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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by 【고동엽】 2022. 2. 17.

한국 교회사

 

한국 교회의 역사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매우 독특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과정을 보아도 그렇고, 교회의 놀랄 만한 급성장과 극심한 고난 등이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향하여 분명한 뜻을 가지고서 역사하셨음을 깨닫게 한다.

 

 한국의 샤머니즘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과정에는 편의상 그 이전의 경교와의 접촉 및 카톨릭의 전래 과정이 포함된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Nestorius)는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전파되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지배하고 있었고,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신라에 경교가 전파된 흔적이 발견된다. 카톨릭은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접촉되었는데, 일본을 통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소소 행장이 이끄는 일본군인들이 카톨릭교인들이었고 그 군대의 종군신부로 세스페데스가 내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을 통해서는 아담 샬, 주문모 신부 등이 카톨릭 전래를 위하여 힘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능동적으로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하여 먼저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 천주교 신부들을 초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개신교 역시 이와 유사하게 로스(J.Ross) 및 이수정에 의하여 번역된 성경들 또는 한문성경을 통하여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한국내에 개신교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된 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개신교와 카톨릭은 자생적(自生的)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개신교는 카톨릭과 달리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특성이 초기부터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는 2가지의 커다란 요소가 작용하였다. 하나는 네비우스(Nevius) 선교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자립, 자치, 자전을 기초로 하는 선교방법으로 한국의 개신교가 성경을 중심으로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로 원산과 평양을 주축으로 하여 일어난 회개운동이며 대각성운동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한편 당시의 한국인들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 있었고, 그 가운데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능동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했으며 믿지 않는 자들의 칭송을 들었었다. 그러므로 그만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환난과 기독교의 급성장은 한국 교회의 성향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교회는 이전의 주도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내세지향적이며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심각한 교권다툼으로 인하여 교회분열이 가속화 되었다. 그리하여 크게는 진보와 보수로, 작게는 그 안의 각 계파간에 주도권 싸움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이제 선교 2세기에 들어선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의 구태의연한 논쟁과 주도권 다툼을 멈추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리하여 민족과 나라를 위한 활동들도 재개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흠잡을 데 없는 신부로서의 모습을 갖추는데 힘써야 한다. 교회의 세속화, 물질화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하나되어 조국의 통일과 그리스도 복음의 편만한 전파를 위하여 정진해야 할 것이다.
 현대교회사는 프랑스 대혁명(1800년) 이후 현대까지의 기간을 다룬다. 특히 현대 교회사에 있어서는 다른 기간을 다루는 것과는 달리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이러한 최근의 일들을 놓고서 역사적인 판단과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며, 정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특히 현대 교회사를 다루면서 이 부분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이제껏 다루고 배워온 교회사를 배우는 시각으로,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현대의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시기는 사회의 각층과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선교의 시기이며, 새로운 신학 사조들이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를 시작으로 하여 여러 신학자들이 나름대로의 신학 사상을 개진해 왔다. 또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이 계속 발전하였고, 진화론 및 유물론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교회는 다변하는 현대세계에 적응하기 위하여 다양한 사회활동과 현대인에게 수용되기 쉬운 형태의 신학을 형성하는 일 그리고 이러한 제반 사역을 이루기 위한 기독교계의 연합사업 등을 추진해 왔다. 현대신학의 선구자는 쉴라이에르마허이다. 그는 교리를 중시하는 이전의 전통에서 벗어나 종교를 신에 대한 의존감정으로 정의했으며 그것은 그를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했다. 그 이후에는 바우르(F.C.Baur 1792-1860)가 헤겔의 영향을 받아 변증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성경을 인간적인 저작으로 보았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쉬트라우스(Strauss 1803-1874)는 성경에서 초월적인 요소를 배제했다. 이에 반하여 리츌(A.Ritscjl 1822-1889)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강조했으나, 반면에 도덕종교화시키는 우(愚)를 범했다. 이들을 선구자로 한 현대신학은 바르트(K.Barth 1886-1968)를 위시하여 부른너(E.Brunner 1889-1966), 불트만(R.Bultmann 1884-1976), 틸리히(P.Tillich 1933-1965) 등을 거쳐 세속화 신학과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으로까지 발전해 왔다.


