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_ 요한복음 9장 4-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
2월 5-13일까지 6년 동안 뵙지 못했던 치매조기증세 진단 받은 장모님을 뵈러 갔다 왔습니다. 제 아내가 먼저 가서 장모님을 많이 격려해서 좋아진 상태입니다. 장모님이 치매초기 증세 진단을 받은 이유는 미국에 살면서 일상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장인어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장인어른은 말을 많이 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수가 적은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다 보니까 이 분이 국제전화를 혼자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영어를 못하고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유폐생활을 몇년 한 겁니다. 제가 제 아내에게 제안했습니다. 26년 만에 당신이 효도한 번 하자, 하면서 103만원 주고 비행기 표를 주면서 아내를 보내고 저도 103만 원짜리 표를 끊어서 돈이 아깝긴 했는데, 일주일 동안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그러나 양가 부모님은 다 부모님인데 우리 어머님은 입원하면 금방 내려가곤 하는데 우리 장인장모님은 사위로부터 아무런 효도를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결단했습니다. 120만원을 드리고 왔습니다. 컴퓨터를 사서 스카이폰와 이메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왔는데, 장모님이 초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이메일을 할 수 있지 않겠나, 나이가 들면 단어수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우리 장로님이나 저 같은 사람에게 여러분이 말을 걸어주셔야 합니다. 단어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social personal effect가 줄어들면 치매가 오고 점점 쇠약해집니다. 우리가 멀쩡한 것 같지만 사랑의 접촉을 유지하지 못하면 우리 장모님처럼, 알고 보면 우리 장모님이 초등학교 여자 수석졸업생이었습니다. 76세에 치매를 경험하는데, 나이 든 사람에게는 선체적 친절로 말을 걸어줌으로써 우리가 단어 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알겠죠? 우리 절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 멀쩡한 사람 아니에요. 우리가 anti climb 되고 있는 상태에요. 장로님은 책을 계속 쓰셔서 언어생활을 하시지만 권사님께서는 책을 안 쓰시기 때문에 권사님께 말을 많이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일주일 동안 제가 미국 가서 읽은 책은 그 동안 읽었던 녹색평론을 복습했는데, 26편의 논문과 성삼문 전기 7권의 책을 읽고 왔습니다. 녹색평론을 가져간 이후는 이번에 국민배당 국민소득이라는 제도를 제가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건 설교 아닙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이라는 책 단행본이 곧 나옵니다. 거기 한 챕터에 넣기 위해서 국민연금제도를 대신할 수 있는 국민소득제도, 국민기본소득제도를 연구하고 있는데 그것이 한 챕터에 들어갑니다. 신명기 15장 11절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 인용문맥에 다시 한 번 인용됩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이런 맥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땅에 항상 존재할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본문이 인용됩니다. 이건 miss coach 된 겁니다. 원래 신명기 15장 11절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도 땅의 소출을 향유하는 데로부터 그쳐지면 안 된다, 그런데 본문에 굉장히 비슷하게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은 이 땅의 소출로부터 절대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그친다는 말은 땅의 소출을 향유하는 것으로부터 끊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다른 뜻이죠. 그걸 제가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여러분이 거의 받지 못하는 단계까지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면서 받지 못하는데, 우리나라 국민연금 110조 넘는 돈을 불릴 데가 없습니다. 국민연금 100조는 위급한 경제위기 때 동원예비군처럼 달아나는 겁니다. 우리 국민들이 낸 연금이 거의 인플레 때문에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내는 연금이 20년 후에 200만 원을 받는다 해도 지금 이 수준의 인플레로 가면 아무 의미가 없는 돈입니다. 저는 그 제도를 1인당 모든 사람에게 20만원을 주는, 다섯 명에게 100만원을 주는 국민 기본소득을 줌으로써 나머지 국민들이 알바하더라도 생계가 유지되는 수준, 다시 말해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더라도 생활하는 문제가 안 생긴다면 시간이 많이 남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 봉사활동을 할 수 있고, 돈과 관련되지 않은 활동을 하는 인구가 많아지면 사회가 따뜻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물리적으로 돈이 많은 사회가 아니라 시간이 많은 사회를 만듦으로 공동체 문화를 양성하는 이런 쪽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걸어가기 위해서 연구를 하는 겁니다. 저는 굉장히 흥분을 하고 밤새워서 읽었는데, 스페인에 가면 이런 운동과 비슷한 운동을 펼치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12만 6천명을 고용한 FC 바르셀로나 리오날 메시가 활약하는 그 지방을 중심으로 몬드라곤 신앙협동조합을 펼친 신부님이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활하도록 생활을 돕고 국가에게 복지를 맡기지 않고 공동체 이웃사촌이 서로 복지를 도와주는 성경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는 건 이런 겁니다. 제가 왜 이걸 공부하는가? 