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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새기는 바울의 십자가 정신! (갈 2:20)

by 【고동엽】 2022. 2. 10.

사순절에 새기는 바울의 십자가 정신! (갈 2:20)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농사에도 절기가 있는 것처럼 성경에도 절기가 있고 교회에도 절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때를 알아야 합니다. 절기에 맞춰 농사를 지어야 풍성한 추수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때를 알고 때에 맞게 행동할 때 성장이 있습니다.
지난 3월 9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4월 23일까지 사순절 기간이고,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을 지킬 때,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사순절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과 생명(부활)입니다. 먼저, 사순절은 내가 죽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합니다. 그 죽음은 실상 나의 죽음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내가 달려야 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는 순간 우리도 죽은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할/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욕심도 없습니다. 자기주장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죽은 자임을 믿습니까? 사순절은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깨닫는 기간입니다. 내 안에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사단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순절이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의 다른 의미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사순절이 끝나면 부활절이 있습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사순절의 경건 훈련은 신앙의 봄을 피웁니다. 죽은 것 같은 땅에서 새싹이 나오듯이 사순절은 우리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 40일 동안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힘써 바라봅시다.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40일 동안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합시다. 우리가 사순절을 잘 지킬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의 흔적이 충만하게 됩니다. 갈6:7절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할/