 한편 개신교의 이러한 사태에 반하여 카톨릭은 옥스퍼드 운동(1833-1841), 예수회의 부흥, 바티칸 회의(1868-1870) 등을 통하여 그 세력을 점차 강화․확대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카톨릭은 세계에서 거대한 하나의 세력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부흥운동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비롯한 여러 신학운동들과 사회․선교운동들이다. 근본주의 운동이나 YMCA, 구세군, WCC 등이 대표적인 운동들인데, 이들 중 특히 WCC는 기독교 세력의 연합을 목적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그러나 WCC의 불분명한 정치적․신학적 방향성은 많은 복음주의 진영 교회들로 하여금 WCC 가입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복음주의 노선은 로잔 대회나 그랜드래피즈 대회 등을 통하여 선교와 사회활동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제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기독교회는 과거 역사의 교훈을 되새김으로 이전의 실수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팔고 세속 권력을 얻는 일이나, 그것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세상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자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세상을 향하여 바른 자세를 견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본문 해설]
  기독교의 양대 산맥은 개신교와 천주교이다. 개신교의 역사는 약 100년 남짓 되지만 천주교는 그보다 훨씬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울러 한반도에 이미 천 오백 년 이상 오래 전에 기독교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네스토리안파인 경교가 당나라에 융성했고, 이는 곧 신라에 전파되었다. 그 증거로서 경교의 십자가가 경주에서 발견되었다. 그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임진왜란을 거쳐 한 두 차례 천주교와 접촉이 있었지만 1784년 한국인 최초로 세례교인이 된 이승훈이 귀국함으로 실질적인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천주교는 전래 당시에는 제사를 불법화하여 이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그러나 일제하에서는 신사참배를, 해방 후에는 제사를 허용하는 식으로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훈해 주는 바가 크다. 
 

[주제 해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근세 이전부터 한국과 여러 차례 접촉해 왔다. 그러나 체계적인 한국 선교의 시작은 1784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해 북경에서 이승훈이 세례를 받아 '베드로'라는 영세명을 받고 귀국했기 때문이다. 그 후 1세기 동안 천주교는 박해와 고난 가운데 꾸준히 성장하여 오다가 한불조약으로 선교가 자유화되자 각 교구 중심의 체계적이며 구체적인 선교전략으로, 선교 3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선교와 봉사활동으로 성장하고 있다.

 

1. 천주교의 전래 -> ○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천주교 이전의 경교
 천주교의 전래 이전에 당을 통해 신라때 경교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경교는 네스토리우스(Nestorrius)에 의해 생겨난 초대교회 이단으로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왔는데 중국에서는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경교는 한때 중국의 국교로 인정되기도 하였으며, 당나라 때 크게 융성하였다. 따라서 신라와 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문화와 무역 교류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때 경교가 신라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 예로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십자가상을 여러 가지 사료에 의해서 추정할 수 있다. 반면 13세기 고려 시대 때 몽고를 통해서 프란체스코회의 수사 루브루크(Wm. Rubruck)가 전교(傳敎)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천주교가 한국에 최초로 전해진 시기는 임진왜란 때로 당시 일본군을 통해 파견된 포르투갈의 세스페데스(G.Cespedes) 신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일본 천주교 신자 부대인 고니시(小西行長) 장군의 부대에 있었으므로 한국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천주교가 전파된 증거가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1636년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인조 대왕의 아들 소현세자를 통해서이다. 그는 볼모지 북경에서 천주교 예수회 신부인 아담 샬(Adam Shall)을 알게 되었는데, 이때 천주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불모 생활을 끝내고 환국하였으나 학질로 죽자 천주교 전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후 많은 조선 학자들을 통해 천주교리가 연구되었는데, 이는 북경에서 천주교 신부와 교리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천주교리와 서적들이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전래자는 이승훈으로 1783년 북경의 사신으로 가 그곳에서 천주교 교리의 우수함과 오묘함에 끌려, 마침내 그 이듬해 북경에서 한국인 최초로 그라몽(Gram,mont)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어 1784년 3월에 귀국했다.

 

2. 천주교의 수난

 

 1) 한국 천주교의 발생
 이승훈의 귀국으로 인해 그와 뜻을 같이하던 이벽과 권철신 등이 교리를 연구하며 전교(傳敎)에 힘썼다. 이들의 전교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날마다 늘어나자, 1785년 서울 진교개(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을 교회로 삼아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몇몇 유생들의 고발로 인해 김범우는 죽음을 당하고, 이승훈, 이벽 등과 많은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박해가 끝나자 흩어졌던 천주교인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박해와 핍박 가운데서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낀 한국천주교회는 자체적으로 주교와 신부를 선정했지만, 북경의 주교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그 후 북경으로 성직 파송을 청원하여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2) 천주교의 박해와 그 원인
 천주교 박해 원인의 가장 큰 이유는 조상제사 문제였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현이 조상 숭배를 이행하지 않았다 하여 사형 당했다. 최초의 전국적인 천주교 박해는 1801년 신유교난을 통해서였다. 이 교난은 서학(천주교) 자체의 동기보다는 정조 왕의 작고 후 정순왕후가 시파를 타도할 목적으로 남인들을 박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남인들의 대부분은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이어 기해교난(1839)과 병인교난(1866)을 통해 전국에서 천주교의 박해와 핍박이 일어났는데 이 당시 순교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3. 천주교의 성장과 역할

