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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권세설교 30편

능력은 있는데, 권위가 부족하다 마7:29, 5:9

by 【고동엽】 2022. 2. 27.

1. 장기적 목회는.. 권위가 서야 합니다.

 

▶서론/ 지난 가을, 장신대 신대원 72기 목사안수 3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했습니다.

강원도 평창에 있는 영성수련원에서 1박 2일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기념 예배에 이어 친교의 시간을 갖고 나서 방마다 여러 명의 목사님들이

밤을 세워가며 지난 30년간의 목회 경험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참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대개 목사가 능력이 있으면, 목회에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목사의 능력,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30년의 목회 발자취를 뒤돌아보니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동기 목사님 중에는 능력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세상적 리더십의 능력과 아울러)

특히 영적 능력(권능)을 받은 분들도 많습니다.       *능력=권능=power

 

이들 능력자들은, 목회 시작부터 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분 들이 어인 일인지

처음 시작과는 달리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분쟁이 일어나서

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분열이 일어나고, 

교인들이 깊은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 목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처음 지하실에서 시작한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하여

2층 임대 상가로 옮겼고, 이어서 상가 건물을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다시 땅을 사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교회 성장에 가속도가 붙어서,

중직자도 세우고, 각부서도 정비해서,

교회의 체제가 갖추어져 이제는 건실한 교회의 기초가 이루어졌다고

한숨 돌리는 순간.. 교회에 큰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장로님을 위시해서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목사님은 실의에 빠져 기도원에 가서 뼈저린 회개기도를 드리며

"앞으로는 절대로 교인들과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고 다짐했습니다.

 

그 분은, 어느 정도 교회의 상처가 아물고, 다시 재도약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회자와 교인 사이의 문제가 아닌,

교인 상호간에 분쟁이 일어나.. 많은 교인들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교회에 화평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 동력을 받아 부흥하기 시작하면

또 예기치 않은 일로 분쟁이 생겨

교회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후 목사님은 정년이 되어 원로 목사로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후임으로 오신 담임목사와 원로목사의 갈등으로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교회는 또 큰 위기에 봉착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목회하신 교회는, 말하자면,

목사님의 능력이 탁월해서 아주 큰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분쟁’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제구실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어느 목사님은 모든 면에서 우수한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시작부터

큰 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을 받아, 순조로운 목회를 시작 헸습니다.

 

모든 면에 능력이 뛰어난 분이라..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고,

많은 동기 목사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목사님은, 교회를 사임하고 다른 교회로 옮겼습니다.

 

그 교회에서도 처음 부임하고서는, 교회가 부흥했으나,

얼마가지 않아서 또 교회를 옮기는 악순환을 계속하다

지금은 지방의 어느 조그만 교회를 담임 하고 있습니다.

 

또 어느 목사님은 우리 교단에서 잘 나가는 엘리트 목사이었습니다.

개척한 교회는 급성장해서, 모든 동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온 교회 교인(장로, 권사, 안수집사, 평신도들까지)들로부터

목사님에게 교회를 떠나달라는 최후통첩을 받았습니다.

 

그 대신 교회에서는 목사님에게 충분한 개척 자금을 주기로 합의를 봤으나

안타깝게도 목사님은 청천벽력과 같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으나

얼마 안 있어 그만 하늘나라에 가고 말았습니다.

 

또 어느 목사님은 70명 모이는 작은 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해서

2천명 교인의 대교회로 성장 시켰습니다.

총회장으로 출마하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회를 사임하고

60이 넘은 나이로, 다시 교회를 개척 한다고 합니다.

 

▶정리하면

과연 이러한 ‘능력’ 있는 목사님들의 목회에        

어려운 일들이 닥쳐와 치명타를 입히는 원인이 무엇일까? ..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저는 목회는 능력(권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권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권위: authority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2. 아버지 상실의 세대 (권위가 사라진 세대)

 

헨리 나우웬은「상처 입은 치유 자, The Wounded Healer」에서

내일의 세대(21C)를 <아버지 상실의 세대>라고 정의 했습니다.

즉 21C를 권위가 서지 않는 세대로 규정했습니다.

 

다음은 어느 초등학교 어린이의 글짓기에서 나온 글입니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예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와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기가 막히고 슬프지만, 현세대는,

가장(家長)의 권위가 땅에 떨어 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교권의 실추는 교육의 위기를 가져왔고,

 

정치인들의 권위는 최 하위권으로 추락했습니다.

언제 부터인가 대통령의 호칭을 YS, DJ 라고 하더니

지도자의 위상을 폄훼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계 지도자들의 위상이 추락할 대로 추락하고, 

교역자의 권위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목사들은 권위주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릅니다.

목사는 오로지"권위 있는 자"가 되어야 목회가 가능합니다.

 

▶1. 권위는 긍휼에서 나온다

헨리 나우웬은 "없는 권위를 사용하려다 실패의 고배를 마시지 말고

<긍휼>로 목회를 하라"고 대안을 내 놓았습니다.

 

긍휼은 권위와는 정반대 개념입니다.

권위에 안주하던 목회자들이

긍휼로 목회 페레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2.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물론 긍휼도 참으로 유효한 방법이지만,

목회자가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는 것이 나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이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수로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겠습니까?

 

헨리 나우웬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21C는 인간의 권위를 세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권위 있는 존재가 되려면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권위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7:29, 21:23-27)

 

이 권위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권위입니다.

왜냐하면 이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에는

귀신도 무서워 떨며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당시 권위라고는 전혀 없는 제자들에게

이런 신적 권위 divine authority를 주셨습니다.