▶그러면 사순절은 어떤 기간인가요?
①자기를 보며 애통하는 기간입니다. 약4:9절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할/
자기의 죄를 바라보고, 자기의 믿음을 바라보고, 자기의 행실을 바라보면서 '왜 나는 이러는지 몰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쾌락과 즐거움도 애통으로, 근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멘!/
성 프란시스 이야기입니다. 그는 조그만 죄도 아파하며 견딜 수 없이 몸부림쳤습니다. 프란시스가 하나님 앞에서 나약한 자신을 보았습니다. 바울 같이 행하려는 바 선을 행하지 못 하고 자꾸만 악을 행하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미웠습니다. 그래서 온 몸을 거의 벌거벗은 상태에서 장미 밭에 들어가 뒹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 벌이었습니다. /할/
②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에 우리는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진하게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특별히 반복되는 죄를 끊도록 자기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아멘!/
③사순절은 신앙을 훈련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회교는 해마다 라마단 기간이 있습니다. 회교도들은 해마다 라마단 기간이면 아침에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 금욕기간입니다. 사순절에 더욱 강조해야 할 신앙훈련들이 있습니다.
⑴기도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마귀가 가까이 하게 됩니다.
⑵성경 묵상입니다. 특히 공관복음 예수님의 교훈의 3분의 2가 사순절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14-17장까지 긴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입니다. 사순절에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뜻을 기리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⑶금식입니다. 40일을 온전히 금식하지 못 하면 아침 금식만이라도 하는 방법입니다. 이것도 어려우면 금요일만 아침 금식을 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것이 사순절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⑷침묵입니다. 사순절은 침묵하는 절기입니다. 평소보다 말을 반 이상으로 줄이십시오. 사람들은 너무나 쓸 데 없는 말을 많이 하고 살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노크 소리는 조용할 때 더 크게 들리는 법입니다. 조용히 지내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⑸구제와 사랑을 실천하는 절기입니다. 잠19: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할/ ◀제목 속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입니다. 그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흠모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일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예수님과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아멘!/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길은 예수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와 연합해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모든 삶을 이어갈 때 그 사람이 바로 사람답게 사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자기 스스로는 사람답게 살수가 없습니다. 접붙임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감을 먹고 그 씨를 밭에 심었습니다. 감나무가 자라면 좋은 감이 열릴 것을 기대하고 심었는데 똘감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똘감나무를 잘라버리고 좋은 감나무를 접붙이면 참 감이 열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르쳐 준대로 접붙이기를 했더니 진짜로 좋은 감이 열렸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씨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접붙이기로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할/
성자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성스러운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기도를 많이 해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아들이 훌륭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접붙여야 합니다.
접붙임이 무엇인가? 영접입니다. 요1: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어떤 사람도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좋은 혈통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다. 또 많이 배웠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씨를 바꾸어야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접붙여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바울은 롬6:3-5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11절에서도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할/
세례는 예수의 죽으심에 연합하고 부활에 연합하는 것인데 세례 받은 자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 인식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처녀가 결혼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녀가 결혼할 때 그 성품, 학력, 인물, 습성 다 그대로 가지고 결혼합니다. 그런데 결혼하면 자기 신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집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또 아이를 낳았을 때는 어머니로 여깁니다. 그래서 신분이 달라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게 될 때는 구원의 확신을 갖습니다. 이것은 요3:16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요3:16절이 구원받는 신앙의 원리라고 말한다면, 오늘 본문인 갈2:20절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생활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별세 신앙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사느냐? '내가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별세는 한 세상을 떠나서 다른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과거의 옛 자아는 죽고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할/
사도 바울은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네 가지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자기 죽음을 선언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첫 번째 우리의 삶의 고백입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 이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는 자기 장례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례식을 두 번 치릅니다. 한번은 남이 해주는 장례식입니다. 이것은 내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장례식을 하는지 모릅니다. 남들이 울어도 모르고, 남들이 뭐라고 해도 모릅니다.
다음은 내가 하는 장례식입니다. 이것은 살아서 내가 웁니다. 과거가 죽으면서 웁니다. 자기 장례식을 생전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사람만 인생을 다시 사는 사람이 됩니다. 과거적 자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고 선언하고 자기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자아를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의로워지느냐' 이것은 두 번째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할/
▶영국의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죠지 뮬러에게 어떤 사람이 '목사님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을 때 '나는 어느 날 죽임을 당하였다. 죠지 뮬러에게 죽었고, 그의 의견에 대하여 죽었고, 그의 선택에 대하여 죽었고, 그의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죽었고, 그의 의지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 칭찬과 책망에 대하여 죽었고, 심지어 친구나 내 형제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하여도 죽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노라'
롬6:3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5절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할/
이것은 죽으심에 연합한다는 것입니다. 연합은 나의 과거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인간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도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별세신앙입니다.
▶김익두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낙고을의 불량배였습니다. 그는 강팍한 사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행패부리면서 탕자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소안론 선교사가 그 앞을 지나가면서 김익두를 보고 전도지를 주면서 '청년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 하니까 김익두가 전도지를 받아 가지고 코를 풀어서 휙 던지면서 '너나 천당 가라'고 말했습니다.
'청년 전도지로 코 풀면 코 썩어요'하니까 그가 그 종이를 다시 한번 소안론 선교사에게 던지면서 '네 코나 썩어라'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잠을 자는데 선교사의 '코 썩어요'하는 소리가 그의 귀를 울리면서 정말로 코가 썩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길을 지나가는데 소안론 선교사가 부흥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새 사람을 입는다.'고 설교를 합니다.
김익두가 이 말씀을 듣고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부정한 모습을 보면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합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된 이후에는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지냅니다. 그러니까 아낙고을에 '김익두가 죽었다'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김익두가 죽었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마음놓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어느 날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죽었다던 김익두가 나타나니까 동네 사람들이 놀래 가지고 도망칩니다. 그러니까 김익두가 이렇게 말합니다. '옛날 김익두는 죽었소. 여기 있는 김익두는 다시 태어난 김익두요'
남을 때리고 괴롭히던 손은 자비의 손으로 바꾸어 남을 구제하고 사랑하는 손이 되었고, 남을 괴롭히며 빼앗던 손은 남에게 구제하고 사랑을 베푸는 손이 되었고, 다른 사람을 안수해 주는 거룩한 손이 되었고, 남을 욕하고 저주하던 입은 복음을 전하는 생명의 입이 되었습니다. 자기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 장례식을 치른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할/ 그렇습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빠지면 타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를 타종교와 명확한 선을 긋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쥐어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흐릅니다. 구약은 양의 피로 충만하고 신약은 예수님의 피로 충만합니다. 십자가가 성경 진리의 핵심입니다.
⑴십자가 정신이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 뜻을 내려놓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자신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코뚜레를 한 소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코가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본받는 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곳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소하고 다른 점은 소는 코뚜레 때문에 억지로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소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이 알아지면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릴 때 어땠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이 그것을 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죽여 제물로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순종을 보시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났지만 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일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따라는 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할/
⑵십자가 정신이란 타인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첫째는 아버지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십자가를 받아드리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범죄 해서 저주 가운데 빠졌는데 그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할/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⑴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애'는 자기의 부정적인 부분까지도 자기의 욕망을 위해 애착심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은 자기의 선호대로 고치려는 집착도 포함됩니다.
⑵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자기의 의(義)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의'는 자신이 옳다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옳은 것을 나타내어 자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높이 평가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추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 열등감(complex)을 가지고 있다면 그 부분은 감추고 싶어합니다. 그 열등감이 어떨 땐 인정받고 싶어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인정해 주지 않고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 때 분노하게 됩니다.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강하면 마음이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면 뭐합니까?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멘!/
⑶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자기 방식(方式)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방식'은 자기의 원하는 뜻에 따라 자기의 방법대로만 하려는 의지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고의 틀과 행동 양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집, 아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가불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가정공동체, 교회공동체, 사회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근거한 자기가 선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역에서 자기의 방법이 아니면 일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쓰임 받더라도 하나님이 자기의 방식대로 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사역에 대한 기도를 해도 자신이 방법을 정해 놓고 그대로 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합니다. 자신의 방식을 결코 하나님 앞에서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방법도 인정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뜻 우리의 방법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하나님의 일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배트랑 급 어부입니다. 그러나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자신의 것들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아멘!/