하나님 나라 운동은 죽어서 천당 가는 운동이 아니라 이 땅에서 공평과 정의를 충만하게 구현하는 대안사회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에 실현가능한 삶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게 교회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많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급진적인 주장이지만 이미 오랫동안 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오즈의 마법사>라는 동화가 다루는 문제입니다. <오즈의 마법사>가 다루는 세계는 결국 돈 화폐 경제적 이익중심의 세상이 평화와 협동과 사랑의 문맹이전의 동화적 세계로 돌아가는 겁니다.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 인민당 당수의 사상을 다룬 겁니다. 미국 인민당 당수는 미국 사회가 너무나 양철로 된 농부처럼 형편없는 비주체적 경제 인구를 너무 많이 발생시키니까 화폐제도를 근본적으로 도입해서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지금 경제학자들이 <오즈의 마법사>를 많이 연구합니다. <오즈의 마법사>는 공동체에 관한 원대한 비전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걸 거꾸로 읽으면요. 여러분께서 <오즈의 마법사> 텍스트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라고, 하나님 나라 운동이 세상에서 가능하다는 것,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 사상의 본류가 아니라는 것, 그걸 알아야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말이 사회적 정치적, 우리가 공부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과 밀접하게 연동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 운동은 죽어서 노쇠해져서 지상에서 삶의 활동을 펼칠 수 없는 여력이 없는 사람이 수세적으로 가는 천당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은 지금 이 땅에서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극복하고 사랑과 우정, 다시 말해서 돈을 버는 운동과 사랑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것이 기독교가 말한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종교와도 다릅니다. 종교는 모두 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실현가능하고 우리가 참여 가능한 운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운동에 투신하려고 하는 극소수의 교회이지만 우리가 그런 운동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9장입니다. 어떤 내용인가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이건 지금 전깃불이 밤의 의미를 퇴색시킨 이런 시대에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실제로 밤에 일할 수 없다는 건 예수님 당시에는 너무나 맞는 말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어둠, 그 당시 랍비와 종교지식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다고 말씀드렸죠.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불구는 하나님 미완의 창조현장이었다, unfinished start,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창조이전 상태, 원시우주 상태를 드러내는 불구가 있고 장애가 있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유보해놓고 남겨놓은 미창조 지역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건 굉장히 다른 입장입니다. 이 세계가 완전하다고 완벽하다고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왔다고 주장하는 것, 종교적인 인과응보설을 주장하면 선천적 장애를 남겨두신 하나님이 설자리가 없습니다. 아니겠죠,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이 자기 죄도 부모 죄도 아니지만 아담의 원죄 때문이겠죠, 이건 아담의 원죄설로 풀려고 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이론이죠.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아담의 원죄설로 풀 수 없고 하나님께서 옛날 우리가 창조되기 이전, 원시창조의 모습을 편린적으로 보여주는 불구와 미완성 장애의 상태를 이미 안고 있는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이 입장입니다. 이건 어떤 차이가 있느냐? 이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부모도 죄를 짓지 않았겠지만 결국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아담의 원죄 때문이라고 해석하면 이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입장과 정반대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영역을 안은 채로 세상을 창조했을까요?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공동창조자가 되는 일에 우리를 초청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수동적인 향유자가 아니라 공동참여자가 되게 하기위하여 남겨놓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보내신 일을 하여야 한다, 에르가입니다. 물리학에서 에르가 하면 에너지 수식 때 쓰죠? 에르가 work, 일이라는 헬라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창조사역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낸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진행 중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사람이 불구로 태어나고 장애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남겨 놓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미완의 창조는 누가 계속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이 땅의 모든 장애와 불구상태를 하나님 창조사역을 보내신 자들로 하여금 되풀이 하게 함으로써 창조주의 기쁨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나는 치명적 불구가 나타난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석서를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생각이 없어서 혹시 내가 이단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도 모릅니다. 