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거룩한 탄식 롬7:15-25
◑자신에 대해 탄식하는 사도바울
본문 로마서 7장을 읽는 성도들 중에는 당황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하는 통로가 될 정도로, 성령님께 사로잡힌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 고백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표현들이
본문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음을 경험하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율법의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이
여전히 죄 아래에서, 죄의 포로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보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5절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18절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압니다'
19절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24절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이러한 고백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그래서 이런 고백들은, 사도 바울이 과거에 불신자 였을 때
회심하기 이전의 상태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바울이 회심은 했지만
여전히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있을 때였다' .. 라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복잡하게 하며
7장에 나타난 복음의 메시지를 더욱 잘못 이해하게 만듭니다.
▲로마서의 전체 흐름으로 볼 때,
로마서 1~3장까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
4~5장,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덧입음으로 의롭게 됨을 말씀했습니다.
6장,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가 됨을 말씀했습니다.
7장, 그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므로, 율법의 대해서도 죽은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7장 후반부에 이르러
롬1~2장에 나타난 불신자의 상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그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 설명 한다는 것은.. 논리의 흐름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문법적으로 보면
7:13절까지는 과거시제를 사용하다가
7:14절 이후부터 현재시제를 사용했습니다.
헬라어는 매우 정교한 언어이고, 특별히 시제가 중요한데
14절부터 현재시제를 그가 사용했다는 것은
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사도바울의 상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오죠.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여기서 '속 사람'은, 이원론적으로 인간의 몸과 영혼을 분리하는 속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는 성도들 안에 새 생명으로 인하여 태어나는 '새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그 '속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불신자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표현이죠.
21절에 보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라고 했습니다.
선한 것을 향한 강한 열망과 의지가 있습니다.
비록 원하는 만큼 선을 행하지 못할지라도
선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습니다.
또 16절에 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면, 나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 선하다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이런 갈등, 모순...
이런 문제가 율법이 선하다.. 라는 증거라는 겁니다.
▲롬7:1~14절에서는,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
율법을 통한 죄와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했죠.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죄를 죄되게 하고...
그러나 율법이 죄는 아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능력은 없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규정해 주지만
죄로부터 건져줄 능력은 없다.
율법은 의가 무엇인지 그 기준은 알려주지만
우리를 그 수준으로 끌어올릴 능력은 없다...
우리 안에 있는 이 갈등은
율법으로 인해 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며
우리가 그 수준의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이기 때문에
율법이 선하다는 증거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가 계속해서 7장까지 흘러온 논리적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23절에서 바울이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포로로 잡아 가는 것을 본다'
이런 표현을.. 그가 항상 죄에 대해 패배하고 죄악가운데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는 영적인 눈으로, 자기 안에 있는 이 죄가, 자신을 어떻게 공격해 오며
자신을 어떻게 사로잡으려 하는지.. 그 실제를 영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쓴 것이죠.
항상 반복해서 죄를 짓는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탄식과 절망은 ..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
그렇다면 앞서 말씀드린, 사도 바울의 고백 이라고 보기 어려운..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 나는 비참하다. 사망의 몸이다' ...
라고 하는 본문의 이 고백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탄식입니다.
성도가 거룩함에 더 이를수록 나타나는 탄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욱 거룩해질 수록 이러한 탄식이 나옵니다.
거룩함에 이를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더 깊이 보게 되고
더 예민하게 보게 되고, 더 세밀하게 보게 되기에
내 안에 있는 이 죄의 실체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때 느끼는.. 그러한 탄식과 간구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은 선인데,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하고 있는 나 자신..
그것을 분명히 볼 수 있고, 그로 인하여 나 자신의 비참함,
사망의 몸과 같은 자신의 실상을 보고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나아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죄를 자각한 그리스도인의 탄식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가운데, 가끔 구원의 확신으로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과연 구원 받았을까?' 그런 고민이 있는 분이 계시죠.
제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개런티 하지 못하지만
그런 분들은 대개 다 구원받으신 분들입니다. 왜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아예 그런 고민 자체가 없어요.
구원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어요.
그런 고민이 있다는 자체가, 구원 받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분이에요.
