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주일설교 1부 _ 요한복음 11장 37-44절 (나사로야 나아오라)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7가지 표적이 요한복음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 일곱 가지 표적 중 마지막이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하고 논증하는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표적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기적입니다. 요한복음에는 7개의 표적이 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첫째 표적이고, 나사로가 부활하는 사건은 일곱 번째 표적입니다. 그런데 이때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해서 무언가 말씀하셨습니다. 11장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본문이 표적다음에 나오는 해설입니다. 예수님은 표적과 해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 일으키신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예수가 살아 있는 성전임을 드러내는 표적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다, 그 진리를 알려주시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보면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2장에서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사건이 나왔고 19장 34절에서는 물과 피가 동시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요한일서 5장 6-7절 ‘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자신의 육체에서 포도주 같은 피를 흘리실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죠. 요한복음 1-11장에 나오는 일곱 가지 표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들됨을 입증하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믿으면 그게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왜 유독 요한복음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 것은 특수한 문장, 명제를 믿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 과정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믿음은 결코 간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설복시켜주시는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을 믿기가 힘듭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을 믿으려면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예수님까지 1500년간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선택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으려면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1500년간 존속한 이스라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은 아브라함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의 복된 왕국으로 초청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보내신 자를 믿는다는 말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준비된 구원사 전체를 믿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를 믿으려면 창세기 1-24장을 믿어야 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이 땅에 왔는가를 믿어야하니까 아브라함이 이 땅에 온 목적은 아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믿으려면 창세기 1-24장에 나타난 아브라함 이전의 역사를 믿어야 하고 인류의 역사, 죄와 불순종과 죽음으로 점철되는 악순환의 역사를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를 파송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1500년간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의 역사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백성 역사 1500년을 믿는다는 말은 왜 아브라함의 나라가 시작됐는가 이유를 알아야 하니까 아브라함 이전의 창세기 1-24장까지 결국 죄와 죽음과 심판의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인류역사를 믿는다는 거죠.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는다는 말은 창세기 3-11장의 역사 속에 반복되는 그 멸망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한만민을 복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면 창세기 3-11장까지 반복되는 죄와 죽음과 심판의 악순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구약적 울림을 전제한 책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고 예수 이전의 구원역사를 믿는 것을 의미하고 예수 구원역사 이전에 인류역사가 속박되어 있는 죄와 죽음의 악순환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뜻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펴볼까요? 요한복음에는 시종일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구원역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 창세기 1장부터 요한복음 3장 15절까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말 안에 구약역사, 창세기 역사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바로 그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축복하면 축복한다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세계만민의 운명을 좌우하고 가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 후손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창세기 3-11장의 그 악순환으로부터 해방되어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생명과 영생의 역사에 진입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왜 요한복음이 어렵나요?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 읽고 나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보통 사람이 읽으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굉장히 신비한 코드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encoded된 language입니다. 그런데 코드를 풀고 나면 마태 마가 누가보다 너무나 깊은 울림이 쩌렁 쩌렁 울려오기 때문에 깨달음이 끝이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언어 하나하나가 끝이 없습니다. 너무나 탐구할 말이 많아요. 