이게 이단인지, 이런 내용이 6군데 7군데 찾아봐도 없어요. 왜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느냐? 만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을 죄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이 해석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영감을 확신합니까? 80% 정도 확신합니다. 20% 정도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매우 맑을 때 깨달은 것이고 지속적으로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감히 이렇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주석서든지 아담의 원죄 때문이든지, 숨은 죄 때문에, 이런 식의 인과응보론 해석은 이 본문의 원 문맥을 너무 떠난 해석입니다. 볼 게 없습니다. 소문 내지 마십시오. 제가 이단인 걸 여러분만 알고, 소문내지 마시고요. 저는 정말 많은 시간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시간을 묵상하고 묵상하기 때문에 제가 옳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기 이전의 세상이 어땠는가를 남겨놓고 그 현장에 우리를 초청한다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굉장히 모험을 하는 겁니다.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시행착오적인 하나님이고, 우리 하나님은 점진적인 개선의 창조주이지, 한번에 one shot one kill로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놓고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아무 할 일도 없는 꼭두각시 같은 피조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남자가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여자를 만드는 추후대책을 세우시는 하나님이시지, 내가 창조했기 때문에 모른 척 하자, 하면서 지나가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아시고 여자 만들 생각을 추후에 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존엄에 대해서 훼손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에 사람을 지었음을 후회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스승을 파는 유다가 세상에 안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탄식을 하는 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 또는 하나님의 아들 입에서 절대로 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하나님도 손도 쓰지 못하는 확률적인 부조리가 있다는 뜻인데, 이건 굉장히 우리가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런 말을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주권적 존엄을 지키기보다는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실제로 작동 안 되는 부분을 솔직히 인정하며 고쳐가고 가필과 퇴고를 끊임없이 하는 작가 같은 솔직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게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완의 창조부분을 놓고도 미완의 어두운 창조부분을 남겨 놓고 보내신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계속 이어 되갚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감격적인 동참을 하는 공동창조자가 나타나도록 하나님이 섭리했다는 겁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참고로 요한복음 3장 17절, 34절, 5장 36-37절, 6장 57절, 7장 29절, 8장 18절, 27절, 이렇게 많은 열군데 이상에서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말보다 나를 보내신 자, 나에게 창조사역을 이어 받게 한 분이라는 말로 하나님을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불구자를 볼 때 어떤 생각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이 불구자와 나를 대면하게 하신 그 뜻이 있어서 불구와 연약함, 피조물의 범연약함, 어쩔 수 없는 장애를 극복하도록 동정심을 발동시키면서 하나님이 하는 일이 이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직면하게 한다는 말이죠. 피하는 것이 아니라요.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파라곤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정면으로 조우하지 않고 길을 지났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을 보고 지나갔습니다. 예수님도 길 지나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비껴갔다는 말입니다. 비껴간 길목에 있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예수님은 몸을 틀어서 응시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문제를 비껴지나가면서 방관하면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길을 가셨을 때 보았습니다. 이때 보았다는 단어가 의도적으로 몸을 틀어서 보았다는 뜻입니다. 길을 지나가실 때 정면으로 그가 요청하고 예수님을 향해서 나아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나갔고 그 사람은 저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갈 때 이렇게 몸을 틀고 보셨습니다. 우리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선천적 장애와 불구적 상황을 지나갈 수 있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보면 그 불구적 상태를 볼 때 죄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조만간 하시게 될 그 일을 생각하면 예수님처럼 그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누가 문제 해결자가 되느냐? 그 문제를 응시하고 관찰하고 보는 사람이 그 문제 해결자가 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불행을 보고 하나님과 연동시키고 하나님과 불행을 연동시킬 수 있는 그 사람이 문제 해결자가 되고 바로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매력적입니다. 