 

 1) 초기 천주교의 신앙 형태
 처음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후 상류층 계급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류에서 서민층 및 하류로 변모해 갔다. 그것은 병인교난 때 유죄 판결을 받은 천주교인들의 비율에서 상류층과 하류층의 비율이 1:1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 비율로 보아 당시 천주교는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서도 국민 종교 내지는 서민 종교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천주교의 성장
 1세기 동안 핍박과 순교의 연속 속에 드디어 한불조약으로 선교 자유화가 시작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천주교는 체제를 정비하고 학교와 양로원 등의 사업을 통해 전도와 사회봉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대지를 구입하여 성당을 건축하는 한편, 신학교를 세워 한국인 사제를 양성했다. 또한 애국계몽운동으로 학교 교육을 통한 소외된 여성 교육과 신문을 통한 한국의 개화 운동에 한 맥을 그었다. 하지만 꾸준히 성장하던 천주교회에 또다시 박해와 수난의 기간이 있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서서히 개신교회와 더불어 천주교회에 간섭과 탄압을 자행했다. 그러한 가운데 천주교는 서울과 평양 교구장에 한국인 노기남, 홍용호 주교를 선임함으로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3) 해방 이후의 천주교
 해방과 6․25사변을 거쳐 천주교는 1962년 3개의 대교구(성루, 대구, 광주)로 승격하고 여러 개의 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각종 학교와 단체 및 간행물과 출판사를 통해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1969년 한국 천주교 최초로 김수환 대교구장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성장에 가속도를 더해 갔다. 지금은 선교 3세기를 맞아 현실적인 사회참여와 봉사활동을 통해 교세를 확장시키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수난 가운데도 독자성을 유지하여 성장해 왔다. 그러나 천주교가 초기에는 신앙과 믿음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순교를 했지만 선교 2세기의 일제하에서는 개신교와 달리 신사참배를 하나의 문화로 단정지어 신사참배를 허용하였다. 또한 해방 후 조상제사 문제에 있어서 조상 숭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라는 교황령에 의해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자세들은 한국 천주교의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봉사와 정의를 위한 투쟁 등 실천적인 행동과는 상반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역사는 오늘의 기독교인에게 개인적 신앙과 사회적인 행동에 있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생각케 해준다.
 

