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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강) 스데반의 설교! ② (행 7:30-50)

by 【고동엽】 2022. 3. 10.

(제20강) 스데반의 설교! ② (행 7:30-50)

 

본문의 말씀은 첫 순교자인 스데반의 설교로서 53절의 긴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왜 스데반이 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까?
6:14절에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법정에 고소했는데 그가 하나님의 성전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과 또 모세의 율법을 뜯어 고쳐야 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공회에 끌려가 재판을 받는 도중 변호의 시간을 얻어 설교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스데반의 긴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교의 그릇된 신앙을 역사적 교훈을 통해 질책'하는데 있습니다.
유대교의 신앙의 주축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창12:1-3)이고, 그 다음은 '율법'이고(출16:28), 또 하나는 '성전'(사6:1)입니다. 스데반은 이 세 가지 사안을 중심으로 유대교의 잘못된 불 신앙을 꼬집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설교의 특징 몇 가지를 상고해 보면,
①스데반은 구약의 족장시대의 구속사를 개괄함으로서 자신은 구약을 충실히 믿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믿는 하나님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으며,
②유대교에서 그렇게 감싸고 있는 율법은 그 의문<법조문>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철저히 강조하고 있습니다(갈3:10-14).
③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 제사하는 장소로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지 결코 건물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할/
▶또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유대교의 근본 3가지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①'선민 사상'의 부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또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하는 엄청난 자부심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받았다'고 하는 표시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담대히 말하기를 "할례를 자랑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잘나서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에 대한 고백이 할례이기 때문에, 할례란 감사의 조건이 될 뿐, 자랑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②유대교의 핵심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 훈련 과정으로 주어진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이 율법이 우리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율법을 가지고 얼마큼 지켰느냐에 따라서 의를 평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율법을 지켰다고 교만하고, 율법이 없는 백성을 무시하고 저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을 부정했습니다.
율법을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이 어떠했느냐?'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광야 40년의 생활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광야 40년의 생활을 불순종의 세월이라고, 이스라엘 역사를 실패의 역사로 단정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③'성전'입니다. 성전은 율법의 대안으로 주신 것입니다. 구약에는 율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도 있는데 그것이 성전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 죄인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성전에 나와서 제사 드리고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지은 백성이 성전에 나와서 은혜로 용서 받고,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에 나와서 회개하고, 겸손하게 무릎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생각은 안하고 성전 자체만 자랑했습니다.
'이 성전이 있는 한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에 대하여 스데반은 말합니다. '그것은 성전 숭배이지 하나님 숭배가 아니다.' 이렇게 강하게 외치다 보니 성전을 모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말합니다. '성전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백성과 교통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고, 그 위에 성전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반대로 되면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1-7절의 아브라함의 교훈에서는 하나님의 구속 계시를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전적 은혜로 선택하여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후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구원의 계시를 점차 구체적으로 확신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모세와 율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 성을 깨닫지 못하고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으므로 스데반은 그 점을 집중적으로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 요셉의 교훈을 통해서는 요셉의 형들이 그를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버린 죄악의 씨앗이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그의 제자들을 핍박한 유대인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형제들에 의해 팔린 요셉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어진 사실을 유대인들의 간교한 음모에 의해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유대인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인 죄인들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으로 이어지는 모세의 생애를 언급한 스데반의 의도는 ①자신도 어느 유대인 못지 않게 모세에 대하여 존경하고 있음을 알게 한 것이고, ②모세를 통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행위보다 인간 모세를 숭배하는 유대인들을 질책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스데반은 애굽 인을 살해한 모세의 인간적 혈기와 동포에 의해 쫓겨난 모세의 좌절감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자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역사 하심에 기인한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더불어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과거에 집착하여 선민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모세를 본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의 용사들이 되어야 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채워져 있습니다.
모세의 기사는 20절부터 나옵니다. 20-29절까지는 모세의 탄생과 성장과 애국심과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0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40년이 차매" 하나님의 일은 때가 차야 이루어집니다. 여기 나오는 40년은 모세의 준비의 기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훈련과 준비가 절대 필요합니다.