요한복음 11장 27절에서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것은 이 당시 유대인들이 다 믿었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다윗의 후손, 다윗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아들’ 즉 사무엘하 7장 14-16절이 약속한 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왜 같은 말인가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하는데 여기서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1대 아들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1대 아들이 된 이유는 시편 2편 7절에 나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상통치의 대리자라는 뜻입니다. 이때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 지상통치의 대리자, 다윗 이후에 오는 모든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대리자, 하나님 아버지의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1대 아들이면 솔로몬은 2대 아들인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부름은 원래 그 원형이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로 불림 받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간의 그 부자지간의 관계를 지상에서 그림자처럼 구현한 거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다윗과 그 후손들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만들었던 원판 원형으로써의 하나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대리자,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거든요. 그 뜻 자체가 버금왕, 부왕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원래 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권능을 그대로 가지는 부왕으로써, second king으로써, 버금왕으로써 대리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똑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똑같은 말이에요.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말씀, 똑같은 말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태초에 하나님 아들이 계셨다, 똑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living bible 이라는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지 않고 태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라고 바로 번역했어요. 그리고 어떤 성경에는 태초에 아들이 있었다고 번역했어요. 왜 똑같은 말이냐면 태초에 순종의 화신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생명적 교제를 나누는 하나님의 심복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버금왕이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대리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셨다고 믿는 것이 요한복음이거든요. 구약성경의 믿음을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 아들들의 신정통치 대리통치의 좌절과 실패의 기록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구약역사는 한 마디로 하나님 아들들의 대리 또는 순종의 실패입니다. 그게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하나님 아들들이거든요. 그런 예수는 You are the son of God, 당신은 구약성경에 나타났던 파편적이고 편린적인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구약성경의 하나님 아들들이 했던 파편적이고 편린적으로 했던 모든 실패를 만회하여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의 왕권을 다시 돌려드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께 소환시켜서 참 하나님 백성을 만들어줄 그 왕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마르다의 이 고백은 구약을 정통하게 이해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백이고 베드로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마르다 이런 사람들은 식견 자체가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깊은 분들입니다. 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런 고백은 구약전체를 정통으로 이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소리에요. 마르다나 베드로는 천재라고 말하기는 힘들고 그런 것보다 큰말이에요. super super 신자에요. 구약성경의 완전히 엑기스를 이해하는 분들이에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할 줄 알고 그걸 앙망하면서 기다리는 분의 눈에 예수님이 보인 겁니다. 이건 답답할 정도로 설명하기 힘들어요. 여러분이 각자 깨닫기 바랍니다. 저는 이것을 분명히 흥분하면서 깨달았어요. 잘 전달이 안 돼요. 엄청 흥분하면서 깨달았는데, 여러분도 깨닫기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런 표현은 구약역사를 아까 제가 정리한 듯이 이해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들이라는 말 최초의 표현 출애굽기 13장 2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2편 7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구약역사는 하나님 아들들의 실패의 역사입니다. 하나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창세기 6장에 나와요. 노아 홍수를 일으켰던 그 죄와 불순종 세대가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이 음란하고 폭력적인 거인들의 시대에 홍수가 왔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역사 앞에 아브라함이 대표했던 하나님 아들들 역사 전에 천사적인 의미의 아들들의 타락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 아들들의 실패, 천상적 존재, 창세기 6장 1-3절에 나오는 육체로 돌변해버린 제1세대 하나님 아들들의 좌절과 불순종을 만회하기 위하여 제2세대 하나님 아들들의 실험을 한 거예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예요. 제1세대 하나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창세기 6장 1-11절까지 하나님 아들들의 역사에요. 제2세대 하나님 아들들의 프로젝트, 즉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의 역사는 노아시대 때 노아홍수를 초래했던 그런 아들들 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얼룩진 하나님 아들들의 역사였어요. 여전히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는 많이 모자란 아들, You are the son of God,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는 고백은 창세기 1장부터 예수님 직전까지 모든 역사를 만회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그걸 우리는 독생자라고 말합니다. 