[자료 해설]
 1. 경교(Nestorianism)의 한국 전래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당태종 정관 9년(635년)은 신라의 선덕여왕 2년, 고구려의 영류왕 18년, 백제의 무왕 36년에 해당하며,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건립한 당의 덕종 2년(781년)은 통일신라 선덕왕 2년에 해당한다. 이때를 전후하여 150년 동안에 삼국은 해마다 당에 사절을 보냈으며, 특히 당태종 14년(640년)은 삼국이 다 사절을 파송하였다. 삼국 중에서도 통일신라는 당과 가장 관계가 밀접하여 여러번 사절단과 유학생을 당에 파송하였다. 당시 당에서는 불교나 유교보다도 경교가 융성하여 중국 각지에 퍼져 있었다. 또한 한때는 경교가 당의 국교로 정해져 널리 권장하였던 경우도 있었다. 특히 1928년 6월에는 압록강 건너 우리 땅과 밀접한 남만주 안산(삼국시대 고구려 땅)에서 경교도의 여러 분묘가 발견되었고, 경교 십자가도 출토되었다. 또한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가 조각되어 있는 바위도 발견되었다. 1956년에는 경주에서 신라시대의 석재 십자가, 동제 십자가와 마리아 관음상 등 경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 그리스도교의 한국 전래는 삼국 시대나 통일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
 1777년 정조 원년에 이벽, 권일신,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등 남인의 시파 유학자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한강가의 선사인 주어사에 모여 토론회를 가졌다. 십 여 일 간 성현들의 의견을 논의하다가 「천주실의」에서 하늘, 세계, 인성, 신앙 등의 교리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얻었다. 그들은 매월 7,14,21,28일을 쉬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으며, 다른 이들에게 차츰 천주교 신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가 당시 우리 나라 사회 풍습과 맞지 않아 고민하다가 이승훈이 1783년(정조 7년) 동지사 겸 사은사 황인점의 서장관으로 가는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이벽은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기를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이승훈은 정약전의 매부이었으므로 그도 천주교 신자였다.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이듬해 정월에 예수회 신부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 해 3월에 수십 종의 교리서와 십자가상과 성화, 묵주 등 진귀한 물품을 가지고 돌아와 이벽에게 교리책들을 전해 주었다. 이벽은 기독교 진리 변중, 중국 및 조선에 있는 미신에 대한 반박, 7개 성사(聖事)에 대한 설명, 공교요리(公敎要理), 복음해설, 매일의 성인전, 기도서 등을 깊이 연구하여 확신을 얻고 이벽, 이승훈, 정약종, 약전, 약용 3형제와 권일신 등이 중심이 되어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많은 신자와 신앙의 동지들을 얻자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1785년 봄에 서울의 명례동(지금의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교회이다. 이 당시 이벽은 상좌에 앉아 설법하고 선생의 예우를 받았다. 그 후 날짜를 정해 회의 모임과 예배를 갖고, 더욱 엄격하여 엄숙하게 진행했다. 이러한 예배가 몇 달 동안 지속되자 양반과 중인 중에서 모이는 숫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유생의 상소로 인해 교회는 없어지고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3. 한국 천주교의 모순
 1) 제사문제 :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의 3세기를 맞아 요한 바울 2세가 우리 나라에 와서 기해년 박해 때 순교한 73위와 병인교난 순교자 24위 등 103위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시복식을 거행했다. 이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를 위해 순교한 사람들을 성자의 위에 올리는 중요한 행사이다. 이 순교자들은 그 당시 조상제사가 천주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하여 이 제사를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재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제사 문제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성자의 위에 올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2) 신사참배문제 :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1918년경부터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이라고 하는 신사(神士)를 만들었다. 이에 조선 천주교는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라고 선언하였다(1921년).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과 이탈리아, 독일이 2차대전 직전에 서로 밀접한 동맹관계를 맺게 되자 일본은 이탈리아를 통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하여금 조선 천주교회가 신사참배를 하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1938년 5월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다"라는 교황청의 포교령이 선언되자 곧 신사참배를 하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 천주교회가 1921년 이미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신사 참배를 하면서도 집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천주교는 조상제사에 대해 완강했던 자세를 무너뜨리고 지금은 제사를 지내도록 허용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리적인 신앙생활보다는 시대와 정치의 변화 속에서 유화적이며 모순되게 성장했다고 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본문 해설]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매우 독특하다. 특히 개신교가 전래되고 교회가 설립되는 전체 과정을 살펴보면, 거기에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하심이 나타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 개신교의 시작은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카톨릭과는 달리 개신교는 처음부터 성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한국인들은 선교사의 지도가 아니라, 스스로 성경을 읽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믿게 된 이들에 의하여 성경이 번역되었다. 이일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 이응찬, 서상륜, 이수정 등이다. 특히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입국했다.
선교사들의 사역 또한 무시될 수 없는데, 그들은 전인격적인 사역을 통해 복음전파를 쉽게 했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실시로 복음적인 기독교 성장에 기여하였다.

 

[주제 해설]
  한국 개신교가 시작되는 일련의 과정은 유럽과 미국의 동양진출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된 과정을 시기와 지역에 따라 분류해 보면 중국, 만주, 일본 그리고 미국 순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는데,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인 귀츨라프(K.F.A.Gutzlaff 1803-1851)와 윌리암슨(A.Williamson) 등이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제공했다. 중국을 통한 개신교의 전래는 주로 만주를 거쳐서 이루어졌다. 특히 로스(J.Ross 1842-1915)와 맥킨타이어(J.Mclntyre 1837-?)는 만주에서 진취적인 서북 지역 청년들과 함께 성경번역 사업을 했다. 한편 일본을 통한 개신교 전래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이수정(李樹廷)으로 그는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현토한한신약성서」(顯討漢韓新約聖書)와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를 출간했다.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들고 미국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했다.

 

1. 개신교의 전래

 한국 개신교의 전래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 선교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교사 입국 이전에 이미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었고, 또한 그 성경을 통해 기독교를 믿는 자들이 자생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한국에 표류해 온 화란인 벨트브레(J.J.Weltvree, 朴燕)나 하멜(H.Hamel) 등은 한국에 종교적인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하멜이 쓴 표류기를 읽은 귀츨라프 선교사는 1832년에 잠시 한국에 머물렀고, 윌리암슨 선교사는 토마스나 로스 등을 격려하여 한국 선교에 힘쓰도록 하였다. 토마스(R.J.Thomas 1840-1866) 선교사는 1866년 27세의 나이로 대동강변에서 순교하면서 한문성경을 전해 주었고,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는 만주에서 이응찬, 서상륜 등과 함께 성경을 번역했다. 이 '로스역 성경'은 서상륜을 비롯한 매서인(賣書人)들을 통해 국내에 유입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성경번역 사업을 하고 있었다.

