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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사람과 쓰임 받은 사람! (행 13:21-23)

by 【고동엽】 2022. 2. 10.

버림받은 사람과 쓰임 받은 사람! (행 13:21-23)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 되는 사람은 잘 되는 이유가 있고,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서 약해지는 사람이 있고, 강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삼하3:1절을 보세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할/
여기서 싸움과 전쟁은 차이가 있습니다. '싸움은 이기고 지는 것이지만, 전쟁은 죽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죽이고 살리는 치열한 전쟁이 있었는데 사울은 점점 약해졌고, 다윗은 점점 강해 졌습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이야기도 있고, 요즘은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편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자라 자기 성씨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세상사는 이야기에서 들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 손자가 할머니를 시골에 내버려두고 달아났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사람에게도 버림받았다는 것은 큰 비극이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과 다윗입니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똑같이 사십 년 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이 교만한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울의 집은 점점 쇠하여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다윗의 집도 하나님의 축복 속에 점점 강성해져 나갔습니다. /할/
우리는 사울 같이 되지 말고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집도 다윗의 집처럼 하나님의 축복 속에 점점 강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가 하는 생업,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참 행복한 교회도 하나님의 축복 속에 더욱더 강성해지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제목 소개!▶

 

1. 본문의 배경을 무엇인가?

 

본문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파송된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는 키프로스 섬에서 배를 타고 다시 육지로 올라와서 지금의 터키 지방인 비시디아 안디옥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폈습니다.
이곳은 지형이 험한 산악지대로서 군사의 요충지였고, 상업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회당을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으며 설교의 주제는 '오직 예수'입니다.
사도행전 속에는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와 바울의 유명한 설교와 스데반의 유명한 설교와 야고보의 유명한 설교 등 총 24편의 설교가 들어있는데, 오늘 본문은 바로 사도바울의 1차 선교여행 중 행했던 첫 번째 그의 설교가 됩니다. /할/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시대에 사울 왕과 다윗 왕조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는데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임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할/
오늘 저는 21-22절에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는 말씀 중심으로 '버림받은 사울과 쓰임 받은 다윗'을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할/

 

2. 버림받은 사울을 먼저 조명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며, 기스의 아들로 부유한 가문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키도 컸고, 용모도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최고 통치권자인 왕이라는 직책은 절대적인 권력의 자리요 그 자리는 오직 한 사람만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사실 왕이란 되기도 어렵지만 왕의 위치를 제대로 지키기란 더 더더욱 어려운 자리입니다. 왕이 누리는 권력이나 영화는 그 나라에서 오직 왕 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며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엄청난 축복이었고, 대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할/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세우고 붙드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붙드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울 왕이나 아합 같은 왕들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었고, 이사야나 스데반이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벧전2:4절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라고 했고, 또 7절에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버림받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버렸습니까? 이스라엘 동족들이 버렸습니다. 정치가들이 버렸고, 종교가들이 버렸고, 유대인들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가장 유일한 인류구속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신 산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누구의 인정을 받고 누구의 버림을 받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느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느냐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학생활 4년 동안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수백 번씩 사랑을 고백하던 같은 과에 남자와 결혼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3년 만에 이혼이라는 아픈 상처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남편이 나가는 직장의 다른 여직원과 눈이 맞아 아내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3년 동안이나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고통받다가 먼 친척의 소개로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난 남편 역시 결혼 전 교제하던 어느 여인과의 불륜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다가 결혼한 아내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은 두 번씩이나 버림받았다는 충격으로 자살을 결심을 하고 극약을 먹었지만 다행히 조기 발견으로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수족마비증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어느 교회 성가대가 복도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88장에 '내 몸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간 나와 항상 같이하여 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날 지키시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할/
이 찬송이 그녀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버렸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라도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면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소망을 소유하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나와 등록을 하고 세례를 받고 직분을 받아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하다가 수족 마비 증세가 치료되고 또 늦은 말년에 상처를 입은 신앙이 좋은 집사님과 재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할/
오늘 본문의 사울 왕은 왕으로 화려한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삼상15:11절에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했다'고 했으며, 23절에서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쥐었던 사울에게서 왕권을 빼앗고 그를 버려야만 했을까요? 우리가 오늘 사울이 버림받은 이유를 잘 배워 우리는 절대로 그런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할/
사울이 왜 버림을 받았는가? 사울은 성공했으나 실패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택받아 왕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버림받은 인생'이요 '퇴짜 맞은 인생'입니다. 사울은 이래서 '성공 같은 실패자'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인생이 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울의 전철을 절대 밟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왜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을까요?

