 문선명'이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도 다 죽어서 무덤에 있고, 앞으로 무덤으로 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⑴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입니다. 이 땅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마다 교주가 있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자기가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⑵예수님만이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입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모하메드도 맹자도 다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들의 도덕적인 가르침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책임지고 대신 죽어 준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실제로 죽어 주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속죄의 죽음입니다.
⑶예수님의 피만이 속죄의 효능이 있기 때문에 오직 예수입니다. 벧전1:18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요일 1:7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⑷예수님은 생사화복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입니다. 시115:12-13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대소 무론 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 리로다"
오직 복의 근원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한나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모든 인생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절대 주권이 오직 우리 주님'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존재도 오직 예수, 구원도 오직 예수, 능력도, 사랑도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숨질 때까지 신앙하고, 생명을 걸고 파수해야 할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믿/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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