 

2. 선교사의 활동

 1) 선교사들의 입국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준비작업을 통해 한국 내에는 자생적인 신앙인들의 모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한국 교회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선교사로서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사람은 알렌(H.N.Allen 1858-1932)이었으나 그는 선교사로서보다는 의사로서 활약했다. 그는 감시정변을 계기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서 활동했다. 1885년에는 장로교의 언더우드(H.L.Underwood 1859-1916)와 감리교의 아펜젤러(H.Appenzeller 1858-1902) 그리고 스크랜톤(Scranton)과 헤론(J.H.Heron) 등이 입국하여 의료와 교육사업 등을 시작했다. 또한 1908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꾸준히 입국해 들어왔다.

 

 2) 활동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벌인 선교사업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뉘는 데 그것은 의료, 교육, 문화선교 등이다. 의료선교 활동은 알렌과 스크랜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알렌은 광혜원(廣惠院)을 세워 병자들을 치료하고 서양의술을 교육하였다. 스크랜톤은 빈민들의 치료에 관심을 가져 상동에 병원을 세웠고, 하워드(M.Howard) 양은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을 세웠다. 교육선교 활동은 특히 감리교 측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행했는데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스크랜톤 여사는 이화학당을 세웠다. 한편 언더우드는 구세학당을 엘러(A.Eller)는 정동여학당을 세웠다. 문화선교 활동은 주로 성경번역과 출판 방면에서 수행되었다. 기존의 로스역과 이수정역을 보완하기 위하여 1893년에 번역연합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여러해 동안의 번역을 통하여 1900년과 1910년에 각각 신약과 구약을 번역했다. 찬송가는 1897년 감리교의 「찬미가」를 시작으로 하여 1928년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신정찬송가」가 발행되었고, 다시 1935년에 「시편찬송가」, 「합동찬송가」 등이 각각 발행되었다. 성경과 찬송 외에도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 〈그리스도 신문〉 등의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했고 잡지로는 〈교회〉, 〈신학지남〉, 〈코리아 미션필드〉 등이 발간되었다.

 

3. 선교정책

 1) 네비우스 방법 이전
 개신교는 한국인들에게 생활과 밀접한 종교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천주교가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학문으로 알려진 것에 비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천주교에 비하여 개신교의 선교가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은 개신교의 선교정책이 한국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잘 계획되고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네비우스 이전의 개신교 선교정책은 문서화된 것은 없으나, 주로 노방․순회전도․의료․교육선교, 사랑방전도, 문서전도 등이라고 볼 수 있다. 순회전도는 초교파적으로 행해졌고, 의료․교육․사랑방전도는 감리교에서 특히 강조적으로 시행했다. 문서선교에 있어서는 배재학당 내에 설치된 삼문(三文) 출판소(The Trillingual Press)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2) 네비우스 선교 방법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였으므로 그들은 중국에서 사역하던 네비우스(J.Nevius 1829-1893)를 초청하여 그의 경험과 선교방법에 대해 배우고자 했다.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방법은 자립․자치․자선을 기초로 한 성경중심적인 방법들이었다. 이 방법의 채택, 시행으로 한국 교회는 매우 건전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특히 장로교의 경우는 지도자의 수준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

 

4. 교회의 설립

 한국 최초의 교회는 순수하게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세워진 소래교회(1884년 설립)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조직 교회였고, 조직교회로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중심이 된 서울 정동교회(새문안교회의 전신)이다. 당시 교회의 조직을 보면 선교사를 돕는 조사(助事, Helper)와 전도부인들(Bible Women), 각 교회를 치리하는 영수(領袖, Leader)가 있었고 현재에도 있는 집사, 장로, 목사가 있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많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피와 땀에 기초하여 시작되었고 자라왔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해진 신앙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매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에 기초하여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전력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자료 해설]

 1. 이수정의 성경번역 사업
 미국 성서공회 루미스 총무는 이수정의 개종에서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이수정을 찾아가 한국선교의 지름길인 성경번역을 제안하였다. 이수정은 성경이 한민족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임을 확신하였고 자신의 번역이 이후 한국으로 들어가는 선교사들에게 준비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흔쾌히 임했다. 1883년 5월 중순에 시작된 이 작업은 먼저 한문 성경에 당시 한국 지식층에서 널리 사용되던 토를 다는 방법으로 착수하였다. 착수한 두 달 만인 6월 21일경 신약 전체를 완성했으나 출판은 11월에 시작되었다. 「신약성서마태전」을 필두로 1883년 11월에 인쇄에 들어가 1884년 8월까지 「신약성서마가전」, 「신약성서로가전」, 「신약성서약한전」, 「신약성서사도행전」 등 5권의 단편 한한 성서가 각 1천부씩 출간되어 나왔다. 신약전서가 현토되었고 로마서까지 조판이 완성되었으나 사도행전까지 간행한 것은 한한성서보다는 한글성서의 필요가 더 절실했기 때문인 듯하다.