모노게네스 히오스, 독특하게 형성된 하나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 모노게오스 히오스가 종말에 죽은 자를 살린다고 믿는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기가 이 땅에 등장한 것 자체가 종말이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마르다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아들 때문에 부활하는 사건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다고 주장하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육신을 입고 주유하는 이 자체가 바로 종말의 시작이라고 보는 거예요. 마르다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세상의 끝이다, 지금 내가 육신을 입고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종횡무진하는 것 자체가 세상 끝날 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면 저는 이런 모든 복잡한 논리를 알고 믿었습니까? 79년 11월에 제가 이 복잡한 논리를 다 알았습니까? 아닙니다. 이 복잡한 논리는 몰랐지만 핵심은 알았습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는 엄청난 떨림이 있었는데 예수를 주로 영접한 순간 예수의 주권 아래 복속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내 순정을 드려서 고백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창조적 불안과 불확실성을 돌파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이 복잡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죄로 인하여 내가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몸서리치게 경험하면서 내가 창세기 3-11장의 역사 안에 속박돼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창세기에 이런 복잡한 내용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내 원하는 바대로 살지 말라고 내 인간성이 하나님을 향해서 피어나지 못하고 이 야수적인 세상에서 동물적인 수준으로 떨어지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구원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알았고, 예수를 주로 영접한 순간 내가 짐승스러운 삶에서 하나님 아들다운 고결한 삶으로 재활복구될 것을 믿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을 받고 성령을 영접하는 순간 성경의 이런 논리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mission passion 선교열정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를 믿자마자 전도를 한 겁니다. 왜냐하면 이 깨달음이 강렬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예수를 믿는 순간 내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느꼈습니까? 저는 네 가지를 통해서 느꼈습니다. 첫째 내 안에 느끼는 고도의 주관적 변화가 가장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고도의 주관적 변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예수를 주로 영접한 순간부터 성령의 역사가 너무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둘째 내가 만나는 관계성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우정의 동아리가 바뀌었습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 아무하고 다 만났습니다. 신림6동에 순대 먹으러 가기도 하고 소주 먹으로 포장마차 가자고 하면 가고 낙성대 가자고 하면 가고, 탱고탱고 가자고 하면 가고 다 갔습니다. 안 간 데가 없었습니다. 대한극장 가자고 하면 가고 뚜렷이 인생의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 동기가, 회권아 대한극장에 아바, 춤 영화 보러 가자, 저는 아바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따라갔습니다. 신림6동에도 따라가고 청계천에 있는 탱고 추는 데도 따라가고 아무런 재미가 없었지만 따라갔습니다. 등산 가자고 하면 등산가고 바둑 두자고 하면 바둑 두고, 이게 제 인생이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내내 그랬습니다. 바둑도 두 시간씩 두기도 하고 세 시간씩 두기도 하고, 인생의 목적이 없으니까 미팅 가자고 하면 미팅도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저의 79년 11월 이전의 삶입니다. 제일 무서운 건 예배드릴 때가 아닙니다. 예배드릴 때는 설교자만 보면 됩니다. 이번에 5월 26일 이승장 목사님이 처음으로 설교 하는데, 설교듣는 건 재미있는데 2부 순서가 사람을 죽입니다. 돌아 앉아서 형제님 자매님 손을 잡고, 회권 형제가 믿음을 갖도록, 눈을 딱 뜨고 이 사람은 언제 봤다고 날 형제라고 그래? 하면서 속으로 반발했습니다. 저는 2부 순서가 제일 힘들어서 항상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령 받고 나서 2부 순서가 재미있어졌습니다. 가자는 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고도의 주관적 변화, 우선순위가 바뀌고, 세 번째는 제 삶의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내 인생이 고결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굉장히 부지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목적이 생겼습니다. 네 번째 제가 전도자가 됐습니다. 이 네 가지가 가장 큰 변화입니다. 고도의 주관적 성령충만상태, 희락과 사랑, 두 번째 삶의 우정의 동아리, 신령한 우정의 교제권에 들어감, 세 번째 삶의 목적과 뚜렷한 소명감이 발생함, 네 번째 제가 전도자의 삶을 살기 시작함, 79년 11월 전과 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제가 구약의 논리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상 창세기 3-11장에 나오는 멸망의 악순환, 죄와 죽음의 악순환 상태, 그 이전에는 제가 무슨 생활을 했습니까? 음란한 포스터를 보면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고, 혹시 음란한 책을 친구들이 보면 따라서 보고 슬금슬금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 땅에 고결하게 살아야 하는 아무런 이유도 몰랐고, 부지런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부지런했지만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순간 창세기 3-11장, 죄와 유혹의 악순환에 떨어져 점점 큰 죄악의 삶, 그 시스템 안에 편입되는 것, 노아의 홍수를 당하고 바벨론 탑을 쌓다가 흩어짐을 당하는 허무맹랑한 멸망의 길에서 저는 분명히 벗어났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저는 그 순간에 경험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표준적인 경험이고 전부 다 저처럼 경험했습니다. 예수는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 속박돼 사는 우리를 위해 우리 무덤에 오셔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 내 무덤가에 파송 당하신 하나님 아들입니다. 우리 무덤에 와서 내 이름을 개인적으로 부르시면서 불러내십니다. 