①경솔한 그의 처신 때문에 버림을 당했습니다.

삼상13:13-14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는 사무엘 선지자와 사울 왕이었습니다. 사실 사울이 왕이 되도록 주선한 것은 사무엘이요,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이 되게 한 것도 사무엘 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는 사무엘이 정치와 종교 전반에 걸친 지도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왕이 된 후로는 정치는 사울에게 위임했고, 종교문제는 사무엘이 책임지고 백성들을 지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울의 입장에서는 사무엘이 거추장스러워졌습니다. 툭하면 간섭을 일삼는가 하면 잘못이 있을 때는 직언과 함께 책망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사울과 사무엘이 갈등이 생기고 파워게임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사울의 잘못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 선지자 사무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울 왕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올바르게 다스리도록 독려하고 왕의 탈선과 범죄를 예방하고 경고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할/
오늘날도 종교지도자는 세상을 향해 바른 소리를 해야 합니다. 삼상13:5-14절에 보면, 사울이 왕이 된지 이 년째 되던 해, 지중해 연안을 주름잡고 살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 원수들이 기병대 36,000명과 보병 수십만을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전세가 위급해지자 사울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때 마침 정신적인 지도자요, 영적인 지도자인 사무엘이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병사들은 블레셋의 엄청난 병력 앞에 겁에 질려 일부는 웅덩이에 숨고 굴속에 숨고 일부는 요단강을 건너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전열이 흩트려지고, 사기가 약화되자 급한 것은 사울 이었습니다. 급한 나머지 사울이 직접 제사를 집권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당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선지자와 제사장뿐이었습니다.
⑴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과대 평가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왕은 정치를, 사무엘은 예배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왕일 뿐 예언자도 선지자도 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왕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 오라'고 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⑵인내가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일주일 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삼상13:8절에 보면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고 해서 일을 저질렀습니다.
인내의 의미는 '얼마나 오래 참느냐'에 있습니다. 순간적인 인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만 끝까지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문둥병이 걸린 아람나라의 나아만은 요단강에 첫 번째 들어갔다가 나온 후 약간 치료되고, 세 번째 절반 치료되고 여섯 번째 거의 완치된 것이 아닙니다. 여섯 번 목욕을 했어도 문둥병이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목욕을 하고 나니 그의 병은 완치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역시 끝까지 인내하지 않았더라면 여섯 번의 목욕이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할/
⑶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삼상13:11-12절에 보면 '불레셋은 쳐들어오고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말은, '당신이 약속한 그 날 제때에 오기만 했다면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경학자 에델쿨트는 '사무엘이 이레를 지난 후에 온 것이 아니라 사울이 이레가 다 가기 전에 먼저 서둘러 번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라 사울이 약속을 어기었고, 경거망동을 한 것입니다.
경솔한 사람과 진실치 못한 사람은 자기가 져야 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고 전가합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습성이 우리에게 지금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할/
⑷부득이한 처사였다는 변명입니다. 여기에는 그의 불신의 소치가 나옵니다. 그가 진실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과 전쟁 역시 하나님의 장 중에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아무리 블레셋이 포위망을 좁히고 병사들이 겁에 질려 줄행랑을 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득이 하다면서 사무엘을 무시하고 신성한 제사 법을 어기면서 자신이 제사를 접전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언제나 '부득이'라는 세 글자가 문제가 됩니다. 부득이해서 교회에 못나오고 부득이해서 기도 못하고 부득이해서 술 마시고 춤추고 고스톱을 쳤다고 합니다.
부득이가 발전하면 상황윤리가 되고, 타협주의, 혼합주의, 기회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결단이라는 아픈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아멘!/
사울은 부득이라는 올무에 걸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부득이해서 그렇게 됐다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소,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요!' 버림받는 순간입니다. /할/

 