 

2. 삼문출판사(三文出阪社, Trilingual Press)
 1889년부터 올링거에 의해 배제학당 안에 인쇄소가 설립되면서 단행본 출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인쇄소는 영문․한문․한글 세 문자의 인쇄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삼문출판사'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인쇄소는 1899년에 인쇄시설을 확충하고 미이미교회출판소(The Korea Methodist Publishing House)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06년부터 장로교와 합동으로 연합출판사로 개편할 계획을 세웠으나 북방로교회의 불참으로 성사되지 못했고 1909년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인쇄 혹은 발행된 초기 기독교 문서들로 인해 한국 기독교뿐만 아니라 일반 문화 향상에 기여한 바는 크다
 1890년대 이후 번역되기 시작한 단편 성경들이 이곳에서 인쇄되었고 정기간행물 〈죠션크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The Korea Repository〉, 〈The Korea Field〉, 〈The Korea Methodist〉, 〈신학월보〉, 〈엡윗청년회보〉, 〈성경강론월보〉뿐 아니라 〈독립신문〉, 〈협성회보〉, 〈경성신문〉, 〈매일신문〉 등 일반 신문까지도 인쇄하였다.

 

3. 선교 연합활동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과 교리적 배경이 다른 교파형 교회였음에도 파송된 선교사들은 본국 교회선교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으며 서로 협력하고 연합함으로 공존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선교사 연합공의회와 선교지역 분할협정이다. 이 같은 사업은 장로교와 감리교에 의해 주도되었다.
 1) 한국 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ions in Korea) : 1905년에 장로교회 4개 선교부, 감리교의 2개 선교부가 결성한 협의체이다. 9월 11일 이화여학교 예배실에서 창설된 이 연합공의회는 그 기능이 단순한 선교사 협의 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된 개신교회'에 대한 강한 의도를 표방하고 나섰다. 헌장 제2조에서 "이 공의회의 목적은 선교 사업에 있어 협력을 기하는 것이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조직하는 데 있다"고 명기하였다.
 2) 선교지역 분할 : 하나의 나라에 여러 교파 선교회가 진출하여 선교함으로써 야기 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선교회간에 지역분할이 추진되었다. 이것이 교계예양(敎界禮讓)으로도 불리는 선교지역 분할협정이다. 이 협정의 근본 목적은 '가장 빈번한 마찰의 요인이 되고 있는 사업의 중첩을 피하고 돈과 시간과 힘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정은 1892년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는데 1892년 6월 11일 서울에서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모여 협의하고 그 이듬해 두 선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4. 언더우드의 네비우스 선교방법 정리
 네비우스의 강연과 저술을 통해 한국에서 새로운 선교정책을 모색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언더우드는 4개의 조항으로 네비우스의 선교 방법을 정리하였다.
 ① 각자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형편에 거하게'하며 각 개인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되어 자기 이웃들 속에 살면서 스스로 생업을 꾸려 나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가르친다.
 ② 교회의 방법이나 조직을 토착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발전시킨다.
 ③ 교회 스스로가 가능한 한 인력과 재정을 공급하게 하여 이웃 곳에서 복음사역을 하게 하되 좀더 나은 자질이 발견된 사람은 별도로 둔다.
 ④ 본토인들로 자기네 교회당 건물을 마련하게 하되 그 건물은 토착적인 것이어야 하고 지역교회가 능히 꾸밀 수 있는 그런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
 특이할 만한 것은 본토인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에 본래의 작업이나 환경을 그대로 고수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사역도 가급적 출신지에서 하도록 유도하였다.

[본문 해설]
  1900년대초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으로 유교와 불교가 쇠퇴되면서 기독교가 새로운 세력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원산집회와 평양집회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드디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폭발적인 부흥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대부흥운동은 교인들과 선교사간의 벽을 허물었으며, 더욱 기도와 성경 연구에 힘씀으로써 한국 교회의 질적, 양적 도약을 가져왔다. 그 이후 한국의 기독교 운동은 신앙운동과 항일 운동으로 나누어지는데, 백만인 구령운동과 진리운동 등은 전자에 속하며 기독교 상인 봉기운동은 후자에 속한다. 우리는 이때의 대부흥운동을 바라보며 성령운동이 식어가는 오늘의 한국 교회를 염려해 본다.

 

[주제 해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대부흥운동 이전에 이미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한 여러 방면에서의 준비와 상황 설정이 되어 있었다. 또한 그 이후에는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시대적인 상황과 엇갈리면서 시도되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특성과 형태를 점차 갖추게 되었다.