이제 머지않아 여름이 오면 매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매미울음소리를 잘 들어보세요! 아주 당당하게 울어 됩니다. 매미가 이렇게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기까지는 유충으로 땅속에서 7년 동안 준비하는 기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매미도 노래를 부르기까지는 7년의 세월을 준비한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도 준비기간이 필요합니다. 특히 본 절의 표현을 보면 모세의 미디안 생활이 하나님의 섭리로 되어졌음을 강조하는 문장입니다.
40년의 훈련기간이 지나자 하나님은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에 불꽃 가운데 오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시내 산으로 나오는데 출3:1에서는 호렙산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성경에서는 호렙산을 종종 언약의 산과 십계명을 부여받았던 시내 산과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산의 호칭은 호렙인데 정상부분을 시내 산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삼각산 안에 능력 봉이 있고, 도봉산 안에 오봉이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산 호렙'은 '모세와 하나님과 만나는 산'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 산에 올라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한 산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과 교통한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영적인 교제 장소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여기 '가시떨기 나무'는 '싯딤'나무로서 성막에서 조각 목으로 쓰임 받은 나무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크게는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고, 적게는 모세를 의미'합니다. 보잘것없는 가시떨기 나무와 같은 모세에게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가시 떨기나무처럼 보 잘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만나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출3:3절을 보면 떨기나무가 타지도 아니했다고 했는데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멘!/
여기서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곳은 '시내산 광야'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그 곳은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이 사실을 지적함으로 성전이 거룩한 처소라고 교만에 빠져서 그곳 외에서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의 불 신앙을 환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나시고 자신을 나타내신 곳은 멀리 시내 광야의 알 수 없는 무명의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무슨 장소(성전)에 국한되신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31-32절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본문의 배경은 출3:3-4절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이상한 장면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호기심과 탐구심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신앙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호기심과 탐구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말씀을 우리가 읽고 깊이 묵상하고 탐구해 봐야 진리의 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떨기나무 근처에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두 번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출3:4절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소명입니다. 이 부름은 모세를 통하여 미디안 도피생활의 종말을 고하는 부름이며 사명을 받는 순간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응답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의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 설교의 중심을 보면 바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응답한 것을 주시시키고 있습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했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말씀 속에는 참으로 귀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①나는 너의 조상에게 복을 약속하였고 기름진 땅과 승리로 약속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②지금도 살아 계신 현재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33절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출3:5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명하셨습니다. 하나는 '네 발의 신을 벗어라!'이고, 또 하나는 '너 있는 곳은 거룩한 땅 이니라'입니다.
①'신을 벗어라'는 무슨 의미인가? 신이란 지금까지 걸어온 그 인생의 발자취입니다. 모세가 '닦아놓은 것'과, '노력해 온 것'의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그대로 서라는 의미입니다.
▶몇 가지로 알아보겠습니다.
⑴'인간의 죄를 벗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신발을 신고 간 곳, 온갖 것을 다 가지고 죄를 지었습니다. ⑵'자신을 포기하라!'는 의미요, ⑶'종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옛날 노예들은 신발이 없었습니다. 종은 무조건 순종의 의무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⑷인생의 '새 출발의 신호'입니다. 신을 신는다는 것은 활동을 의미하고 신을 벗는다는 것은 인생의 끝을 의미합니다.
"모세야 네 신을 벗어라!"고 한 것은 '네 인생은 이제 끝이 났다. 그리고 모세 너는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는 신이 없습니다. 엄마가 업고 다닙니다. '모세야 네 발로 걷지 말고, 내가 걷게 하리라'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걷게 해 주셔야 합니다. 시121: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할/
②'거룩한 땅'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은 땅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선 곳을 결코 거룩한 땅이 될 수 없습니다. 평당 몇 억 호가하는 명동 중심가도 아니요, 강남 1번지의 땅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광야의 기름진 땅도 아닙니다.
그 땅은 삭막한 사막 땅입니다. 버려진 땅이요, 저주의 땅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땅을 거룩한 땅이라고 합니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모세를 부르시는 거룩한 사역을 하신 곳이기에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땅, 하나님이 일하시는 땅'이 바로 이곳이 거룩한 땅입니다. /믿/ 어떤 사람은 자기 가정을 우습게 평가합니다. '못난 부모, 유산 없는 가문', 그러나 비록 가난하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이 내 가정을 통해서 일하시는 한 거룩한 가정입니다. /아멘 입니까?/
오늘 이 자리가 거룩한 자리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 이곳에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거룩한 곳이고,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표현해 보면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를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져 주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하나님이 삶의 현장에서 책임 있게 지켜 주실 줄 믿습니다. /할/