②그의 교만 때문에 버림을 당했습니다.
삼상15:12절에 보면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는가를 알기 위해서 삼상15:1-9절을 참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공격을 하고 진멸하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원수들 중의 원수였습니다.
아말렉 전투에서 사울은 왕 아간을 생포하고 적을 무찌르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개선하던 사울은 갈멜지방에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승전비'를 세웠습니다. 그가 기념비를 세운 것은 승리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전술과 전략이 뛰어났고 용맹이 작용해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127: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했고, 또 시27:3절에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할/
그 이유는 '여호와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승리와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께 두었고, 사울은 자신에게 두었습니다.
사무엘선지자도 기념비를 세운 일이 있습니다. 삼상7:12절에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이 나라를 다스릴 때 블레셋과의 일대 전쟁을 치러야할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이 노도와 같이 쳐들어오고 있을 때,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회개하면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우렛소리를 발하여 블레셋을 물리쳐주시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 일 후에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중간지점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같은 기념비입니다만 사무엘은 하나님을 위하여 세웠고, 사울은 자신을 위해서 세웠습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개인도 권력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믿/아멘!/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념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그는 분명히 했습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기념비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세상에 기념비를 세우기를 원한다면 겸손함이 기념비, 순종과 헌신의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을 자신의 면류관이요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여인 한나에게 있어서 사무엘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기념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눈물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도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라면서 그분을 찬양하는 믿음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를 통해 믿음의 기념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기도의 기념비, 섬김의 기념비, 헌신의 기념비, 사랑의 기념비, 전도의 기념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늘의 기념비, 십자가의 정신으로 가득 찬 헌신의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사울이 세운 기념비는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해 기도하던 사무엘 선지자를 밤을 새워 근심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는 근심의 기념비였으며, 교만의 기념비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할/

 

③그의 탐욕과 거짓 때문에 버림을 당했습니다.
삼상15:3절입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그러나 9절에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죽이지 않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끌고 왔습니다. 난데없이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양과 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는 어찜입니까?'라고 묻자 사울도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다 잔멸했다.'고 항변합니다.
▶여기 사울의 몇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⑴욕심에 끌려 살찌고 좋은 양과 소를 죽이지 않고 끌어온 것입니다.
⑵양이나 소를 끌어온 것은 자기가 아니라 백성이라고 그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⑶양과 소를 전리품으로 끌어다가 착복하려다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끌어왔다는 미명으로 위장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탐욕과 거짓으로 자신의 행위를 위장하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지도자가 부패하니까 백성이 따라 간다는 사실입니다. 삼상15:9절에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그러니까 왕과 백성은 공범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 해먹는데 나라고 못해 먹을게 뭐냐'는 식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졸라'의 작품 '나나'의 주인공 나나는 어느 극장의 이름 없는 여배우였으나 사치와 허영에 빠져 고급 매춘부로 전략하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 주변은 수없이 많은 남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모조리 몰락했습니다.
어느 백작은 가산을 탕진했고, 어느 은행장은 파산했고, 군장성 형제는 공금횡령과 자살로 파멸해 버렸고, 나나 자신은 천연두에 걸려 죽었습니다. 작가 '에밀졸라'는 그의 소설 끝 부분에서 말하기를 '쾌락이라는 독소로 다른 사람들을 헤치던 그 독소에 의해 비너스는 썩어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썩어져 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심어줘야 합니다. /아멘!/

 

④사울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삼상15:11절에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잘못 돌이킨 사람이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던 사람이 돌이켜 제주로 가버리고 만 것처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생의 키를 돌이킨 사람입니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향하여 가다가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회개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눅15장에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향락과 방종의 세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방종이나 타락의 생활은 출발은 감미로워도 종국에는 비참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는 제멋대로 자유를 만끽했고, 인생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 갈곳이 없었고, 살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이키기를 작정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눅15: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20절에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가진 재산을 모조리 탕진했고, 술친구며 주변에 맴돌던 여자들이 그의 곁을 떠났을 때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아버지 품이었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의 위대한 회개입니다. 이 길이 살길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믿/아멘!/
두 번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다가 세상을 향하여 떠나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순종의 사람, 배신의 사람, 무지몽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떠난 가롯 유다는 무지몽매하게 목매달아 자살하고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왔습니다. 시49: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돌이켜 하나님을 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그러기에 삼상15:22-23절에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거역하는 것은 사슬의 죄와 같다'고 책망했습니다.
사울은 순종하는 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잡지 않고 불순종하는 방향으로 돌이켜 인생을 걷다가 버림받게 된 것입니다. /할/

 

⑤한마디로 믿음(신앙)이 없어서 그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삼상15:15절에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하나님'이라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무엘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너의 하나님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 믿음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똑같은 제자였지만 베드로와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했는가 하면, 가롯 유다는 단 한번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못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비롯됩니다. 사울처럼 하나님을 당신의 하나님으로 인식해 버리면 하나님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로 객관화되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의무감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구원이 있고, 기도의 응답이 있고, 축복이 있고 능력이 있고,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할/