 

②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자기 죽음을 선언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무엇을 주인으로 모시느냐에 따라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지게 됩니다.
빌1: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고, 롬14:7-8절에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주인이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서 나의 주인이 될 때 사는 목적이 달라집니다. 주를 위하여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 되고, 생명이 되고, 머리가 되고, 주님의 심장이 나의 심장이 되고, 오직 주님이 나를 다스립니다. /할/
▶영국을 최대의 강국으로 번영시킨 여왕이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어떻게 그가 영국을 해 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습니까? 믿음으로 영국을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 국민 사랑, 나라 사랑'으로 일생을 살면서 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여왕이 가난한 과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과부는 여왕이 친히 왕림해 주니까 너무 황송해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과부에게 여왕이 묻습니다. '아주머니, 이제까지 이 집을 찾은 손님 중에 가장 고귀한 손님이 누구입니까?' 할 때 '저에게 가장 소중한 손님은 여왕 폐하시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왕은 '예수님이 아주머니를 찾은 가장 고귀한 손님이겠지요'라고 말하자, 그 이 여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폐하, 예수님은 손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할/ 여왕은 아주머니의 훌륭한 신앙을 칭찬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궁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 과부의 집을 위로 차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천사였습니다. 나의 주 나의 왕 예수여 이 나라에 세세토록 주인이 되시고 이 궁실의 주인이 되소서. 그리고 제 생전에 강림하시어 이 왕관을 주의 발 앞에 드리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 나의 생명도 주의 것이요, 나의 사업도 주의 것이요, 나의 자녀도 주의 것이요, 나의 재산도 주의 것으로 고백하고 사십시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나그네로 모셔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나의 집에 잠시 다녀가시는 낯선 분으로 영접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사람은 세상 적으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 권리와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아멘!/

 

③사랑 받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사랑 받는 존재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 받는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가 나와 연합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받기 위해서 산다는 존재성에 대하여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사랑 받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가정에 돌아가면 사랑 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 받는 아내가 되어야 되고, 사랑 받는 남편이 되어야 되고, 회사에서도 사랑 받는 존재로 살아야 됩니다. 사랑 받는 며느리가 되어야 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예수와 연합한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요, 사람에게 사랑 받는 존재요, 역사에 길이 길이 사랑 받는 존재로 우리에게 구주가 된 것처럼 나도 사랑 받는 존재로 살아야 됩니다. /아멘!/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됩니다. 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은 능률이 오릅니다. 꽃도 사랑으로 기르면 잘 자랍니다. 봉사도 사랑으로 하면 힘이 안 듭니다. 모든 면이 다 사랑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물건만 팔아서는 안됩니다. 사랑 받는 사람으로 찾아오게 해야 합니다. 음식점을 경영하는 사람은 음식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팔아야 되고 사랑 받기 위해서 사랑 받는 사람으로 찾아오게 만들어야 됩니다.
교회는 사랑 받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주님을 찾아오는 이유가 주님이 사랑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가정으로 돌아갑니까? 사랑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해 주기 때문에 자녀들이 돌아오고, 남편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가출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왜 갑니까?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관료로서 궁궐에 들어가 18년 동안 일하면서 왕의 총애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반대 세력의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되는데 그때 왕은 정약용의 유배를 한사코 말렸지만 정약용은 이런 말로 왕을 위로합니다. '왕이시여, 제가 떠나야만 왕의 심기가 편할 것이옵니다.'
그는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나라 사랑, 민족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관료가 부임하면서부터 퇴임할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책이 바로 '목민심서'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 생을 살다 가지만 그 사는 날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할/