그런 고민을 통해서, 나중에 더욱 견고한 확신에 이르기도 하지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의로운 성도 saints 들은 동시에 죄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을 덮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죄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며
죄의 갈망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의사의 진료가 필요한 아픈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심각하게 아프지만, 오직 소망 안에서 건강하다.
점점 더 나아지기 시작하는 한, 그들은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롬7장에 나타난 이 바울의 고백은
죄에 대하여 죽고, 율법의 대해 죽은 자로서
거룩한 구원에, 약속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성도의 거룩한 탄식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도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거듭난 이후에, 곧바로 완전한 거룩을 이루었다면
이러한 연약함, 탄식은 필요 없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거듭난 직후에, 완전한 거룩에 이루지 못했다면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러한 거룩한 탄식을 (바울처럼) 경험하게 된다는 거죠.
오히려 이런 탄식이 없는 것이 문제요, (진정 구원 받았는지) 의심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더욱 거룩함에 이를수록,
자신의 더 깊은 죄를 보고 탄식하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여러 서신서들을, 시간 연대순으로 배열해 놓고
초기의 자신에 대한 고백과, 후기에 자신의 고백을 비교해보면
뚜렷한 특징이 나옵니다.
그것은 자신이 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는 겁니다.
비교적 사역 초기에 썼다는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사도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비교적 후기에 쓰여진 목회서신에서
자신에 대한 고백을 보면, '나는 죄인들 중에 괴수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사역초기부터 말기로 갈수록
더 심각한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고백을 했을까요? 분명 아닐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백을 했을까요? No
죄에 대한 민감성이 더 깊어졌다는 거죠.
예수님을 믿고 믿음 생활을 하면서,
믿음의 초기보다 믿음이 더 원숙해지고, 더 거룩해 질수록
과거에는 죄로 느끼지 못했던 것 마저, 다 죄로 느끼고
더 깊은 회개와, 하나님 앞에 탄식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더 깊이 깨닫고
우리에게 주어진 상태인..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이,
성령의 거룩한 탄식을 더 갈망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거룩한 탄식'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성령 아래 있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본문 로마서 7장 다음에 8장을 보면,
8장은 성령 안에 있는 성도들의 안전과, 확신과, 능력을 말해요.
7장의 탄식은 마치 (거룩한 목마름, 갈급한) 메마른 땅과 같고
8장에 그 위에 성령의 단비가 내리듯이
본문 7장의 이러한 갈급함, 이런 간절함, 이런 탄식 이후에
8장에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므로 롬7장의 바로 이 부분에
거룩함에 이르기를 사모하며, 죄와 싸우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누리기를 원할 때,
우리는 성령님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 일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성도의 거룩한 탄식 가운데 나타난, 중요한 진실들이 있습니다.
▲1. 우리의 원함 자체가, 우리의 행함은 아니라는 것이죠.
15절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증오하는 것을 행한다.'
19절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선한 소원이 있으면,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원함(마음) 자체가 행함은 아닙니다.
그러한 소원 조차도 없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행함이 없다'는 면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가장 진실한 소원(원함)도,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열매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원함, 소원 자체가, 내가 의로운 삶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행함의 열매에 이르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죄의 법의 포로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원함은 있지만 행함으로 나타나지 못 할까요?
오늘 본문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이 이 죄의 세력이, 우리의 소원, 우리 원함보다 더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
저절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에요.
믿음으로 싸워야 하는 것이고
약속을 주장해야 되는 것이고
의의 종으로 자신을 드려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자신을 의의 무기로 드린만큼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누릴 때, 죄는 호락호락 우리를 포기하지 (놓아주지) 않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가 완강히 거부했고, 10가지 재앙을 받고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어 줬지만
또 백성들을 뒤쫓았죠.
바로의 군대가 홍해바다에서 다 수장 될 때까지, 그는 완강하게 뒤쫓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가 언제까지 우리를 따라옵니까? 천국 문에 이르도록 따라온다는 겁니다.