 

▶34절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출3:7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①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고통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②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③그 우고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보고, 듣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믿/ 하나님은 고난 받는 성도의 사정을 보시고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 수고를 알아주십니다. 한마디로 인격적인 하나님! 멋쟁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멘!/할/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파송을 하십니다. 사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몇 번 거절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부름 받은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①감사하라!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존재들이 못됩니다. 자격이 있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요, 경력이 화려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의 계획 가운데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감사한 것입니다.
②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져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③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고전4: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이란 온 정성을 다 쏟는 것입니다.
④모든 사람들 앞에 신앙의 본과 덕을 세워라! 원래 '본’'이란 뜻은 '펜글씨 배우는 사람을 위해 점을 찍어서 이렇게 쓰라고 견본을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즉 모방을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도 자신 있게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35절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40년 전에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의 동족을 못살게 하는 것을 보고 의분을 느껴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이튿날 유대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왜 한 민족끼리 싸웁니까?' 했더니 그 동족이 하는 소리가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하면서 살인사건을 폭로하겠다고 합니다.
그때 모세는 살인자의 죄악이 드러날까 봐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세를 가시떨기 가운데 불러 40년 전에 모세를 거절하던 유대인들에게 '속량하는 자'로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의 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를 누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거부한 유대인들의 태도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가 동일하다는 의미의 설교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구속자인 모세를 거부했듯이 구세주이시며 심판 주로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입니다.

 

▶36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오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10가지의 재앙 뿐 아니라 반석을 쳐 생수를 내었고,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고, 두 손들고 기도할 때 아말렉 군대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광야 40년은 바로 기적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기적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허락하셨습니다.

 

▶37절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신18:15-1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메시아를 기대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모세와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너희가 죽인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예언하신 선지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모세가 전했던 메시지 중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이 메시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흔히 모세가 전한 중요한 메시지는 십계명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모세가 전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신18:15-16절의 오실 예수님을 전한 메시지입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했는데 모세야말로 특수한 선지자입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직분을 분할시켜 놓았습니다. '제사장, 선지자, 왕'입니다. 사회적인 것은 왕이 다스리고, 교회는 제사장이 다스리고, 교회가 잘못 되었을 때, 책망, 예언은 선지가가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선지자가 제사장을 향하여 많이 책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만은 이 세 가지 직분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제사장 이전의 제사장이요, 대제사장을 세운 사람이 모세입니다. 아론을 기름 부어 대제사장을 세운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3직을 가지신 분입니다. 즉 '제사장, 선지자, 왕'직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할/

 

▶38절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여기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성전 관을 고쳐 놓고 있습니다. '광야교회'라 함은 광야에 모인 회중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명령받은 대로 광야에 성막 성전을 세웠는데 그것이 광야교회입니다.
그 성막 성전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철수되고 멈추면 다시 설치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성전 건물을 우상시 하는데 건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려고 광야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생명의 도'를 받아 신앙으로 양육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광야교회는 건물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모이고, 믿음 있는 성도가 모이면 말씀을 듣는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 즉 죄악으로부터, 멸망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의 도를 받고 그 생명의 도를 증거 하는 곳입니다.