 

⑥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에 하나님도 그를 버렸습니다.
삼상15:25-26절에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은 말씀하신 하나님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요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여기서 말씀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그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역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32:15절에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또 삿10:13절에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고 하셨고, 렘6:19절에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 진멸하되 다 진멸하라!' 이 명령을 어겼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울을 버려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게 했습니다.
롬10장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첫째는 '로고스'라 했고 또 하나는 '레마'라 했습니다. '로고스'는 들려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레마'는 임하는 말씀, 내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들리는 말씀과 임하는 말씀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듣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단 선지자가 삼하12장에서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를 책망합니다. 이에 다윗은 선지자의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드려 7일 동안 눈물로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레마' 임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과 달리 임하는 말씀을 거역해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버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십니다. 예수님은 마10:32-33절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할/
오늘 사울의 교훈을 머리 속에 새겨 우리는 절대로 그런 죄에 빠져서는 아니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⑦사울의 마지막은 비참하게 자살로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죽게 하신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사들에게 쫓기어 길보아산까지 도망쳤는데 그 곳에서 블레셋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이제 사울 왕과 그 왕의 아들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사울 왕의 아들 세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이 때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제 블레셋 군사의 목표는 사울 왕 하나 남았습니다. 활로 멀리 도망치는 사울 왕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블레셋 군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악착같았습니다. 절대로 사울 왕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점점 거리가 좁혀 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 왕은 잡혀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죽을 것 같으니까 사울 왕이 옆에 붙어 다니는 자기 병기를 가지고 있는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저 할례 없는 자가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대상10;4) 그러나 병기를 가진 신하는 감히 사울 왕을 죽일 수가 없었기에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울 왕은 자기 칼을 땅에 세우고는 그 칼 위에 엎드러졌습니다. 사울 왕은 이렇게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병기 가진 신하도 사울 왕과 같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죽음인가? /할/

 

3. 쓰임 받은 다윗을 조명해 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다윗을 귀하게 쓰셨습니까? 다윗이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습니까? 스텐포드 대학을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목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여기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말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생각도 마음도 뜻도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사람'을 말합니다. 사랑도 물질도 마음도 드려야 합니다.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마음에 드는 음식점에서 먹어야 행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다시 한번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①다윗은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삼상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무엘이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사울 대신에 이스라엘의 새 임금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삼상13:14절에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야 이스라엘 왕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새의 여덟 아들이 순서대로 사무엘 앞에 나와 섰습니다. 먼저 장자 엘리압이 나왔습니다.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하고 잘 생겼습니다. 사무엘이 속으로 '이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합당이 여기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 차남 아비나답, 다음 삼남 삼마가 나왔으나 다 합격하지 못하고 장자로부터 일곱 번째 아들까지 다 낙방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이새를 불러 '네 아들이 다냐?' '아닙니다. 막내 다윗이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습니다. 왕 되기에는 너무 어리고 볼품이 없어 선택하는 자리에 아예 데려오지도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빨리 불러 오라 해서 왔는데 주의 음성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십니다.
②다윗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형제들은 모든 조건을 다 훌륭하게 갖추었으나 믿음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삼상 17장의 다윗과 블레셋 대장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다윗의 신앙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골리앗이 막대기와 몰매를 가지고 싸우러 오는 다윗을 향하여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오느냐? 내게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짐승에게 주리라.'고 하자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하고 나가 물 맷돌 하나로 골리앗의 머리를 맞추어 쓰러트리고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다윗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할/
③다윗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 조건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그 유명한 말씀을 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④다윗은 충성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충성의 사람을 마음'에 두십니다.
다윗은 어릴 때 아버지의 양을 치는 일에도 충성했고,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돌보는데도 충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⑤다윗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을 쓰십니다.
삼상16: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할/ 요즘 말로 하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군대에 나갈 수도 없는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은 골리앗 때문에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물 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담대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멘!/
⑥다윗은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그러운 사람'을 쓰십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여러 차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이고, 또 그의 너그러운 마음' 때문입니다.
⑦다윗은 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사람'을 쓰십니다.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었지만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고 죄를 지적했을 때, 회개했습니다. 그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라면 어찌 하든지 해야 되겠다는 열심과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할/
여러분! 사울은 자기의 주제를 넘는 일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직을 무시했고, 선지자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도 잘못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철저하게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귀하게 쓰셨고 존귀케 하셨고 다윗의 집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윗의 축복이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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