결코 쉽게 우리를 내어 주지 않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두 차례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다'
이것은 나쁜 잘못을 해놓고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내 속에 죄가 한 거야'
이렇게 자신을 변명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 할 수 있죠. 그런 표현이 아니라
'나는 이런 존재이다. 나는 원함은 있으나 행함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판결을 내린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우리 원함보다 죄의 세력이 더 강하다면
결코 소원하는 것, 선한 것을 원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 무엇이 더해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인 거죠.
성령님께서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충만히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자로, 보혜사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늘 가까이 계시므로, 우리에게 힘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롬7장 이후에 8장에서, 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에 대한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우리 자신은, 자신을 모른다는 겁니다.
7:15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뜻이 아니죠.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장 칼뱅은 <기독교 강요> 제1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먼저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자신을 아는 지식이 따라온다는 것이죠.
세상 일반 종교는,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하나님이 있다' 이런 말을 맞는 것처럼 하지만
틀린 말이죠.
우리 자신을 아무리 들여다봐야,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마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 되면, 비로소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를 그때(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알게 되죠.
죄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얼마나 분열시켜 놓았고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얼마나 망가뜨려 놓은지를
하나님을 알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의 영혼육이 얼마나 파괴되어 있고, 망가져 있는지를 알게 되고
우리 영혼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나 자신을 아는 거 같지만
성령 안에 있지 않으면 '나를 모른다'는 거죠. 이게 사도 바울의 고백이죠.
25절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분열되어 있다는 거죠.
마음과 육신이 분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옛사람의 영향력, 옛 자아의 영향력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그러나 내 마음은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이렇게 분열되어 있는 모습,
이것은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본다는 게 아니라
거룩함을 이루어 갈 때, 우리 안에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때로는 내가 어느 편에 서야, 진짜 하나님 편에 서는 지를 알지 못하는 때도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동일한 내 안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와
악을 행하기 원하는 내가 함께 존재한다... 얼마나 절망적 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내 안에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알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 나의 영과 혼과 육이 이렇게 파괴되었고, 이렇게 분열되어 있구나!'
'내 안에 이런 갈등이 존재하는구나!' 이것이 오히려 희망입니다. 절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 갈등이 없습니다.
때로 여러분, 성도들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보고, 어떤 분들이 부러워합니다.
'저렇게 그냥 갈등없이 살면 얼마나 편할까?'
(성화에 대한) 고민이 없어요. 기준(성경)이 없으니, 그저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죠.
갈등이 없으니 편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게 아니라, 절망이에요.
오히려 이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이 죄의 법을 따르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마는
그러나 이러한 탄식이 희망인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의 증거이고, 온전한 구원으로 나아가는 증거 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늘 나 자신을, 나도 모르는 것 같은 그런 시간이 있다는 거죠.
이것은 잠깐의 절망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기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분열되어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열된 내면이, 어떻게 하나로 통합 될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22:37~38절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명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되는 계명이다'
마음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가복음에서는 '힘을 다하라'
왜 이렇게 구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냥 '너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셔도 될 텐데
왜 이렇게 구분하여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내면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지만, 힘을 다 하진 않아요.
뜻은 있지만, 생명은 다하지는 않아요.
이렇게 우리는 내면이 파괴되고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나도 나 자신을 모르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하나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사랑하는 목적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온전한 인간, 온전한 구원 받은 영혼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일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전 인격이 하나되어, 우리 영과 혼과 육이 온전함을 이루는 것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모든.. 이 새롭게 태어난 새 생명이
우리의 겉사람을 다 내버리고, 온전한 인격으로 통합되게 하시는 일,
그 일은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어요.
그래서 롬7장의 탄식 이후에, 롬8장에서 성령님의 역사와, 그분의 사역과 축복이
이어져 나오는 겁니다.
▲3. 이 거룩한 탄식 속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는 진리가 나옵니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울은 탄식 했습니다.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짧은 대답이지만, 분명하고 정확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나를 이 상태에서 건져 주실 것이며
그리고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거죠.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만 믿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그 분 안에, 그 분과 동행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분이 구원의 문이지만, 또한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문인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문 과 길'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좁은 길로 쭉 가다가, 나중에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정반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 길은 좁고 협착하다' 그랬어요.