 

▶39절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이 구절은 민14:3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철저한 노예근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몸은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었지만 마음과 생각은 애굽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을 출애굽시킨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을 전혀 모르고 차라리 애굽에서 고통 당하는 것이 광야에서 고통 당하는 것보다 낫겠다고 불평합니다. 스데반은 여기서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하고 과거에 집착했던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천국을 허락하셨건만 그들은 그 약속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40절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출32: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주야를 금식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은 그 새를 못 참고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합니다. 이 표현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 기업으로 약속 받은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하는 것보다 애굽을 더 사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 천국을 향하는 마음보다 죄악된 이 세상을 사모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하여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세가 눈앞에 보이지 않자 아론에게 달려와 애굽의 우상을 만들자고 강요합니다. 당시 애굽의 우상인 송아지 숭배는 대단했는데 그 중에 '아피스' 송아지 숭배가 제일로 하려했다고 합니다.
'아피스'는 검은 수소로 이마에 네모난 점이 있고, 등은 독수리 모양으로 만들고 여러 가지 장식을 하고 호화로운 공중에서 살게 했을 때, 그 소가 거리를 행진하면 백성들은 길가에 나와서 '아피스'를 숭배했다고 합니다. 그 소는 자연사하지 않고 약25년이 지나면 물에 빠져 죽게 한 후에 미이라를 만들어 신전 무덤에 장례를 하고 섬겼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41-42절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탈무드에 보면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 지은 최초이자 마지막의 가장 가증한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회당예배에서는 이 사건을 직접 언급하기를 꺼려했고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은 이방인 계승자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
또 어떤 랍비들은 금송아지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그 사건으로 인해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 드렸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여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한 사실을 꼬집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데반의 의도는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마음을 온전히 드린 것이 아니라 마음 한편으로 우상을 섬긴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생활에서 너희를 보호하였고 지켜주었건만 너희가 정말 나에게 희생과 재물을 드린 일이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 말의 뜻은 '희생과 재물을 드렸다. 그런데 거짓으로, 형식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의 규정에 따라 형식상 제물을 드렸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신 제사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예배는 형식이 아니고 마음에 있습니다. /아멘!/

 

▶43절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우상을 섬긴 죄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몰록'은 놋쇠를 만들어져 있으며 황소머리에 두 팔을 벌리고 서있는 형태를 지닙니다. 사람들은 우상의 팔 가운데 어린아이를 산 제물로 바친 후에 밑에서 불을 놓아 어린 아이를 태워 죽이는 제사입니다(왕하23:10). 또 '레판의 별'(일월성신)을 섬겼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암5:25-27절에 있는 말씀으로 하늘에 있는 별까지 섬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이스라엘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함으로 바벨론 70년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44절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지는데 지성소 법궤 안에는 '십계명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45절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도 가나안에 장막 성전을 세우고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이 장막은 여호수아를 거쳐 다윗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모세 때부터 다윗 때까지를 500년으로 봅니다.
그 500년 동안은 건물을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천막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있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천막 아래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고 했으나 하나님이 허락지 않아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것입니다.

 

▶46-47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여기서 스데반은 솔로몬 성전이 여호와 신앙의 타락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솔로몬의 성전을 냉소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건물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의미로 바뀌었음을 진술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48절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라니 선지자의 말한바"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바뀌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성소의 찢어진 것과 연관시키는 말씀입니다.

 

▶49-50절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사66: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성전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역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으로써 하나님이 거하신 영원한 처소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수많은 이방 세계의 신전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들의 신을 위한 거처로 생각하고 있는 그 생각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성전을 무시하거나 없애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우상화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로 깨달아 바로 섬겨야 할 것을 스데반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근본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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