나의 죽음에 슬픔을 표하면서, 내가 청년이면서도 베로 수족을 동인 채 악취를 풍기며 사는 내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하나님은 내 무덤가에 오셔서 나를 고유명사로 부르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저는 내 이름을 고유명사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 자복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런 구원이 지금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창세기 3-11장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유혹과 죄, 범죄와 살인욕구와 음란욕구와 자기 파괴적인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인생관, 노아 홍수에 빠져 죽는 사건, 바벨탑 축조 세대들과 동아리가 되어서 말도 안 되는 이 세상의 체제에 순응하는 인생들, 이게 전부 다 죄와 죽음입니다. 거대한 바벨론 축조세대에 들어가서 부품처럼 자기 인생을 내맡기는 것, 이것이 바벨론 반역세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노아홍수세대, 삶의 가치관이 없어지고 육체가 되어 살면서 영성이 죽어버리고 육체적 쾌락 이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고결한 삶의 지점을 잃어버린 sensual life, 쾌락적이고 관능적인 삶이 노아홍수세대의 삶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를 죽이려는 증오심에 북받쳐 사는 삶이 카인과 아벨의 삶입니다. 악한 꾀를 쫓으면서 한몫에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 삶, 일확천금을 꿈꾸는 삶이 아담과 하와의 삶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의 삶은 악인의 꾀를 쫓는 삶이고, 카인은 죄인의 길에 들어선 삶이고, 라멕과 노아 세대 때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세대입니다. 악인의 길은 망하지만 의인의 길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법 안에서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도 멸망으로 가는 real한 삶이 너무나 넓게 퍼져 있습니다.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러나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너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길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백성들은 창조적 소수파에 소속돼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을 사람들에게 선교적 제사장적 사명감을 갖고 살아가는 겁니다. 얼마나 감격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내 인생의 대답으로 이미 죽기 시작한, 썩기 시작한, 악취를 내기 시작한 내 인생에 우리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보내신 대답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은 결정적으로 아무도 피하면 안 되는, 지금 바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순간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죽는 걸 슬퍼하시고 우리가 죽음의 권세에 속박되어서 시달리는 걸 슬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십니다. 주님은 청년이 죽는 걸 우십니다. 주님은 마땅히 오래 살아야 할 인생이 죽음의 권세에 종노릇하면서 쓰러져 있는 걸 슬퍼하시고, 우리 무덤가에 오셔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이미 냄새가 나는, 부패당해서 질주하는 망가진 내 인생을 향해서 재활복구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내 인생의 대답, 창세기 3-11장까지 반복됐던 멸망의 악순환, 그 인생을 끊어줄 하나님의 아들, 순종의 화신, 그 아들임을 믿기만 하면 생명의 왕국으로 우리를 이주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면서 불러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 소리로, 포네 메갈레, ‘나사로야 나오라’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것이 매주일 일어나야 하고 매순간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미 죽은 지 나흘된, 악취가 나고 냄새가 나는 누추한 내 인생의 문가에 오셔서 내 이름을 불러내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 아멘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시신에게도 명령하실 수 있고 무생물에게도 명령하실 수 있고 죽어버린 몸, 식어버린 몸에게도 명령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식어버린 나에게도 명령 내리실 수 있고 죽음 저편으로 질주하는 나를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의 음성을 가진 분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저는 예수님 만세라고 불렀습니다. 세 번씩 불렀습니다. 너무나 위대하신 분을 우리가 주로 영접하고 있고, 우리가 예수를 주로 영접한다면 죽음의 가치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사랑 외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외에는 모든 것이 썩어가면서 악취를 냅니다. 불결하고도 썩어갑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외에는 어떤 나의 삶의 행적도 악취가 나는 썩어가는 필멸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필멸적 가치에 둘러싸인 나를 불러내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내가 필멸적, 반드시 소멸할 수밖에 없는 가치에 둘러싸인 것 자체가 무덤 안에 있는 겁니다. 을지로와 충무로에 다니는 저 사람들은 좀비입니다. 강시입니다. 필멸의 가치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좀비고 강시이면서 동시에 무덤을 뛰쳐나온 시신들입니다. 그래서 냄새가 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가치에 매몰된 내 인생이 무덤에 있는 인생이다, 사명자의 삶을 살지 못하고 생명의 감가삼각을 계속 경험하면서 생명을 소진시키면서 어떤 거룩한 일에도 투신되지 못한 삶이 무덤에 있는 삶이다, 넓은 길 멸망의 길로 질주하는 삶이 무덤에 있는 삶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개인 고유명사로 이름을 불러가면서, 이윤구 형제님 나오십시오, 이종혁 형제님 나오십시오, 라고 부릅니다. 이때 아멘 하면서 거룩한 좀비가 돼서 나와야 합니다. 베로 수족을 조인 것을 풀어 직립보행자가 되게 하라,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안식일에 경험해야 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엄청 흥분했습니다. 이 짧은 구절을 묵상하면서 우리주님이 너무 엄청난 분인걸 깨닫게 되었고, 창세기부터 다시 생각하니까 만세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주님을 너무 초라하게 대표합니다. 우리는 우리 예수님을 기독교인과 약간 관련된 분으로 알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주님이 하실 일을 우리는 너무 모릅니다. 너무 슬픕니다. 고유명사로 우리를 불러내시는 주님, 필멸적 가치에 둘러싸여 썩어가는 우리 인생을 생명의 왕국, 좁은 길로 불러내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필멸의 가치 속에 썩어 없어져 가는 저희 인생들을 냄새 나는 저희 인생들을 부르셔서 생명의 길로 초청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냄새나는 누추한 삶의 자리로 오셔서 우리를 고유명사로 불러내주시기 원합니다.