 

1. 부흥운동의 배경

 1) 외적인 요인
 부흥운동 직전의 한국 상황은 매우 암울한 것이었다. 일제는 점점 그 마각을 드러내면서 한국을 속국화하려는 정책을 진행하고 있었다. 1904년의 노일전쟁과 한일의정서의 작성, '제국의 대한 방침'과 '대시설강령 결정의 건' 등을 통하여 한국의 자주권과 모든 권익을 빼앗아가 버렸다. 마침내 1905년 11월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음으로 한국을 그들의 보호국화하였다.
 또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종교인 유교와 불교는 이미 그 세력을 잃었고, 기독교가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기독교와 함께 전수되어 들어온 발달된 서구문명은 기독교를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비춰지게 했다.

 

 2) 내적인 요인
 이러한 외적 상황에 발맞추어 기독교 내에서는 1903년의 원산집회를 시작으로 하여 계속해서 부흥집회가 열렸다. 1903년의 원산집회는 프랑슨(F.Fransom)과 화이트 여사(Miss M.C.White)가 인도한 기도와 성경연구 모임에서 시작되었고, 1904년의 집회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의 세 교파연합으로 모여 회개와 성령은사에 대해 새롭게 강조되었다. 원산에서의 집회는 평양과 목포, 개성 등지에 영향을 미쳐서 각 지역에서의 부흥집회가 성령의 감동 아래서 충만한 가운데 진행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집회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부흥과 성령 충만에 대한 더욱 뜨거운 열망을 갖게 했다.

 

2. 대부흥운동

 

 1) 발단과 경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대부흥 사경회는 1907년 1월 6일부터 16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중에 길선주 목사에 의해서 한국 최초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고, 하디(R.A.Hardie)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의 인도로 집회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일 성령 충만한 가운데 진행되던 집회는 드디어 15일 저녁집회 후에 열린 특별 기도회에서 폭발하게 되었다. 길선주 목사의 회개로 시작된 기도회에서 교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추악한 죄악들을 회개하기 시작했다. 이 회개운동은 회개기도로 끝나지 않고 사과하고 배상하는 등 실제적인 회개의 실전운동으로 발전했다. 또한 평양 시내의 상가들과 학교들도 문을 받고 이 운동에 동참할 정도로 폭넓고 뜨거운 회개와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2) 결과와 의의
 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에 여러 가지 긍정적이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교인들과 선교사들간의 벽을 허물어 서로 화목하게 하였고, 사랑하며 봉사하는 자세를 갖게 했다. 또한 성령 충만, 회개, 심판 등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을 갖게 하여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는 힘을 얻게 했다. 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가 더욱 기도와 성경연구에 힘쓰는 교회가 되게 했고, 또한 한국 교회의 양적인 성장에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대부흥운동이 전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다. 특히 이 운동은 이후에 떨어질 백만인 구령운동 등과 함께 물역사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것은 국운이 기우는 가운데서도 오직 교세확장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3. 성도의 경건생활

 1) 신앙운동
 대각성운동 이후의 기독교 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운동과 항일운동으로 나뉘어진다. 이중 신앙운동으로는 백만 인 구령운동과 전진운동 그리고 진리운동 등이 있다. 백만 인 구령운동은 스톡스(M.B.Stokes)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몇몇 선교사들이 시작했다. 1909년의 남감리회 13차 선교연회는 20만 명을,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와 1910년 장로회 4차 독노회는 100만 명을 목표로 세웠다. 그리하여 채프만(J.Chapman) 등을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고, 대규모 전도단을 결성하여 전국순회 전도운동을 벌였다. 또한 '날연보'(dayoffering)와 '쪽복음 배포' 등의 방법들을 사용했으나 실제적인 결과는 목표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한국인 신자들에게 영적 생활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을 주었다. 전진운동은 3․1운동이 실패한 후에 김익두 목사 등을 중심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교세를 확장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된 운동이다. 진리운동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많은 순교자들과 투옥자들을 배출했다.

 

 2) 항일 경제운동
 항일 경제운동은 토착자본을 규합하여 민족기업을 육성하려는 운동과 소규모적으로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항세운동 등으로 나뉘어진다. 토착자본 규합운동은 이승훈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그는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주장하며 자기(磁器) 주식회사 설립운동을 전개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기독교 상인 봉기운동'(蜂起運動)으로 불리기도 하는 순수 기독교 상인들의 운동은 항세운동, 일본상품 불매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형태로 실천되었다.