인간의 불행을 지나가시지 않고 정면으로 조우하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하실 일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시고 기대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관점이 살아 있을 때는 우리는 낮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항상 일할 것이 있는 낮을 경험하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관점이 없는 사람들, 이런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과 시야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밤이 돼서 어떤 일도 하지 못하는 수동 상태에 빠져버립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가 정면으로 조우할 선천적 장애와 불구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맹인이 멀리서 볼 때는 무생물적 정물이죠? 그런데 이 맹인이 보통 맹인이 아닙니다. 말을 따박따박 하는 걸 보면 이 사람이 보통 맹인이 아니고, 속이 다 살아 있는 맹인이고 존엄을 파괴당했을 때 슬픔을 토로하는 맹인이며 심지어 창세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창세기의 창조를 simulation 실현 재현해준 겁니다. 이 맹인이 바리새인 특별심사 위원회에 불려가서 하는 말입니다. 9장 31절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맹인은 이제 보니 재야신학자입니다. 32절이 결정적입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자기 일생의 관점입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이 떠진 사건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이건 자기 일생의 관심사인데,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말은 성경에 굉장히 밝은 사람입니다. 이 맹인도 독학파 신학자이고 굉장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논쟁을 이어갑니다. 우리가 무생물적 정물상태에 있고 감정도 없고 존엄한 인격의 파괴를 보고도 마음 아파할 것 같지도 않은, 거의 사물상태의 인격성을 박탈당한 채 인정받지 못한 그 사람들 마음에도 이렇게 파괴된 존엄, 자기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고 번뇌가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걸 알아차린 겁니다. 그걸 알아차리려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한 동안 계속 우호적 관찰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그를 통찰하고 관찰해야 그 사람 안에 있는 일생의 질문이 무엇인가 공감이 일어나고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사랑이 가득 차면 우리가 정물처럼 무생물처럼 사물처럼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속에 무슨 문제가 꿈틀거리는지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생깁니다. 하나님과 그 사람의 인생을 연동시키는 신학적 신앙적 상상력이 가득차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없으면 모릅니다. 왜 이 맹인에게 창세기를 simulation 해주었는지 알겠죠? 진흙으로 사람을 빚은 그 장면을 다시 한 번 해준 이유가 있죠? 창세 이후로 눈을 뜨게 하지 못했다, 내가 두 번째 창세기다, 네 말이 맞다, 나는 지금 두 번째 창세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라면서 눈에다가 진흙을 이깁니다. 사실 진흙 자체나 침 자체에 의학적 성분이 있다는 걸 믿기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하면 안 됩니다. 맹인에게는 성경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 진흙으로 사람을 만드는 그 장면을 simulation 또는 재현시켜주셔서 나를 창세기 그 순간으로 데려가는 구나, 창세기 그 순간으로 나를 소환하여 진짜 나에게 두 번째 창조 미완의 창조를 완성하는가 보다라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행동이죠. 창세 이후로 소경된 사람이 눈을 뜨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거룩한 suspense를 불러 일으켰겠죠? 한 번 보세요.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번역하면 실로암은 보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아랍사람 이름 중에 샬라가 많죠? 샬라린 샬라, 전부 다 샬라흐 라는 동사, 보내다는 동사입니다. 원래 기혼 샘물이라는 예루살렘, 기혼샘물 하니까 아무도 모르네요. 예루살렘에 가면 기혼샘물이 있거든요. 그 샘물을 공사해서 안으로 보냈습니다. 기혼샘물로부터 예루살렘 물가로 보냄 받은 물이 실로암 물가입니다. 성 바깥에서, 인간의 피조물 바깥에서 연약한 인생 바깥에서 온 생수, 이런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생 피조물의 바깥에서 온 실로암 물과 같이 피조물의 연약함 불구를 치유할 수 있는 물과 같습니다. 자기를 생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생수라고 말한 그 본문을 넌지시 일깨워주고자 실로암을 보냄 받은 자라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계속 보냄 받은 자라고 했던 언급, 자신을 생수라고 했던 언급, 예루살렘 성 바깥에서 예루살렘 성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보냄 받고 들여보내진 샘물이 실로암 샘물이기 때문에 실로암 샘물로 가서 씻으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에게 가서 씻으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 됩니다. 결국 예수님 믿고 가서 씻으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실로암 샘물까지 걸어갔을 때는 약간의 순종이 필요했겠죠?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사람이 실로암못까지 걸어가려면, 예루살렘 길은 평탄대로가 아니라 울퉁불퉁합니다. 원래 제가 교목실장 하지 않으면 이번 6월에 하나님 나라 연구소에서 예루살렘 성지 트래킹 단을 구성해서 가려고 했습니다. 어쨌든 갈 생각은 아직도 있습니다. 