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7가지 표적이 요한복음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 일곱 가지 표적 중 마지막이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하고 논증하는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표적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기적입니다. 요한복음에는 7개의 표적이 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첫째 표적이고, 나사로가 부활하는 사건은 일곱 번째 표적입니다. 그런데 이때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해서 무언가 말씀하셨습니다. 11장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본문이 표적다음에 나오는 해설입니다. 예수님은 표적과 해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 일으키신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예수가 살아 있는 성전임을 드러내는 표적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다, 그 진리를 알려주시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보면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2장에서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사건이 나왔고 19장 34절에서는 물과 피가 동시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요한일서 5장 6-7절 ‘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자신의 육체에서 포도주 같은 피를 흘리실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죠. 요한복음 1-11장에 나오는 일곱 가지 표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들됨을 입증하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믿으면 그게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왜 유독 요한복음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 것은 특수한 문장, 명제를 믿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 과정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믿음은 결코 간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설복시켜주시는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을 믿기가 힘듭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을 믿으려면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예수님까지 1500년간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선택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으려면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1500년간 존속한 이스라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은 아브라함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의 복된 왕국으로 초청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보내신 자를 믿는다는 말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준비된 구원사 전체를 믿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를 믿으려면 창세기 1-24장을 믿어야 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이 땅에 왔는가를 믿어야하니까 아브라함이 이 땅에 온 목적은 아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믿으려면 창세기 1-24장에 나타난 아브라함 이전의 역사를 믿어야 하고 인류의 역사, 죄와 불순종과 죽음으로 점철되는 악순환의 역사를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를 파송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1500년간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의 역사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백성 역사 1500년을 믿는다는 말은 왜 아브라함의 나라가 시작됐는가 이유를 알아야 하니까 아브라함 이전의 창세기 1-24장까지 결국 죄와 죽음과 심판의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인류역사를 믿는다는 거죠.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는다는 말은 창세기 3-11장의 역사 속에 반복되는 그 멸망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한만민을 복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면 창세기 3-11장까지 반복되는 죄와 죽음과 심판의 악순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구약적 울림을 전제한 책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고 예수 이전의 구원역사를 믿는 것을 의미하고 예수 구원역사 이전에 인류역사가 속박되어 있는 죄와 죽음의 악순환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뜻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펴볼까요? 요한복음에는 시종일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구원역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 창세기 1장부터 요한복음 3장 15절까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말 안에 구약역사, 창세기 역사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바로 그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축복하면 축복한다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세계만민의 운명을 좌우하고 가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 후손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창세기 3-11장의 그 악순환으로부터 해방되어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생명과 영생의 역사에 진입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왜 요한복음이 어렵나요?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 읽고 나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보통 사람이 읽으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굉장히 신비한 코드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encoded된 language입니다. 그런데 코드를 풀고 나면 마태 마가 누가보다 너무나 깊은 울림이 쩌렁 쩌렁 울려오기 때문에 깨달음이 끝이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언어 하나하나가 끝이 없습니다. 너무나 탐구할 말이 많아요. 