 

④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마태복음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 받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한 사람은 8장에 나오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입니다. 그를 향하여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은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마15장에서 가나안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믿음의 반대는 적은 믿음인데 예수님으로부터 적은 믿음을 가진 자라고 꾸중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마8장에 보면 바다에 큰 지진이 일어나 풍랑에 배가 위험할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였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니까 적은 믿음의 소유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위 환경을 보고 무서워하는 자입니다. 또 14장에 보면 한 밤중에 예수님이 바다위로 걸어오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인 것을 확인하고 물위로 걸어갔는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갔습니다.
그러한 베드로를 구해내시고서 하신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적은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의심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가진 자는 무서워하지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무서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되 무서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큰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신 말씀은 참 굉장한 말씀입니다. 크다는 개념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부자도 웬만한 부자면 몰라도 더 큰 부자는 '거부'라고 했습니다. 다리도 큰 다리는 대교라고 합니다. 크다는 것에는 '조금 큰 것, 더 큰 것, 엄청나게 큰 것'이 있는데 여기 '네 믿음이 크도다'란 원어적인 의미는 '네 믿음이 위대하다'는 '메가톤급'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믿음이 '메가톤급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 적은 믿음이 있습니다. 이왕 우리 믿음 생활을 할 바에는 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믿음대로 축복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큰 믿음 있으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가나안 여인의 위대한 믿음이 무엇인가?
⑴예수님께서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 앞에 가면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⑵'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이 믿음이 위대합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믿음,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믿으면서도 예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기 수단 방법 배경, 돈을 의지합니다.
⑶'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그의 태도가 위대합니다. 이런 위대한 믿음은 위대한 축복의 역사와 응답의 역사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라'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예수를 닮아 가는 삶'입니다. /할/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⑴예수님을 사랑하면 닮습니다.
오래 살아온 부부를 보면 대게 많이 닮습니다. 젊은이들도 사랑하면 금방 두 사람이 분위기가 비슷해지고 닮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당신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당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라 함은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편으로는 당신의 아들을 우리 모양으로 만드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를 예수님 모습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 롬8: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입기까지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닮기를 원하십니다. /할/
⑵예수님을 바라보면 닮습니다.
우리는 보면서 배웁니다. 보고 배우면 닮습니다. 교육이란 무엇입니까? 교육은 좋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따라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삶을 닮아갑니다. 부모의 아름다운 가정을 보고, 자신도 아름다운 가정을 가꿉니다. 부모의 직업을 보고 자신도 좋은 직업을 갖습니다.
지휘자 금난새씨는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십시오. 좋은 자연환경을 보여주십시오. 아름다운 산천을 보여주십시오. 누구나 자연보호의 첨병으로 나서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아이에게 나라 사랑을 보여주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이에게 효도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효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보여주십시오. 진실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보여주십시오. 신실한 경배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을 보여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대의 유산입니다. /할/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보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의상 디자인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사람의 옷이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 히3: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⑶십자가를 지면 닮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내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나'를 위해 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우리의 속 사람과 살아가는 방법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갈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정욕과 욕심을 못 박아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사람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압박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습니다. /할/
⑷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야 닮습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죽음의 장소입니다. 죽음의 장소이므로 모든 것의 끝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의 시작의 장소입니다. 왜? 부활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서 새 출발을 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 장소에서 주님이 우리의 삶을 시작하십니다. 나를 통해서 당신의 삶을 시작하십니다. /아멘!/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사순절,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고난 주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해야 합니다. /할/ 이런 신앙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믿/
▶인도의 '간디'가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왜 너는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그 친구의 질문에 '만약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는 신앙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라고 했답니다.
간디 주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디에게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간디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하숙집 주인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간디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하숙집 주인이 간디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셨다면 간디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인도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할/
중국의 모택동 역시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기독교요, 다른 하나는 서구 문물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실망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빠져서 중국을 공산화 시켰다고 합니다. 그의 주변에도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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