학교고 뭐고 때려치우고,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에 많은 후원을 해주신 분과 우리 가향교회 형제자매들, 제가 걸었던 길과 산 유대광야 신광야, 마사다를 꼭 걷게 하고 싶고 단과 브엘세바를 걸으면서 창세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번에 학교에서 안 가면 가려고 합니다. 돈 좀 모아보시기 바랍니다. 터키에서 1박 하고, 저는 이 생각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여러분을 데려 가서 내가 걸었던 그 길을 걷게 하고 싶은 마음, 모세가 구리 놋뱀을 만들었던 구리 광산, 노예들이 구리채광을 했던 곳부터 해서 헬몬산의 이슬이 있는 단에 가서 열대우림 숲에서 예수님 따먹었던 무화과 바나나 이런 것을 따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기혼 샘물이라고 하니 눈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예루살렘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기혼샘물이 들어온다는 말을 하니 눈이 맑아져야 하는데 여러분 눈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숙여지는 상태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가더라도 예루살렘에 가야 합니다. 유대 팔레스타인 땅을 가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같으면 순례개념이 아니라 공부 개념이 됩니다. 인문지리와 자연지리를 공부하고 나면 완전히 성경이 새롭게 보입니다. 완전히는 아니고 약간, 성경을 많이 읽으면 완전힌데, 평소에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효과가 없더라고요. 우리 한 번 갑시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라는 말은 보냄 받은 자 예수님에게 가서 씻으란 뜻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남겨 놓은 미완의 창조영역들을 찾아가서 창조에 인간을 동참시켜서 하나님의 공동창조자로 인간을 초청하기 위해서 파송된 실로암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 말은 우리 모든 불구와 우리의 모든 어둠과 우리의 모든 장애를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씻어야 하고, 예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인생을 재해석하면 눈이 열리고 새로운 관점이 생기고 시야가 열린다는 뜻입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2-3일 전에 토니 멜렌데스, 레나 마리아, 오프라 윈프리 2007년 스탠포드 졸업연설, 스티브잡스의 2008년 연설, 수없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 안에 있는 치명적 약점이 얼마나 하나님께 완벽하게 쓰임 받았는지 간증합니다. 여러분 유투브에 가면 오프라 윈프리 2007년 스탠포드 치면 나오는데, 너무나 영어를 잘합니다. 스티브잡스 연설, 너무나 영어 잘합니다. 막힘 없이 영어를 하는 구나, 스티브잡스는 세 번이나 인생이 낙심하고 침몰했던 이야기, 오프라 윈프리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서 앵커우먼으로써 실패한 이야기, 앵커우먼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사를 전송받고 말하자마자 눈물을 터트리니까 해고를 시켰습니다. 22살 때 2만불 고급직에서 해고를 당했는데, 8개월 있다가, 너 같이 눈물이 많은 사람들은 앵커우먼으로 적당하지 않아, 대신 토크쇼를 한 번 해봐, 힐링캠프, 남에게 공감을 잘하는 공감의 천재였던 오프라윈프리가 드디어 토크쇼를 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격정들을 힐링토크를 하면서 완전히 다 풀어냅니다. 레나마리아는 1968년에 스웨덴에 태어나서 두 팔이 없고 한 다리가 짧고 한 다리 밖에 성한 것이 없는 사람이 복음성가 가수가 되면서 장애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6개를 땄습니다. 열린음악회에 와서 너무나 아름다운 를 한국말로 불렀습니다. 토니 멜렌데스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앞에서 팔이 없기 때문에 발로 기타연주를 했는데, 이라는 복음성가를 불렀죠. ‘Today is filled with love Today is like no other day before‘ 이런 노래인데, 교황 바오로 2세가 놀라서 포교문에 있는데, 이 세상에는 자신안에 있는 치명적인 어둠,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멈춰버린 것 같은, 다시 말해서 내가 안고 살아야지만 극복할 수 있는 죄의 문제, 내가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존재론적인 취약성 때문에 생긴 겁니다. 우리가 너무 자학하면 안 됩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인 연약함과 취약함이 우리에게 있는 겁니다. 시편 103편 14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우리가 먼지뿐이라는 것은, 아파라 아도나이, 우리가 죄를 너무 쉽게 지을 수밖에 없고 존재론적인 취약함을 가진 존재인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걸 기억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우리의 치명적인 실수,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종류의 어둠도 실로암 물가에 가서 재해석되지 않고 재가공되고 재창조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만큼 중요한 분입니다. 인류전체의 운명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진짜 중요한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우리 예수님을 심드렁하게 무감각하게 무감동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 원시우주와 같은 치명적 어둠을 씻어서 빛의 창조로 대반전 시켜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 나가서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가서 씻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내 인생을 계속 바라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내 인생을 해석하는 겁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읽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읽었던 책이 성경 아닙니까? 