요한복음 11장 27절에서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것은 이 당시 유대인들이 다 믿었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다윗의 후손, 다윗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아들’ 즉 사무엘하 7장 14-16절이 약속한 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왜 같은 말인가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하는데 여기서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1대 아들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1대 아들이 된 이유는 시편 2편 7절에 나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상통치의 대리자라는 뜻입니다. 이때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 지상통치의 대리자, 다윗 이후에 오는 모든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대리자, 하나님 아버지의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1대 아들이면 솔로몬은 2대 아들인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부름은 원래 그 원형이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로 불림 받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간의 그 부자지간의 관계를 지상에서 그림자처럼 구현한 거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다윗과 그 후손들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만들었던 원판 원형으로써의 하나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대리자,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거든요. 그 뜻 자체가 버금왕, 부왕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원래 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권능을 그대로 가지는 부왕으로써, second king으로써, 버금왕으로써 대리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똑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똑같은 말이에요.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말씀, 똑같은 말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태초에 하나님 아들이 계셨다, 똑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living bible 이라는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지 않고 태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라고 바로 번역했어요. 그리고 어떤 성경에는 태초에 아들이 있었다고 번역했어요. 왜 똑같은 말이냐면 태초에 순종의 화신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생명적 교제를 나누는 하나님의 심복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버금왕이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대리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셨다고 믿는 것이 요한복음이거든요. 구약성경의 믿음을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 아들들의 신정통치 대리통치의 좌절과 실패의 기록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구약역사는 한 마디로 하나님 아들들의 대리 또는 순종의 실패입니다. 그게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하나님 아들들이거든요. 그런 예수는 You are the son of God, 당신은 구약성경에 나타났던 파편적이고 편린적인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구약성경의 하나님 아들들이 했던 파편적이고 편린적으로 했던 모든 실패를 만회하여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의 왕권을 다시 돌려드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께 소환시켜서 참 하나님 백성을 만들어줄 그 왕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마르다의 이 고백은 구약을 정통하게 이해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백이고 베드로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마르다 이런 사람들은 식견 자체가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깊은 분들입니다. 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런 고백은 구약전체를 정통으로 이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소리에요. 마르다나 베드로는 천재라고 말하기는 힘들고 그런 것보다 큰말이에요. super super 신자에요. 구약성경의 완전히 엑기스를 이해하는 분들이에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할 줄 알고 그걸 앙망하면서 기다리는 분의 눈에 예수님이 보인 겁니다. 이건 답답할 정도로 설명하기 힘들어요. 여러분이 각자 깨닫기 바랍니다. 저는 이것을 분명히 흥분하면서 깨달았어요. 잘 전달이 안 돼요. 엄청 흥분하면서 깨달았는데, 여러분도 깨닫기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런 표현은 구약역사를 아까 제가 정리한 듯이 이해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들이라는 말 최초의 표현 출애굽기 13장 2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편 2편 7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구약역사는 하나님 아들들의 실패의 역사입니다. 하나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창세기 6장에 나와요. 노아 홍수를 일으켰던 그 죄와 불순종 세대가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이 음란하고 폭력적인 거인들의 시대에 홍수가 왔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역사 앞에 아브라함이 대표했던 하나님 아들들 역사 전에 천사적인 의미의 아들들의 타락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 아들들의 실패, 천상적 존재, 창세기 6장 1-3절에 나오는 육체로 돌변해버린 제1세대 하나님 아들들의 좌절과 불순종을 만회하기 위하여 제2세대 하나님 아들들의 실험을 한 거예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예요. 제1세대 하나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창세기 6장 1-11절까지 하나님 아들들의 역사에요. 제2세대 하나님 아들들의 프로젝트, 즉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의 역사는 노아시대 때 노아홍수를 초래했던 그런 아들들 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얼룩진 하나님 아들들의 역사였어요. 여전히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는 많이 모자란 아들, You are the son of God,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는 고백은 창세기 1장부터 예수님 직전까지 모든 역사를 만회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그걸 우리는 독생자라고 말합니다. 