 이 기간의 한국 교회는 일제의 수탈과 침략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하여 성장을 향한 커다란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부흥운동은 이후의 한국 교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것은 긍정적으로도 그리고 부정적으로도 영향력을 미쳤다. 우리는 그 두 부분을 한쪽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공과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하는 중요한 자료와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가 발전한 것은 분명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모습으로 남느냐 하는 것은 실제로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수준과 태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들을 오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자료 해설]
 1. 부흥운동(revivals of religion)의 정의
 신앙 상태가 지적, 정적으로 침체되어 신앙의식이 결여되어 있을 때 사경회, 부흥회, 전도대회(총동원) 등을 통하여 성경지식, 은혜에 대한 감사, 범죄에 대한 회개, 실천없는 신앙에 대한 반성, 새로운 각오 그리고 낙심과 좌절에 빠진 자의 신앙회복 등으로 공동체의 신앙상태를 일신시키려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총칭하여 '부흥운동'이라고 한다.
 부흥운동은 불신자나 낙심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신앙상태가 완벽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불신자나 초신자나 믿음의 신급이 높은 자나 다 함께 어울려 동참할 때 부흥운동의 효과가 커진다.

 

2. 부흥운동의 필요성
 한 시대의 신앙 상태나 어느 특정 지역사회에 속한 교회의 신앙 상태나 개인적 신앙 상태 등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경건하고 성령 충만하며, 거룩하고 의로운 신앙생활의 상태를 지속하지 못하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현실이다. 그것을 사사기에 잘 묘사해 두었는데,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끊임없는 경성(警醒), 지칠 줄 모르는 근면, 끈질긴 도전, 환경과 여건의 지혜로운 선용(善用) 등을 통하여 신앙 상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성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교만해지거나 자족(自足)지 못하고 탐욕을 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잠시 잠깐의 징계라도 받으면 울부짖어 기도하는 불쌍한 존재인 것이다. 영적 쇠퇴와 신앙적 실패는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그 소속 공동체가 합력하여 그를 위로하고 책망하여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영적 상태가 고저의 주기가 있는 것은 공통적이다. 영적으로 고조상태에 있는 자는 영적으로 저조상태에 있는 자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러한 상호협력 관계를 통하여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눅13:30) 체험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부흥운동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진행되지만, 그 진행과정에서 돕는 자가 있고 도움받는 자가 있으며, 또한 도움을 주면서 도움을 받게 되는 수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부흥운동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부흥의 체험을 얻고 신앙성장의 결과를 거두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부흥운동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부흥운동을 통하여 회심, 중생, 성령체험, 은사체험, 문제해결, 질병치료 등을 체험했다는 것은 부흥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케 해준다.

 

3. 최초의 부흥운동
 교회사상 최초의 부흥운동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체험한 오순절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미리 이 부흥운동을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준비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로 12제자를 비롯한 모든 무리가 각기 제 갈길로 뿔뿔이 흩어졌었다. 실로 엄청난 낙담과 좌절을 체험했던 것이다. 그들이 한 곳에 모여 일심으로 기도했을 때 요엘 선지를 통한 예언대로 성령이 강림하였고, 영적 부흥의 열매를 거두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부패된 교회를 갱생시킨 역사적 부흥운동이다. 이는 성령의 특별하신 경륜으로 '진리'가 무엇인가 깨우치게 하였고, 복음에 대한 순수한 신앙에로의 개종이 전세계로 전파되어 전대미문의 세기적 신앙부흥운동으로 발전하였다.


4. 한국 교회의 급진적 성장
 초기 선교는 한국에 있어서 의료사업과 학교교육을 통한 간접 선교이었고, 초기 개종자들은 깊은 심연의 감화나 성령체험적 내면신앙이라기보다 현실 구원적 윤리적 의식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일제하에서 국권회복의 힘이 되어 줄 서양 국가들에 대한 의뢰심으로 외국인 선교사에게 호감을 품었으며, 신앙심과 애국심을 혼동한 면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의 통치자로 하여금 교회말살정책을 쓰게 할 구실을 주기가 쉽다고 판단되어, 선교사들은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내면적 영혼문제로 신앙적 관심을 돌리고자 애써왔다. 한국인 고유의 종교적 심성, 신비체험적 신앙정서는 길선주 목사와 같은 부흥사를 태어나게 한 배경이 된다. 초기의 냉정한 이지적 기독교는 사경회적 심령 부흥회와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하여 심령적 복음의 기독교로 바뀌었다. 전국으로 확산된 부흥회는 교회를 급성장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경건주의적 신앙유형이 정립되고 내면적 신앙체험을 얻었으며, 당시 사회․정치적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일지 않는 섭리신앙의 수준까지 성장한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비정치화, 비사회화의 경향을 띠면서 내면적으로 영혼 구원과 내세 소망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침략자를 증오하고 독립쟁취를 위한 구심점으로서의 호국 기독교는 민족공동체를 신앙공동체로 포용하는 가운데 용해되었고, 주를 위한 순교정신으로 승화시켰으니 이는 부흥운동이 얼마나 큰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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