예수님 마셨던 생수가 성경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의 관점, 예수님께 가서 얼굴을 씻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읽으셨던 말씀으로 자기 인생을 재해석한다는 말이고, 말씀으로 멱을 감고 말씀 안에 헤엄친다는 것이고, 말씀으로 들이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치명적 원시적 어둠 상태를 빛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재창조의 손길을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이 대 반전을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짜 대단한 분입니다. 제가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둔탁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예수님은 정말 기독교인들만 알면 안 되는 분입니다. 오프라 윈프리 너머에 예수님이 있는데, 예수님의 기가 막힌 언어를 오프라 윈프리 만큼 풀어쓰는 성직자가 없습니다. 오늘날 성직자는 거룩한 옷만 입고 다니고 대중과 접촉을 상실한 바리새인이 대부분입니다. 목사를 불러 놓고 힐링 토크를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목사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야, 이렇게 하는 게 목사지, 자기 고통의 언저리에 와서 내 고통과 신음소리를 들어줄 사람으로 목사를 지목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목사 그 인간과 너무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안 돼, 그게 대개 성직자입니다. 요새 법륜 스님이라는 분이 청춘토크에 가서 즉문즉답을 하는데 너무 간단합니다. 저는 애인이 두 명인데 어떻게 할까요? 한 명 자르세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러나 법륜 스님이 하면 감동이 옵니다. 부모님이 이혼했습니다, 저는 지금 14살입니다, 이혼한 부모님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14살은 혼자 살 수 있습니다, 집 나오세요, 이게 답입니다. 목사님이나 기독교인이 힐링캠프, 힐링토크에 초청받지 못합니다. 창조주가 남겨 놓은 미완의 창조. 어둠, 장애, 치명적 죄의 문제 이런 것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전혀 기독신앙과 연동되지 못한 채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강호동의 <무릎팍 도사>가 연예인들의 죄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는 고해성사입니다. 강호동 <무릎팍 도사> 마지막에 보면 꼭 대마초 피워서 감옥에 갇혔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묻습니다. 목사님은 묻지 못하는 겁니다. 마지막에 기를 불어 넣어주는데 물론 기가 차지도 않겠죠. 그러나 그 내용은 그 사람을 재활복구 시켜주는 내용입니다. 대마초는 물러갈 지어다, 합니다. 이경규 김제동이 국민멘토가 돼서 뜨는 것도 기독교라는 엄청난 영성적 자원을 가진 우리가 일상적인 담화현장에서 추방됐고 소외됐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예수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의 관점을 가진 우리가 왜 원시 우주 같은 어둠에 처박힌 사람들의 인생을 왜 힐링캠프로 초청하지 못합니까? 마무리 짓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치명적 상처를 남겨놓으신 목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3절에는 하나님의 하실 일이 치명적인 불구자에게 나타날 것이 예상됩니다. 그다음 본문 4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은 누가 계승해야 하죠? 하나님이 보내신 자와 그 보내신 자를 따르는 자들이 이 불구자의 어둠과 대결해야 하는 거죠. 요한복음 9장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의 불행과 세상 사람들을 근원적으로 속박하는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와 불구와 인생을 어두컴컴한 밤으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장애와 슬픔, 지금은 그 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 보내신 자와 함께 있는 자들이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강력한 논제입니다. 어떤 실천적 함의가 나와요? 사람의 불행을 볼 때 죄와 연동시키지 말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미완의 과업을 들고 인생의 모든 어둠과 모든 죄와 모든 불구와 모든 부정적 쓰레기 같은 삶의 사연들을 실로암 물가에 가서 힐링을 하고 실로암 물가가 바로 교회가 돼야 하고 기독교인들의 동아리가 돼야 하고 그리스도인 아름다운 인격이 돼야 하고 바로 우리가 돼야 합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가서 눈을 씻고 불구를 해결 받는 장소가 되길 원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치명적으로 위태롭게 만들었던 어둠의 시간들을 극복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신령한 영적 대안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열망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사무치는 진실이 많이 모자라서 우리 목사님들이 천 번 흔들리며 앓고 있는 청년들에게 신세대에게 아들딸 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용도 폐기된 돌처럼 굴러다닙니다. 도덕적으로 너저분한 사건들이 교회를 싸고돌고, 하나님 기독교인들은 고집이 세면서 보수적인 수구인들과 연동하면서 사회 일반적 진보와 발전도 방해하는 무지막지한 무감각한 사람이 됐습니다. 주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불행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으시면서 그 안에서 죄를 본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시키고자 하는 섭리를 보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일어나야 할 사명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 만나는 불행을 비껴가지 않게 하시고 정면으로 조우하게 하셔서 하나님 뜻과 내 인생을 발견할 수 있게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중에서 실로암 물가에 가서 씻어야 할 어둠을 실로암 물가 같은 곳에서 씻어서 말씀 안에 씻어서 갱생되고 재활될 수 있어서 치료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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