모노게네스 히오스, 독특하게 형성된 하나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 모노게오스 히오스가 종말에 죽은 자를 살린다고 믿는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기가 이 땅에 등장한 것 자체가 종말이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마르다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아들 때문에 부활하는 사건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다고 주장하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육신을 입고 주유하는 이 자체가 바로 종말의 시작이라고 보는 거예요. 마르다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세상의 끝이다, 지금 내가 육신을 입고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종횡무진하는 것 자체가 세상 끝날 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면 저는 이런 모든 복잡한 논리를 알고 믿었습니까? 79년 11월에 제가 이 복잡한 논리를 다 알았습니까? 아닙니다. 이 복잡한 논리는 몰랐지만 핵심은 알았습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는 엄청난 떨림이 있었는데 예수를 주로 영접한 순간 예수의 주권 아래 복속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내 순정을 드려서 고백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창조적 불안과 불확실성을 돌파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이 복잡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죄로 인하여 내가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몸서리치게 경험하면서 내가 창세기 3-11장의 역사 안에 속박돼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창세기에 이런 복잡한 내용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내 원하는 바대로 살지 말라고 내 인간성이 하나님을 향해서 피어나지 못하고 이 야수적인 세상에서 동물적인 수준으로 떨어지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구원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알았고, 예수를 주로 영접한 순간 내가 짐승스러운 삶에서 하나님 아들다운 고결한 삶으로 재활복구될 것을 믿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을 받고 성령을 영접하는 순간 성경의 이런 논리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mission passion 선교열정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를 믿자마자 전도를 한 겁니다. 왜냐하면 이 깨달음이 강렬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예수를 믿는 순간 내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느꼈습니까? 저는 네 가지를 통해서 느꼈습니다. 첫째 내 안에 느끼는 고도의 주관적 변화가 가장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고도의 주관적 변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예수를 주로 영접한 순간부터 성령의 역사가 너무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둘째 내가 만나는 관계성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우정의 동아리가 바뀌었습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 아무하고 다 만났습니다. 신림6동에 순대 먹으러 가기도 하고 소주 먹으로 포장마차 가자고 하면 가고 낙성대 가자고 하면 가고, 탱고탱고 가자고 하면 가고 다 갔습니다. 안 간 데가 없었습니다. 대한극장 가자고 하면 가고 뚜렷이 인생의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 동기가, 회권아 대한극장에 아바, 춤 영화 보러 가자, 저는 아바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따라갔습니다. 신림6동에도 따라가고 청계천에 있는 탱고 추는 데도 따라가고 아무런 재미가 없었지만 따라갔습니다. 등산 가자고 하면 등산가고 바둑 두자고 하면 바둑 두고, 이게 제 인생이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내내 그랬습니다. 바둑도 두 시간씩 두기도 하고 세 시간씩 두기도 하고, 인생의 목적이 없으니까 미팅 가자고 하면 미팅도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저의 79년 11월 이전의 삶입니다. 제일 무서운 건 예배드릴 때가 아닙니다. 예배드릴 때는 설교자만 보면 됩니다. 이번에 5월 26일 이승장 목사님이 처음으로 설교 하는데, 설교듣는 건 재미있는데 2부 순서가 사람을 죽입니다. 돌아 앉아서 형제님 자매님 손을 잡고, 회권 형제가 믿음을 갖도록, 눈을 딱 뜨고 이 사람은 언제 봤다고 날 형제라고 그래? 하면서 속으로 반발했습니다. 저는 2부 순서가 제일 힘들어서 항상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령 받고 나서 2부 순서가 재미있어졌습니다. 가자는 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고도의 주관적 변화, 우선순위가 바뀌고, 세 번째는 제 삶의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내 인생이 고결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굉장히 부지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목적이 생겼습니다. 네 번째 제가 전도자가 됐습니다. 이 네 가지가 가장 큰 변화입니다. 고도의 주관적 성령충만상태, 희락과 사랑, 두 번째 삶의 우정의 동아리, 신령한 우정의 교제권에 들어감, 세 번째 삶의 목적과 뚜렷한 소명감이 발생함, 네 번째 제가 전도자의 삶을 살기 시작함, 79년 11월 전과 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제가 구약의 논리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상 창세기 3-11장에 나오는 멸망의 악순환, 죄와 죽음의 악순환 상태, 그 이전에는 제가 무슨 생활을 했습니까? 음란한 포스터를 보면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고, 혹시 음란한 책을 친구들이 보면 따라서 보고 슬금슬금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 땅에 고결하게 살아야 하는 아무런 이유도 몰랐고, 부지런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부지런했지만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순간 창세기 3-11장, 죄와 유혹의 악순환에 떨어져 점점 큰 죄악의 삶, 그 시스템 안에 편입되는 것, 노아의 홍수를 당하고 바벨론 탑을 쌓다가 흩어짐을 당하는 허무맹랑한 멸망의 길에서 저는 분명히 벗어났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저는 그 순간에 경험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표준적인 경험이고 전부 다 저처럼 경험했습니다. 예수는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 속박돼 사는 우리를 위해 우리 무덤에 오셔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 내 무덤가에 파송 당하신 하나님 아들입니다. 우리 무덤에 와서 내 이름을 개인적으로 부르시면서 불러내십니다. 