예수님이 '좁은 문'이고, 그리고 이후에 그 길로 걸어가는 것도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를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고,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이 사망의 몸에서 온전한 구원을 받는 길이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롬7장에서, 이 갈등 속에 있는 탄식을 했죠.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말씀이,
비교적 그의 사역 후기에 기록된 빌3:10~12절에 나타납니다.
빌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
3:12 나는 이미 얻었거나 이미 온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좇아갑니다.
이는 나도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놀라운 고백 아닌가요.
'나는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온전해 진 것이 아닙니다. 알기 원합니다. 이르고자 합니다.
붙잡으려고 좇아갑니다...'
이 고백을 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그 로마서를 통해 복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기록한 사람이 '알려고 한다. 이르지 못했다. 붙잡으려고 좇아간다고요?
그분의 부활에 이르고자 하고, 그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지식적인 정보를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삶으로 체험 하기를 원합니다.'
'원함에 그치지 않고 행함으로 나타나길 원합니다.
내 안에 있는 나의 대한 진실을 바로 알고, 올바로 나 자신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열망과 갈망이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나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면, 누가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가 '아직도 알려고 한다'면, 누가 '나는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다 안다' 그래요.
단어를 아는 거지, 그 의미와 체험을 아는 것은 아닌 거죠.
기억하십시오! 익숙함이 성숙함은 아닙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내가 성숙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익숙해지면 사라지는 게 있습니다. 갈망과 갈급함입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 반드시 나타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이 사도 바울의 갈급함 입니다.
내가 이제껏 신앙 생활을 오래 했는데,
그저 신앙생활에 익숙한 것인지, 아니면 신앙이 성숙해졌는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본문의 바울의 탄식과 바울의 갈망이 있습니까?
성숙으로 나아온 겁니다.
그게 없다면 그저 익숙한 것뿐입니다.
그저 익숙한 것이 신앙 생활이라고.. 내가 다 안다.. 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런 마치 성경 지식이 조금 있다고, 내가 성경을 다 안다고 여기는 것과 같죠.
그래서 저는 성경공부 교재 가운데, 제일 싫은 제목이
무슨 '관통, 꿰뚫기, 마스터' 이런 단어가 들어있는 게 정말 싫어요.
그냥 그런 교재를 안 봐도, 그런 강의를 안 들어 봐도 알 것 같아요.
'어떻게 저렇게 교만한 이름을 지을 수 있을까?'
역사 이래로 성경을 꿰뚫은 사람은 없어요.
성경에 꿰뚫림 사람만 있을 뿐이에요.
성경을 마스터 했다?
지식으로는 다 암송하고, 시험 봐도 100점 맞을 수는 있겠죠.
그러나 소원이 행함은 아닌 거죠.
사도 바울의 이 겸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부활의 이루고자 한다... 붙잡으려고 좇아간다...
언제까지?
천국문에 이르도록!
좇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성숙은 완전함이 아니라, 완전함을 향한 간절한 갈급함이죠.
그 출발이 어디입니까?
롬7장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이러한 탄식이 있는 사람은.. 간절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탄식이 없는 사람은.. 조금 알면, '나는 다 이루었다. 무엇이든지 내게 물어보라'
그렇게 교만에 빠진 거죠.
익숙하면.. 갈급함이 없이 교만에 빠지게 되어 있죠.
이미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약속 있지만,
이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이것도 믿음으로 우리가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거룩한 성도의 탄식이,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 아래에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과 권능 아래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이 은혜가 우리에게 은혜로 누려지는 것이고,
원함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가게 되는 거죠.
나의 분열된 모습을 바로 알고, 직시하고
통합된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거죠.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간절함이
우리에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롬7장에서의 탄식이
이제 롬8장에 성령님에 대한 사모함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주를 기대하십시오. 로마서 7~8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기를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의 거룩한 탄식을 보며
우리에게도 이러한 탄식이 있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죄인 줄도 모르고, 우리 자신의 분열된 모습도 모르며,
그저 (거룩함을) 원함을 (거룩함의) 행함이라 착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더욱 갈급함과, 갈망하며, 추구하며, 붙잡으려고 따라가며 좇아가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동행하기를 더욱 갈망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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