 

오늘의 목회자도,

주님께서 주시는 바로 이런 신적 권위를 부여받아야

현대 목회의 험난한 파고를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 도다 하더라."(막1:27)

 

◑3. 능력은 있으나, 권위가 약화된 현실

 

*능력 : power, 두나미스, 권능으로 번역되기도 함. 같은 말.

*권위 : authority, 엑소시아, 권세로 번역되기도 함. 같은 말.

 

능력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성령께서 주신 권능’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재능은, 교회의 양적 성장은 가져 올 수 있으나

영적 부흥은 불가능 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신 권능을 받아야만, 참다운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성령의 권능은, 교회 부흥에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나,

교회의 분쟁에 취약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입니다.(고전1:7)

성령의 9가지 은사를 다 가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신령한 교회가 되지 못하고

시기와 분쟁, 당파 싸움으로 얼룩진 교회로 나타나 있습니다.(고전3:1-4)

 

왜 그럴까요? 교회에 권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능력(권능)만 있으면 부흥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놓으면

놀랍게도 시기와 분쟁과 당파싸움이 일어납니다.

 

이 때 교역자들은 더욱 강력한 권능을 받아 이를 제압하려고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부작용만 낳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시점에 와 있습니다.

 

해결 방법은 권능이 아니라.. 권위인 것입니다.

(권능은.. 어느 정도 주어져 있습니다. 계발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권위는.. 물론 어느 정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위로 목회를 하게 되면, 사탄도 순종하게 됩니다.

어떠한 악의 세력도 감히 도전장을 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사람에서 나오는 권위(권위주의)가 아닙니다.

 

21C는 권위가 상실된 시대입니다.

없는 권위를 부리려면 권위주의가 됩니다.

권위주의는 교회를 황폐케 합니다.

 

참된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권위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즉 권위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5:9)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권위를 복으로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권세는,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런 힘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화평하게 하면, 피스메이커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귀신들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 주시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면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가..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거지 옷을 입고 있던 왕자가

거지 옷을 벗어버리고 왕자의 옷을 갈아입으면

그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권위가 서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권위로 목회를 해야 비로소 바람직한 목회를 하게 됩니다.

 

 

◑4. 이제 화평케 하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권세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귀신들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 주시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면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가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나타나지기 때문입니다.

 

이 권위로 우리가 목회를 해야 비로소 바람직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5:9)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화평하게 한다’는 것은, ‘온유한 자’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누가 싸움을 걸어 올 때 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그래서 온유한자가 되면 땅(사람의 마음을 밭, 땅이라 표현)을 차지하게 되나(마5:5),

그러나 화평하게 하는 자는 싸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원수가 제 발로 찾아와 화평을 자청하게 해주심을 받게 됩니다. 할렐루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그 뿐만 아니라 싸움이 있는 곳에, 화평하게 하는 사람peacemaker이 가면,

모든 싸우던 사람들이 다툼을 멈추고 화평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화평하게 하려면 타협을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결단코 비 진리와는 타협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진리가 비 진리와 타협이 되면

이는 화평이 아니고 세속화(世俗化)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리(정의)를 위해서는

불의한 자를 힘으로 이겨서 화평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결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해서는

절대로 화평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불의한 자를 힘으로 제압해서는, 더 더욱 화평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자만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우 단순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의(義)를 이 땅에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면 사람의 의(自己 義)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3)

 

그렇습니다. 인간이 자기 의로써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대개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자는 다른 사람을 멸시 합니다.(눅18:9)

 

왜냐하면 인간의 정의(자기 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와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 자를 비판하게 되고,

힘으로 제압해서 이겨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자기 의)로는 싸움이 있을 뿐 화평하게는 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서 이루어 가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화평하게 해 주십니다.

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면.. 권위(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를 받게 됩니다.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위가 있어야

참 목회를 할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지금까지 말씀드린 제 글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됩니다.(잠16:7)

 

2. 화평하게 하는 자가 권위(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를 받게 됩니다.(마5:9)

 

3.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위를 받아야 참된 목회를 할 수가 있습니다.(마7:29)

 

 

◑5.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인간적인 자기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서 이루어 가야 합니다.(롬10:3)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의(義)를 부인해야 하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마16:24)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법은 참으로 특이 합니다.

이를테면 불의와 싸우는 전투에는 참으로 신묘한 전술 전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싸우는 자는

적(불의한 자)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을 생각해봅시다.

의로운 분은 예수님이시고, 불의한 자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취하신 전략은

불의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당신 자신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모든 악의 세력을 깨트리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신 것입니다.

 

혹자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치부하고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로 승리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이 때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권위를 부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빌2:5-11)

 

그러기에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깊이 성찰해 봐야 할 것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열세라서 세인의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고

화평이 없기 때문에, 즉 싸움질만 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각성해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싸움만 하는 자는 마귀의 자식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각 교단의 갈등과 다툼, 개 교회의 분쟁 따위로

사랑의 기독교, 화평의 기독교를

온통 갈등과 분쟁과 싸움으로 얼룩진 이 세대에

진정 필요한 인물은 도대체 누구이겠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정치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견제하면서

정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치 원리인데

 

여야가 무조건 반대하고 헐뜯고, 싸움질만 하니

어떻게 국민들의 눈에 정치인들이 정상인처럼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평한 가정, 화목한 가정, 이런 가정이 천국이지

아무리 부유하고, 고관대작의 가정이라도 싸움만 하는 가정은

지옥 바로 그 자체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화평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만이 올바른 인성을 가지게 되고,

건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컨대 결론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권위(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를 받게 되고,

또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특별히 목사님들은 이 십자가에서 나오는 권위로 목회를 해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빌2:5-11절을 각자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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