나의 죽음에 슬픔을 표하면서, 내가 청년이면서도 베로 수족을 동인 채 악취를 풍기며 사는 내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하나님은 내 무덤가에 오셔서 나를 고유명사로 부르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저는 내 이름을 고유명사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 자복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런 구원이 지금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창세기 3-11장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유혹과 죄, 범죄와 살인욕구와 음란욕구와 자기 파괴적인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인생관, 노아 홍수에 빠져 죽는 사건, 바벨탑 축조 세대들과 동아리가 되어서 말도 안 되는 이 세상의 체제에 순응하는 인생들, 이게 전부 다 죄와 죽음입니다. 거대한 바벨론 축조세대에 들어가서 부품처럼 자기 인생을 내맡기는 것, 이것이 바벨론 반역세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노아홍수세대, 삶의 가치관이 없어지고 육체가 되어 살면서 영성이 죽어버리고 육체적 쾌락 이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고결한 삶의 지점을 잃어버린 sensual life, 쾌락적이고 관능적인 삶이 노아홍수세대의 삶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를 죽이려는 증오심에 북받쳐 사는 삶이 카인과 아벨의 삶입니다. 악한 꾀를 쫓으면서 한몫에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 삶, 일확천금을 꿈꾸는 삶이 아담과 하와의 삶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의 삶은 악인의 꾀를 쫓는 삶이고, 카인은 죄인의 길에 들어선 삶이고, 라멕과 노아 세대 때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세대입니다. 악인의 길은 망하지만 의인의 길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법 안에서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도 멸망으로 가는 real한 삶이 너무나 넓게 퍼져 있습니다.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러나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너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길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백성들은 창조적 소수파에 소속돼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을 사람들에게 선교적 제사장적 사명감을 갖고 살아가는 겁니다. 얼마나 감격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내 인생의 대답으로 이미 죽기 시작한, 썩기 시작한, 악취를 내기 시작한 내 인생에 우리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보내신 대답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은 결정적으로 아무도 피하면 안 되는, 지금 바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순간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죽는 걸 슬퍼하시고 우리가 죽음의 권세에 속박되어서 시달리는 걸 슬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십니다. 주님은 청년이 죽는 걸 우십니다. 주님은 마땅히 오래 살아야 할 인생이 죽음의 권세에 종노릇하면서 쓰러져 있는 걸 슬퍼하시고, 우리 무덤가에 오셔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이미 냄새가 나는, 부패당해서 질주하는 망가진 내 인생을 향해서 재활복구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내 인생의 대답, 창세기 3-11장까지 반복됐던 멸망의 악순환, 그 인생을 끊어줄 하나님의 아들, 순종의 화신, 그 아들임을 믿기만 하면 생명의 왕국으로 우리를 이주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면서 불러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 소리로, 포네 메갈레, ‘나사로야 나오라’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것이 매주일 일어나야 하고 매순간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미 죽은 지 나흘된, 악취가 나고 냄새가 나는 누추한 내 인생의 문가에 오셔서 내 이름을 불러내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 아멘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시신에게도 명령하실 수 있고 무생물에게도 명령하실 수 있고 죽어버린 몸, 식어버린 몸에게도 명령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식어버린 나에게도 명령 내리실 수 있고 죽음 저편으로 질주하는 나를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의 음성을 가진 분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저는 예수님 만세라고 불렀습니다. 세 번씩 불렀습니다. 너무나 위대하신 분을 우리가 주로 영접하고 있고, 우리가 예수를 주로 영접한다면 죽음의 가치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사랑 외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외에는 모든 것이 썩어가면서 악취를 냅니다. 불결하고도 썩어갑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외에는 어떤 나의 삶의 행적도 악취가 나는 썩어가는 필멸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필멸적 가치에 둘러싸인 나를 불러내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내가 필멸적, 반드시 소멸할 수밖에 없는 가치에 둘러싸인 것 자체가 무덤 안에 있는 겁니다. 을지로와 충무로에 다니는 저 사람들은 좀비입니다. 강시입니다. 필멸의 가치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좀비고 강시이면서 동시에 무덤을 뛰쳐나온 시신들입니다. 그래서 냄새가 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가치에 매몰된 내 인생이 무덤에 있는 인생이다, 사명자의 삶을 살지 못하고 생명의 감가삼각을 계속 경험하면서 생명을 소진시키면서 어떤 거룩한 일에도 투신되지 못한 삶이 무덤에 있는 삶이다, 넓은 길 멸망의 길로 질주하는 삶이 무덤에 있는 삶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개인 고유명사로 이름을 불러가면서, 이윤구 형제님 나오십시오, 이종혁 형제님 나오십시오, 라고 부릅니다. 이때 아멘 하면서 거룩한 좀비가 돼서 나와야 합니다. 베로 수족을 조인 것을 풀어 직립보행자가 되게 하라,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안식일에 경험해야 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엄청 흥분했습니다. 이 짧은 구절을 묵상하면서 우리주님이 너무 엄청난 분인걸 깨닫게 되었고, 창세기부터 다시 생각하니까 만세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주님을 너무 초라하게 대표합니다. 우리는 우리 예수님을 기독교인과 약간 관련된 분으로 알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주님이 하실 일을 우리는 너무 모릅니다. 너무 슬픕니다. 고유명사로 우리를 불러내시는 주님, 필멸적 가치에 둘러싸여 썩어가는 우리 인생을 생명의 왕국, 좁은 길로 불러내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필멸의 가치 속에 썩어 없어져 가는 저희 인생들을 냄새 나는 저희 인생들을 부르셔서 생명의 길로 초청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냄새나는 누추한 삶의 자리로 오셔서 우리를 고유명사로 불러내주시기 원합니다.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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